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메오 카스텔루치_ 신의 아들을 바라보는 얼굴의 컨셉에 대하여


 

2013년 3월 24일 일요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자생하는 비극> 연작들을 스크리닝으로 보고 나흘 만에 직접 신작 연극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저에게 마법의 표가 생긴 겁니다.


 

극장에 들어가자 모든 것이 새하얗게 세팅 돼있었습니다. 왼쪽부터 하얀 소파와 카펫, 하얀 테이블, 하얀 침대, 그리고 무대의 중앙에 대형 얼굴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의 얼굴입니다. 예수의 얼굴, 혹은 예수의 얼굴이 담긴 대형 포스터는 극 후반에 아주 중요한 역할이 있습니다.


 

정시가 되자마자 두 남자가 역시 새하얀 옷을 입은 노인을 부축해 나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버지와 아들이 등장하는 연극에서 역할이 없는 그들이 연극이 시작되자마자 아버지를 부축해 소파에 앉히기 위해 등장하는 것이 어색합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는 혼자는 걷기조차 힘든 노인이 연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다고 해서 뚜벅뚜벅 걸어 나온 채 시작하는 순간 극 중 노인으로 변신하는 것은 더욱 어색합니다.


 

아버지는 헤드폰을 쓴 채 우리나라의 ‘동물왕국’ 비슷한 프로그램을 보고, 뒤이어 등장하는 아들은 아버지의 안부를 물으며 출근 준비를 합니다. 전화 통화를 하며 메모를 하는 그는 바빠 보입니다. 하지만 출근하려는 찰나, 아버지는 똥을 쌉니다.


 

그는 익숙하게 아버지가 싼 똥을 치우고 아버지의 옷을 갈아입힙니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사과하고 아들은 계속해서 아비를 달랩니다. 나이가 들어 거동이 불편하고 배변 조절이 힘들어도 아버지가 느끼는 수치심까지 사라지진 않습니다. 어릴 땐 분명 자신의 똥기저귀를 갈아줬을 아버지이므로 아들은 직장에 늦어도, 전화가 와도, 아버지를 토닥이며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아줍니다.


 

아버지가 싼 똥은 새하얀 가구들 사이에 더욱 빛이 납니다. 똥이 묻은 자리가 너무 새하얘서 오히려 초콜릿 같은 느낌도 들지만 이내 온 극장에 퍼지는 냄새가 정신을 차리라고 말합니다. 이게 가짜였으며 좋겠지? 하지만 이건 정말로 냄새 나는 바로 그 똥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등받이가 검은 의자에도 아버지가 싼 똥이 묻어있습니다. 연출자의 의도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등받이에 묻은 똥의 색깔과 모양은 마치 뒤에 걸려 있는 예수의 얼굴과 색깔이나 모양이 비슷합니다. 아마 우연이겠죠. 저는 그냥 제가 보고 싶은 걸 본 걸 겁니다. 어쨌든 위치와 각도 때문에 그 검은 등받이에 묻은 똥의 색깔이나 모양이 꼭 인간의 얼굴 같이 느껴지는 걸 어쩔 수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연극은 후반에 극의 반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치워 놓으면 다시 싸고 닦아 놓으면 다시 쌉니다. 차분하게 아버지를 달래고 보살피던 아들은 어느 순간 폭발하죠. 아버지 대체 뭘 드신 거냐고요. 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흐느낍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새하얀 침대에마저 자신의 설사를 묻힙니다. 아마 아무리 착한 아들이라도 더 이상 평정심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아들은 무대 중앙에 걸린 예수 얼굴로 다가갑니다. 예수의 얼굴을 어루만집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의 절규가 느껴집니다.


 

아들은 무대 뒤로 사라지고 아버지는 여전히 똥 묻은 흰 침대에 걸터앉아 울고 있습니다. 이 때, 책가방을 매고 농구공을 든 남자아이가 등장합니다. 책가방에서 수류탄을 꺼내 예수의 얼굴에 던지기 시작하죠. 이후 계속해서 아이들이 나와 같은 행동을 합니다. 모든 아이가 다 나오고 나서 세어보니 아이들은 모두 12명이었습니다. 열 두 명의 아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분은 없을 듯 합니다.


