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5. 육아는 오디션이다
(부제 : 냉장고 위에 장난감을 올리는 부모님께 (2))

아이를 기르는 부모님은 오디션을 치르는 배우와 같습니다. 심사위원은 바로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행동을 보고 마음 깊이 새기고, 나중에 똑같이 따라합니다. 형제끼리 싸우고 있을 때 싸움을 무력으로 저지하는 부모님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학교에 가거나 사회에 나가서 싸우는 모습만 보면 덮어 놓고 반대하거나 싸움을 멈출 생각만 하는 사람이 됩니다. '왜 싸우는가?' 하는 생각은 영원히 사라집니다. 버스나 지하철이 파업하면 우리가 습관적으로 비난만 하는 것처럼. 가정에서 배운 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증자가 말했다. '열 개의 눈이 부릅떠 보고 있고 열 개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데 무섭지 않은가
ㅡ 대학6장

가정에서 아이들이 경험하는 일들은 사회에 나가서도 무한반복되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입니다. 어쩌면 인생 자체가 하나의 오디션인지도 모릅니다. 서울생협의 의뢰를 받아 조합원 어머니들에게 강연을 하고 나서 점심을 함께 먹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한 아주머니가 아기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수업을 들었던 유모차 엄마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이들이 계속 울고 떠들어서 전 집중을 잘 못했는데, 선생님은 강의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으셨나요?”

만약 그 순간 내가 ‘뭐, 그런 부분도 있죠.’라고 대답했다면 나는 인생 오디션에서 실패했을 것입니다. 다행히 나는 순간 나의 대답의 찾았죠. 

“물론 아이들이 울고 떠들면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강의하는 데 지장을 미치죠. 하지만 부모 강의를 계속 하다 보니까 처음에는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들어왔는데, 그 다음에는 아이 엄마의 마음이 들어오더군요. 오죽했으면 아이가 떠들어 실례가 됨에도 불구하고 강의를 들을까? 이 마음이 대견하고 고마워요.”

갑작스럽게 받은 질문에 대해서 답변을 한 거였지만, 나중에 집에 돌아가고 나서 안도했습니다. 어른들끼리의 대화에서도 이렇게 살 떨리는 오디션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아이들과의 일상에서는 어떨까요? 부모님들의 주의집중과 긴장이 요구됩니다. 동양에서는 ‘마음 씀’과 ‘마음 반응’을 정확히 구분합니다. 강연을 할 때 아이들이 떠들면 주의력이 분산되고 짜증이 올라오는 것은 마음의 반응입니다. 마음은 원래 도망을 잘 치고, 조그만 것에도 반응을 잘 합니다. 맹자는 도망치지 않으면 마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학문의 길이란 다름이 없다. 그 달아난 마음을 찾는 것뿐이다."(맹자11-11)라고 말했습니다. 유명한 ‘구방심(求放心)’이 바로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마음을 쓴다는 것은 알아봐준다는 것이고, 사정을 헤아린다는 것입니다. 예양이란 자객은 자신의 주인을 위해 복수를 하다가 실패해 죽게 되자 조양자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서 죽고, 여인은 자기를 아껴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
- 사마천, <사기열전> ‘자객열전’

장난감을 가지고 다투는 아이들을 보면서 부모는 그저 욕심 때문에 서로의 것을 빼앗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아이들이 장난감 가지고 열 번을 다툰다고 해도 열 가지의 서로 다른 사정이 있기 마련인데, 이걸 알아주지 않으니 다툼은 더욱 심해지고 원망은 커집니다.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유명한 친구관계인 관중은 친구 포숙의 마음 쓰는 방법을 이렇게 칭찬합니다. 

“나는 세번 싸움에 나갔다가 세 번 모두 달아났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 사마천, <사기열전>, ‘관안열전’

냉장고에 장난감을 올리는 부모의 행동은 나름대로 아이들의 싸움에 대한 합리적인 결론을 내렸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 씀’이라기보다는 ‘반응’에 가깝습니다. 누군가 내 마음을 알아주면 표정이 편안해집니다. 부모님이 냉장고 위에 장난감을 올려놓으면 아이들 표정이 편안해지나요? 여기에는 다만 힘의 논리만 작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이의 마음에서 어떤 생각이 일어나고 있는지 동양철학의 목소리로 한번 들어볼까요?

