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 자
실비아 플라스 지음, 공경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2월
절판


나랑은 상관없었지만, 전기 사형을 당하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경이 산 채로 몸이 타면 어떨까.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p. 5쪽

하지만 난 휩쓸고 다니지 못했다. 내 자신조차 마음대로 못 했다. 호텔에서 사무실로, 파티장으로, 파티장에서 호텔로, 다시 사무실로 멍청한 무궤도 전차처럼 다닐 뿐. 다른 여자애들처럼 들떠서 지내야 마땅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마음이 가라앉고 공허한 느낌이었다. 주위가 소란한 가운데 둔하게 움직이는 폭풍의 눈 같다고 할까. -p. 7쪽

그녀는 무슨 말을 하든, 내 뼛속에서 튀어나와 말하는 은밀한 목소리 같았다. -p. 12쪽

마침내 보드카가 내게 맞는 술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 맛도 나지 않으면서, 뱃속으로 넘어간 느낌은 차력사가 칼을 삼킨 것 같았다. 기운이 나고 신이 된 기분이었다.-p. 19쪽

두 사람이 서로에게 점점 열을 올리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기운이 빠진다. 같은 방에 있으면서 우두커니 소외된 사람의 입장에서는 특히 그렇다.

그것은 파리를 떠나는 고속 열차의 맨 뒷칸에서 파리를 쳐다보는 것과 비슷하다. 시시각각 파리는 점점 작아지고, 나도 점점 작아지고 외로워지는 느낌. 파리의 휘황찬란한 불빛과 흥분에서 시속 100만 마일의 속도로 멀어지는 기분. -p. 24쪽

온종일 길에 쏟아진 후텁지근한 열기가 마지막 모욕처럼 얼굴에 확 밀려왔다. -p. 25쪽

차들이 시끄럽게 달리고, 차에 탄 사람들과 불 밝힌 건물에 있는 사람들이 소리를 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강물도 소리를 내며 흘렀지만,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창문에 도시가 걸려 있었다. 포스터처럼 평평하게 걸려서 반짝이고 깜빡거렸지만, 내게는 없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침대 옆에 놓인 하얀 전화기가 나를 주위와 연결시켜줄 수도 있었지만, 전화기는 죽은 자의 머리처럼 잠자코 놓여있기만 했다. -p. 27쪽

밤도 낮도 아닌, 소름 끼치는 제 3의 시간같이 느껴졌다. 갑자기 밤과 낮 사이에 끼어서 끝나지 않는 시간. -p. 30쪽

그 날 밤 도린에 대해 결정을 내렸다. 그녀를 지켜보고 말을 들어주기야 하겠지만, 마음속으로는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p. 31쪽

"정말 모르겠어요."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그 말을 하면서 스스로 깊은 충격을 받았다. 말을 이 밖에 낸 순간, 그게 사실임을 알았으니까.

그 말은 사실로 들렸고, 나는 깨달았다. 오랫동안 집 주변을 기웃대던 정체 모를 사람이 갑자기 다가와서 친아버지라고 말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나와 똑같이 생겨서 그가 생부고 평생 아버지로 여긴 사람은 가짜였다는 생각을 할 때처럼, 그 말이 사실로 다가왔다.

"정말 모르겠어요." -p.42쪽

화학은 더 끔찍하리란 걸 알고 있었다. 화학 실습실에 걸린 아흔 몇 개의 원소 차트를 본 적이 있으니까. 금, 은, 코발트, 알루미늄 같은 멋진 말이 숫자와 함께 흉한 약어로 적혀 있었다. -p. 46쪽

난 천연색 영화가 싫다. 천연색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은 죄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야한 새 의상을 입고, 진초록색 나무나 진노란색 밀밭이나 사방으로 흘러가는 진파란색 바다 앞에 빨래걸이처럼 서 있어야 한다고 느끼는 것 같다. -p. 52쪽

"그러지 뭐. 좋아."