 

실컷 수류탄을 던지고 나면 아이들은 다시 가방을 잠그고 다시 매고 왔던 길로 돌아갑니다. 그 후로는 예수의 얼굴 뒤로 불길과 사람의 그림자가 등장합니다. 예수의 얼굴이 일그러지거나 변형됐다가 원래 모습을 찾았다가를 반복합니다. 그리고 메시지가 뜹니다.


 

“You’re My Shepherd”


 

그러다 오른쪽 귀퉁이에 어떤 글자가 보일 듯 말듯 희미하게 떠오릅니다. 아직 극장 안이 어두울 때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극장 안이 밝아질수록 그 글자는 선명합니다. ‘not’입니다.


 

어두울 때는 “You’re My Shepherd”로 보이지만 밝아오면 “You’re not My Shepherd”가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레이디 가가의 공연은 그토록 반대하면서 이런 작품이 상영될 때는 왜 이렇게 고요한가를 반문하기도 하더군요. 명백한 신성모독 작품이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유럽에서 상영됐을 때는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여져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의도는 꼭 신이 있다, 없다와 같은 단순한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했던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인간이 어떤 고통의 순간에 직면해있을 때, 그것을 피할 수도, 누군가를 원망할 수도 없이 받아 들여야하지만 고통스러울 때, 또 수치스러우면서도 생을 부지해야 할 때, 자신이 믿는 신을 부르고 질문을 하는 것처럼 질문하는 것 같았습니다. 신에게도 질문하고, 관객에게도 질문하고, 배우들에게도 질문하고, 자기 자신에게도 질문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보면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에까지 이를 수도 있겠습니다. 그동안 믿어온 신은 과연 정말 있는 건지, 나를, 우리를 굽어 살피고 있는 건지, 모든 것이 신의 뜻인 건지, 그렇다면 왜 하필 이런 고통과 수치를 주는 건지 우리 인간은 그냥 받아들이기에는 버거우니까 묻고 또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품는 것만으로도 신성모독이 될 수 있다면 또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습니까? 추호의 의심도 없이, 당신은 신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모든 것을 그 어떤 고통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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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봄이라는 것은 계절의 이름이기보다는 여름이 오기 직전 명멸하는 대낮이거나 조명처럼 번쩍 벚꽃 흩날리는 밤과 같이 어느 한 때를 가리키는 말이 돼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여전히 보는 일을 가리키는 봄이란 건 변함 없어서 조금 다행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매년 3월, 봄이 아직 덜 왔건 바싹 왔건간에 우리나라에서는 '페스티벌 봄'이 열립니다. 그동안 봄이 왔다가 가버린 건 알았어도 이런 축제가 열린다는 사실은 몰랐다가 작년 연말 젊은 축제기획자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축제는 이름만 들어도 왠지 멋있다거나 재미있을 것 같다거나 하는 인상을 전달하면 절반은 성공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페스티벌 봄은 그렇게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처음으로 선택한 '봄'은 무려 여섯 시간의 대장정을 위한 체력을 기본 요건으로 하는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연극 [자생하는 비극] 연작의 스크리닝입니다. 페스티벌 봄이 정식 개막도 하기 전에 필름포럼에서 말 그대로 연극장면을 촬영해 재편집한 영상을 극장에 모여 보는 것이었습니다.

 

 

 

페스티벌 봄에서 해주는 설명은 이렇습니다. 그래서 진작 그리스비극 좀 열심히 읽어놓을 걸 하는 후회가 됩니다.

 

로메오 카스텔루치라는 이탈리아 태생의 아방가르드 연극연출가에 대해서는 이번 페스티벌 봄을 통해 처음 알게 됐지만 그래도 6시간이나 보고 나니 좀 아는 예술가 같이 느껴집니다. 처음에는 난감하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면도 있지만 볼수록 조금씩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지 점점 재미있어지고 영감을 주는 작품들이었습니다. 물론 갈수록 이야기의 배경과 내용이 좀 더 익숙하고 현대적으로 변주된 덕도 컸습니다.

