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봄이라는 것은 계절의 이름이기보다는 여름이 오기 직전 명멸하는 대낮이거나 조명처럼 번쩍 벚꽃 흩날리는 밤과 같이 어느 한 때를 가리키는 말이 돼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여전히 보는 일을 가리키는 봄이란 건 변함 없어서 조금 다행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매년 3월, 봄이 아직 덜 왔건 바싹 왔건간에 우리나라에서는 '페스티벌 봄'이 열립니다. 그동안 봄이 왔다가 가버린 건 알았어도 이런 축제가 열린다는 사실은 몰랐다가 작년 연말 젊은 축제기획자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축제는 이름만 들어도 왠지 멋있다거나 재미있을 것 같다거나 하는 인상을 전달하면 절반은 성공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페스티벌 봄은 그렇게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처음으로 선택한 '봄'은 무려 여섯 시간의 대장정을 위한 체력을 기본 요건으로 하는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연극 [자생하는 비극] 연작의 스크리닝입니다. 페스티벌 봄이 정식 개막도 하기 전에 필름포럼에서 말 그대로 연극장면을 촬영해 재편집한 영상을 극장에 모여 보는 것이었습니다.

 

 

 

페스티벌 봄에서 해주는 설명은 이렇습니다. 그래서 진작 그리스비극 좀 열심히 읽어놓을 걸 하는 후회가 됩니다.

 

로메오 카스텔루치라는 이탈리아 태생의 아방가르드 연극연출가에 대해서는 이번 페스티벌 봄을 통해 처음 알게 됐지만 그래도 6시간이나 보고 나니 좀 아는 예술가 같이 느껴집니다. 처음에는 난감하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면도 있지만 볼수록 조금씩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지 점점 재미있어지고 영감을 주는 작품들이었습니다. 물론 갈수록 이야기의 배경과 내용이 좀 더 익숙하고 현대적으로 변주된 덕도 컸습니다.

 

총 340분 하고도 25초 분량의 [자생하는 비극] 연작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미지는 염소와 말, 가짜 피와 우유, 물과 빗물, 흰 옷과 까만 옷과 빨간 옷, 복면, 벌거벗은 남자와 여자, 남자와 여자의 성기입니다. 아방가르드 연극답게 이 연작 속에는 대사도 많지 않고 움직임도 많지 않습니다. 상징과 은유로 가득하고 각각의 장면들은 느리게 움직이거나 정지한 상태로 보여지기 때문에 회화에 가깝습니다. 아니면 초기 영화 형태인 움직이는 사진 같습니다. 숨을 죽이고 저 사람은 뭘하고 있나, 누군가, 왜 저러고 있나를 생각하게 만들죠. 그리스비극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면 염소와 말 등 앞에서 언급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소재에 대한 해석이 더욱 쉬웠을 겁니다. 하지만 모른다해도 마찬가집니다(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뭐든 한 가지로 해석하고자 하면 쉽고 그게 아니라면 복잡하고 모호하고 한 가지 결론으로 수렴되지 않는 다단한 생각이 머리를 떠도니까 말입니다.

 

겁에 질린 벌거벗은 남자, 하반신만이 천장에 매달린 소년 혹은 소녀, 나오지 않는 젖을 짜는 노파, 기저귀를 차고 월계관을 쓴 젊은 남자, 나폴레옹의 후예들로 보이는 군인들(파리 공연), 로마교황을 연상시키는 무기력한 노인과 교활한 사제들(로마 공연), 부족한 물과 그 때문에 늘 죽음을 면전에 맞는 기분으로 사는 부부(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만)(마르세유 공연) 등이 연작에 등장합니다.

 

페스티벌 봄에서 설명한 대로 로메오 카스텔루치는 [자생하는 비극]이라는 한 가지 주제를 시기와 공연 장소에 맞게 끊임 없이 변주합니다. 그 과정에서 전에 전혀 없던 서사가 강화되기도 하고 자연스레 대사가 늘어나기도 합니다. 한참을 보다보면 오히려 그렇게 관습적인 형태의 연극이 더욱 어색합니다. 저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말이 많아, 라는 생각이 저도 모르게 듭니다. 그 대화들은 어떻게 들으면 철학적이고 또 어떻게 들으면 전혀 무의미하기도 합니다.

 

연작의 후반으로 갈수록 대사들이 쏟아지기도 하고 배우들이 표정으로 연기를 하기도 하지만 초반에는 대사도 없고, 배경음악도 거의 없고, 배우들에겐 표정이나 제대로 된 얼굴도 없습니다. 얼굴이 있어도 계속해서 복면이 씌워지거나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표정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더라도 동그란 눈과 입매만 보입니다. 이 때의 표정은 일상적인 표정들이라기보다는 더욱 드라마틱하게 과장되고 극단적입니다. 과장된 표정 속에 담긴 감정은 정확히는 몰라도 왠지 알 것 같은 그런 감정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기쁘고 행복하기보다 두렵고 슬프고 괴롭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감정을 따라가기보다는 한 발짝 떨어져서 장면을 관찰하게 됩니다.

 

이것이 스크리닝 형태이기 때문에 관객인 우리와 연극이 행해진 바로 저 장소와는 이미 많은 시간차와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극은 그 자체로 또 한 번 더, 혹은 두 번 이상 장막을 칩니다. 많은 장면이 연극이 행해지는 공간과 실제 그 곳에 있는 관객 사이에도 한 단계를 더 만들어둡니다. 유리벽을 두거나 커튼을 치거나 뒤돌아서있거나 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 속에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밖에서 관찰하고 생각하게 둡니다.

 

나체나 흰 옷에 뿌리는 시뻘건 피도 처음에는 끔찍하다는 생각을 부르지만 볼수록 너무 새빨개서 가짜 피구나 하는 안도를 불러 극에 몰입하거나 감정이입할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형태의 연극이나 영화라면 그걸 보면서 아 피다, 아프겠다, 조금씩 감정이입을 하게 되겠지만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자생하는 비극] 속 핏물들은 가짜인 게 너무 분명해서 저건 누구의 피일까, 왜 저렇게 뿌려대는 걸까, 무엇을 의미할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졸 틈도 주지 않습니다; 6시간 내내 1초도 졸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굉장히 몰입해서, 제가 스스로 생각해도 참 의외일 정도로 재미있게 봤습니다.

 

그리스신화에서 각 동물이나 인물이나 피나 그 외의 것들이 대부분 상징하는 바가 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그걸 알고 나서 보면 또 어떨지 궁금합니다. 지금은 기왕에 못 본 거 못 봐도 많은 걸 스스로 상상하고 영감을 받는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더욱 흥미진진할 것을 압니다. 서사보다는 상징이 많다고 했던 생각도 바뀔 지 모릅니다. 알고 보면 그 모든 빈 공간과 빈 시간과 움직임 없음이 다 서사일지도 모르죠.

 

 

각 작품의 크레딧과 아주 적은 분량의 대사 혹은 소리들은 대부분 이탈리아언데, 대략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래도 한글자막이 없어서 비록 그 사실이 미리 공지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건 조금 아쉬웠습니다.

 

 

프로그램북과 리플렛입니다. 슬기와 민.이 디자인했습니다. 참으로 심플하고 모던합니다. 이 자체도 예쁘지만 각 작품들과 결합한 이미지들은 정말로 더 예쁩니다. 페스티벌 봄에서 다음에는 또 어떤 충격과 영감을 받게 될지 기대됩니다. 이번 주말에는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연극 [신의 아들을 바라보는 얼굴의 컨셉에 대하여]를 보러 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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