내가 대답했다.

나는 버디가 면바지의 지퍼를 내리고 벗어서 의자에 던져놓고, 나일론 망사팬티를 벗는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시원해. 어머니가 그러시는데 세탁도 잘 된대."

버디가 설명했다.

그는 내 앞에 버티고 섰고, 나는 계속 쳐다봤다. 칠면조 목과 내장 같다는 생각만 들었고, 아주 실망스러웠다. -p. 85쪽

평생 처음으로 유엔 건물의 방음이 되는 심장부에서, 테니스를 치는 동시 통역사 콘스탄틴과 관용어구를 많이 아는 러시아 여자 사이에 앉아 있으니, 내가 끔찍하게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 늘 부족했는데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내 특기는 장학금 따기와 상 타기였는데, 이제 그것도 끝나갔다.

경마장이 아닌 거리에 던져진 경주마가 된 기분이었다. 대학 우승자인 풋볼 선수가 양복 차림으로 월스트리트와 마주선 느낌과 비슷했다. 그의 영광의 나날은 선반에 놓인 트로피로 끝나버리지 않았던가. 트로피에 새겨진 날짜는 묘비의 날짜와 다름없었다. -p. 94쪽

버디는 보이지 않는 철사로 입매를 위로 잡아맨 양 계속 빙그레 웃었다. -p. 109쪽

"서로 다른 두 가지를 동시에 하고 싶은 게 노이로제라면, 난 끔찍한 노이로제에 걸렸어. 난 죽을 때까지 완전히 다른 것들 사이를 날아다닐 거야." -p. 115쪽

울음이 터질까봐 사진 찍기가 싫었다. 왜 울 것 같은지 몰라도, 누가 말을 걸거나 빤히 쳐다보면 눈물이 줄줄 흐르고, 목구멍에서 흐느낌이 치솟아 일주일 내내 목 놓아 울 것 같았다. 물이 가득 차서 넘칠 것 같은 컵처럼, 눈물이 차올랐다. -p. 123쪽

아침마다 소설 편집자의 사무실에는 눈사태 난 것처럼 원고가 쏟아졌다. 미국 전역의 서재, 다락방, 교실에서 사람들이 은밀히 글을 쓰는 것 같았다. -p. 125쪽

등을 뒤로 기대고, 쓴 부분을 읽었다.

충분히 생생한 것 같았고, 벌레 같은 땀방울 부분이 자랑슬웠다. 다만 오래 전 다른 데서 그런 묘사를 본 것 같은 인상이 어렴풋이 들었다.

한 시간쯤 그렇게 앉아서 이제 어찌할지 고민했다. -p. 147쪽

매트리스와 침대 틀 사이로 들어가, 매트리스를 관 뚜껑처럼 내 몸에 덮었다. 어둡고 안전한 기분이었지만, 매트리스가 충분히 무겁지 않았다.

잠들려면 1톤쯤 더 무거워야 될 것 같았다. -p. 150쪽

"문제가 뭐 같아?"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책도 못 읽겠고요."

차분한 태도로 말하려 했지만, 귀신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목이 막혔다. 나는 두 손바닥을 위로 향하도록 해서 쫙 폈다. -p. 153쪽

잠을 못 잔 지 7일이나 됐다.

엄마는 내가 분명히 잤을 거라고, 7일이나 안 잘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잤다고 해도 눈을 크게 뜨고 잤을 것이다. -p. 155쪽

1년의 하루하루가 흰 상자들처럼 줄줄이 늘어서 있고, 상자와 상자 사이에 검은 그림자 같은 잠이 있었다. 유독 내게는 상자와 상자 사이에 놓인 긴 그림자가 갑자기 쑥 빠져서, 하루하루가 끝없이 쓸쓸한 흰 대로처럼 내 앞에서 이글거리는 것 같았다.

