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개월의 새 황석영 중단편전집 3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10월
평점 :
절판


시대가 어지러울수록, 그래서 어떤 사람들의 속까지 어지러워질수록, 곳곳에서 ''를 마주치게 될 가능성이 커지는 모양이다. 무진에 간 윤희중이 역에서 만난 미친 여자에게서, 목포의 눈물을 부르는 하인숙에게서, 자살한 술집 작부에게서도 자신을 발견하는 일과 몰개월에서 '''빠꿈이'에게서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마지막에 그들은 모두 자신이 다른 육체 속에서 발견한 자신을 결국은 버리게 된다.
 

그것은 버림받는 당사자들이 더 잘 알고 있었던 듯 하다. 버림받는 것이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늘 가슴 아픈 이별을 새롭게, 진심으로 가슴 아파하며, 떠나는 이에 대한 예우를 잊지 않는 "몰개월의 똥까이"들의 이별 준비가 그렇게도 완벽하고 철저한 것을 보면 말이다

 

''는 베트남전 참전에 대한 보상으로 "일년 치를 앞당겨 받은 봉급을 침 발라 헤는 병사들"과 같은 특교대의 병사이다. 출전 전 마지막으로 군장 검열이 끝나고서 몰개월에서의 일을 회상하고 있다. 그곳에서 ''는 추장을 만나고, 추장을 만난 것으로 인해 "시궁창에 하반신을 담그고 엎드린 여자", 미자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미자를 처음 보았을 때 ''는 공연히 자신이 "먼 벽지나 부둣가의 어둠 속에 콱 처박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아마 미자와의 만남이 자신에게 남기게 될 흔적의 성격에 대한 예감이었을 것이다

 

미자는, "어디서 흘러왔는지도 모를 작부들이 집마다 두세 명씩 기거"하는 몰개월 갈매기 집의, "전국에서 가장 깡다구가 센 년들이란 소문이 자자" '똥까이'들 중 하나이다. 그 몰개월의 똥까이들은 모두 쓸개가 빠져서는 "모두들 애인 하나씩 골라서는 편지질"을 하지만, 그 상대편은 죽어버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제대하고 가면서 몰개월에 찾아와 한 번 들여다보지도 않는 매정한 놈들뿐이다.

'' 역시도 제대하면 그만이더라는 다른 놈들과 결국 다를 바 없겠지만, 갈매기 집의 온돌방에서 "마치 집에 돌아온 기분"을 느끼고, 처음에는 기억도 하지 못하던 미자를 애인 삼는다. 그런데 분명 ''가 첫 애인이 아닐 미자는 마치 처음 연애를 하는 여자처럼 ''에게 순정을 다 바친다.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일만큼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는 연애를 몇 번이나 하고도 늘 처음 하는 것처럼 열심히 할 수 있는 것이 '몰개월의 똥까이'들인 것이다

 

그래서 미자를 애인 삼고 미자와 연애를 하면서도 ''는 미자를 "먹지 못했다." 그들은 그가 미자의 "낯을 씻길 때부터 먹지 못하게 무관한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이라면 도저히 먹어줄 수가 없는, 먹어서는 안 되는 식구로 느끼게 된 것이다. 식구라 하면 핏줄 당기는 정도 정이지만, 늘 가슴속에 연민을 품게 되는 것처럼 ''도 역시 자신이 곧 버리게 될 '미자'에게 연민을 느낀다.

하지만 오히려 미자는 ''를 가여워한다. 그네는 "사는 게 그냥, " 가여운 일이라는 것을 깨쳐버린 것이다. 그래서 미자를 비롯한 "몰개월 여자들이 달마다 연출하던 이별의 연극은, 살아가는 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는 자들의 자기표현"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 인생의 시기와 세상의 시기의 어지러움 속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어리고 철이 없는, 그래서 가여운 수많은 병사들에게 늘 처음처럼 온정을 다 바치고, 헤어질 때가 되면 또 최선을 다해 슬퍼하며 그들을 연민하는 몰개월 여자들은 그들에게 애인이고, 누이이고, 어머니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물원에 가기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베스트셀러와 베스트셀링 작가에 대한 타고난 거부감으로 알랭 드 보통 책을 한 권도 읽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 책을 샀다. 신문을 보다가 한 기자가 인용해놓은 글이 알랭 드 보통의 책의 한 구절이었고 인상적이어서 이 책을 사보게 됐고, 후에는 친구가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선물해줬다. 알고 보니 '동물원에 가기'는 알랭 드 보통이 지금까지 쓴 수많은 책들 가운데 일부를 모아놓은 것이었다.