 

총 340분 하고도 25초 분량의 [자생하는 비극] 연작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미지는 염소와 말, 가짜 피와 우유, 물과 빗물, 흰 옷과 까만 옷과 빨간 옷, 복면, 벌거벗은 남자와 여자, 남자와 여자의 성기입니다. 아방가르드 연극답게 이 연작 속에는 대사도 많지 않고 움직임도 많지 않습니다. 상징과 은유로 가득하고 각각의 장면들은 느리게 움직이거나 정지한 상태로 보여지기 때문에 회화에 가깝습니다. 아니면 초기 영화 형태인 움직이는 사진 같습니다. 숨을 죽이고 저 사람은 뭘하고 있나, 누군가, 왜 저러고 있나를 생각하게 만들죠. 그리스비극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면 염소와 말 등 앞에서 언급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소재에 대한 해석이 더욱 쉬웠을 겁니다. 하지만 모른다해도 마찬가집니다(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뭐든 한 가지로 해석하고자 하면 쉽고 그게 아니라면 복잡하고 모호하고 한 가지 결론으로 수렴되지 않는 다단한 생각이 머리를 떠도니까 말입니다.

 

겁에 질린 벌거벗은 남자, 하반신만이 천장에 매달린 소년 혹은 소녀, 나오지 않는 젖을 짜는 노파, 기저귀를 차고 월계관을 쓴 젊은 남자, 나폴레옹의 후예들로 보이는 군인들(파리 공연), 로마교황을 연상시키는 무기력한 노인과 교활한 사제들(로마 공연), 부족한 물과 그 때문에 늘 죽음을 면전에 맞는 기분으로 사는 부부(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만)(마르세유 공연) 등이 연작에 등장합니다.

 

페스티벌 봄에서 설명한 대로 로메오 카스텔루치는 [자생하는 비극]이라는 한 가지 주제를 시기와 공연 장소에 맞게 끊임 없이 변주합니다. 그 과정에서 전에 전혀 없던 서사가 강화되기도 하고 자연스레 대사가 늘어나기도 합니다. 한참을 보다보면 오히려 그렇게 관습적인 형태의 연극이 더욱 어색합니다. 저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말이 많아, 라는 생각이 저도 모르게 듭니다. 그 대화들은 어떻게 들으면 철학적이고 또 어떻게 들으면 전혀 무의미하기도 합니다.

 

연작의 후반으로 갈수록 대사들이 쏟아지기도 하고 배우들이 표정으로 연기를 하기도 하지만 초반에는 대사도 없고, 배경음악도 거의 없고, 배우들에겐 표정이나 제대로 된 얼굴도 없습니다. 얼굴이 있어도 계속해서 복면이 씌워지거나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표정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더라도 동그란 눈과 입매만 보입니다. 이 때의 표정은 일상적인 표정들이라기보다는 더욱 드라마틱하게 과장되고 극단적입니다. 과장된 표정 속에 담긴 감정은 정확히는 몰라도 왠지 알 것 같은 그런 감정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기쁘고 행복하기보다 두렵고 슬프고 괴롭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감정을 따라가기보다는 한 발짝 떨어져서 장면을 관찰하게 됩니다.

 

이것이 스크리닝 형태이기 때문에 관객인 우리와 연극이 행해진 바로 저 장소와는 이미 많은 시간차와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극은 그 자체로 또 한 번 더, 혹은 두 번 이상 장막을 칩니다. 많은 장면이 연극이 행해지는 공간과 실제 그 곳에 있는 관객 사이에도 한 단계를 더 만들어둡니다. 유리벽을 두거나 커튼을 치거나 뒤돌아서있거나 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 속에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밖에서 관찰하고 생각하게 둡니다.

