비슷한 것은 가짜다 - 연암 박지원의 예술론과 산문미학
정민 지음 / 태학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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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제 내가 그대와 헤어진 뒤 그대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정자 난간을 세며 돌고, 나도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다리 어귀에서 말을 세우고 그대가 서성이는 그 모습을 바라보았소. 그때 우리 두 사람이 바라보던 그 지점은 어디였을까요? 허공의 환희와 그리움이 만나던 지점은 앞이었던가요, 뒤였던가요? 아니, 우리의 마음은 애초에 떨어짐이 없이 하나였는데, 만나기는 어디서 만난답니까?
 
박지원이 곁에 살아서 콧구멍으로 숨을 내뿜는다면,
나는 보따리짐을 싸고 튼튼한 신을 신고 그의 뒤만 졸졸졸,
그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리했을텐데-
하지만, 이렇게 얘기해놓고 생각해보니,
나는 평생 그를 좇아도 그는 나를 동정해줄지언정,
마음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싶은데,

애초에 마음이란 것이 없었는데 나는 무엇을 어찌 얻는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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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변화 - 상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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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부 일롱카 - 열정적 사랑
 
숨도 못 쉬고, 물도 못 마시고 읽었던 1.

 

책을 읽으면서 몰입할수록, 내 속에서는 갖가지 단어들이 합체하지 못한 채 마구 튕겨 올라왔고
포스트잇까지 붙여가면서 그 단상들을 붙잡고 싶었다. 일롱카에게 페터와 함께 한 시간은 행복하고 무난했던 몇 년이든, 괴롭고 억지로 이어갔던 몇 년이든, 그저 '그의 시간'의 고정돼 있었다.

그는 아직도 그녀를 멀리서 그를 잠깐 보는 것만으로도 한겨울에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큰 숟가락으로 퍼먹게 만드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시린 존재.

 

2부 페터 - 용기 없는 사랑
 
페터가 유디트에게 엉켜있지 않았더라면 일롱카가 그와 헤어진 뒤 그를 우연히 만났을 때 그렇게 큰 숟가락으로 쉴 새 없이 아이스크림을 퍼먹진 않았을 것이다. 페터가 한 번 건드려보지도 못하고 겁을 집어먹은 채 유디트를 마음속에 품고 있지 않았어도 일롱카에게 그렇게 매력적인 인물이었을까.

손에 들어온 것보다는 손 끝에 닿는 것이 훨씬 매력적인 법이니까. 페터가 일롱카에게 얘기했듯이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 문제인지를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지만 아무리 모른 척 눈 돌려봐도 결국 문제는 문제. 결국 헤어졌잖아.

3부 유디트 - 파괴적 사랑

그들의 관계는 처음부터 셋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는 시작되고 유지될 수 있었다. 유디트의 사랑은 경외였으며 경외는 무의식에서 솟구쳐 올라온 경외라고 믿었던 다른 것이었다. 유디트가 그 사실을 조금만 더 빨리 알았다거나 조금만 더 늦게 알았더라면 또 한 번의 결혼이 미완으로 끝나지 않았을 텐데-

시작도 되지 않았을 거니까. 그리고 그들도 결국은 헤어졌잖아.

 
일롱카에서 페터, 유디트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시차가 드러난다. 일롱카의 이야기가 시기적으로 가장 앞서 있고 유디트의 이야기는 시기적으로 가장 뒤에 있다. 또 일롱카의 이야기가 지극히 페터에게 초점 맞춰져 있었다면 페터의 초점은 유디트였고 유디트의 초점은 사회 속의 자기자신과 그들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이들이 서로 결혼을 하게 된 데는, 사적인 감정 따위는 사실상 영향을 주지 못했고 사회가 이들을 그렇게 하게끔 등을 떠민 셈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이 자신의 감정이며 의지라고 생각했나 보다.


읽으면서 나는 이게 무어 특별히 결혼 이야기냐 생각했는데, 이건 사랑 이야기다 생각했는데, 사랑 이야기보다는 결혼 이야기에 가깝고 결혼 이야기보다는 어떤 '', 우리가 무의식 중에 우리에게 씌운 틀에 관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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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항아리 - 이태리작가 작품선 2
루이지 피란델로 지음, 장지연 옮김 / 예니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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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루이지 피란델로는 말년에 희곡을 쓰는 데 힘을 쏟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을 찾기는 쉽지 않지만 20세기 초반에는 희곡으로 굉장한 인기를 끌었고 노벨상도 받았다.