읽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그 당시는 참 마음이 복잡했던지, 포스트잍까지 붙여가며 많은 생각들을 잡아놓으려고 시도했었던 모양이다. 그 때 글로 옮겨진 생각들은, 지금에 와선 딱히 와닿지 않는 것도 많다. 내 감정의 부피는 작고, 질량은 적고, 질감도 나쁜 것들이었다, 언제나. 나는 다른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기 전에 우선 내 감정에 먼저 마음을 여는 일이 필요하다.

보통이 호퍼의 그림을 얘기하는 대목에선, 내가 잠시 지나왔던 수많은 기차역이나 터미널, 공항 같은 장소들이 떠올랐다. 회사나 학교 안이었다면 혼자서 밥을 먹느니 차라리 굶는 쪽을 택할 내가 기차역이나 터미널, 공항 같은 곳에서는 혼자서도 밥을 잘 먹을 수 있었다는 점도 생각해냈다.

원래 사람이 적은 장소나, 원래 사람이 적은 시간, 그리고 차라리 모든 각자가 다 남인 장소에서는 실제로 고립되어 있더라도 고립이 느낌이 오히려 희석된다. 군중 속의 고독이 더 고독의 본질에 가까운 것도 그 이유겠지.

하지만 이 책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오롯하게 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가치에 대한 믿음에 대한 집착부터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웃긴 건, 나는 스스로의 가치가 뭔지도 확실하게 모르고 그 믿음도 뿌리가 깊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겨우 그런 알량한 믿음 때문에, 거 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물원에 가기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6년 8월
구판절판


슬픔이 주는 기쁨

도로변의 식당이나 심야 카페테리아, 호텔의 로비나 역의 카페 같은 곳에 가면 쓸쓸한 공공장소에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이 희석되기도 하고, 그 덕에 독특한 공동체 의식을 다시 발견할 수도 있다. 가정적인 분위기의 결여, 환한 불빛, 특징 없는 가구가 외려 가정의 거짓 위안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도 있다. 익숙한 벽지와 액자에 걸린 사진들-위안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런 실내장식들-이 있는 집의 거실보다는 이곳이 슬픔에 마음을 여는 데 더 편할 수도 있다. -p. 12쪽

조명은 용서가 없어 창백함과 더러움이 사정없이 드러났다.-p. 13쪽

호퍼의 작품은 잠시 지나치는 곳과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마치 우리 자신 내부의 어떤 중요한 곳, 고요하고 슬픈 곳, 진지하고 진정한 곳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p. 15쪽

정신은 자신이 해야할 일이 생각뿐일 때는 제대로 그 일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p. 19쪽

열차밖 풍경은 안달이 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그러면서도 사물을 정확하게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리게 움직인다. -p. 20쪽

이따금씩 건물 내장에서 엘리베이터가 쉭하고 솟아오르는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호텔방에 누워있으면,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일어났던 일들 밑에 금을 그을 수 있다. 우리 경험에서 이제까지 무시해왔던 넓은 영역 위를 날아볼 수도 있다. -p. 21쪽

성심성의껏 소외를 시켜놓은 환경에 나 자신의 소외를 풍덩 빠뜨리는 것은 실로 위안이 되었다. -p. 23쪽

공항에 가기

비행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긴 날개들 밑에 엔진 네 개가 귀걸이처럼 걸려 있다.-p. 29쪽

비행기에서 구름을 보면 고요가 찾아든다. 저 밑에는 적과 동료가 있고, 우리의 공포나 비애가 얽힌 장소들이 있다. 그러나 그 모두가 지금은 아주 작다. 땅 위의 긁힌 자국들에 불과하다. 물론 이 유서 깊은 원근법의 교훈은 전부터 잘 알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차가운 비행기 창에 얼굴을 갖다대고 있을때만큼 이것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경우는 드물기에, -p. 38쪽

진정성

상대를 향한 강렬한 욕망은 유혹에 필수적인 무관심에 방해가 된다.-p. 43쪽

내가 클로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가치에 대한 믿음을 모조리 잃었다는 뜻이었다. 그녀와 비교하면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p. 43쪽

이런 식으로 열등감을 느끼게 되면, 바로 나 자신이라고 말하기 힘든 어떤 다른 인물로 위장할 필요가 생기다. 나보다 우월한 존재의 요구를 탐색하여 거기에 부응하려고 노력하는 유혹자의 자아를 전면에 내세우게 되는 것이다. -p. 44쪽