 

나체나 흰 옷에 뿌리는 시뻘건 피도 처음에는 끔찍하다는 생각을 부르지만 볼수록 너무 새빨개서 가짜 피구나 하는 안도를 불러 극에 몰입하거나 감정이입할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형태의 연극이나 영화라면 그걸 보면서 아 피다, 아프겠다, 조금씩 감정이입을 하게 되겠지만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자생하는 비극] 속 핏물들은 가짜인 게 너무 분명해서 저건 누구의 피일까, 왜 저렇게 뿌려대는 걸까, 무엇을 의미할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졸 틈도 주지 않습니다; 6시간 내내 1초도 졸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굉장히 몰입해서, 제가 스스로 생각해도 참 의외일 정도로 재미있게 봤습니다.

 

그리스신화에서 각 동물이나 인물이나 피나 그 외의 것들이 대부분 상징하는 바가 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그걸 알고 나서 보면 또 어떨지 궁금합니다. 지금은 기왕에 못 본 거 못 봐도 많은 걸 스스로 상상하고 영감을 받는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더욱 흥미진진할 것을 압니다. 서사보다는 상징이 많다고 했던 생각도 바뀔 지 모릅니다. 알고 보면 그 모든 빈 공간과 빈 시간과 움직임 없음이 다 서사일지도 모르죠.

 

 

각 작품의 크레딧과 아주 적은 분량의 대사 혹은 소리들은 대부분 이탈리아언데, 대략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래도 한글자막이 없어서 비록 그 사실이 미리 공지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건 조금 아쉬웠습니다.

 

 

프로그램북과 리플렛입니다. 슬기와 민.이 디자인했습니다. 참으로 심플하고 모던합니다. 이 자체도 예쁘지만 각 작품들과 결합한 이미지들은 정말로 더 예쁩니다. 페스티벌 봄에서 다음에는 또 어떤 충격과 영감을 받게 될지 기대됩니다. 이번 주말에는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연극 [신의 아들을 바라보는 얼굴의 컨셉에 대하여]를 보러 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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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커를 봤습니다. 이 스토커stoker는 그 스토커stalker가 아니지만 알고 보면 그 스토커stalker입니다. 엄마 스토커, 열여덟생일을 맞은 딸 스토커, 열여덟생일날 죽은 아빠 대신 나타난 삼촌 스토커, 죽은 아빠도 스토커, 암튼 스토커가의 이야기이니까 스토커들이 가득 등장합니다. 이 중 두 명은 알고 보면 그 스토커인 진정한 스토커입니다. 그리고 최후의 승자는 진정한 사냥꾼이기도 합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스타일의 영화라고 느껴집니다. 스토커를 가지고 치는 말장난과 중의적 의미들, 배우들이 하나같이 풍기는 그로테스크함, 영화의 에로틱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피아노곡들, 스토커가의 저택의 구조와 조명과 가구들과 계단(계단은 딸 인디아 스토커와 엄마 이비 스토커의 중요한 발견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장소로 사용됩니다)과 문들(열린 문과 닫힌 문, 이쪽 문과 저쪽 문, 이쪽 문에 선 사람과 저쪽 문에 선 사람의 운명의 변화와 엇갈림), 모두 어느 하나 무심히 만들어지고 무심히 배치되고 무심히 사용되는 것이 없습니다.
인디아 스토커가 이비 스토커의 머리를 빗겨주던 장면이 아빠와 사냥하던 숲의 장면으로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넘어가던 장면도 확실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밖에도 영화에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 내가 놓쳤을 지도 모르는 모든 것이 다 섬세하고 철저하게 의도된 감독과 배우의 의도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좋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이제 박찬욱의 절정에 달한 이 스타일의 표현이, 가득찬 상징들이, 조금은 지겹게 느껴집니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입니다. 상징이 아무리 빼어난 스타일로 표현되었다해도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차렸을 때는 알아맞힌 것 이상의 감흥이 저 스스로에게 일어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히려 해석의 폭이 비교적 좁은 상징보다는 질문의 폭이 비교적 넓은 함의가 담긴 영화들을 저는 대체로 더 좋아해왔으니까요.
바로 어제 얘기했던 <케빈에 대하여>와 어쩌면 마...찬가지로 <스토커> 속 모녀의 관계 역시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형태의 일반적인 모성애에 기반을 두고 있진 않습니다. 이야기의 중심 역시 그러한 모성애는 아니고 영화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장치에 불과해보입니다. 물론 감독이나 각본가가 의도한 다른 의도를 제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가능성도 다분하지만, 그 모든 설정이 오로지 하나의 이야기와 하나의 스타일을 완성하기 위한 장치처럼 느껴집니다. 이는 박찬욱 감독의 명백한 의도이기도 할 듯 합니다. 감독의 스타일과 상징들의 총체라는 점에서 웨스 앤더슨의 <문라이즈 킹덤>도 비슷한 맥락에 두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니 박찬욱 감독의 스타일과 상징들이 이젠 조금 지겹다는 말을 하고 있는 저의 생각들이 전적으로 취향에 기반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하게 듭니다.