다음날 또 옷을 빨고 머리를 감아야 하는데, 오늘 그러는 게 멍청한 짓 같았다.

그 생각만 해도 지겨웠다.

모든 걸 딱 한 번만 하고 끝까지 그대로 버티고 싶었다. -p. 156쪽

못생기고 친절하고, 직관이 있는 남자가 올려다보면서, 내가 모르는 것을 안다는 듯 격려하는 말투로 "아!" 하고 말하는 것을 상상했다. 그러면 나는 빠져나갈 길 없는 숨막히는 검은 주머니 속에 점점 처박히는 것 같이 겁난다고 말할 것 같았다. -p. 157쪽

가장 신경 쓰이는 게 필체란 말은 하지 않았다.

...아이가 쓴 것처럼 크고 삐뚤삐뚤한 글씨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거의 대각선으로 내려갔다. 누가 글씨에 대고 비스듬히 입김이라도 분 것 같았다.

그런 편지를 부칠 수 없어서 짝짝 찢어서 핸드백에 넣었다. 의사가 보여달라고 할까 콤팩트 옆에 쑤셔 넣어두었다.

물론 내가 그 이야기를 안 했으므로, 닥터 고든은 편지를 보여달라고 하지 않았다. 내 영리함이 흐뭇해지기 시작했다. 말해주고 싶은 것만 말해야지. -p. 158쪽

하지만 닥터 고든이 그 일에 대해 엄마랑 대화하는 게 내키지 않았다. 나를 병원에 가둬야 한다고 말할 것 같았다. 편지 조각을 모았다. 그가 편지를 이어 붙여, 내가 도망칠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을 알면 곤란했다. 난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p. 165쪽

가장 마음에 드는 나무는 '흐느끼는 학자 나무'였다. 일본산 나무일 것 같았다. 일본인들은 정신에 대한 것들을 이해했다.

그들은 일이 어긋나면 스스로 할복했다.-p. 167쪽

앞자락이 지저분한 유니폼을 걸친 덩치 좋은 간호사는 사팔눈이었다. 안경알이 워낙 두꺼워서 눈 네 개로 날 쳐다보는 것 같았다. -p. 172쪽

사람들이 어느 늙은 로마 철학자에게 어떻게 죽고 싶은지 묻자, 그는 따뜻한 물속에서 동맥을 끊을 거라고 말했다. 욕조에 누워, 팔목에서 흐른 붉은 피가 투명한 물속으로 퍼지는 것을 보는 것은 쉬울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양귀비꽃처럼 화려한 수면 밑, 잠 속으로 빠져들겠지.

하지만 시작하려는 순간, 팔목의 살갗이 너무 허옇고 무방비 상태여서 칼을 댈 수가 없었다. 죽이고 싶은 게 그 살갗이나 엄지 밑에서 뛰는 파란 핏줄이 아니라, 다른 데 있는 것만 같았다. 더 깊고 은밀하고, 다다르기가 훨씬 어려운 곳에. -p. 178쪽

노란 실크 끈을 고양이 꼬리처럼 목에 매달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목을 맬 곳을 찾다가, 엄마의 침대에 앉아서 끈을 꽉 당겼다.

하지만 끈을 바싹 당겨서 귀가 벌게지고 얼굴에 피가 솟구치는 기분이 들 때마다 끈을 풀었고, 그러면 다시 괜찮아지곤 했다.

그 때 내 몸이 온갖 종류의 속임수를 쓴다는 걸 알았다. 중요한 순간에 양손이 늘어졌고, 그러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내 뜻대로 한다면 순식간에 죽는 거였는데. -p. 193쪽

엄마는 말했다. 자기에 대해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생긴 병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돕는 게 치료법이라고. -p. 196쪽

눈을 뜨면, 색깔과 형체들이 간호사처럼 내게 몸을 굽히고 있을 것 같았다. -p. 207쪽

"오늘 아침에는 기분이 어떠세요, 미스 그린우드?"

