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 자
실비아 플라스 지음, 공경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2월
절판


나랑은 상관없었지만, 전기 사형을 당하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경이 산 채로 몸이 타면 어떨까.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p. 5쪽

하지만 난 휩쓸고 다니지 못했다. 내 자신조차 마음대로 못 했다. 호텔에서 사무실로, 파티장으로, 파티장에서 호텔로, 다시 사무실로 멍청한 무궤도 전차처럼 다닐 뿐. 다른 여자애들처럼 들떠서 지내야 마땅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마음이 가라앉고 공허한 느낌이었다. 주위가 소란한 가운데 둔하게 움직이는 폭풍의 눈 같다고 할까. -p. 7쪽

그녀는 무슨 말을 하든, 내 뼛속에서 튀어나와 말하는 은밀한 목소리 같았다. -p. 12쪽

마침내 보드카가 내게 맞는 술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 맛도 나지 않으면서, 뱃속으로 넘어간 느낌은 차력사가 칼을 삼킨 것 같았다. 기운이 나고 신이 된 기분이었다.-p. 19쪽

두 사람이 서로에게 점점 열을 올리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기운이 빠진다. 같은 방에 있으면서 우두커니 소외된 사람의 입장에서는 특히 그렇다.

그것은 파리를 떠나는 고속 열차의 맨 뒷칸에서 파리를 쳐다보는 것과 비슷하다. 시시각각 파리는 점점 작아지고, 나도 점점 작아지고 외로워지는 느낌. 파리의 휘황찬란한 불빛과 흥분에서 시속 100만 마일의 속도로 멀어지는 기분. -p. 24쪽

온종일 길에 쏟아진 후텁지근한 열기가 마지막 모욕처럼 얼굴에 확 밀려왔다. -p. 25쪽

차들이 시끄럽게 달리고, 차에 탄 사람들과 불 밝힌 건물에 있는 사람들이 소리를 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강물도 소리를 내며 흘렀지만,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창문에 도시가 걸려 있었다. 포스터처럼 평평하게 걸려서 반짝이고 깜빡거렸지만, 내게는 없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침대 옆에 놓인 하얀 전화기가 나를 주위와 연결시켜줄 수도 있었지만, 전화기는 죽은 자의 머리처럼 잠자코 놓여있기만 했다. -p. 27쪽

밤도 낮도 아닌, 소름 끼치는 제 3의 시간같이 느껴졌다. 갑자기 밤과 낮 사이에 끼어서 끝나지 않는 시간. -p. 30쪽

그 날 밤 도린에 대해 결정을 내렸다. 그녀를 지켜보고 말을 들어주기야 하겠지만, 마음속으로는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p. 31쪽

"정말 모르겠어요."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그 말을 하면서 스스로 깊은 충격을 받았다. 말을 이 밖에 낸 순간, 그게 사실임을 알았으니까.

그 말은 사실로 들렸고, 나는 깨달았다. 오랫동안 집 주변을 기웃대던 정체 모를 사람이 갑자기 다가와서 친아버지라고 말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나와 똑같이 생겨서 그가 생부고 평생 아버지로 여긴 사람은 가짜였다는 생각을 할 때처럼, 그 말이 사실로 다가왔다.

"정말 모르겠어요." -p.42쪽

화학은 더 끔찍하리란 걸 알고 있었다. 화학 실습실에 걸린 아흔 몇 개의 원소 차트를 본 적이 있으니까. 금, 은, 코발트, 알루미늄 같은 멋진 말이 숫자와 함께 흉한 약어로 적혀 있었다. -p. 46쪽

난 천연색 영화가 싫다. 천연색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은 죄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야한 새 의상을 입고, 진초록색 나무나 진노란색 밀밭이나 사방으로 흘러가는 진파란색 바다 앞에 빨래걸이처럼 서 있어야 한다고 느끼는 것 같다. -p. 52쪽

"그러지 뭐. 좋아."

내가 대답했다.

나는 버디가 면바지의 지퍼를 내리고 벗어서 의자에 던져놓고, 나일론 망사팬티를 벗는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시원해. 어머니가 그러시는데 세탁도 잘 된대."

버디가 설명했다.