나는 사랑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상상하고, 그 눈을 통하여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그녀에게 누구인가?"였다. -p. 45쪽

그 날 저녁 나는 클로이의 욕망을 찾아내고 그에 따라 나 자신을 바꾸려는, 진정성이 결여된 시도를 되풀이했다. -p. 46쪽

너무나 오랫동안 클로이 생각뿐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다른 것은 몰라도 그 생각만큼은 그녀와 공유할 수가 없었다. 침묵은 어느 쪽으로든 빠져나갈 도리가 없는 고발장이었다.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침묵하면 그것은 상대가 따분한 사람이라는 뜻이 되고, 매력적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침묵하면 구제불능일 정도로 따분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임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p. 48쪽

가장 어줍게 유혹하는 사람이야말로 상대를 향한 진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관대하게 봐줄 수도 있다. 정확한 말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정확한 말을 의도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말로 표현하지 못할 뿐). -p. 48쪽

진정한 연인의 생각은 두서가 없고, 말은 조리가 안 선다는 것이다. 언어는 사랑에 걸려 비틀거리고, 욕망은 명료한 표현을 찾지 못한다(그러나 나는 그 순간에는 나의 말의 변비를 발몽 자작의 풍부한 어휘와 바꾸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p. 49쪽

그런 어줍은 질문(그래도 내가 던진 질문 하나하나를 통하여 나는 그녀를 조금씩 더 많이 알게 되는 것 같아다) 배후에는 가장 직접적인 질문으로 다가가려는 초조한 시도가 있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그리고 그것과 연결되는 "나는 누구여야 합니까?") 그러나 그런 직접적인 접근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내 방법이 거칠면 거칠수록, 내 연구 대상은 그물 사이로 빠져나가면서 자신이 무슨 신문을 읽는지, 무슨 음악을 좋아하는지만 알려주었다.-p. 51쪽

게다가 그녀는 똑같은 점을 두고 한 번은 칭찬을 했다가 조금 후에는 비난을 했기 때문에, 내가 제시하고 싶은 자아를 정신없이 계속 고쳐써야 했다.-p. 55쪽

나 자신의 어떤 면을 방출해야 하는가? -p. 55 쪽

나는 한가지 의견을 내놓았다가 잠시 후 그녀의 의견과 맞추기 위해 그것을 약간 수정하는 일을 되풀이했다. 클로이의 질문 하나하나가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다.-p. 55쪽

독창성은 자신이 하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소외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에 나는 그쪽으로는 전혀 다가갈 수가 없었다. -p. 56쪽

나는 아주 주변적이고 부수적인 사랑의 올무에 걸리는 경향이 있었다. 유혹하는 여자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중요한 자산으로 내세우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p. 64쪽

키스는 모든 것을 바꾸어버린다. 두 살갗이 접촉하게 되면 우리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들어가, 암호화된 말의 교환은 끝이 나고 드디어 이면의 의미들을 인정하게 될 터였다. -p. 65쪽

그녀는 속삭였다. "우리는 애들이 아니잖아요."

그녀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입을 자신의 입으로 덮었으며, 이어 인류 역사상 가장 길고 가장 아름다운 키스가 시작되었다. -p. 67쪽

일과 행복

현재 쏟아져 나오는 일에 관한 주장들은 현실이 제공할 수 있는 것과 명백하게 어긋난다. -p. 77쪽

석탄 사용을 중단하고 천연가스를 사용해도 도태된 에너지 자원은 절벽에서 뛰어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노동자는 자신의 가격이나 존재를 축소하려는 시도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습관이 있다. 노동자는 화장실에 들어가 흐느끼기도 하고, 실적 미달에 대한 두려움을 술로 달래기도 하며, 해고를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p. 81쪽

인생은 고통일수밖에 없다는 확고한 믿음은 수백년동안 인류의 가장 중요한 자산의 하나였다. 이것은 마음이 독에 물드는 것을 막아주는 보루가 되기도 했고, 좌절밖에 기다리는 것이 없는 희망의 길로 가는 발걸음을 막아주는 보호벽이 되기도 했다.-p. 82쪽

동물원에 가기

동물들이 결국 그렇게 이상하게 보이게 된 것은 자연환경에 적응했다는 표시다, 하고 다윈은 말했다. -p. 88쪽

참게는 <보그>의 페이지를 장식할 일이 결코 없을 것이고(꼭 작은 군용철모에 휜다리를 달아놓은 것처럼 생겼다), 기번을 읽지도 못하겠지만, 심해 생존 분야에서는 발군으로 상어한테도 잡아먹히지 않는다. -p. 90쪽