이런 의문도 듭니다. 남들이 못 보는 것까지 보고 못 듣는 소리도 듣는 훌륭한 자질을 갖춘 소녀는 왜 결국 자기 안의 폭력성과 악마를 인정하는 길에 있는 걸까 하는 겁니다. 뛰어난 사냥능력을 가진 자라면 아무래도 이 능력을 효과적으로, 효율적으로 보여주기에는 착한짓보다 나쁜짓이 더 적합하기 때문인 걸까요. 스타일상 착한짓보다 나쁜짓이 더욱 시각적으로 효과적으로, 효율적으로 표현 가능하기 때문인 걸까요. 그러니까 결론은 다시 한 번, 역시 스타일에 대한 취향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영화 후반부 이비 스토커의 자식에 대한 대사는 누구를 쳐다보고 누구를 향해 하는 말이냐에 따라 똑같은 말이 굉장히 섬뜩한 말이 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굉장히 통쾌한 말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시선을 통해 착시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렇게 디테일들을 떠올리며 곱씹을수록 박찬욱 감독이 얼마나 섬세하게 많은 것들을 영화에 심어두었는지가 느껴집니다. 특히 수미쌍관으로 배치해둔 장면돠 대사, 마지막에 흐르는 음악은 정말이지 섬뜩함을 더합니다. 자막으로 나오는 가사를 보며 원래 있던 음악이라면 다르게도 해석됐을지 모를 이 가사가 영화의 엔딩과 만나니 너무 끔찍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찾아보니 이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음악 같았습니다. 아아 끔찍해라! 암튼 이런 쪽으로는 도가 튼 것 같은 박찬욱 감독, 내가 본 그의 필모 중에는 유일하게 특유의 유머감각도 쪽 빼고 철저하게 살벌하게 만든 이 영화는 얘기할 거리들이 많지만 막 그렇게 좋아하기는 조금 버겁습니다. 늙었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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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고 임신한 친구들이 가끔 너희도 빨리 결혼하고 임신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 모르니까 이야기해도 잘 모르니까 그렇다는 겁니다. 인생의 속도가 비슷하면 만났을 때 공감대도 더욱 커지고 같이 나눌 얘기도 많다고 합니다. 분명 그렇긴 할 겁니다. 아마 여자의 결혼과 남자의 결혼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다를 거고, 엄마가 되어본 여자와 엄마가 되지 않았거나 되지 않을 여자가 또 다를 겁니다.

<케빈에 대하여>를 보고 가슴이 이렇게 철렁한 것은 남자건 여자건 마찬가지이겠지만, 이 영화 연출자가 여자라는 점, 그리고 아빠보다는 엄마에 초점이 맞춰져있다는 점, 그리고 관객인 나 역시 여자이고 잠재적인 엄마라는 점은 과연 이 영화를 보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친구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너도 빨리 결혼하고 임신해서 자기랑 같이 얘기하자고 했던 친구의 말이. 분명 지금 이 영화를 보는 것과 혹시라도 나중에 엄마가 된 후 이 영화를 보게 되는 것은 다른 일이겠지 싶습니다, 친구의 말대로라면. 적어도 친구의 말 속에는 너는 아직 경험해보지 않아서 경험해본 사람만큼은 잘 모를 거라는 뜻이 포함돼 있는 거니까요.