...기분이 뭣 같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쾌활한 목소리로 "기분이 어떠냐?"고 묻고 "좋아요"란 답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싫다.

"거지 같아요." -p. 215쪽

기니 여사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런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그녀가 유럽 행 티켓이나 크루즈 왕복표를 줬다 해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내가 어디 있든-배의 감판이든 파리나 방콕의 거리 카페든-나 자신의 시큼한 공기 속에서 속을 태우며 벨자(종 모양의 유리 그릇) 밑에 앉아 있을 테니까.-p. 225쪽

"하지만 지금은 괜찮잖아."

내가 분명하게 말했다.

조앤은 반짝이는 회색 눈으로 날 쳐다보며 대꾸했다.

"그럴 거야. 너도 그렇지 않아?" -p. 243쪽

"난 네가 좋아."

나는 책을 들면서 대답했다.

"그건 곤란해, 조앤. 난 너를 안 좋아하니까. 이유를 알고 싶다면 말하지. 널 보면 토할 것 같아서 그래."

방에서 나왔다. 조앤은 내 침대 위에서 늙은 말처럼 늘어져 있었다. -p. 268쪽

예전부터 퇴원할 때는 앞에 펼쳐진 모든 것을 알고 확신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내가 '분석'되었으니 모든 게 분명해질 터였다. 그런데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물음표뿐이었다. -p. 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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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literature | quick space 2004/06/30 21:15

1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문학교과서에 실릴 만큼의 비중을 공인 받는 여느 우리 작가보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을 더 편하게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한 번 가 본 적도 없는 노르웨이의 숲은 왠지 태백산맥 어디쯤 있을 것처럼 친숙하다.

아무 의미가 없으면서도 부르기 쉬운 이름을 찾다가 "바나나"라는 필명을 지었다는 요시모토의 "부엌(키친)" 역시 조금 과장해서 어릴 적 친구 집인 것 마냥 정겹다.

어마어마한 규모와 소장량을 자랑하는 대학도서관에서 "냉정과 열정사이"를 '빌려서' 읽고 싶거든 꽤 부지런해야 한다. 곁다리로 에쿠니 가오리의 다른 책이라도 보고 있으려니 그것조차 쉽지 않다.

"69"의 상징을 모르는 이는 문학도의 자질을 의심받을 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난잡한 성교와 의도적인 자기 파괴가 취미인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무난하게 읽히지는 않아도, 억눌린 쾌락과 일탈 충동, 감각을 긁어주는 "무라카미 류"도 있었다.

2 가깝고도 먼 나라가 일본이라고는 하지만, 우리 땅 덩어리 아닌 타국에 적을 둔 베스트셀러, 혹은 스테디셀러 작가가 서너 명 정도는 그냥 떠오른 다는 것은 어쩐지 의미심장하다.

90년대 말쯤으로 기억한다. "노르웨이의 숲에 가보셨나요?"라는 감성적인 카피의 광고가 히트를 치면서 다시 한 번 "상실의 시대" 읽기, 하루키 읽기 바람이 불었다. 꼭 문학청년이 아닌 이들도 "와타나베"와 "미도리"를 사칭하며 그들의 창조주 하루키에 대한 흠모의 정을 키워나갔다.

개인적인 고백을 털어놓자면, 솔직히 "죄와 벌"을 읽고서 라스콜리니코프의 죄의식과 인간의 원죄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의 와타나베와 미도리, 레이코의 방황과 착란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쩐지 조금 더 멋있게 느껴진 적도 있었다. 조금만 더 자라면, 겉에서 보기에는 혼돈과 무질서를 힘겹게 짊어지고 있는 것 같아도 나름의 굳은 삶의 방식을 가진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환상과 현실을 교란시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을 손에 잡힐 듯 그려내는 하루키의 수법은 나를 여러 가지 이유로 숨막히게 했다.