무력으로서 사람을 굴복시키면, 마음으로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 맹자3-3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는데, 무엇이든지 적응하려고 해서 탈입니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사람의 이런 성향을 휴리스틱(Heuristic)이라고 말합니다. 휴리스틱(heuristic)은 ‘찾아내다’ ‘발견하다’는 뜻의 그리스 말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말로, 불확실하고 복잡한 상황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가능한 한 빨리 풀기 위해 쓰는 주먹구구식 셈법이나 직관적 판단, 경험과 상식에 바탕을 둔 단순하고 즉흥적인 추론을 뜻합니다. 운전을 처음 할 때는 핸들이나 라이트, 기어, 핸드 브레이크, 미러 등의 조작 방법이 복잡해 보이지만 6개월 정도만 운전하다 보면 따로 생각하지 않고서도 익숙하게 기계를 조작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눈 감고도 운전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차선을 바꿀 때, 후진으로 주차할 때 역시 느낌만으로도 반듯이 하는 수준이 됩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과신하다 보면 접촉사고가 나는 경우도 생기죠. 휴리스틱은 익숙하고 반복되는 상황을 몸에 입력해 놓았다가 바로 반응해서 시간을 줄여주기도 하지만, 큰 실수를 유발하기도 합니다. 특히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휴리스틱에 의존하면 안 됩니다. 이것을 의식하지 않으면 부모의 관념 속에 아이를 밀어 넣고 선입견의 눈으로 바라보기 쉽습니다. 그러면 아이 역시 부모를 관념 속에 밀어 넣고 선입견으로 바라봅니다.이렇게 계속 가다가는 ‘그런 부모’, ‘그런 아이’가 되어 버립니다. 실제 부모와 실제 아이가 사라지는 겁니다. 이제 ‘마음 쓰기’를 해야 할 이유가 충분해졌죠?

장난감을 가지고 다투다가 한 아이가 울면서 다가오면 그저 말없이 안아줍니다. 너의 아픔과 슬픔을 알고 있다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울고 있는 아이와 같은 표정을 지어주면 아이는 부모가 자기의 편이라는 사실을 인지합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을 때린 아이 앞에서 하면 자연스럽게 때린 아이가 틀렸다는 메시지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두 아이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이렇게 해야 합니다. 한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에 동조해줄 때도 마찬가지로 다른 아이가 들을 수 없도록 귓속말로 해주거나 표정으로 동의를 해줍니다. 부모가 자기의 뜻을 알아준다고 생각하면 아이들은 분노가 누그러지거나 득의만면해집니다. 장난감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둘이 다투다가 가지게 된 아이가 가지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이의 장난감을 빼앗아서 냉장고에 올리거나, 다른 아이에게 장난감을 건네주는 것을 보면서 그 아이는 깊은 좌절감을 느낍니다. 다른 방법을 쓰는 게 낫습니다. 다툼이 있는 장난감은 둘 다의 소유물이거나 누구의 소유물도 아닌 것이 많습니다. 소유가 명확히 정해지면 아이들은 탐을 내는 일이 별로 없거든요. 가지고 놀다가 나중에 빌려줄 수 있느냐고 물어봅니다.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다면 답을 하지 않거나 거절하는데, 그러면 조금 기다렸다가 마음이 풀리면 다시 물어봅니다. 나의 경우는 ‘시간’을 의인화시키는 방법을 썼습니다. 