 

내가 구할 수 있었던 '바보'라는 제목의 희곡과 '항아리'라는 제목의 희곡은, 휘어진 코를 발견한 것 때문에 그렇게나 심오한 방황을 하는 모스카르다의 이야기만큼, 기발하고 재치 있다.


<바보>의 줄거리는 이렇다,

 

(애석하게도 지금 이름은 생각 안 난다, 이탈리아 이름 어렵다-_-)
A
라는 사람이 자살을 했다.

 한 출판사 뒷방에 누워서 이 출판사의 편집장을 죽이고 죽을 생각으로 거사를 치르기 전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B가 편집장이 하는 말을 듣는다.

 "기왕 죽을 거였다면, A C를 죽였어야 했어. 가치 있는 일 하나는 하고 죽었어야지! A는 바보야!"
(C
는 거물급 정치인이고, 편집장과는 반대성향이다)

 이 말을 들은 B는 사실, C가 편집장을 죽이라고 시켜서 온 거였다. 그리고 편집장의 말을 듣고 자극을 받는다. 그래서, B는 마음을 살짝 바꾸는데, 편집장에게 이차저차 해서 내가 너를 죽이러 왔는데 너를 죽이지 않을 테니 시키는 대로 각서를 쓰라고 하는 것.

내용인 즉,

"B는 총을 들고, 정말 편집장을 죽이러 왔지만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비록 아무도 죽이지 않고 자살을 했지만 B는 바보가 아니다."

결국, B는 스스로 바보가 된다. 그렇게 자살하고 나면 편집장은 그 각서를 찢어버릴 테고, 그리고 나서는 다시 ‘B A보다 몇 백배는 더 바보야하고 말할 테니까.
 

<항아리>의 줄거리는 이렇다.

 

굉장히 돈 많고 인색한 올리브유 농장 주인 돈 롤로(이름이 생각난다, 아이러니하게 이름에 ''자가 들어간다)는 올리브유를 담을 커다란 항아리를 산다.

하지만 가격에 비해서 크기가 작고 왠지 부실하다고 불만이 많다. 게다가 노새꾼은 약속시간에 늦어서 열 받았다. 싸우러 간다.

그 사이에 농장 일을 해주는 일꾼들이 돌아온다. 그리고 항아리가 있는 창고로 갔는데, 아무 이유 없이 항아리가 쩍! 하고 갈라진다.

돌아온 돈 롤로가 흥분하며 그 책임을 일꾼들에게 떠 넘기고, 가난한 일꾼들은 항아리를 땜질할 땜장이를 생각해낸다. 땜장이는 본드로 간단하게 붙일 수 있다고 말하지만, 불안한 돈 롤로는 못까지 여러 개 치라고 말한다. 항아리에-_-

땜장이는 할 수 없어서, 못을 치기 위해서 항아리 안 쪽으로 들어간 다음, 밖에서 본드를 바르게 한다. 근데, 항아리 주둥이가 유난히 좁아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안에 갇힌다.

돈 롤로는 항아리를 깨고 나오려면 돈을 물라고 하지만, 땜장이는 절대 돈을 물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어쨌든 일한 값을 받는다. 돈 롤로는 화가 나서 마음대로 하라고 하고는 돌아가고, 땜장이는 그 돈으로 일꾼들과 함께 술과 음식을 산 뒤, 항아리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음주가무를 즐긴다.

화가 난 돈 롤로가 자다가 뛰어나와서 항아리를 뻥 차고, 항아리는 깨지고, 땜장이는 빠져 나오고, 돈을 물어주지 않는다.

 

줄거리만 들어도 너무너무 흥미롭고, 뭔가 깊숙하지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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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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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사람이란 상대를 완전히 판단치 못했을 때 상대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그리움이란, 인식이 부족해서 생기는 소산인 것이다."

 

관계 맺기란 편견 만들기가 아닐까.

 

적어도 관계가 깊어지기 전에는 관계를 맺고 있는 대상에 대한 무한한 상상의 공간이 열린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모든 것이 그이고, 이 때에는 오히려 상상 밖 공간까지 열린다.

 

하지만 직접적인 관계 맺기를 통해서 우리는 이전의 상상항목들에 수정, 혹은 삭제만을 하기가 쉽다. 그 항목에 미처 넣지 못했던 것들은 미안하지만 탈락시킬 수밖에 없다. 억지로 받아들인 경우에도 그것은 그가 아닌 내게 맞춰진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 사람을 내게 맞는 옷으로 재단한다. 어느 신화에서처럼 침대에서 튀어나온 팔, 다리를 잘라내는 식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그것을 재단하다 보면, 그 재단이 끝나기도 전에 그것은 이미 내가 알고 있던 그가 아니잖아. 하고 내팽개쳐버리기도 한다.

