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성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오르한 파묵 | 하얀 성 | quick space 2004/07/21 02:07

 

"이미 죽기로 정해져 있으면 기어코 죽음은 찾아오는 것이지 왜 무서워한단 말인가?

자네가 매일 적어놓은 자네의 죄에 대한 기록 때문인가?"

역병이 돌자 극도의 불안감을 나타내는 ''에게 호자가 이렇게 되묻는다.

 

''는 포로로 잡혀가서, 스스로도 착각할만큼 자신과 닮은 호자 밑에서 오랜 시간을 지낸다. 무서우리만치 자신과 닮은 호자의 포로가 된 '', 허황된 꿈을 꾸고 이룰 수 없는 꿈에 대한 망상에 젖어 사는 호자에게 거부감을 느낀다.

 

그래서 달아나려고 한다.

 

그에게서 달아날 수 있는 방법으로 그가 선택한 것이 '나는 누구일까'하는 물음을 호자로 하여금 자꾸 스스로 묻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이 조금은 효과가 있어서, 획기적인 무기-결국 하얀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사용될 무기이지만 이들은 아직 그 정확한 무기의 목적이랄까, 그 대상을 알지 못한다-를 만드는 일에서 잠시 빠져 나와 호자는 그 질문에 골몰한다.

 

호자는 혼란스러워하며 두려워한다.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전에 먼저 ''가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싶어한다.


'
'는 있는 얘기, 없는 얘기 만들어가며 자신의 과거를 낱낱이 기록하고 자신의 추악한 단면을 과장하여 보여준다. 거기에 경멸을 느낀 호자는 자신의 노트를 만드는 것을 거부하지만, 결국 스스로에 대한 물음에 답하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노트를 만들게 된다. 그리고는 혼자서 찢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면서 자신에 대해 적어나가지만 결코 그것을 ''에게 보여주지는 않는다.


어떤 목적이 있어서 ''가 만든 과거에 대한 자신의 기록은 호자와 내가 서로 언제라도 뒤바뀐 인생을 살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호자가 무기를 완성하며 술탄의 부대를 이끌고 결코 함락되지 않을 '하얀 성' 앞에서 패배를 인정해야 했을 때, 호자와 ''는 서로가 살기 위해 둘의 인생을 바꾼다. 아니, 이미 그들은 하나의 인생을 살고 있었으므로 바꿀 수 있는 것은 그들의 과거일 뿐이다.

호자로 살고 있는 ''는 끊임없이 그에게서 호자와 자신을 분리시키려고 하는 술탄처럼, 호자인지 나인지 모르는 여생을 살게 된다.

 

내가 나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 없는 상태. 과거만 공유한다면 미래는 얼마든지 뒤바꿀 수 있는 호자와 나와의 관계. 끊임없이 '나는 누구일까'하는 질문을 던지며 괴로워하는 호자.

 

보는 순간,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거대한 하얀 성과 그 하얀 성을 무너뜨릴 무기를 위해 그들이 지내온 세월.

 

그리고 내 안의 수많은 호자. 나를 포로로, 나를 누예로 부리는 나와 똑같이 생긴 호자.

 

한 객체 속에 들어있는 모든 사람들의 호자에 대한 이야기.

 

절대 함락시킬 수 없는 하얀 성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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