민준이가 한 살 많은 사촌누나와 주먹다짐을 하고 나서 크게 울면서 제게 왔을 때 안아주고 화해하게 했더니 사촌누나가 아직 준비가 안 된 상태였습니다. 아이에게 “민준아, 시간은 똑똑한 친구지? 시간한테 맡기고 조금 기다리면 어떨까?”라고 제안하고 그네타기를 같이 하면서 놀고 있었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사촌누나의 마음이 누그러졌는지 먼저 와서 아이에게 사과를 합니다. “그것 봐, 시간은 똑똑하다고 했지?”라고 말해줍니다. 물론 이렇게 좋게 끝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서 시간을 지연시키는 방법을 쓰면 언제나 효과가 있었습니다. 마음은 항상 달아나지만, 그때마다 되돌아오는 것도 잊지 않으니까요. 
이런 과정들이 어떻게 보면 상당히 번거롭고 복잡합니다. ‘이렇게까지 해야 돼?’ 하고 질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남은 세월을 생각해보세요. 부모가 없어져도 아이들은 부모와 관계 맺었던 경험을 종자돈으로 삼아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부모의 마음 씀이 아이의 인생에 큰 상처를 준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 중에서 한 가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개만 보면 벌벌 떠는 사람의 한탄입니다. 

"어른들은 모두 내가 어려서 그런 거라고, 크면 괜찮아질 거라고만 하셨어. 하지만 개에 대한 두려움은 커서도 없어지지가 않았고 난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개를 무서워했어. 그때 부모님이 나에게 개에 대해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무조건 피하기만 하지 않고 개에 대한 두려움을 스스로 극복하도록 도와주셨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스트레스를 받으며 힘들어하진 않았을 테니까."
- 상진아, <행복한 놀이대화>, 89쪽

마음은 외과수술처럼 제거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알아주고 감싸주면서 치유될 때까지 기다려주는 대상입니다. 장난감을 냉장고 위에 올리는 부모의 마음을 ‘마음 씀’의 방법으로 읽어 본다면, 아이들이 다투고 때리는 상황이 싫은 겁니다. 안타깝게도 그 원인이 장난감에 있다고 보고 애꿎은 장난감을 희생양으로 삼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부모님의 마음속에 펼쳐지고 있는 근원적인 모습을 보면 부정적인 상황이나 싸움을 보면 피하고 싶은 욕구가 담겨 있습니다. 부정적인 상황을 피하고 싶어하는 부모님은 마음은 부모 역시 어렸을 적에 부모로부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부모님의 부모님에게로 문제는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이들이 다시 부모가 되었을 때 또다시 부정적인 상황을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만큼은 상황을 직면하면서 슬기롭게 해소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선에서 문제를 해소하는 부모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부모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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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4. 냉장고 위에 장난감을 올리는 부모님께 (1)


남자 형제를 키우다 보니 아이들의 취향이 서로 비슷합니다. 또봇Z 신제품을 하나 사주면 서로가 갖겠다며 전쟁이 벌어집니다. 설거지를 하고 있거나 다른 일을 보고 있을 때는 소리를 크게 지르거나 맞아서 우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아이들이 싸우는지 알게 됩니다. 갑자기 화가 치밀어오릅니다. 아이들에게 가서 장난감을 빼앗은 다음에 아이들이 볼 수 있게 냉장고 위에 올리면서 한마디 합니다. 

“장난감 때문에 싸우면 냉장고에 올릴 거야!”

냉장고 위에는 또봇뿐만 아니라 파워레인저, 각종 자동차 등 장난감이 이미 많이 올라갔습니다. 혹시 여러분의 가정에서 벌어지는 일은 아닌가요? 나도 한때는 냉장고에 장난감을 올리는 아버지였습니다. 형제를 키우는 부모님 중에서 냉장고에 장난감을 올리지 않는 부모님은 참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참 많이들 싸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TV를 보면 국회에서 멱살을 잡고 최루탄을 뿌리는 모습을 잘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싸움을 잘 하는 게 아니라, 싸움에 취약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싸우는 상황에 무척 취약합니다. 소리를 지르거나 주먹이 나가거나 멱살을 잡는 게 더 편합니다. 오죽했으면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까지 나왔을까요? 동양은 예부터 싸움 잘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오묘한 도를 설파하는 노자로부터 전쟁의 신이라 추앙받는 손자에 이르기까지 동양이 말하는 ‘싸움의 기술’은 싸움 자체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듭니다. 

