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메오 카스텔루치_ 신의 아들을 바라보는 얼굴의 컨셉에 대하여


 

2013년 3월 24일 일요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자생하는 비극> 연작들을 스크리닝으로 보고 나흘 만에 직접 신작 연극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저에게 마법의 표가 생긴 겁니다.


 

극장에 들어가자 모든 것이 새하얗게 세팅 돼있었습니다. 왼쪽부터 하얀 소파와 카펫, 하얀 테이블, 하얀 침대, 그리고 무대의 중앙에 대형 얼굴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의 얼굴입니다. 예수의 얼굴, 혹은 예수의 얼굴이 담긴 대형 포스터는 극 후반에 아주 중요한 역할이 있습니다.


 

정시가 되자마자 두 남자가 역시 새하얀 옷을 입은 노인을 부축해 나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버지와 아들이 등장하는 연극에서 역할이 없는 그들이 연극이 시작되자마자 아버지를 부축해 소파에 앉히기 위해 등장하는 것이 어색합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는 혼자는 걷기조차 힘든 노인이 연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다고 해서 뚜벅뚜벅 걸어 나온 채 시작하는 순간 극 중 노인으로 변신하는 것은 더욱 어색합니다.


 

아버지는 헤드폰을 쓴 채 우리나라의 ‘동물왕국’ 비슷한 프로그램을 보고, 뒤이어 등장하는 아들은 아버지의 안부를 물으며 출근 준비를 합니다. 전화 통화를 하며 메모를 하는 그는 바빠 보입니다. 하지만 출근하려는 찰나, 아버지는 똥을 쌉니다.


 

그는 익숙하게 아버지가 싼 똥을 치우고 아버지의 옷을 갈아입힙니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사과하고 아들은 계속해서 아비를 달랩니다. 나이가 들어 거동이 불편하고 배변 조절이 힘들어도 아버지가 느끼는 수치심까지 사라지진 않습니다. 어릴 땐 분명 자신의 똥기저귀를 갈아줬을 아버지이므로 아들은 직장에 늦어도, 전화가 와도, 아버지를 토닥이며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아줍니다.


 

아버지가 싼 똥은 새하얀 가구들 사이에 더욱 빛이 납니다. 똥이 묻은 자리가 너무 새하얘서 오히려 초콜릿 같은 느낌도 들지만 이내 온 극장에 퍼지는 냄새가 정신을 차리라고 말합니다. 이게 가짜였으며 좋겠지? 하지만 이건 정말로 냄새 나는 바로 그 똥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등받이가 검은 의자에도 아버지가 싼 똥이 묻어있습니다. 연출자의 의도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등받이에 묻은 똥의 색깔과 모양은 마치 뒤에 걸려 있는 예수의 얼굴과 색깔이나 모양이 비슷합니다. 아마 우연이겠죠. 저는 그냥 제가 보고 싶은 걸 본 걸 겁니다. 어쨌든 위치와 각도 때문에 그 검은 등받이에 묻은 똥의 색깔이나 모양이 꼭 인간의 얼굴 같이 느껴지는 걸 어쩔 수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연극은 후반에 극의 반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치워 놓으면 다시 싸고 닦아 놓으면 다시 쌉니다. 차분하게 아버지를 달래고 보살피던 아들은 어느 순간 폭발하죠. 아버지 대체 뭘 드신 거냐고요. 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흐느낍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새하얀 침대에마저 자신의 설사를 묻힙니다. 아마 아무리 착한 아들이라도 더 이상 평정심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아들은 무대 중앙에 걸린 예수 얼굴로 다가갑니다. 예수의 얼굴을 어루만집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의 절규가 느껴집니다.


 

아들은 무대 뒤로 사라지고 아버지는 여전히 똥 묻은 흰 침대에 걸터앉아 울고 있습니다. 이 때, 책가방을 매고 농구공을 든 남자아이가 등장합니다. 책가방에서 수류탄을 꺼내 예수의 얼굴에 던지기 시작하죠. 이후 계속해서 아이들이 나와 같은 행동을 합니다. 모든 아이가 다 나오고 나서 세어보니 아이들은 모두 12명이었습니다. 열 두 명의 아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분은 없을 듯 합니다.


 

실컷 수류탄을 던지고 나면 아이들은 다시 가방을 잠그고 다시 매고 왔던 길로 돌아갑니다. 그 후로는 예수의 얼굴 뒤로 불길과 사람의 그림자가 등장합니다. 예수의 얼굴이 일그러지거나 변형됐다가 원래 모습을 찾았다가를 반복합니다. 그리고 메시지가 뜹니다.


 

“You’re My Shepherd”


 

그러다 오른쪽 귀퉁이에 어떤 글자가 보일 듯 말듯 희미하게 떠오릅니다. 아직 극장 안이 어두울 때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극장 안이 밝아질수록 그 글자는 선명합니다. ‘not’입니다.


 

어두울 때는 “You’re My Shepherd”로 보이지만 밝아오면 “You’re not My Shepherd”가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레이디 가가의 공연은 그토록 반대하면서 이런 작품이 상영될 때는 왜 이렇게 고요한가를 반문하기도 하더군요. 명백한 신성모독 작품이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유럽에서 상영됐을 때는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여져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의도는 꼭 신이 있다, 없다와 같은 단순한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했던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인간이 어떤 고통의 순간에 직면해있을 때, 그것을 피할 수도, 누군가를 원망할 수도 없이 받아 들여야하지만 고통스러울 때, 또 수치스러우면서도 생을 부지해야 할 때, 자신이 믿는 신을 부르고 질문을 하는 것처럼 질문하는 것 같았습니다. 신에게도 질문하고, 관객에게도 질문하고, 배우들에게도 질문하고, 자기 자신에게도 질문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보면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에까지 이를 수도 있겠습니다. 그동안 믿어온 신은 과연 정말 있는 건지, 나를, 우리를 굽어 살피고 있는 건지, 모든 것이 신의 뜻인 건지, 그렇다면 왜 하필 이런 고통과 수치를 주는 건지 우리 인간은 그냥 받아들이기에는 버거우니까 묻고 또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품는 것만으로도 신성모독이 될 수 있다면 또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습니까? 추호의 의심도 없이, 당신은 신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모든 것을 그 어떤 고통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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