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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왜냐하면 사람이란 상대를 완전히 판단치 못했을 때 상대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그리움이란, 인식이 부족해서 생기는 소산인 것이다."
관계 맺기란 편견 만들기가 아닐까.
적어도 관계가 깊어지기 전에는 관계를 맺고 있는 대상에 대한 무한한 상상의 공간이 열린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모든 것이 그이고, 이 때에는 오히려 상상 밖 공간까지 열린다.
하지만 직접적인 관계 맺기를 통해서 우리는 이전의 상상항목들에 수정, 혹은 삭제만을 하기가 쉽다. 그 항목에 미처 넣지 못했던 것들은 미안하지만 탈락시킬 수밖에 없다. 억지로 받아들인 경우에도 그것은 그가 아닌 내게 맞춰진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 사람을 내게 맞는 옷으로 재단한다. 어느 신화에서처럼 침대에서 튀어나온 팔, 다리를 잘라내는 식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그것을 재단하다 보면, 그 재단이 끝나기도 전에 그것은 이미 내가 알고 있던 그가 아니잖아. 하고 내팽개쳐버리기도 한다.
자기에게 맞추어진 인물은 이미 스스로에게는 인식 불가능한 먼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토마스 만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상대를 완전히 판단하려는 것부터가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상대를 판단하지 않으면 인식은 저절로 따라온다. 정확하고 예측 가능한 인식이 아닌, 매 순간순간 부딪히는 그때그때의 인식이 진짜라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그 대상에 대한 굉장한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대상에게, 그에게, 그녀에게 집중된 인식은 자연스럽게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베니스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아셴바흐는 끊임없이 이국의 것으로부터 유혹을 받는다. 모든 이국 취향은 이길 수 없는 욕망이고, 그래서 늘 죽음을 동반한다.
이국적인 게 뭐 어떤 건가.
인간은 자기에게 없는 것은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이므로, "이국적"이라는 바로 그 속성마저도 실제로는 자기 내부에서 늘 꿈틀거리고 있는 그런 것, 혼자 있을 때나 또렷하게 들려오는 소리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깊숙이 숨겨진 무의식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흠.
아셴바흐를 베니스까지 끌고 갔고, 탓치오를 데려다 놓음으로써 발목을 붙잡고, 열에 시달리면서도 분리되지 않는 미친 환상들과 함께 하며, 결국은 이국의 병으로 죽고 말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국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 스스로에 대한 취향, 무의식에 대한 지향성은 아닌가.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토마스 만의 작품을 영화로 만든 건데, 1971년 작이고, 이탈리아 영화이고, 암튼 좀 지루했다. 소설 속, 바로 그 소년 탓치오를 연기할 배우를 골라낸 취향도 지금으로서는 조금 느끼하달 밖에 달리 표현하기가 힘들다, 흠,,,
하지만, 영상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하는 만큼 화면이 아름답다. 그리고 요즘 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영화 속에 풍성한 여백이 느껴지는 점도 좋았다.
+ 어쨌든, 토마스 만의 소설은 조금 지겹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