훌륭한 사관(士官)은 무용(武勇)을 앞세우지 아니하고 잘 싸우는 사람은 성을 내지 아니하며 잘 이기는 사람은 적과 맞붙지 아니하고 사람을 자 부리는 사람은 그 사람 밑으로 내려간다. 이를 일러 다투지 않음의 덕이라 하고 이를 일러 사람 부리는 힘이라 하고 이를 일러 하늘의 짝이라 하니 옛날 도의 지극함이다. – 도덕경 68장

동양에서는 완력이나 지위, 목소리 등으로 위협하는 싸움을 비웃었습니다. ‘나는 용감함을 좋아합니다.’라고 말하는 맹자는 “왕께서는 작은 용감함을 갖지 마십시오. 대저 칼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화낸 눈초리로 쏘아 보며, '그가 어찌 감히 나를 당해 내랴!'고 한다면, 이것은 필부의 용감함으로, 한 사람만 대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맹자2-3)라고 충고했습니다. 아이들이 싸울 때야말로 싸움의 기술을 가르칠 최적의 타이밍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 이렇게 싸우는 모습을 보면 나는 참 슬플 것 같습니다. 동양철학 중에서도 ‘믿고 쓰는’ 정신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느림’입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 제목처럼 동양은 느리게 걷고 느리게 사고합니다. 느린 시선으로 냉장고에 장난감을 올리는 부모님의 마음을 보면 ‘평화에 대한 집착’을 읽을 수 있습니다. 

송나라에 사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밭에 심은 벼싹이 자라지 아니하는 것을 가엽게 여겨 이를 다 뽑아버렸다. 그 사람은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에게 말했다 ‘오늘은 피곤하다. 내가 벼싹을 자라게 도와 주었다’ 그의 아들이 황급히 뛰어나가서 밭을 살펴보니, 벼싹은 이미 말라버렸다. 천하에는 벼싹을 자라게 도와주지 않는 사람이 적을 것이다. 
- 맹자3-2

평화는 어떻게 찾아오나요? 한번 격렬하게 싸우고 나서 ‘우리 이렇게 살지 말자’는 반성이 들면 평화가 옵니다. 미국이 인종차별에 대해서 세심한 제도를 갖출 수 있었던 까닭은 엄청난 인종차별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일이 극우정당에 대한 정치적 견제 장치가 강한 까닭은 나치 정권의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럽이 노동자 의식과 연대, 가치에 대한 높은 수준의 이해를 보여주는 까닭은 잔인한 착취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시민운동, 시민사회, 시민 그 자체에 대한 사회적 이해가 부족한 까닭은 그만큼 역사가 짧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책과 라디오 등 미디어들이 어떻게 평화를 찾게 되었는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기막히게 드라마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디어 전문가인 마셜 매클루언은 “새로운 미디어는 이전의 오래된 미디어가 평화롭게 가만히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두 개의 해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듯 새로운 미디어는 낡은 미디어가 새로워진 환경에 맞는 새로운 형태와 자리를 발견하는 순간까지 쉬지 않고 압박을 가합니다. 인류학자이자 언어학자인 다니엘 네틀, 수잔 로메인에 따르면 지난 5백 년 동안, 우리에게 알려진 세계의 언어들 중 거의 절반 가량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제주 방언 역시 2010년 12월 유네스코에 의해 ‘심각한 위기에 처한 언어(Critically Endangered Language)’로 분류되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언어와 미디어가 평화를 찾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싸우는 아이들을 보면서 부모가 갖기 쉬운 ‘평화에 대한 집착’에 대해 한번쯤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라디오가 나타난 뒤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에서는 옛날에 쓰던 말들이 되살아 났고, 이스라엘에서는 더욱 놀라운 언어의 부활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지금 수 세기 동안 책 속에서 줄어 있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 마셜 매클루언, <미디어의 이해>(커뮤니케이션출판부), 515쪽