작가로서의 고민을 담은 그의 초기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읽을 때에는 실제로 바람의 노래 아니라 숨소리라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는 힘, 그것이 한 왜소한 열도에서 태어난 영원히 젊은 작가 하루키이다.

하루키에 이어, 요시모토 바나나는 "키친" 한 권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베스트 셀러 작가 자리를 지켜왔는지 모른다. 삶과 죽음 사이를 부유하며 끊임없이 우리에게 오라 하는 손짓. 흔히 표현하듯 경쾌한 터치와 신세대적인 감각적 묘사로 심각한 것을 조금은 사소하게 만들어주는 글쓰기. 바나나는 "너만 괜찮다면, 우리 좀 더 밝고 더 굉장한 곳으로 가자"는 위험한 유혹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그리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끓는 피는 기꺼운 마음으로 모험을 감행하도록 부추긴다.

그러나 가장 최신식 일본산 히트 작가를 논하자면, 하나의 이야기를 남과 여의 시각으로 담아 내는 새로운 시도가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킨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를 빼 놓을 수 없을 것이다. 헤어진 연인이 '10년 후 생일에 피렌체 두오모에 오르자'는 약속을 했다는 설정은 유치하고 상투적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낭만적이다. 원래 사랑은 유치한 거라는 말로 위로하며, 사람들은 냉정과 열정사이에 빠져들어 자신의 냉정 속에 감추어진 열정을 찾아낸다.

그야말로 "빙점"의 미우라 아야꼬,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나쓰메 소세키와 같은 전통적인 일본 작가들과는 조금 성격을 달리하는 감각적이고 젊은 작가들은 이웃 나라, 한국의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힘은 여전히 소진되지 않은 듯하다. 이는 하루키의 최신작 "해변의 카프카"나 에쿠니 가오리의 "호텔 선인장"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3 내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어느 동호회의 인터넷 게시판에 "키친"의 소설의 한 구절을 올린 적이 있었다. 그 게시판에서는 그 한 구절 때문에 논쟁이 일었다. 물론, 그것은 작가 혹은 작품 전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은근히 뿌리 깊은 반일감정 대 일본작가들에 대한 매니아적 취향간의 대립이었다.

하루키의 글 속에는 진정성이 부족하고, 바나나의 글에는 깊이가 없으며, 따라서 하루키나 바나나를 읽는 요즘 젊은이들은 오감을 직접적으로 자극하지 않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다.

유행에 민감한 이 땅의 젊은이들은 책읽기도 유행을 따라서 베스트 셀러는 없어서 못 팔고, 고전문학은 먼지 쌓인 서고 한 켠으로 밀려나고 있다고도 말한다. 실제로, 똑같은 번역에 똑같은 판으로 찍어낸 책에 양장을 시켜 한 몇 천 원쯤 얹어 팔아도 베스트 셀러는 잘 나가고, 출판사는 또 그것이 고마워 베스트셀러 작가들의 베스트셀러 작품들을 세트로 묶어 할인해주며 팔고 있다.

이 세 가지 걱정 중의 첫 번째는 유서 깊은 무조건적 배타심을 버리는 것으로 해결을 볼 수 있을 것이고, 두 번째는 (실제로 그들의 지적이 정당하다는 가정 하에) 삶의 진정성과 깊이가 들어 있는 다른 작품들로 결핍을 메우면 될 것이다.

그러나 세 번째는 조금 더 생각을 해보았으면 싶은 문제들인데, '출판사는 훌륭한 책으로 사람들을 널리 이롭게 하겠다는 사명만을 갖고 조악한 상술은 깨끗이 버리시오' 라고는 할 수 없는 바, 읽는 우리나마 책을 고르는 눈을 닦아야 하지 않겠는가. 대문호라고 언제나 명작만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세트로 묶어 판다고 홀라당 넘어가지 말고, 이제는 좀 골라서 읽고 다르게 읽자.


