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만의 종이접기 열풍 때문에 접어뒀던 종이접기의 기억이 떠올랐다.

지난 7월 캄폿에서였다. 이미 며칠을 거의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올리스플레이스에서 빈둥대고 있었다.

하루는 주인아저씨 쥘이 아파 오전근무조였던 P가 종일 바 겸 리셉션을 지키고 있었다. 야밤형 인간인 나는 보지 못했지만 여러 목격자에 의하면 아침 7시에 근무를 시작한 P는 아침 7시부터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평소 같으면 오후 3시 퇴근인데 그날은 아픈 쥘 대신 9시가 넘도록 바와 리셉션을 지켰다.

올리스플레이스의 장기투숙객 중 하나였던 M은 술과 담배를 즐기지 않으며 매일 아침 요가를 하러가던 아침형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늦도록 방에 들어가지 않고 바 주변에 남아있었다.

늘 가장 늦게 방으로 돌아가는 사람 중 하나였던 나는 그날따라 모기가 너무 물어서 P, M과 놀다가 먼저 내 방갈로로 들어갔다. 이런 일은 10일간의 투숙 중 딱 하룻밤만 있었던 드문 일이다.

35도가 넘는 기온에 아침 7시부터 대략 14시간 이상을 꾸준히 맥주를 마신 P는 아무래도 관성 때문인지 한잔 더 하고 싶었는데 일터가 아닌 곳에서 마시고 싶었다고 한다.

마침 그날따라 늦게까지 방에 들어가지 않고 남아있던 M에게 바로 옆 게스트하우스에 한 잔 하러 가지 않겠냐고 권했고, 당시 비자 만기를 일주일도 남겨놓지 않고 그 이후에 어떻게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M은 `와이낫?`하며 P를 따라갔다.

그리고 잠시 모기를 피하고 나자 금세 맥주생각이 났던 나도, 올리스플레이스 바가 닫힌 걸 보고 옆 게스트하우스로 갔다.

그곳에는 아침부터 취했던 P와 술이 약해 사이더 한잔으로 기분이 한껏 좋아진 M이 있었다. 우리는 바에 앉아 바텐더 T와 함께 적당히 술을 마셨고, 취한 P는 한 시간 정도 후에 아내와 딸들이 있는 집으로 먼저 돌아갔다.

이때 상의를 탈의한 한 청년이 와서 내게 말을 걸었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친구들과 여행 중인 남아공 출신의 E는 여행 중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고 너무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10대 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책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였다.

덕분에 E와는 인투더와일드며 여러 이야기를 조금더 나눴다. 그러다 문득 내 왼쪽에 앉았던 E는 내 오른쪽에 앉아있던 M에게 왜 술을 더 마시지 않느냐며 내기를 제안했다. M이 이기면 E가 술을 사고, 지면 M이 E에게 술을 사야했다.

M은 자신이 지게 되면 술을 살 돈도 없을 뿐더러 최근에는 어떤 내기를 해도 지기만 해서 싫다고 극구 거절했지만 E는 끈질기게 M을 설득했다.

그것은 똑같은 컵 3개와 빳빳한 지폐가 필요한 내기였는데 컵 두개 위에 종이를 접어올려 컵 하나가 떨어지지 않게 얹으면 이기는 게임이었다. 내기 당사자인 M은 돈이 없었고 바텐더인 T에게는 컵은 있었지만 빳빳한 지폐는 없어 나는 내 지갑에서 가장 빳빳한 1달러를 내놓았다.

내기는 시작되고 M은 새지폐가 너덜너덜해지도록 여러 번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M은 기분 좋게 취한 상태였다). 이때 지나가던, 이름을 모르는 술취한 호주남자가 큰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말했는데 나는 거기에서 힌트를 얻어 정답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는 여자였다.

M이 포기를 선언한 후 나는 시도했고 지폐 위에 컵 얹기에 한번에 성공하고 말았다. 절망하는 M과 실망하는 E에게 나는 나도 모르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E는 웃지도 않고 무엇이 미안하냐고 했는데 나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몹시 미안함을 느꼈다.