아이들이 장난감을 차지하려고 싸우는 모습에서부터 다서 한번 천천히 생각해보면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싸우는 아이들을 무턱대고 수수방관할 필요는 없지만 부모님의 빠른 반응은 아이들의 성장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앞으로 평생 동안 이와 비슷한 상황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무척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이들이 장난감 가지고 다투는 것은 어른들이 이해관계나 가치판단 때문에 서로 옳다고 다투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부모님들이 평화상태에 집착해 다투는 아이들을 서로 떼어 놓고 장난감을 냉장고에 올릴수록 아이들은 부정적인 상황에 대한 대응능력이 떨어집니다. 아이들 마음의 밭에 뿌려 놓은 벼싹을 뽑아버리는 일과 같습니다. 충분히 서로 감정표현을 할 수 있도록 기다리고, 주먹다짐을 하더라도 성급히 떼어놓지 않아야 합니다. 아동심리학자들도 어린아이들의 근육과 완력이 세지 않기 때문에 어릴 적에 주먹질을 하거나 얻어맞은 경험을 미리 해두는 것이 좋다고 조언합니다. 


역할극을 마음속에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대개의 부모님들은 형제들을 피고나 원고, 또는 변호사나 검사를 앞에 둔 판사처럼 행동합니다. 결론을 내 주는 거죠. 하지만 아이들이 싸울 때 부모가 할 수 있는 좋은 역할은 바로 ‘기자’입니다. 기자는 상반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취재하면서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 보고 기사에 반론을 싣습니다. 기자 스스로 판단을 하지 않고 독자들의 판단에 맡깁니다. 판사가 가지는 마음이 책임감이라면, 기자가 가지는 마음은 ‘궁금함’입니다. 궁금하지 않으면 혼을 내고 장난감을 냉장고에 올립니다. 나는 두 형제가 장난감을 가지고 싸울 때 조금 기다리고 개입할 타이밍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차분한 어조로 한명씩 이유를 물어봅니다. 아이들의 고조된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일을 그르칩니다. 부정적인 감정, 즉 화가 날 때는 속도가 급격히 빨라집니다. 부정적인 감정일수록 일부러 속도를 느리게 가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나는 종이와 펜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화가 나서 감정이 빨라진 상황에서 느리고 차분하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디어가 주는 효과를 따로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가 세 살이기 때문에 두 살이 많은 형에게 맞고 나서 울면서 찾아올 때가 많습니다. 종이와 펜을 준비하고 최대한 다정하게 물어봅니다. “민서(둘째 이름)야, 왜?” 둘째는 울먹이면서 “형아가 때려쪄!”라고 대답합니다. 나는 종이에 둘째가 말한 내용을 소리 내서 천천히 받아 적습니다. 이때 둘째의 표정을 힐끗힐끗 바라보면서 변화를 관찰합니다. 그 다음에 ‘문제’의 형인 첫째를 부릅니다. 이 때 주의할 점은 취조를 하듯이 물어보거나, 아이가 방어를 하도록 물어보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살살 달래며 마치 ‘낚시’를 하듯 물어봅니다. “민준(첫째 이름)아, 민서가 울고 있네. 형아가 때렸다고 하던데.” 첫째는 자기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점을 항변하기 위해서 대답합니다. “민서가 내 장난감 가져가잖아.” 나는 둘째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펜으로 첫째가 했던 말을 소리 내서 천천히 받아 적습니다. 역시 첫째와 둘째의 표정을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변화를 관찰합니다. 자신이 한 말을 부모가 받아 적었을 때 아이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습니다. 아이들이 엄마에게 이야기할 때 엄마는 대개 돌아서서 설거지를 하고 있거든요. 아빠들은 책을 보거나 TV에 시선을 떼지 않고 입으로만 아이의 말에 대답을 하거든요. 이런 엄마 아빠가 아이가 한 말을 경청하고 펜으로 받아적는다는 것은 충격적인 경험입니다. 부모가 아이를 존중한다는 강력한 표현이거든요. 둘째에게 다시 물어봅니다. “민서가 형아 장난감 가져갔다는데?” 둘째는 억울하다는 듯 대답합니다. “형아가 주기로 해놓고서 안 주잖아.” 둘째의 말을 똑같이 따라 씁니다. 아이들의 표정을 힐끗 힐끗 보라고 한 것은 아이들 표정에서 화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 처음 싸웠을 때 화가 풍선만큼 커졌다면, 펜으로 받아 적으면서 이야기를 듣고 나면 탁구공만큼 작아졌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말을 소리 내서 따라 하는 이유는 역시 존중의 표현입니다. 누가 잘못하고 누가 잘했는지,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판단하지 않아도 당장 아이들의 감정 상태를 존중하기만 하면 아이들의 화는 누그러집니다. 굳이 판단을 할 필요도 없고 잘잘못을 가릴 필요도 없습니다. “너희들이 장난감 때문에 싸우면 내 마음이 슬퍼져.”라고 말해도 충분합니다. 형제가 있는 아이들 싸우는 문제가 부모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옆에서 한 엄마가 한마디 합니다. 이 말에 모든 부모님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잠잠해집니다. 