영화는 스페인 토마토축제 현장을 비추며 시작합니다. 시뻘건 으깬 토마토들 사이에 자유롭기 그지없어 보이는 에바가 그 틈에 있습니다. 이미 으깨어져 본래의 형체를 잃어버린 시뻘건 토마토들은 감독의 명백한 의도대로 마치 사방에 흐르는 피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에바가 만끽하는 명백한 자유가 명백하게 불길한 기운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다시 영화는 이미 모든 일이 일어난 후 엄마인 에바가 무기력하게 누워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에바의 집과 차를 누가 시뻘건 페인트로 어지럽게 칠해놓은 것에서 시작하고, 길 가다 난데없이 뺨이 시뻘게지도록 따귀를 맞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과거의 생기 넘치던 에바는 이제 누구보다 시든 파같은 몰골로 직장을 구하고 장을 보고 사람들의 시선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분명히 다정한 남편과 애교 넘치는 딸과 아들이 있었는데, 소파에도 혼자 누워있고 모습도 엉망이고 집과 차에 칠해진 페인트도 혼자 치우고 있고 그 누구도 곁에 없습니다. 그나마 에바에게 관심을 갖고 일도 도와주며 호의를 보여주던 직장동료마저 겨우 춤 한 번 거절당했다고 에바에게 참 나쁜 말을 속삭입니다. 모든 장면 하나하나가 극도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영화를 볼수록 불길해집니다. 이쯤되면 <케빈에 대하여>는 최고의 스릴러 영화입니다. 난데없이 에바와 프랭클린 사이에 생긴 아이는 보통의 아이와 좀 다릅니다. 엄마를 싫어하고 엄마한테만 못되게 굽니다. 함께 사는 남편도, 전문가인 의사도, 케빈은 사랑스러운 보통의 아이라고 말하지만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에바에게는 유독 사납게 굽니다.

모든 일이 일어난 후에 사람들이 에바만을 이토록 비난하고 심지어 저주하는 것을 보면, 사실은 케빈이 보통의 아이와 좀 다르게 된 것보다 에바가 보통의 엄마와 좀 달랐던 것이 먼저였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지도 모릅니다. 린 램지 감독은 실제로 "내 아이가 안 좋은 아이로 태어날지도 모른다는 근원적 두려움" 때문에 이 영화를 연출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감독은 케빈이 안 좋은 아이로 태어난 것은 그리고 더 안 좋은 아이로 자란 것은 보통의 엄마와 달랐던 에바 때문이 아닐까 의심하게 만듭니다.

