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들의 잠
요르기 야트로마놀라키스 지음, 안진태 옮김 / 자연사랑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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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기 야트로마놀라키스 | 소들의 잠
 
그리고리스는 마음속으로는 이 우주적 봉오리를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실제로 걸어서는 이 산 저 산을 거쳐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는 없었다. 설령 그것이 가능했을지라도, 산마루를 아래에 남겨두고 걸어서 공중을 빙빙 돌아 마지막에 천개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물론 눈으로는 공중 높이 올라갈 수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눈이란 보이는 것만 볼 수 있는데, 이 때 많은 빛과 강한 시력이 필요하다고 말하곤 했었다. 이런 이유에서 가장 확실한 길은 천천히, 그리고 멀리 확실하게 가는 상상력의 길이었다. 이런 방식을 소위 '생사의 사다리'라고도 하는데, 이 사다리를 이용하는 사람은 거미처럼 그것에 매달려 천개까지 기어올라 북두칠성과 은하수의 물결 위에서 산책한다.(p.48)

그러자 포도밭에 있는 올리브 나무 위에서 매미의 울음소리가 그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들렸다. 다음에는 나무와 잡초 뿌리 속을 기어다니는 벌레 소리가 들렸고, 마지막으로 3㎞ 떨어진 곳에서 아가피가 기르는 누에의 되새김질 소리가 들려왔다. (p.63)

그의 도피방식에는 나름대로의 지론, 인생철학이 담겨져 있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언급해보면 대체로 삶이라는 것이 일련의 사건, 즉 아침 일찍 시작되어 낮의 여러 가지 필요성에 의해 변화되고 형성되다가 밤에는 사라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디케오스는 깨닫고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루의 사건에 달려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p. 68)

이렇게 나무 오르는 습관을 그리고리스는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할아버지는 그런 행동에서 어떤 치유력을 믿고 있었다.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거나 미칠 정도로 어려움에 처할 때에는 땅에서 벗어나 높은 나뭇가지를 붙잡고 매달려 있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그밖에도 나무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거나, 혹은 기둥 위에 있는 것도 유익하다고 했다. 긴급한 경우에는 나무나 밧줄로 된 사다리 위에 앉아 있는 것이 시급한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할아버지는 말한 바 있었다.
■■■한데 세상 사람들 중에서 근심 있는 사람이 바로 그 근심 때문에 직접적인 위험을 당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그리고리스의 할아버지는 말했다. 그러나 갖가지 고통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구원책은 나무 위로 몸을 날려 새의 세계나 끊임없이 움직이는 나뭇잎의 세계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첫 번째 시도할 때 자신의 근심을 셋 이상의 사건과 관련시켜서는 안 되는데, 이렇게 하면 나무나 근심 없는 새들의 사회도 그를 구출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p. 99)

그러나 결국 모든 물체가 어떻게 무게와 가치를 상실하는가를 본 것은 그가 피를 사방에 흘리며 죽기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그런 깨달음과 변화는 인간 각자의 천성에 기인하는 것인데, 인간의 천성은 변할 수 없고 그밖에도 그것이 죽음 또는 몰락의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었다. (p. 124)

예를 들어 누군가가 살인을 했는데, 피살자가 바닥에 쓰러지지 않고 반대로 인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오랫동안 높이 떠있다면, 그 살인은 정당하며 신의 정의의 행위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p.136)

총을 맞은 자가 천천히 계속해서 소유물과 힘을 상실해 가는 모습을 주시하는 것은 본질적이고 정의롭다. (p.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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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와 피살자, 살인자의 아들이 피살자가 되자 피살자의 아들이 살인자가 된다.

그리스 소설이다. 우연히 동네 서점에서 싸게 팔기에 사게 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감탄감탄해가며 읽은 것 빼고는, 그리스 소설이라곤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많은 문학 밑바탕에 깔려 있는 점을 생각하면 조금은 이상한 일이지만.

소는 잘 때 눈을 뜨고 잔다고 한다. 살인자나 살인자의 아들, 혹은 친척은 살인 사건이 일어난 후에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다. 그래서 몇십킬로미터 밖의 소리뿐 아니라 마음이라는 장소에서 생기는 소리까지 다 듣게 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살인자는 피살자의 몸이 아주 오랫동안 공중에 떠 있었다는 이유로 그 살인을 신이 인정한 정당한 행위로 받아들인다.

이 소설은 여러모로 매우 독특하다. 우선, 시점은 물론이고 시간이 마구 뒤섞여있다. <소들의 잠>에서 시간은 수직, 수평으로 마구 뻗어가다가도 시점마다 어지럽게 오가며 이상한 점들을 형성한다. 또 살인자가 살인을 행하고 난 후, 9일이라는 기간동안 들키지 않고 은신하는 방법 역시 무척 인상적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제대로 해보면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

농경사회의 사람들은 할아버지의 말씀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며 신뢰하는 것 같다. 그것은 인디언들도 마찬가지이다. 그 땅에서 한 가지 일을 하며, 별반 다를 바 없는 인간 존재로서의 존재함을 수십 년이나 미리 겪은 그들의 말은 더욱 중요할 수밖에. 나무를 탈 줄 안다면 내 근심도 해결이 될까. 정말로 끌리는 치유법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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