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literature | quick space 2004/06/30 21:15

1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문학교과서에 실릴 만큼의 비중을 공인 받는 여느 우리 작가보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을 더 편하게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한 번 가 본 적도 없는 노르웨이의 숲은 왠지 태백산맥 어디쯤 있을 것처럼 친숙하다.

아무 의미가 없으면서도 부르기 쉬운 이름을 찾다가 "바나나"라는 필명을 지었다는 요시모토의 "부엌(키친)" 역시 조금 과장해서 어릴 적 친구 집인 것 마냥 정겹다.

어마어마한 규모와 소장량을 자랑하는 대학도서관에서 "냉정과 열정사이"를 '빌려서' 읽고 싶거든 꽤 부지런해야 한다. 곁다리로 에쿠니 가오리의 다른 책이라도 보고 있으려니 그것조차 쉽지 않다.

"69"의 상징을 모르는 이는 문학도의 자질을 의심받을 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난잡한 성교와 의도적인 자기 파괴가 취미인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무난하게 읽히지는 않아도, 억눌린 쾌락과 일탈 충동, 감각을 긁어주는 "무라카미 류"도 있었다.

2 가깝고도 먼 나라가 일본이라고는 하지만, 우리 땅 덩어리 아닌 타국에 적을 둔 베스트셀러, 혹은 스테디셀러 작가가 서너 명 정도는 그냥 떠오른 다는 것은 어쩐지 의미심장하다.

90년대 말쯤으로 기억한다. "노르웨이의 숲에 가보셨나요?"라는 감성적인 카피의 광고가 히트를 치면서 다시 한 번 "상실의 시대" 읽기, 하루키 읽기 바람이 불었다. 꼭 문학청년이 아닌 이들도 "와타나베"와 "미도리"를 사칭하며 그들의 창조주 하루키에 대한 흠모의 정을 키워나갔다.

개인적인 고백을 털어놓자면, 솔직히 "죄와 벌"을 읽고서 라스콜리니코프의 죄의식과 인간의 원죄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의 와타나베와 미도리, 레이코의 방황과 착란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쩐지 조금 더 멋있게 느껴진 적도 있었다. 조금만 더 자라면, 겉에서 보기에는 혼돈과 무질서를 힘겹게 짊어지고 있는 것 같아도 나름의 굳은 삶의 방식을 가진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환상과 현실을 교란시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을 손에 잡힐 듯 그려내는 하루키의 수법은 나를 여러 가지 이유로 숨막히게 했다.

작가로서의 고민을 담은 그의 초기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읽을 때에는 실제로 바람의 노래 아니라 숨소리라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는 힘, 그것이 한 왜소한 열도에서 태어난 영원히 젊은 작가 하루키이다.

하루키에 이어, 요시모토 바나나는 "키친" 한 권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베스트 셀러 작가 자리를 지켜왔는지 모른다. 삶과 죽음 사이를 부유하며 끊임없이 우리에게 오라 하는 손짓. 흔히 표현하듯 경쾌한 터치와 신세대적인 감각적 묘사로 심각한 것을 조금은 사소하게 만들어주는 글쓰기. 바나나는 "너만 괜찮다면, 우리 좀 더 밝고 더 굉장한 곳으로 가자"는 위험한 유혹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그리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끓는 피는 기꺼운 마음으로 모험을 감행하도록 부추긴다.

그러나 가장 최신식 일본산 히트 작가를 논하자면, 하나의 이야기를 남과 여의 시각으로 담아 내는 새로운 시도가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킨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를 빼 놓을 수 없을 것이다. 헤어진 연인이 '10년 후 생일에 피렌체 두오모에 오르자'는 약속을 했다는 설정은 유치하고 상투적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낭만적이다. 원래 사랑은 유치한 거라는 말로 위로하며, 사람들은 냉정과 열정사이에 빠져들어 자신의 냉정 속에 감추어진 열정을 찾아낸다.

그야말로 "빙점"의 미우라 아야꼬,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나쓰메 소세키와 같은 전통적인 일본 작가들과는 조금 성격을 달리하는 감각적이고 젊은 작가들은 이웃 나라, 한국의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힘은 여전히 소진되지 않은 듯하다. 이는 하루키의 최신작 "해변의 카프카"나 에쿠니 가오리의 "호텔 선인장"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3 내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어느 동호회의 인터넷 게시판에 "키친"의 소설의 한 구절을 올린 적이 있었다. 그 게시판에서는 그 한 구절 때문에 논쟁이 일었다. 물론, 그것은 작가 혹은 작품 전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은근히 뿌리 깊은 반일감정 대 일본작가들에 대한 매니아적 취향간의 대립이었다.

하루키의 글 속에는 진정성이 부족하고, 바나나의 글에는 깊이가 없으며, 따라서 하루키나 바나나를 읽는 요즘 젊은이들은 오감을 직접적으로 자극하지 않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다.

유행에 민감한 이 땅의 젊은이들은 책읽기도 유행을 따라서 베스트 셀러는 없어서 못 팔고, 고전문학은 먼지 쌓인 서고 한 켠으로 밀려나고 있다고도 말한다. 실제로, 똑같은 번역에 똑같은 판으로 찍어낸 책에 양장을 시켜 한 몇 천 원쯤 얹어 팔아도 베스트 셀러는 잘 나가고, 출판사는 또 그것이 고마워 베스트셀러 작가들의 베스트셀러 작품들을 세트로 묶어 할인해주며 팔고 있다.

이 세 가지 걱정 중의 첫 번째는 유서 깊은 무조건적 배타심을 버리는 것으로 해결을 볼 수 있을 것이고, 두 번째는 (실제로 그들의 지적이 정당하다는 가정 하에) 삶의 진정성과 깊이가 들어 있는 다른 작품들로 결핍을 메우면 될 것이다.

그러나 세 번째는 조금 더 생각을 해보았으면 싶은 문제들인데, '출판사는 훌륭한 책으로 사람들을 널리 이롭게 하겠다는 사명만을 갖고 조악한 상술은 깨끗이 버리시오' 라고는 할 수 없는 바, 읽는 우리나마 책을 고르는 눈을 닦아야 하지 않겠는가. 대문호라고 언제나 명작만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세트로 묶어 판다고 홀라당 넘어가지 말고, 이제는 좀 골라서 읽고 다르게 읽자.


2003. 여름
from www.chamzin.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