넓은 세상을 자유롭게 유랑하던 에바에게 임신은 프랭클린에게처럼 전혀 기쁜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아기를 가졌을 때 기쁘기보다는 당황스러웠을 사람이 실제로도 적진 않겠지만 일단 낳기로 하면 대개는 모성애에 의해 자연스럽게 아기를 사랑하게 됩니다만, 에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세상에 나왔을 때 에바는 조금도 기쁘거나 반가워보이지 않았습니다. 육마의 과정마저 험난합니다. 에바도 모두가 당연하게 기대하듯 모성애 넘치는 엄마가 아니지만, 케빈도 여느 아기처럼 사랑스럽기만 한 아기가 아닙니다. 가끔 엄마와의 소통을 거부하고 엄마가 아끼는 것들만 골라 망쳐놓는 케빈의 눈빛과 마주칠 때는 섬뜩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케빈이 커갈수록, 그 섬뜩한 눈빛은 조금씩 나쁜 짓들로 구체화되어 나타납니다. 영화가 주는 긴장감이 극도에 달해가면서 실제로 사건도 더는 나쁠 수 없을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습니다. 모든 것이 드러났을 때, 에바가 왜 혼자 그 길고긴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고 있는지를 알게 됐을 때의 충격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 충격은 끔찍하게도, 만약 나에게 저런 일이 일어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그 일이 실제로 누군가에게는 일어났으니까요.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세상에 그 어떤 극악무도한 놈에게도 엄마는 있으니까요. 그 엄마는 어떤 마음일까요. 아이에게 다른 엄마들처럼 마음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사랑을 주지 못했던 엄마라면 또 어떤 마음일까요. 많은 사람이 그 아들의 잘못이 엄마탓이라고 비난하고 저주하고, 무엇보다 그 자신 스스로가 가장 자신을 비난하고 저주하는 주체라면 어떤 마음일까요. 그녀가 그 시간을 견뎌내는 것은 오로지 케빈에게 "왜 그랬냐"고, 너무나 묻기 어려웠고 대답을 듣기도 두려운 그 질문을 하기 위해서였을까요. 그저 수없이 많은 질문이 온 몸에 소름처럼 돋아나지만 차마 '나라면'으로 시작되는 대답을 마련할 수 없고 도저히 아무리 생각해도 대답할 수 없는 그 질문들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도, 다 보고 나서도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결국 에바는, 이제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케빈을 가장 끝까지 사랑해야 하는 유일한 사람이 됩니다. 드디어 눈을 제대로 맞추고 질문을 던졌을 때 한 번도 마음을 열어보이지 않았던 아들은 가장 솔직한 대답을 줍니다. "그 때는 아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정말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틸다 스윈튼과 이즈라 밀러의 연기에 감탄하면서도, 틸다 스윈튼은 에바로, 케빈의 엄마로, 이즈라 밀러는 케빈으로, 에바의 아들로 영원히 제 가슴에 박제되어 있을 것만 같습니다.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모 과장은 좀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누가 꺼냈다는 겁니다. 이상하다는 이유가, 대부분의 아기 엄마들이 핸드폰 메인화면에 자기 아이들을 넣어두는데, 그 여자과장은 자신의 셀카를 넣어놨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성적으로는 엄마는 무조건 아이들 사진을 핸드폰 메인에 넣어놔야 하는 거냐고, 아빠가 아이들 사진을 안 넣어놨어도 그렇게 말했겠냐고, 엄마가 되면 자기 자신은 없어지는 거냐고 발끈했지만 그와 동시에 나라면 과연 그랬을까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 단순한 일화가, 지금에 와서 무척 섬뜩하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겨우 핸드폰 메인화면에 아이들을 넣어두는 사람이냐 아니냐를 갖고도 그녀의 모성애를 판단하고 또 많은 경우 이상하다고 생각하니까요.

감히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던 '모성애'란 단어에 이토록 진지하고 무서운 질문을 던진 원작의 작가 라이오넬 슈라이버, 린 램지와 틸다 스윈튼, 그리고 이즈라 밀러가 정말 굉장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무거운 질문은 여전히 질문으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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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상 역시 꽤나 오래됐습니다. 이제 더이상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이 없고 또 고향집에는 현재 제가 살고 있지 않기에 책상이지만 책장으로서의 역할이 더 커져버렸습니다.

 

보이지 않는 책장 위에는 유치원 졸업사진과 고등학교 방송제 때 선물받았던 액자가 놓여있습니다.

 

가장 위칸에 꽂힌 책들은 한국소설들입니다. 그대의 차가운 손(한강), 녹천에는 똥이 많다(이청동),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풀밭에서(조세희), 풍금이 있던 자리(신경숙), 홀림 / 궁전의 새 / 인간적이다(성석제), 지구를 색칠하는 페인트공(양귀자), 원미동사람들(양귀자), 오빠가 돌아왔다(김영하),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하성란), 투견(김숨), 여관(한차현), 위험한 독서(김경욱), 지문사냥꾼(이적), 유맹(손창섭), 미칠 수 있겠니(김인숙),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최인호), 지구영웅전설 /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 카스테라 / 핑퐁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박민규), 꾿빠이, 이상 / 밤은 노래한다 / 세계의 끝 여자친구(김연수), 남한산성 / 공무도하(김훈)이 있습니다.