2003.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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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가운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
루이제 린저 지음, 박찬일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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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제 린저 | 생의 한가운데 | quick space 2004/06/30 21:18

자신의 이름보다는 [생.의.한.가.운.데.]라는 그녀의 제목이 조금 더 유명한 독일産 여류작가가 있다. 생.의.한.가.운.데.를 알면서 그녀는 알지 못한다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지만, 생.과 그 한.가.운.데.라는 두 단어의 결합에 묻어 있는 간결하지만 오롯한 느낌 때문이리라.

그렇지 않아도 生.이란 한 마디는 언제나 우리 산 사람들의 말초를 자극하는 법이다.

그리고 니나 부슈만.

단언하건대 사랑 얘기인 척하는 소설치고 진짜 사랑 얘기인 것 없고,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명제 앞이라고 사랑이 물러나는 일도 없더라. 소설 쓰는 사람은 자기 얘기인 척 남의 얘기를 쓰고, 진짜 자기의 모습을 다른 사람인양 한다. 하지만, 아무리 돌려치고 메쳐도 그게 그거고 그 사람은 그 사람이다.

그래서, 루이제 린저.

사실, 이렇게 말하고 보면 니나에게 열광하면서 정작 루이제 린저를 잘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모순이니, 말도 안된다느니 하는 말을 할 필요도 없는 거였다. 니나를 만나기로 해놓으면 루이제 린저가 따라 나온다. 소설과 현실을 혼란스럽게 섞어 놓은 속에서 니나로 분한 루이제 린저의 실체를 굳이 분리해 낼 필요가 없었던 거다.

그녀의 이력은 실로 화려하다. 화려하다기 보다는 나같은 범부가 말장난이나 삼고 있을 만한 것이 못 될 정도로 훌륭하며, 그래서 약간은 거북스럽기까지 하다. 1911년 뮌헨 대학에서 심리학과 교육학을 공부하였고 약 4년간 교편을 잡았으며 악단 지휘자와 결혼한 것까지는 겉보기로는 그냥 그렇고 그렇다. 그러나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 남편은 소련으로 도피하고, 루이제 린저는 전쟁과 부조리와 편견에 맞서며, 반 나치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그런 연유로 그녀는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옥살이를 하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녀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이슈들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84년에는 연방 대통령 후보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력만으로도 루이제 린저는, 정치라면 알지도 못하면서 치부터 떠는 나같은 무지한 사람과 쉽게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녀의 휴머니즘도 나치즘에 대항하여 싸운 수많은 사람들 누구나 가진 흔해 빠진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이따금 크고 작은 국제적 사고를 치지 않는 한 잊고 사는 우리를 대신해, 고의를 가장한 고립과 싸우는 북한에 여러 차례 방문하는 애정을 보였다.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입 대신 온몸으로 자유와 정의를 외쳤다. 그녀는 대부분이 생각도 하지 않으려는 것을 행동하는 여자였다.

그녀의 열정은 젊음에 힘 입어 한창 때 반짝하고 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치열한 열정이 “생”이라는 가깝고도 먼 화두를 던진 것이다. 내가 여기 저기 다른 이름으로 흩뿌려놓은 말들을 다 모아도 온전한 내가 보일까마는, 적어도 그녀는 스스로 생.의.한.가.운.데.를 쓰면서 생의 한가운데를 정통으로 뚫고 지나는 황홀경을 체험하지 않았을까. 그렇기 때문에, 니나를 18년간 짝사랑하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해버리고 마는 슈타인의 개인적인 일기들도 마치 생생한 역사적 기록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나처럼, 너처럼, 니나의 언니는 오랫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던 동생에게 잠깐 와서 있어달라는 편지를 받고, 죽도록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떠날 준비를 하는 니나와 며칠을 지낸다. 니나의 언니는 동생을 짝사랑해온 슈타인이 18년간 써온 일기와 동생과의 짧은 만남으로 니나가 살아온, 살아갈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알게 된다. 자신이 너무도 무감하게 언저리만 맴돌며 살아온 생을, 치열하게 살고 있는 니나로 인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비친 슈타인은 꼭 홈으로 냅따 뛰려다가 런다운 플레이에 걸려 3루와 홈 사이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야구선수 같다. 관객들은 야유한다. 야 임마, 상황을 보고 뛰어야지. 아니면 진즉에 뛰던가. 이성이 작용하기 힘든 곳에, 자칫하면 모든 것을 놓쳐버릴지 모르는 순간에, 논리와 이치를 불러들이려는 슈타인의 모습은 답답하다.