“우리 가족은 아들만 하나라서 장난감 가지고 싸울 기회조차 없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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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3. 솔직히 말하는 동양철학 (2) 공자와 맹자는 왜 아내 이야기를 하지 않나?

가정을 갖기 전에 읽었던 동양철학과 가정을 갖고 나서 읽었던 동양철학은 느낌이 아주 다릅니다. 특히 논어와 맹자 등 유학 경전을 볼 때는 아주 놀라울 정도로 의아했습니다. 가장 먼저 든 의문은 공자와 맹자는 왜 아내에 관한 이야기가 별로 없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공자는 홀아비였습니다. 공자뿐만 아니라 공자의 아들 역시 홀아비가 되었습니다. 홀아비 공자와 홀아비 아들이 방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그려 보십시오. 갑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심지어 공자의 홀아비 아들은 공자보다 일찍 죽었습니다. 가족의 눈으로 볼 때 공자는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홀아비 공자와 홀아비 공자 아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동양철학에서 가족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진항이 백어에게 물었다. "당신은 특이한 가르침을 들은 게 있겠지요?" 그가 대답하였다. "없습니다. 일찍이 홀로 서 계실 때에 제가 종종걸음으로 마당을 지나가는데, '시를 배웠느냐?'하고 물으시더군요. '배우지 못했습니다'하고 대답하니, '시를 배우지 않으면 남과 말할 수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물러나 시를 배웠지요. 
다른 날 또 홀로 서 계실 적에 제가 종종걸음으로 마당을 지나가는 데, '예를 공부했느냐?' 하고 물으시더군요. '못했습니다.'하고 대답하니, '예를 공부하지 않으면 남 앞에 설 수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물러나 예를 공부했지요. 들은 것은 이 두 가지입니다."
진항은 물러나와 기뻐하며 말하였다. "한 가지를 물었더니 세 가지를 터득하였다. 시에 대해 들어서 알게 되었고, 예에 대해 들어서 알게 되었고, 또 군자는 자기 자식을 멀리한다는 것도 들어서 알게 되었다." - 논어 16-13

위 구절에서 보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보면 마치 군주와 신하의 관계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의 가족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친구 같은 아빠'라는 신조어 프렌디(Frienddy : Friend + Daddy)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집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아들과 딸을 낳은 아버지가 딸을 대하는 모습과 아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뭔가 다릅니다. 동양의 아버지들은 무의식적으로 '부자관계=군신관계'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프렌디는 최근에 나타난 현상일 뿐 많은 가족들이 권위적인 아버지를 두고 있습니다. 
동양철학에서는 육아와 관련한 희귀한 구절이 있는데, 이를 통해서 조상들이 육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확실히 볼 수 있습니다. 