 

그 아래칸에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몇 권 있습니다. 동물 농장(조지 오웰), 다섯째 아이(도리스 레싱), 삶의 한가운데(루이제 린저, 롤리타(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모래의 여자(아베 코보), 1984(조지 오웰), 위대한 개츠비(스콧 피츠제럴드),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인간실격(다자이 오사무), 인생의 베일(서머싯 몸), 인어의 노래(발 맥더미드), 네번째 손(존 어빙), 대기 불안정과 그 밖의 슬픈 기상 현상들(리브카 갈첸), 천 명의 백인 신부(짐 퍼거슨), 스틸 라이프(루이즈 페니), 9,990원(프레데리크 베그베데), 더로드(코맥 매카시), 휘트먼의 천국(마이클 커닝햄), 가면의 생(에밀 아자르), 작은 것들의 신(아룬다티 로이), 군인은 축음기를 어떻게 수리하는가(사샤 스타니시치), 신도 버린 사람들(나렌드라 자다브), 이청준 문학상 수상 작품집(이청준 등저), 청동기(장용학), 김승옥(서울 1964년 겨울), 이상문학 전집_수필(이상/김윤식 편저), 김수영 전집_산문(김수영)이 있습니다. 김수영 전집은 한자가 너무 많아서 읽기가 힘들어요 ㅠㅠ

 

또 그 아래칸에는 열하일기1~3(박지원),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 / 오름 오르다 / 프루스트와 지드에서의 사랑이라는 환상 /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 남해 금산 / 그 여름의 끝 /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 아, 입이 없는 것들 /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이성복), 유혹하는 글쓰기(스티븐 킹),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3(마르셀 프루스트), 기형도 전집 / 기형도 산문집_ 짧은 여행의 기록 /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입속의 검은 잎(기형도), 행복의 건축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일의 기쁨과 슬픔 / 동물원에 가기 / 우리는 사랑일까 / 불안 / 여행의 기술(양장) / 여행의 기술(알랭 드 보통),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 에라스무스, 사랑에 빠지다(페터 회) / book+ing 책과 만나다(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가 꽂혀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아래칸에는 월간뱀파이어1 '2' / 2 '너와 나의 20세기' / 4 'mp3' / 5 '지혜롭고아름다운사람을포기하는법' / 6 '빛으로만들어진도시'(모임 별), 불안하니까 사람이다(김현철), 아뿔싸, 난 성공하고 말았다(김어준, 이석원, 신경민 등저), 건투를 빈다(김어준), EBS 다큐멘터리 동과서_ 서로 다른 생각의 기원(EBS 동과서 제작팀, 김명진 공저), 지식e1~4(EBS 지식채널e), 다윈의 식탁(장대익), 민주주의, 약자들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리처드 스위프트), 세계화를 둘러싼 불편한 진실(카를-알브레히트 이멜), 탐욕의 종말(폴 메이슨), 사다리 걷어차기 / 나쁜 사마리아인들(장하준), 미디어 모노폴리(벤 H. 바그디키언),  만들어진 신(리처드 도킨스), 여적(경향신문사 편집부),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드니 로베르, 베로니카 자라쇼비치),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홍세화), 당신들의 대한민국(박노자), 뉴레프트리뷰(알랭 바디우 등저), 인사이트 지식사전(조선경제i 연결지성센터), 시뮬라시옹(장 보드리야르), 논리-철학 논고(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더 건방진 우리말 달인 / 건방진 우리말 달인(엄민용)이 꽂혀 있습니다.

 

역시 아직 못 다 읽은 책이 좀 있지만 쳐다만 봐도 배가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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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2 0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karma 2015-05-05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월간뱀파이어는 저에게도 소중합니다 :) 의외로 팔라고 하시는 분들이 많네요- 월간뱀파이어 몇 호를 말씀하시는 건지 알려주시면 혹시라도 제가 구해보고 알려드릴게요-!

Withmithra 2014-12-23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이 비밀댓글이라 혹시라도 글 쓰신 분이 남기신거면 파실 수 있으시면 문자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꼭이요ㅠㅠ

2014-12-23 0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05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karma 2015-05-05 00:0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월간뱀파이어는 저에게도 소중합니다. byul@byul.org로 직접 문의해보시면 아마 조태상님이 친절하게 안내해주실 거예요-! :) 어려우시면 제게 말씀주세요- 구할 수 있을지 알아봐 드릴 수 있습니다- :)

2015-05-05 0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karma 2015-05-05 00:23   좋아요 0 | URL
꼭 구하시게 되길 바라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