3루든, 끝인 듯 보이는 홈이든 하나의 그라운드 위에 그려진 다이아몬드 모양 발판에 지나지 않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라운드 한 가운데 놓인 우리에게는 그 사실이 중요하지 않거나 거기에 신경쓸 겨를이 없거나다. 생의 한가운데 던져진 우리는 그저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

반면에, 니나는 거침이 없다.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감정을 따르면서도 쉽게 감상에 빠지지 않는다. 두려움과 타협하지 않는다. 그녀야말로 사람을 빠져들게 하는 매력을 가졌다. 당연히 우리는 슈타인보다는 니나에게 매혹되기가 쉽고, 슈타인보다는 니나를 사랑한다. 니나는 우리가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혹은 잊고 있는 진정한 용기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슈타인에게 니나는 사랑하는 여자이기보다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존재이며, 그래서 영원한 동경의 대상일 뿐이다.

슈타인과 니나의 언니를 통해 니나를 보면서 나는 마치 내가 니나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지지만, 차라리 슈타인 쪽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래서 슈타인의 우유부단함과 끝끝내 현실의 구질구질함에 연연하는 것을 보고 있기가 쉽지 않다.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하는 니나에 대한 슈타인의 희망이 끝내 좌절될 때는 나도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루이제 린저는 자기의 열정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겪고 있지만, 쉬이 보려고 하지 않는 삶의 진면목을 조목조목 짚어준다. 나도 그랬고, 너도 그랬을, 앞으로도 그럴 수 밖에 없을 .생.의 절절함.

숲을 보려면 숲 밖을 나와야하지만,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그 속에 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태풍의 한가운데는 오히려 안전하다.

2003. 늦겨울
from www.goon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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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천에는 똥이 많다
이창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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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 녹천에는 똥이 많다 | quick space 2004/06/30 21:14

suede = stay together

영화 "오아시스"의 활약덕분에, 대형도서관에서나 발견되었을 이창동의 92년작 소설집이 2002년 10월 문학과 지성사에서 재발간 되었다. 그의 최근작인 "오아시스"로 이창동을 기억하고 있다면, 이 소설집의 재발간은 다소 거북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창동 스스로가 그의 최근작을 '경계에 관한 영화'로 규정짓고 있지만, 바로 전 작품까지만 하더라도 진흙탕 같은 질펀한 현실 속으로 우리를 자꾸만 끌어당기던 그가 아니었던가.

이창동은 아마도 선천적으로 꾸미거나 둘러대는 것에 몹시 약했거나, 병적이면서도 의식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소위 예술이라는 것에 가치를 두기 시작하는 시기는 그야말로 극심한 사회적 병폐 속에 인간이라는 가치는 변두리로 밀려나 있던 7, 80년대였던 것이다.

이런 그의 표현방법을 사람들은 '비판적 리얼리즘'이라 이름 붙였다. 그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사회에서 떠밀려 있거나, 스스로 현실에서 멀어지기를 선택하며, 그들은 전자에 비하면 오히려 용감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창동이 관심을 가지는 쪽은 후자 쪽이 아니다.

