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커를 봤습니다. 이 스토커stoker는 그 스토커stalker가 아니지만 알고 보면 그 스토커stalker입니다. 엄마 스토커, 열여덟생일을 맞은 딸 스토커, 열여덟생일날 죽은 아빠 대신 나타난 삼촌 스토커, 죽은 아빠도 스토커, 암튼 스토커가의 이야기이니까 스토커들이 가득 등장합니다. 이 중 두 명은 알고 보면 그 스토커인 진정한 스토커입니다. 그리고 최후의 승자는 진정한 사냥꾼이기도 합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스타일의 영화라고 느껴집니다. 스토커를 가지고 치는 말장난과 중의적 의미들, 배우들이 하나같이 풍기는 그로테스크함, 영화의 에로틱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피아노곡들, 스토커가의 저택의 구조와 조명과 가구들과 계단(계단은 딸 인디아 스토커와 엄마 이비 스토커의 중요한 발견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장소로 사용됩니다)과 문들(열린 문과 닫힌 문, 이쪽 문과 저쪽 문, 이쪽 문에 선 사람과 저쪽 문에 선 사람의 운명의 변화와 엇갈림), 모두 어느 하나 무심히 만들어지고 무심히 배치되고 무심히 사용되는 것이 없습니다.
인디아 스토커가 이비 스토커의 머리를 빗겨주던 장면이 아빠와 사냥하던 숲의 장면으로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넘어가던 장면도 확실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밖에도 영화에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 내가 놓쳤을 지도 모르는 모든 것이 다 섬세하고 철저하게 의도된 감독과 배우의 의도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좋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이제 박찬욱의 절정에 달한 이 스타일의 표현이, 가득찬 상징들이, 조금은 지겹게 느껴집니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입니다. 상징이 아무리 빼어난 스타일로 표현되었다해도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차렸을 때는 알아맞힌 것 이상의 감흥이 저 스스로에게 일어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히려 해석의 폭이 비교적 좁은 상징보다는 질문의 폭이 비교적 넓은 함의가 담긴 영화들을 저는 대체로 더 좋아해왔으니까요.
바로 어제 얘기했던 <케빈에 대하여>와 어쩌면 마...찬가지로 <스토커> 속 모녀의 관계 역시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형태의 일반적인 모성애에 기반을 두고 있진 않습니다. 이야기의 중심 역시 그러한 모성애는 아니고 영화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장치에 불과해보입니다. 물론 감독이나 각본가가 의도한 다른 의도를 제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가능성도 다분하지만, 그 모든 설정이 오로지 하나의 이야기와 하나의 스타일을 완성하기 위한 장치처럼 느껴집니다. 이는 박찬욱 감독의 명백한 의도이기도 할 듯 합니다. 감독의 스타일과 상징들의 총체라는 점에서 웨스 앤더슨의 <문라이즈 킹덤>도 비슷한 맥락에 두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니 박찬욱 감독의 스타일과 상징들이 이젠 조금 지겹다는 말을 하고 있는 저의 생각들이 전적으로 취향에 기반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하게 듭니다.
이런 의문도 듭니다. 남들이 못 보는 것까지 보고 못 듣는 소리도 듣는 훌륭한 자질을 갖춘 소녀는 왜 결국 자기 안의 폭력성과 악마를 인정하는 길에 있는 걸까 하는 겁니다. 뛰어난 사냥능력을 가진 자라면 아무래도 이 능력을 효과적으로, 효율적으로 보여주기에는 착한짓보다 나쁜짓이 더 적합하기 때문인 걸까요. 스타일상 착한짓보다 나쁜짓이 더욱 시각적으로 효과적으로, 효율적으로 표현 가능하기 때문인 걸까요. 그러니까 결론은 다시 한 번, 역시 스타일에 대한 취향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영화 후반부 이비 스토커의 자식에 대한 대사는 누구를 쳐다보고 누구를 향해 하는 말이냐에 따라 똑같은 말이 굉장히 섬뜩한 말이 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굉장히 통쾌한 말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시선을 통해 착시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렇게 디테일들을 떠올리며 곱씹을수록 박찬욱 감독이 얼마나 섬세하게 많은 것들을 영화에 심어두었는지가 느껴집니다. 특히 수미쌍관으로 배치해둔 장면돠 대사, 마지막에 흐르는 음악은 정말이지 섬뜩함을 더합니다. 자막으로 나오는 가사를 보며 원래 있던 음악이라면 다르게도 해석됐을지 모를 이 가사가 영화의 엔딩과 만나니 너무 끔찍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찾아보니 이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음악 같았습니다. 아아 끔찍해라! 암튼 이런 쪽으로는 도가 튼 것 같은 박찬욱 감독, 내가 본 그의 필모 중에는 유일하게 특유의 유머감각도 쪽 빼고 철저하게 살벌하게 만든 이 영화는 얘기할 거리들이 많지만 막 그렇게 좋아하기는 조금 버겁습니다. 늙었나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