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가운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
루이제 린저 지음, 박찬일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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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제 린저 | 생의 한가운데 | quick space 2004/06/30 21:18

자신의 이름보다는 [생.의.한.가.운.데.]라는 그녀의 제목이 조금 더 유명한 독일産 여류작가가 있다. 생.의.한.가.운.데.를 알면서 그녀는 알지 못한다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지만, 생.과 그 한.가.운.데.라는 두 단어의 결합에 묻어 있는 간결하지만 오롯한 느낌 때문이리라.

그렇지 않아도 生.이란 한 마디는 언제나 우리 산 사람들의 말초를 자극하는 법이다.

그리고 니나 부슈만.

단언하건대 사랑 얘기인 척하는 소설치고 진짜 사랑 얘기인 것 없고,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명제 앞이라고 사랑이 물러나는 일도 없더라. 소설 쓰는 사람은 자기 얘기인 척 남의 얘기를 쓰고, 진짜 자기의 모습을 다른 사람인양 한다. 하지만, 아무리 돌려치고 메쳐도 그게 그거고 그 사람은 그 사람이다.

그래서, 루이제 린저.

사실, 이렇게 말하고 보면 니나에게 열광하면서 정작 루이제 린저를 잘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모순이니, 말도 안된다느니 하는 말을 할 필요도 없는 거였다. 니나를 만나기로 해놓으면 루이제 린저가 따라 나온다. 소설과 현실을 혼란스럽게 섞어 놓은 속에서 니나로 분한 루이제 린저의 실체를 굳이 분리해 낼 필요가 없었던 거다.

그녀의 이력은 실로 화려하다. 화려하다기 보다는 나같은 범부가 말장난이나 삼고 있을 만한 것이 못 될 정도로 훌륭하며, 그래서 약간은 거북스럽기까지 하다. 1911년 뮌헨 대학에서 심리학과 교육학을 공부하였고 약 4년간 교편을 잡았으며 악단 지휘자와 결혼한 것까지는 겉보기로는 그냥 그렇고 그렇다. 그러나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 남편은 소련으로 도피하고, 루이제 린저는 전쟁과 부조리와 편견에 맞서며, 반 나치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그런 연유로 그녀는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옥살이를 하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녀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이슈들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84년에는 연방 대통령 후보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력만으로도 루이제 린저는, 정치라면 알지도 못하면서 치부터 떠는 나같은 무지한 사람과 쉽게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녀의 휴머니즘도 나치즘에 대항하여 싸운 수많은 사람들 누구나 가진 흔해 빠진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이따금 크고 작은 국제적 사고를 치지 않는 한 잊고 사는 우리를 대신해, 고의를 가장한 고립과 싸우는 북한에 여러 차례 방문하는 애정을 보였다.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입 대신 온몸으로 자유와 정의를 외쳤다. 그녀는 대부분이 생각도 하지 않으려는 것을 행동하는 여자였다.

그녀의 열정은 젊음에 힘 입어 한창 때 반짝하고 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치열한 열정이 “생”이라는 가깝고도 먼 화두를 던진 것이다. 내가 여기 저기 다른 이름으로 흩뿌려놓은 말들을 다 모아도 온전한 내가 보일까마는, 적어도 그녀는 스스로 생.의.한.가.운.데.를 쓰면서 생의 한가운데를 정통으로 뚫고 지나는 황홀경을 체험하지 않았을까. 그렇기 때문에, 니나를 18년간 짝사랑하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해버리고 마는 슈타인의 개인적인 일기들도 마치 생생한 역사적 기록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나처럼, 너처럼, 니나의 언니는 오랫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던 동생에게 잠깐 와서 있어달라는 편지를 받고, 죽도록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떠날 준비를 하는 니나와 며칠을 지낸다. 니나의 언니는 동생을 짝사랑해온 슈타인이 18년간 써온 일기와 동생과의 짧은 만남으로 니나가 살아온, 살아갈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알게 된다. 자신이 너무도 무감하게 언저리만 맴돌며 살아온 생을, 치열하게 살고 있는 니나로 인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비친 슈타인은 꼭 홈으로 냅따 뛰려다가 런다운 플레이에 걸려 3루와 홈 사이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야구선수 같다. 관객들은 야유한다. 야 임마, 상황을 보고 뛰어야지. 아니면 진즉에 뛰던가. 이성이 작용하기 힘든 곳에, 자칫하면 모든 것을 놓쳐버릴지 모르는 순간에, 논리와 이치를 불러들이려는 슈타인의 모습은 답답하다.

3루든, 끝인 듯 보이는 홈이든 하나의 그라운드 위에 그려진 다이아몬드 모양 발판에 지나지 않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라운드 한 가운데 놓인 우리에게는 그 사실이 중요하지 않거나 거기에 신경쓸 겨를이 없거나다. 생의 한가운데 던져진 우리는 그저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

반면에, 니나는 거침이 없다.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감정을 따르면서도 쉽게 감상에 빠지지 않는다. 두려움과 타협하지 않는다. 그녀야말로 사람을 빠져들게 하는 매력을 가졌다. 당연히 우리는 슈타인보다는 니나에게 매혹되기가 쉽고, 슈타인보다는 니나를 사랑한다. 니나는 우리가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혹은 잊고 있는 진정한 용기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슈타인에게 니나는 사랑하는 여자이기보다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존재이며, 그래서 영원한 동경의 대상일 뿐이다.

슈타인과 니나의 언니를 통해 니나를 보면서 나는 마치 내가 니나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지지만, 차라리 슈타인 쪽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래서 슈타인의 우유부단함과 끝끝내 현실의 구질구질함에 연연하는 것을 보고 있기가 쉽지 않다.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하는 니나에 대한 슈타인의 희망이 끝내 좌절될 때는 나도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루이제 린저는 자기의 열정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겪고 있지만, 쉬이 보려고 하지 않는 삶의 진면목을 조목조목 짚어준다. 나도 그랬고, 너도 그랬을, 앞으로도 그럴 수 밖에 없을 .생.의 절절함.

숲을 보려면 숲 밖을 나와야하지만,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그 속에 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태풍의 한가운데는 오히려 안전하다.

2003. 늦겨울
from www.goon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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