내기가 끝난 후 E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M은 나를 사이에 두고 격렬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마치 서양 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이 봐왔던, 한 남녀가 서로에게 반한 순간의 장면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첫눈에 반하면 노골적으로 주변인과 배경을 다 지우고 서로의 눈만 바라보며 격렬히 대화를 나누는 그런 문화권에서 자라지 않아 그러한 경험은 또 난생 처음이었으므로 어찌해야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지만 M과 E가 대화 중간 스무번 중 한 번 정도는 나를 일별하였으므로 도무지 일어날 타이밍을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냥 앉아있자니 백년 동안의 고독이라는 게 이런 걸까 알 것만 같았다. 어쨌든 늦은 시각이었으므로 결국 둘의 대화는 끝이 났고, 바로 옆에 있는 우리 숙소로 돌아오면서 키가 179cm나 되는 M은 나에게 팔짱을 끼고 E가 참 스윗하다고 말했다.

그날은 만월이었고 둘은 며칠 후 토끼섬으로 함께 여행을 갔다.

덕분에 나는 맥주 한 잔 하고 싶은데 돈이 없는 날 활용할 수 있는 괜찮은 내기 하나를 알게 됐다. E는 M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하면서도 제한 시간은 두지 않았었는데 나는 이겨서 술을 얻어먹는 게 목적이므로 제한 시간을 둘 예정이다.

남들 자는 시간에 잠들지 못하면 이런 글을 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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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방에는 티비가 없소. 특정영상물을 보고 싶을 땐 B영화제 ㅇ모팀장님에게 칭얼거리거나 곰티비에서 조달하오. 곰티비에서는 최근 2개의 광고가 주로 번갈아 나오는데 하나는 탕웨이와 김희애가 함께 등장하는 SK2 광고요, 하나는 아마도 전동칫솔 광고올시다.

이 두 개 광고는 항상 짝을 지어 나오는데, 둘 다 안티에이징을 지향한다는 점이 같습디다. 사실 두번째 광고는 브랜드와 제품명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음을 고백하오. 전동칫솔 광고인지 치약 광고인지조차 기억이 희미한데, `구강도 안티에이징이 필요하다`는 광고 초반 카피를 들을 때마다 항상 초심으로 돌아가서 늘 같은 강도로 화가 나는 것을 어쩔 수 없기 때문이오.

화가 날 때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는 반문도 늘 같소. `신체 각 부위 안티에이징도 모자라서 이제는 구강까지 안티에이징을 해야하오이까.`

광고 키워드를 뽑다뽑다 이제는 구강에도 안티에이징을 외치는 세상이 되었음을 개탄하오. 안티에이징이라는 단어에 발끈하는 스스로를 발견하며는 이미 상당히 진행된 에이징 속에서 무력감과 패배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소만. 허나 왜 내가 세월과 겨루느라 세월을 보내야하오. 이는 처음부터 질 수 밖에 없는 싸움이며 이기고 싶을수록 이길 수 없는 싸움이오. 무엇보다 나는 나의 구강을 나이들게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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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반 전에 엄마가 이사를 했다. 책장을 하나 더 주문해야 한다. 책장이 오면 바로바로 꽂아넣을 수 있도록 책을 분류했다. 의외로 해외소설 중엔 프랑스 소설을 가장 많이 갖고 있었는데 나도 미처 몰랐던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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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6-12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정리하면서 책장에 책을 꽂을 때가 보기에는 힘들어보여도 막상 하면 기분이 좋아져요. 지금까지 샀던 책들을 한 번에 쭉 보면서 성취감이 느껴지잖아요. ^^

karma 2015-06-14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얼른 책장에 꽂히는 걸 보고 싶어요 :)
 

문제는 생각이 꼼짝할 생각을 않는 바로 거기에

아마도 우리 주위 사물의 부동성은 그것이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물이라는 확신에서, 그리고 그 사물과 마주한 우리 사유의 부동성에서 연유하는지도 모른다. (중략) 아직도 잠으로 마비되어 꼼짝할 수 없는 내 몸은 피로의 형태에 따라 팔다리의 위치를 알아내고, 거기서 벽의 방향과 가구의 위치를 추정하여 현재 내 몸이 놓인 곳을 재구성하고 이름을 불러보려고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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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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