 

자기에게 맞추어진 인물은 이미 스스로에게는 인식 불가능한 먼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토마스 만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상대를 완전히 판단하려는 것부터가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상대를 판단하지 않으면 인식은 저절로 따라온다. 정확하고 예측 가능한 인식이 아닌, 매 순간순간 부딪히는 그때그때의 인식이 진짜라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그 대상에 대한 굉장한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대상에게, 그에게, 그녀에게 집중된 인식은 자연스럽게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베니스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아셴바흐는 끊임없이 이국의 것으로부터 유혹을 받는다. 모든 이국 취향은 이길 수 없는 욕망이고, 그래서 늘 죽음을 동반한다.

 

이국적인 게 뭐 어떤 건가.

 

인간은 자기에게 없는 것은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이므로, "이국적"이라는 바로 그 속성마저도 실제로는 자기 내부에서 늘 꿈틀거리고 있는 그런 것, 혼자 있을 때나 또렷하게 들려오는 소리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깊숙이 숨겨진 무의식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

 

아셴바흐를 베니스까지 끌고 갔고, 탓치오를 데려다 놓음으로써 발목을 붙잡고, 열에 시달리면서도 분리되지 않는 미친 환상들과 함께 하며, 결국은 이국의 병으로 죽고 말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국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 스스로에 대한 취향, 무의식에 대한 지향성은 아닌가.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토마스 만의 작품을 영화로 만든 건데, 1971년 작이고, 이탈리아 영화이고, 암튼 좀 지루했다. 소설 속, 바로 그 소년 탓치오를 연기할 배우를 골라낸 취향도 지금으로서는 조금 느끼하달 밖에 달리 표현하기가 힘들다, ,,,

 

하지만, 영상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하는 만큼 화면이 아름답다. 그리고 요즘 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영화 속에 풍성한 여백이 느껴지는 점도 좋았다.

 

+ 어쨌든, 토마스 만의 소설은 조금 지겹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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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밀레니엄 북스 23
헨리 입센 지음, 곽복록 옮김 / 신원문화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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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품은 때로 그 작품이 탄생한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단 생각이 든다.

 

인형의 집이 당시 일으켰던 파문에 그 이유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했다면 나는 <인형의 집>의 유명세에 동의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좀 그렇지만 암튼 노라의 변화는 너무, , 갑작스럽다.

 

노라의 남편이 위기의 상황에서 숨겨두었던 속물 근성을 너무 갑자기 폭발시키는 것이 노라를 자아 찾기의 길로 인도했지만 현대를 살고 있는 지금의 나로서는 그것만으로 노라의 과감한 선택을 100%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긴 힘들다.

 

한 인간존재의 인간조건에 대한 자각, 우리가 늘 숨기고 사는 진짜 우리라는 존재가 가진 정신의 피폐성 혹은 폭력성, 그리고 달라진 여성의 행동 정도가 이 작품의 쟁점일 듯 싶다.

 

부모님의 손에 인형으로 자라, 더 큰 인형이 되어 또 다른 작은 인형들을 키우고 있는 인형의 집과 한 인형의 (아무리 생각해도) 갑작스러운 깨달음, 그리고 탈출.

 

모든 깨달음이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다른 사람의 눈에는 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깨달음과 과감한 선택을 하기까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수많은 발버둥 혹은 입질이 필요한 것임을 생각하면 노라의 경우는 암튼 갑작스럽다.

 

어쩌면 초기 사실주의 극에 대한 극히 개인적 취향 탓일까.

 

하지만 무슨 주의’, 무슨 사조라는 꼬리표가 안 붙어도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 진짜배기라면 그 꼬리표에 상관없이 그 속이 남는 것이 진짜 진짜배기 아닐까.

 

시대적 배경이나 정황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요소는 될 수 있겠지만 전체를 황금으로 바꾸어주는 무슨 마법은 아니다. 작품이 발표되는 당시는 물론, 지금 봐도 늘 새롭고 충격적인 작품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으니까 말이다.

 

(문학사조상 중요한 작품이 별것 아닌 한 개인의 취향으로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게 될까 봐 걱정된다. 아 소심하다. 단지 개인적 취향임을 밝히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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