그는 내 앞에 버티고 섰고, 나는 계속 쳐다봤다. 칠면조 목과 내장 같다는 생각만 들었고, 아주 실망스러웠다. -p. 85쪽

평생 처음으로 유엔 건물의 방음이 되는 심장부에서, 테니스를 치는 동시 통역사 콘스탄틴과 관용어구를 많이 아는 러시아 여자 사이에 앉아 있으니, 내가 끔찍하게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 늘 부족했는데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내 특기는 장학금 따기와 상 타기였는데, 이제 그것도 끝나갔다.

경마장이 아닌 거리에 던져진 경주마가 된 기분이었다. 대학 우승자인 풋볼 선수가 양복 차림으로 월스트리트와 마주선 느낌과 비슷했다. 그의 영광의 나날은 선반에 놓인 트로피로 끝나버리지 않았던가. 트로피에 새겨진 날짜는 묘비의 날짜와 다름없었다. -p. 94쪽

버디는 보이지 않는 철사로 입매를 위로 잡아맨 양 계속 빙그레 웃었다. -p. 109쪽

"서로 다른 두 가지를 동시에 하고 싶은 게 노이로제라면, 난 끔찍한 노이로제에 걸렸어. 난 죽을 때까지 완전히 다른 것들 사이를 날아다닐 거야." -p. 115쪽

울음이 터질까봐 사진 찍기가 싫었다. 왜 울 것 같은지 몰라도, 누가 말을 걸거나 빤히 쳐다보면 눈물이 줄줄 흐르고, 목구멍에서 흐느낌이 치솟아 일주일 내내 목 놓아 울 것 같았다. 물이 가득 차서 넘칠 것 같은 컵처럼, 눈물이 차올랐다. -p. 123쪽

아침마다 소설 편집자의 사무실에는 눈사태 난 것처럼 원고가 쏟아졌다. 미국 전역의 서재, 다락방, 교실에서 사람들이 은밀히 글을 쓰는 것 같았다. -p. 125쪽

등을 뒤로 기대고, 쓴 부분을 읽었다.

충분히 생생한 것 같았고, 벌레 같은 땀방울 부분이 자랑슬웠다. 다만 오래 전 다른 데서 그런 묘사를 본 것 같은 인상이 어렴풋이 들었다.

한 시간쯤 그렇게 앉아서 이제 어찌할지 고민했다. -p. 147쪽

매트리스와 침대 틀 사이로 들어가, 매트리스를 관 뚜껑처럼 내 몸에 덮었다. 어둡고 안전한 기분이었지만, 매트리스가 충분히 무겁지 않았다.

잠들려면 1톤쯤 더 무거워야 될 것 같았다. -p. 150쪽

"문제가 뭐 같아?"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책도 못 읽겠고요."

차분한 태도로 말하려 했지만, 귀신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목이 막혔다. 나는 두 손바닥을 위로 향하도록 해서 쫙 폈다. -p. 153쪽

잠을 못 잔 지 7일이나 됐다.

엄마는 내가 분명히 잤을 거라고, 7일이나 안 잘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잤다고 해도 눈을 크게 뜨고 잤을 것이다. -p. 155쪽

1년의 하루하루가 흰 상자들처럼 줄줄이 늘어서 있고, 상자와 상자 사이에 검은 그림자 같은 잠이 있었다. 유독 내게는 상자와 상자 사이에 놓인 긴 그림자가 갑자기 쑥 빠져서, 하루하루가 끝없이 쓸쓸한 흰 대로처럼 내 앞에서 이글거리는 것 같았다.

다음날 또 옷을 빨고 머리를 감아야 하는데, 오늘 그러는 게 멍청한 짓 같았다.

그 생각만 해도 지겨웠다.

모든 걸 딱 한 번만 하고 끝까지 그대로 버티고 싶었다. -p. 156쪽

못생기고 친절하고, 직관이 있는 남자가 올려다보면서, 내가 모르는 것을 안다는 듯 격려하는 말투로 "아!" 하고 말하는 것을 상상했다. 그러면 나는 빠져나갈 길 없는 숨막히는 검은 주머니 속에 점점 처박히는 것 같이 겁난다고 말할 것 같았다. -p. 157쪽

가장 신경 쓰이는 게 필체란 말은 하지 않았다.

...아이가 쓴 것처럼 크고 삐뚤삐뚤한 글씨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거의 대각선으로 내려갔다. 누가 글씨에 대고 비스듬히 입김이라도 분 것 같았다.