"원숭이는 인간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다." 우랑우탄 우리에는 그런 설명이 붙어 있다. "비슷한 점이 몇 가지나 보이는가?" 물론 너무 많이 보여 마음이 편치 않을 정도다. -p. 91쪽

독신남

함께 로맨틱해질 사람이 없는 사람보다 더 로맨틱한 사람은 없다. 정신을 팔 일이나 친구도 없어 깊은 외로움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드디어 사랑의 본질과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p. 97쪽

글쓰기(와 송어)

다른 사람들이 쓴 책을 읽다보면 역설적으로 나 혼자 파악하려 할 때보다 우리 자신이 삶에 관해서 더 많이 알게 된다.

-p. 126쪽

희극

나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왕좌에 앉아 있지만 그래봐야 내 엉덩이 위일 뿐이다. -몽테뉴-p. 13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처음 읽게 된 건 선생님께서 엮어주신 책 덕분이었다. 그 시를 쓴 사람과 이 소설속의 네루다가 결코 동일인물이 아니라고해도 소설속 네루다의 모습이 완전히 허상이라고는 믿고 싶지 않다. 평화롭기만 한 이 마을의 전경과 당시 칠레의 정치상황이 완벽한 대조를 이루는데도, 칠레는 시인이 대통령 후보가 되어 연설대신 시를 읽어줄 수 있는 나라였다.

아- 또 하나의 사랑스런 캐릭터, 마리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장바구니담기


"구인광고를 보고 왔습니다."

마리오가 버트 랭커스터 뺨치는 미소를 지으며 관리에게 말했다.

관리는 지루해하며 물었다.

"자전거 있나?"

마리오는 얼씨구나 싶었다.

"네."

관리는 안경을 닦으면서 말했다.

"좋아. 이슬라 네그라를 담당할 우체부 직이야."

"우연이네요. 제가 이슬라 네그라 옆 포구에 살거든요."

"그것 참 잘됐군. 하지만 문제는 수신인이 단 한 사람뿐이라는 거야."

"한 사람뿐이라고요?"

"그렇다니까. 포구 사람들은 모두 까막눈이야. 계산서조차 못 읽으니까."

"그 수신인이 누구죠?"

"파블로 네루다씨."

마리오는 한 사발은 족히 될 침을 삼켰다.

"하지만 그건 쌈박한 일이잖아요." -p. 17-18쪽

한없는 인내를 지닌 태평양도 못한 일을 산안토니오이 단출하고 정겨운 우체국이 이루어냈다. 마리오는 동이 트면 휘파람을 불며 일어났고 코도 막히는 법 없이 멀쩡했다. -p.21쪽

심지어 두어달 동안은 초인종으로 쓰는 종을 칠 때마다, 절묘한 시구를 빚어낼 찰나에 있는 시인의 영감을 살해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p.22쪽

두번째 월급봉투를 받았을 때 당연하다는 듯이 로사다 판 <신 일상송가>를 샀다. 꿈에 그리던 산티아고여행을 포기해야만 했을 땐 일말의 슬픔이 밀려왔다. 거기에다 약아빠진 서점 주인이 "다음 달에는 <제3송가>를 준비해놓습죠."라고 말했을 때는 공포가 엄습했다.-p. 23-24쪽

네루다는 지쳐서 말을 끝맺었다. 그리고 남은 힘으로 마리오에게 포구로 가는 길을 가리켰다. 하지만 마리오가 적절히 초를 쳤다.

"제기랄. 나도 시인이나 되었으면."

"허허! 칠레에서는 모두가 시인이야. 계속 우체부를 하는 게 더 독창적이라고. 자네는 적어도 많이는 걸으니 살은 안 찌잖아. 칠레 시인들은 다 배불뚝일세." -p. 28쪽

바다의 모든 것이 웅변적이었건만 마리오는 침묵만을 지켰다. 너무도 굳게 침묵을 지켰기에 자신과 비교하면 돌멩이들까지도 수다쟁이 같았다.-p. 35쪽

마리오는 소녀가 골을 넣어 쇠골대가 울렸을 때 그녀 쪽으로 시선을 들며 가능한 한 최고로 꼬리치는 미소를 지었다. -p. 36쪽

그 꼬락서니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위해 잔도 샴페인도 없이 건배를 제의하는 바로 그 모습이었다.
-p. 37쪽