이창동의 관심사는 사회구조에 의해 노골적으로 밀려났던가, 밀려나지 않기 위해 그 속에 어정쩡하게 뒤섞여 끽 소리도 내지 않는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그는 철저하게 냉혹한 현실 속에 밀어 넣었고, 어느 순간에 그들로 하여금 정신적 무력감의 끔찍한 마지막 순간들을 경험하게 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영화보다 훨씬 잔인하며, 그 잔인성으로 무장된 내러티브로 읽는 이들을 수갑채운다.

이 소설집에는 5편의 중■단편 소설들이 실려있는데, 5가지 모두가 앞에서 언급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며, 그 형식상 구조 또한 너무나 단순하다. 그가 현실을 꿈과 판타지(이 판타지라는 것은 영화 "오아시스"를 경계에 세우고, 앞으로 꾀하게 될 변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로 포장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의 문장 역시도 너무나 메말라 있다. 그의 글을 읽고 있자면 마치 오래되어 지린 냄새를 풍기며 딱딱하게 굳어버린 오징어를 씹는 기분이면서도, 그 인물이나 이야기구조가 너무도 사실적이어서 끝까지 그를 따라가고야 마는 것이다.

여기 실린 길고 짧은 소설은 꼭 한 번쯤은, 어디에선가는 분명히 있었을 법한 이야기들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7, 80년대를 피끓는 젊음으로 살아온 세대이며, 조악한 현실이더라도 그것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 것을 경계해온 작가이기 때문이다.

"진짜 사나이"나 "용천뱅이"는 소신을 지키며 사는 데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인색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며, "운명에 관하여"는 인생을 지나친 우연의 장단에 맡겼지만, 우리는 그것이 결코 억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똥구덩이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채 어린애처럼 소리내 울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녹천에는 똥이 많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에서 그토록 버리고 싶었던 나 자신과 주변의 모습을 다시 한번 더 절감하게 된다.

그리고 이창동은 마지막으로 실려 있는 "하늘燈"에서 지금은 우리가 역사의 터널 속에 있을 뿐이라는 수임의 말에 '터널 저쪽은 도대체 뭐가 있는 거지?'라는 반문을 던진 채 끝을 맺는다. 그러나 우리는 비극 속에 비극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듯이 우리는 역시 그를 통해 그래도 터널을 건너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번 더 다지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현실이 끔찍하게 두렵다면, 아직은 이창동을 피해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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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드의 여왕 (구) 문지 스펙트럼 3
알렉산드르 셰르계예비치 푸슈킨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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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 이반 폐트로비치 볠킨의 이야기

 

도덕적인 속담이나 격언은 우리가 우리 행위를 정당화시킬 구실을 스스로 생각해내기 힘들 때 놀랄 만한 효력을 발휘하는 법이다.  p. 57

 

하루라도 관을 보지 않는 날이 있을까,

늙어가는 이 우주만상의 백발을?

- 제르자빈의 시 '폭포'의 일부                    p. 69

 

독자 여러분 중에 시골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분은 이런 시골 아가씨들이 얼마나 매력적인 존재인지를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 아가씨들에게는 말 방울소리가 이미 가슴을 설레게 하는 모험이고, 가까운 시내로의 나들이는 일생의 사건이며, 손님의 방문은 오래도록, 때로는 영원토록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 된다.   p. 106

 

원래 산문시인이었던 푸슈킨, 자신이 쓴 소설을 '이반 폐트로비치 라는 '허구의 훌륭한 소설가'를 만들어내서 그의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자신은 은근슬쩍 그 책임에서 물러나고자 하는 건가.

 

 

2. 스페이드의 여왕

 

'스페이드의 여왕'은 '비밀스런 악의'를 뜻한다고 한다.

그런데, 내게 1800년대의 소설은

약간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너무 교훈적인 것 같아서 거부감이 느껴진다.

 

대신에 좀 유치하고 단순하기 때문에,

내가 소설 속 주인공보다 별반 나을 것도 없으면서,

마음껏 욕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어쨌든 저쨌든, 그러면서도 재미있게는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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