그런 편지를 부칠 수 없어서 짝짝 찢어서 핸드백에 넣었다. 의사가 보여달라고 할까 콤팩트 옆에 쑤셔 넣어두었다.

물론 내가 그 이야기를 안 했으므로, 닥터 고든은 편지를 보여달라고 하지 않았다. 내 영리함이 흐뭇해지기 시작했다. 말해주고 싶은 것만 말해야지. -p. 158쪽

하지만 닥터 고든이 그 일에 대해 엄마랑 대화하는 게 내키지 않았다. 나를 병원에 가둬야 한다고 말할 것 같았다. 편지 조각을 모았다. 그가 편지를 이어 붙여, 내가 도망칠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을 알면 곤란했다. 난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p. 165쪽

가장 마음에 드는 나무는 '흐느끼는 학자 나무'였다. 일본산 나무일 것 같았다. 일본인들은 정신에 대한 것들을 이해했다.

그들은 일이 어긋나면 스스로 할복했다.-p. 167쪽

앞자락이 지저분한 유니폼을 걸친 덩치 좋은 간호사는 사팔눈이었다. 안경알이 워낙 두꺼워서 눈 네 개로 날 쳐다보는 것 같았다. -p. 172쪽

사람들이 어느 늙은 로마 철학자에게 어떻게 죽고 싶은지 묻자, 그는 따뜻한 물속에서 동맥을 끊을 거라고 말했다. 욕조에 누워, 팔목에서 흐른 붉은 피가 투명한 물속으로 퍼지는 것을 보는 것은 쉬울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양귀비꽃처럼 화려한 수면 밑, 잠 속으로 빠져들겠지.

하지만 시작하려는 순간, 팔목의 살갗이 너무 허옇고 무방비 상태여서 칼을 댈 수가 없었다. 죽이고 싶은 게 그 살갗이나 엄지 밑에서 뛰는 파란 핏줄이 아니라, 다른 데 있는 것만 같았다. 더 깊고 은밀하고, 다다르기가 훨씬 어려운 곳에. -p. 178쪽

노란 실크 끈을 고양이 꼬리처럼 목에 매달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목을 맬 곳을 찾다가, 엄마의 침대에 앉아서 끈을 꽉 당겼다.

하지만 끈을 바싹 당겨서 귀가 벌게지고 얼굴에 피가 솟구치는 기분이 들 때마다 끈을 풀었고, 그러면 다시 괜찮아지곤 했다.

그 때 내 몸이 온갖 종류의 속임수를 쓴다는 걸 알았다. 중요한 순간에 양손이 늘어졌고, 그러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내 뜻대로 한다면 순식간에 죽는 거였는데. -p. 193쪽

엄마는 말했다. 자기에 대해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생긴 병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돕는 게 치료법이라고. -p. 196쪽

눈을 뜨면, 색깔과 형체들이 간호사처럼 내게 몸을 굽히고 있을 것 같았다. -p. 207쪽

"오늘 아침에는 기분이 어떠세요, 미스 그린우드?"

...기분이 뭣 같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쾌활한 목소리로 "기분이 어떠냐?"고 묻고 "좋아요"란 답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싫다.

"거지 같아요." -p. 215쪽

기니 여사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런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그녀가 유럽 행 티켓이나 크루즈 왕복표를 줬다 해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내가 어디 있든-배의 감판이든 파리나 방콕의 거리 카페든-나 자신의 시큼한 공기 속에서 속을 태우며 벨자(종 모양의 유리 그릇) 밑에 앉아 있을 테니까.-p. 225쪽

"하지만 지금은 괜찮잖아."

내가 분명하게 말했다.

조앤은 반짝이는 회색 눈으로 날 쳐다보며 대꾸했다.

"그럴 거야. 너도 그렇지 않아?" -p. 243쪽

"난 네가 좋아."

나는 책을 들면서 대답했다.

"그건 곤란해, 조앤. 난 너를 안 좋아하니까. 이유를 알고 싶다면 말하지. 널 보면 토할 것 같아서 그래."

방에서 나왔다. 조앤은 내 침대 위에서 늙은 말처럼 늘어져 있었다. -p. 268쪽

예전부터 퇴원할 때는 앞에 펼쳐진 모든 것을 알고 확신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내가 '분석'되었으니 모든 게 분명해질 터였다. 그런데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물음표뿐이었다. -p. 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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