마리오가 프롤레타리아적인 근성을 발휘하여 비틀스보다 더 덥수록한 머리를 하고 다녀도 참을 수 있었다. -p. 39쪽

마리오는 곁으로 갔고, 말을 다시 잇기 전에 십초간이 헐떡임을 네루다에게 선사했다. -p. 41쪽

"과부가 속담포병대를 이끌고 메타포 전쟁에 임하기로 한 것 같아 정말 두렵군." -p. 94쪽

청년 마리오는 과부가 자손만대에까지 기억될만큼 문을 쾅 닫으며 나가는 것을 보았다. -p. 96쪽

네루다가 덤덤한 표정을 말했다.

"자, 주점으로 가서 그 유명한 베아트리스에 대해 알아보자고."

"농담이시겠죠."

"진담일세. 주점에 가서 포도주 한 잔 하면서 자네 애인을 한 번 보자고."

"우리가 같이 있는 걸 보면 감동해 까무러칠 거예요. 파블로 네루다씨와 마리오 히메네스가 함께 주점에서 포도주를 마신다! 까무러치고말고요!"

"그건 너무 슬픈 일이군. 소녀에게 시 대신 비문을 써줘야 한다면."-p. 47쪽

"테이블 축구이 제왕이시여. 무엇을 드시겠나이까?"

마리오는 시선을 소녀의 눈에 고정시키고는 삼십초동안 '내가 누구지, 내가 지금 어디 있지, 숨은 어떻게 쉬지, 말은 어떻게 하지?' 등등 자신을 억누르는 치명적인 충격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를 떠올리려고 기를 썼다. -p. 50쪽

마리오는 트럭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떠나는 것을 보았다. 마리오는 그 흙먼지가 아예 자신을 생매장시켜 버렸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마리오는 목숨을 끊지는 않으리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시인에 대한 충정이 우러나 삼천쪽에 달하는 작품전집을 한 쪽 한 쪽 다 읽을 때까지는 결코 죽을 수 없었다. 첫 오십쪽은 시인이 집 마당에 있는 종루 아래서 해치워버렸다. 그러는 사이 바다가 마리오를 산란하게 만들었다. 네루다에게는 절묘한 이미지를 숱하게 안겨준 바다이지만 마리오에게는 단조로운 대사를 읽어주는 사람같았다. 그저 '베아트리스, 베아트리스.'라는 후렴을 선사할 뿐이었다. -p. 52쪽

흰옷차람이 남자 두명이 그 시끌시끌한 차에서 내리더니 함박웃음을 지으며 사람들에게 다가왔다. 인근에서는 보기 드문 그런 웃음이었다. 이발 빠진 사람들이 많은 포구에서 함박웃음은 호사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p. 53쪽

마리오는 먼저 토레 상표 공책에 습작을 한 메타포들을 가다듬은 뒤, 앨범에는 그중 최고의 것만 가려서 비누로 손을 정결하게 씻고 시인처럼 초록색 볼펜을 쓸 작정이었다. -p. 57쪽

베아트리스는 나날이 아름다움의 극치를 향해 치달았지만 자신이 변화가 마리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알지 못했다. -p. 58쪽

"손님 의견은 묻지 않았어요."

마리오는 가죽가방에 시선을 내리꽂았다. 가방 속으로 파고 들어가 포도주 병을 벗삼았으면 하는 심성이었다. -p. 59쪽

"이봐요, 따님. 정치와 시도 혼동할 정도로 똥오줌 못가리면 곧 미혼모가 되시고 말걸요. 마리오가 무슨 말을 했지?"

베아트리스는 혀끝에 맴도는 말을 몇초간 뜨거운 침으로 다듬었다.

"메타포요." -p. 61쪽

"'그대 머리카락을 낱낱이 세어 하나하나 예찬하자면 시간이 모자라겠구려.' 그러더라고요." -p. 63쪽

"엄마!"

"넌 지금 풀잎처럼 촉촉해. 후끈 달아올랐을 때에는 약이 딱 두가지밖에 없지. 교미나 여행"

어머니는 딸이 귓불을 놓고 침애 밑에서 가방을 꺼내 침대 위에 패대기쳤다.

"가방 싸!"

"싫어요! 여기 남을 거예요!"

"강물은 자갈을 휩쓸어 오지만 말은 임신을 몰고 오는 법이야. 가방 싸!"

"전 스스로를 지킬 줄 알아요."

