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한 집엔 창고처럼 짐만 넣어놓고 오랜만에 왔더니, 버스에서 내려 집을 찾아갈 때 지도앱이 필요했다. 여행지에서 숙소 찾아가듯 지도 들고 캐리어 들고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이번에는 현관 비번이 생각나지 않았다. 부동산 담당자가 보내준 예전 문자를 찾아냈지만 비번 앞뒤로 뭘 더 눌러야만 열리는 것 같다는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를 뿐 뭘 눌러도 현관이 열리지 않았다. 결국 이사한 날 도와준 이에게 우리집 현관을 어떻게 여는지 물어봐야했다.

소설창작수업을 통해 단편을 썼고 여행 가서 퇴고를 마친 소설이 담긴 문집이 나왔다. 이렇게 사람이 여럿이 모이는 자리는 오랜만이다. 대구 있는 동안에 한 주된 발화는 빠지지 않고 간 크로스핏 수업에서 옹알이 하듯 뱉어낸 신음소리와 퇴근한 엄마와의 일상적인 대화들-엄마는 자꾸 뭘 먹으라고 하고 나는 엄마 때문에 다이어트를 못한다고 원망하는 루틴-이 주였다. 내가 이야기하는 법을 까먹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요즘 유행하는 듯한 자몽 섞은 소주를 맛봄으로써 나도 그거 먹어보기는 했는데 역시 별로더라고 말할 기회를 획득한 밤이었다.

엄마에겐 내가 쓴 소설을 보여줄 수 없을 것 같다. 선생님의 아버지는 선생님이 쓴 소설을 보고 우셨다고 한다.

내일은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부케를 한 번 더 받는다. 뭐, 내일의 부케는 내일의 내가 받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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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두류공원을 걸었다. 신기하게도 구월이 되자마자 바람의 온도가 바뀌었다. 우리는 비록 현실의 팍팍함을 이야기했지만 구월의 바람이 불고 아이들은 뛰놀고, 갑자기 모든 게 다 별일 아니게 느껴졌다. 별일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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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일기

평소 최고가 될 것이 아니라면 시작도 하지말자,와 같은 의지 돋는 결심을 하는 편이 아니라서 장미란이 될 것도 아닌데(오히려 모든 꽃이 장미꽃일 수는 없으며 꽃 중의 꽃이라 불리는 장미가 아니라도 꽃은 꽃마다 각기 다른 매력과 향기가 있다는 선생님 말씀을 받들고 있다) 내가 왜 바벨을 발목에서 무릎으로, 무릎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다시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리는 동작을 다섯바퀴나 반복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오늘의 크로스핏을 마쳤다.

장미란 선수가 지금껏 한 것은 단순한 힘의 과시가 아니라 리본 대신 역기 들고 하는 리듬체조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가는 길엔 분명 십분 걸리는 이 길이 오는 길엔 항상 이십분씩 걸리는 것은 갈땐 걸어가지만 올땐 기어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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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재는재로 > 서평단 모집중

또다른 생명을 돌보며 슬픔을 견디는 과정이 궁금하다. 난 아직 한번도 나 이외의 다른 생명을 돌보아 본 경험이 없다. 날이 갈수록 그것, 슬픔을 견디는 것에 취약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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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8-21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르마님, 서평단 신청 스크랩을 잘못 올렸습니다. 서평단 공지사항을 ‘복사하기 붙여넣기’ 기능으로 카르마님의 블로그에 옮겨야 합니다. 그리고 이 옮긴 블로그 주소와 읽고 싶은 이유를 민음사 공식 블로그 댓글에 달면 합니다. 민음사 블로그는 ‘알라딘 서재’ 화면 왼쪽 하단에 있습니다.

karma 2015-08-21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친절한 사이러스님! 고맙습니다 :)
 

백수가 된지 두달 이십일이 지났다.

어젯밤엔 조금 일찍 자보려고 했다. 마침 크로스핏을 등록하고 맛보기지만 운동을 시작한 첫날이어서 놀란 근육들이 잠을 보챘다. 하지만 눕자마자 내 두뇌는 잡생각을 꺼냈고, 한 번 시작된 잡념은 오랜 세월 단련해온대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억지로 잠자기를 포기하고(백수만의 특권이다) 서재(엄마가 이사한 후 같이 살지도 않으면서 엄마집의 방 한 칸은 내 책과 음반들로만 채워넣고 내 맘대로 내 서재)로 갔다. 책은 많지만 그 중엔 읽지 않은 책도 많아 잠시 책장을 남의 책장인 양 구경하다 [#한밤중에잠깨어]를 발견했다.

[한밤중에 잠깨어]는 정약용이 유배시절 쓴 한시들을 한학자 정민이 옮겨쓰고, 한자 그대로 뜻풀이하고, 그걸 다시 에세이식으로 풀어쓴 책이다.

사두고 읽지 않다가 마침 한밤중에 잠깨어 그 책이 눈에 들어와서 읽기 시작했다. 정약용의 한시들에 대한 기대도 기대지만, 한자까막눈이라 무엇보다 정민 작가의 한시재해석에 기대가 컸다.

앞에 실린 열 편의 시를 읽었는데 이게 정약용이 쓴 것인가 의심될 정도로 칭얼칭얼 찡찡인 거다. 유배되어 간 낯선 곳에서 한밤중에 쓴 글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다시 봐도 칭얼칭얼 찡찡.

그 중 한 편 맛보자면 이렇다.

나를 비웃다
뱀 비늘과 매미 날개

초초한 옷차람이 결국 너를 속여서
십 년을 내달려도 피곤함뿐이로다.
만물 모두 안다면서 어리석어 답 못 하고
일천 사람 이름 알아 비방이 따라오네.
고운 얼굴 박명탄 말 그대는 못 보았나
예로부터 백안시는 친지에게 달린 것을.
뱀 비늘과 매미 날개 끝내 어이 믿겠는가
우습구나 내 인생 간데없는 바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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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 나라 일 하다며 분골쇄신 애를 썼지만 남은 것은 전 피곤뿐이다. 저 혼자 똑똑한 척은 다 해놓고, 막상 제 처지 하나 감당하지 못했다. 명성은 늘 비방을 달고 다녔다. 미인박명이라더니 꼭 날 두고 한 말이었다. 가깝던 벗들이 내게 먼저 등을 돌린 것이 가장 뼈아프다. 나는 그들에게 그런 존재일 뿐이었구나. 고작 금방 벗어버릴 뱀 허물과, 얼마 못 가 바스러질 매미 날개 같은 재주를 믿고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였구나. 바보 같은 놈!

`나를 비웃다`라는 제목 아래 쓴 열 편의 한시에 정민 작가가 핵심 단어를 뽑아 직접 부제를 붙인 것 같은데, 순서대로 나열해보면 이렇다.

진창에 갇힌 물고기
뱀 비늘과 매미 날개
살 맞은 새
고꾸라진 용
바다를 못 만난 큰 물고기
술이나 마시자(이 대목이 가장 인간적이었다!)
꿈 깨니(술 마신 후부터는 다소 진정되는 듯하다)
장자의 봄꿈
낡은 책 일천 권
십 년 전 꿈

억울해하고 원망하고 그 와중에 겸손을 잃고(스스로를 주로 어떻게 비유했는지를 보면 숨기려 해도 드러난다) 자책하고 자포자기하면서도 스스로를 변호하는 모습이 멋있진 않아도 친근했다.

하지만 그뿐 그밤에 마음에 상처를 입고 외로운 남자의 일기를 계속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진 않아 책을 덮고 다시 자리에 누웠더니 금세 잠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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