" '아버지가 정도로 나를 가르치시지만, 아버지는 정도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면, 이는 서로 감정을 상하는 일이다…그래서 옛날에는 자식을 바꿔서 가르쳤다" (맹자7-18)

아버지가 자식을 가르치는데 생활하는 동선이 겹치기 때문에 자식은 때로는 아버지의 가르침과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식의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것과 아버지의 일상의 행실이 다르기 때문에 의심이 듭니다. 이 문제가 동양의 아버지들을 무척이나 골치아프게 했나봅니다. 그래서 맹자가 생각해낸 아이디어는 역자(易子) 즉, 친구와 서로 아이를 바꿔서 가르치는 방법이었습니다. 조선 선비들도 맹자의 방법을 따라 해서 친구와 자식을 바꿔서 가르쳤는데 이를 교자(交子)라고 했습니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아버지들은 일종의 '격리 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친구가 자식을 가르치기 때문에 자신의 의도대로 아이를 교육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상생활을 하면서 아이의 의심을 받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의를 상할 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맹자와 맹자의 방법을 따른 선비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가족의 모습입니까? 

군대에 가면 모든 부대의 유리창이나 벽에 써 있는 글자가 있습니다. 바로 효(孝)라는 글자입니다. 한마디로 '배반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유학으로 대표되는 동양철학은 아버지들에게는 참으로 편안하고, 임금과 상급자에게는 참으로 편안한 이론입니다. 하지만 가족의 약자인 아내나 자식들에게는 참으로 못된 학문이고, 노동자나 하급자, 신하들에게는 참견을 많이 하는 학문입니다. 그것은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가족 자체가 현대에서 말하는 가족과 전혀 다른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양철학의 가족은 다분히 정치적인 용어입니다. 동양철학이 말하는 가족이라는 용어를 육아에 그대로 썼다가는 낭패입니다. 그래서 동양철학에서 의도하지 않은 것을 보라고 말한 것입니다.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가족'이라는 의미를 과감히 거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순수한 의미에서 '가족'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전면적으로 배격할 필요는 없지만, 정치적 의도가 담긴 용어라는 사실을 알고 동양철학을 받아들이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동양과 서양의 아버지가 자식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드러내주는 글을 소개합니다. 동양의 아버지들이 한번쯤은 생각해볼 만한 화두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나이 어리면 부모를 사모하고, 여색을 알면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좋아하며, 처자가 있으면 처자를 사모하고, 벼슬을 하면 임금을 사모하며, 임금에게서 신임을 받지 못하면 속이 탄다. 큰 효자는 평생토록 부모를 사모한다. 
- 맹자9-1

십대가 되기까지는 대개의 부모가 아이를 효과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부모 자신이 더 이상 변화할 수가 없어서 계속해서 성숙하고 달라지는 아이의 요구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 결과 좋은 부모로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느 경우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 스캇 펙, <아직도 가야 할 길>

위 글을 비교해 보면 동양은 자식의 사랑에, 서양은 부모의 사랑에 포인트를 두고 있습니다. 동양철학은 특히 아버지와 아들, 즉 남성의 관점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성다움'에 대해서 고민한 흔적은 의외로 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동양의 남성상'을 찾는 것이야말로 아빠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는 동양철학의 다른 면모를 통해서 '남자다움'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편(아빠)의 정체성은 무엇이고, 아내(엄마)의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어떤 과정을 통해서 아이가 어른이 될지 궁금하지 않나요? 여자는 아이를 낳는 과정을 통해서 엄마가 됩니다. 정말 명확한 통과의례죠. 그런데 아빠(남편)은 어떤 통과의례를 통해서 아빠(남편)가 될까요? 명확하게 떠오르는 게 없습니다. 임신처럼 분명한 통과의례가 없다보니 철부지 아빠가 부지기수인지도 모릅니다. 동양 땅을 밟고 사는 남자들이 일단 이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아서 동양의 가족관계가 왜곡되어 왔습니다. 결국 사랑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 아내와 아이들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장자>에서는 아내가 죽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내가 죽자 장주(장자)는 곡을 하지 않고 웃으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주위에서 의아해서 묻자 저승 가는 아내 앞에서 울면 아내가 얼마나 슬퍼하겠느냐며 웃으면서 보내주고 싶다고 말합니다. 장자는 아내를 사랑한 사나이였습니다. 다산 정약용도 다정한 남편이자 아버지였습니다. 다산이 유배지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어머니께 효도하라는 글이 있습니다. 남자는 양이고 여자는 음이지만, 아버지가 없을 때는 어머니가 양이 되고 아들은 음이 되니, 어머니를 아버지처럼 따르고 존경해야 한다며 이론적으로 사뭇 진지하게 자식들을 설득하는 아버지 다산의 모습을 보면 '사나이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다산과 장자를 동양 아버지의 표상이자 성공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공자와 맹자를 실패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곡된 가족관계, 특히 아버지의 모습을 바로잡는 것에서부터 육아를 위한 동양철학의 성찰이 막힘 없이 흘러나올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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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2. 솔직히 말하는 동양철학 (1) 동양에서 민주주의가 꽃피지 못하는 까닭은?