"흥! 스스로를 지킬 줄 아신다고요! 제가 보기엔 손끝만 스쳐도 무너질 것 같은데요. 이 몸이 그대보다 훨씬 먼저 네루다 시를 읽었다는 것을 기억하시죠. 남정네들이 달아오르면 간덩이까지 시로 변하는 걸 모를 것 같으신가요?" -p. 65쪽

"기막혀! 남자애 하나가 내 미소가 얼굴에서 나비처럼 날갯짓한다 그랬다고 산티아고에 가야 되다니."

과부역시 열을 올렸다.

"닭대가리 같으니! 지금은 네 미소가 한마리 나비겠지. 하지만 내일은 네 젖통이 어루만지고 싶은 두마리 비둘기가 될 거고, 네 젖꼭지는 물오른 머루 두 알, 혀는 신들의 포근한 양탄자, 엉덩짝은 법선 돛, 그리고 지금 네 사타구니 사이에서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는 고것은 사내들이 그 잘난 쇠몽둥이를 달구는 혹옥 화로가 될 걸! 퍼질러 잠이나 자!" -p. 67쪽

마리오는 목구멍에 온갖 메타포가 걸린 채로 일주일을 보냈다.-p. 69쪽

마리오는 혀끝으로 추켜올리고 싶은 그 미니스커트 주인공의 그림자라도 나타날까 하여, 오후마다 주점 바깥에서 비탄에 잠긴채 흘러나오는 <돛단배>를 들었다. -p. 69쪽

애교로 봐줄법한 낭만에 사로잡힌 마리오는 공들인 메타포 하나하나와 한숨 하나하나 그리고 장차 자신이 귓불과 사타구니엣 예고편처럼 노닐 소녀의 혀가, 정액을 영글게 하는 대우주의 기라고 상상했던 것이다. -p. 70쪽

"선생님, 오늘은 메타포를 생각할 기분이 아니에요. 제발 편지를."

네루다는 버터칼로 편지를 뜯었다. 일부러 굼뜨게 굴어서 일분 이상이나 걸렸다. 시인은 '복수는 신들이 즐거움이란 말이 맞군.'이라고 생각하면서 봉투에 붙어 있는 우표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우표 속 위인의 생동감 있는 턱수염을 시시콜콜 뜯어보고, 산안토니오 우체국의 희미한 직인을 판독하는 척하고, 발송인 이름 위에 들러붙은 바삭거리는 빵 한조각을 떼어냈다. 어떠한 추리영화의 거장도 마리오를 그런 서스펜스로 몰아넣지 못했을 것이다. -p. 73쪽

"따님에게 무슨 말을 했는데요?"

과부가 침을 뱉듯 말했다.

"메타포요."

시인은 침을 꼴까닥 삼켰다.

"그런데요?"

"네루다씨. 메타포로 제 딸을 용광로보다 더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니까요!"

"지금은 겨울입니다, 부인."

"불쌍한 베아트리스는 그 우체부 때문에 완전히 맛이 가고 있단 말입니다. 가진 것이라곤 알량한 무좀균뿐인 작자때문에 말입니다. 발은 병균으로 득실거리는 주제에 주둥아리만 살아서 나불대죠. 주둥아리도 그냥 주둥아리가 아니라 칡넝쿨처럼 얽혀오죠. 가장 심각한 것은 뻔뻔스럽게도 제 딸을 꼬드기는 데 쓰는 메타포들이 당신 책에서 베낀 거라는 사실입니다."

"그럴리가요!"

"그렇다니까요! 처음엔 순수하게 나비 같은 미소 어쩌고 저쩌고 했죠. 하지만 다음번에는 벌써 딸에게 젖가슴이 두줄기 불꽃같다고 말했어요."

시인이 캐물었다.

"그가 사용한 이미지가 시각일까요, 아니면 촉각일까요?" -p. 80쪽

"과부이 협박이 빈말일수도 있지만 진짜라면 자네는 '삶이 칠흑처럼 어둡다'는 그 상투적인 어구를 평생 뇌까릴 수 있는 권리를 얻을거야." -p. 83쪽

"하지만 저는 젊고 건강한걸요. 아코디언보다 더 팽팽한 허파도 있고요."

"하지만 베이트리스 때문에 한숨쉬는 데만 허파를 사용하잖아. 벌써 유령선 뱃고동 같은 천식소리가 나는 걸." -p. 84쪽

나를 하얀도포를 입은 서글픈 왕으로 만들어버려. 벌써 입까지 차올라 입술을 덮어서 아무말도 할 수 없네. -p. 10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