나는 소심한 남자입니다. 지금까지 2,000여 명의 가족들을 만나면서 육아와 책놀이 강의를 하면서 조금씩 인문학 내용을 덧붙여 왔는데, 동양철학을 이야기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년 넘게 엄마들을 만나면서 나는 보았습니다. 엄마, 아빠의 마음속에 담겨 있는 갈증을. 육아서가 보여주는 시선의 편협함, 미안하게 만드는 불편함을 넘어서 가족을 제대로 바라보고 제대로 사랑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나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내 육아철학의 정점인 동양철학까지 보여드렸지만 거부감은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편안하고 행복한 표정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좋은 걸 알았다면 처음부터 동양철학으로 육아 이야기를 할 걸 그랬습니다. 하지만 조금 다른 동양철학이어야만 합니다. 정직하지 않았기 때문에 철학이 이 모양이 되었다는 철학자 윌 듀런트의 말처럼 어렵게 만든 가족, 어렵게 낳은 귀한 아이들을 위해서 조금 더 가치 있는 선물을 주기 위해서는 정직한 눈으로 처음부터 다시 동양철학을 뜯어봐야 합니다. 동양철학은 두 가지 지독한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맹목적 숭배와 맹목적 배척이 그것입니다. 이를 들어내기 위해서는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의 작동원리를 살펴봐야 합니다. 서양철학은 이른바 ‘반발의 원리’가 숨어 있고, 동양철학은 ‘교조주의’가 숨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스승 플라톤의 철학을 반박하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진리를 구제하기 위해서는, 더구나 철학자로서는, 우리와 아주 가까운 것들까지도 희생시키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 보인다. 친구와 진리 둘 다 소중하지만, 진리를 더 소중하는 것이 경건하기 때문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도서출판 숲), 22쪽

만약 동양의 어떤 지식인이 공자의 철학을 반박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곧바로 파문을 당합니다. 파문(破門)이란 학교에서 쫓겨나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된다는 걸 의미하고, 생계가 끊기는 것을 말합니다. 노자와 장자 등 극소수의 지식인만이 공자를 비판할 만큼 동양철학의 교조적인 전통은 강고합니다. 이를 다른 말로 훈고학(訓詁學)적 전통이라고 하는데 동양철학의 특징은 주석가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스승의 철학에 대해서 반박은 못하고 주석을 달면서 작은 글씨로 자신의 생각을 부연하는 방식이 동양의 지적 전통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이런 방식으로 동양의 지혜를 찔끔찔끔 선사할 수 없습니다. 과감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승 플라톤에게 들이댄 척도로 동양철학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동양철학에 덧씌워진 편견을 걷어낼 수 있습니다. 벼룩 잡는다고 초가삼간까지 다 태울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의 또 다른 차이점은 야심이 넘치는 서양철학에 비해서 동양철학은 왠지 체제 순응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서양철학은 때로는 정치세력에 의해서 채택되기도 했지만 그 이상이었습니다. 세상을 설명하고 세상을 담아내려는 야심으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동양철학은 정권에 입맛에 맞게 적절히 활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치 주문자 생산 방식처럼 정권에 부역해왔던 역사가 있습니다. 노자와 장자가 대단한 까닭은 동양철학 중에서도 무척 예외적인 기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양철학의 가장 취약한 점은 민주주의를 약화시킨다는 데 있습니다. 서양철학은 너와 나의 구분이 강할 뿐만 아니라 나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히 강해서 자기중심적으로 느껴질 정도인데, 동양철학은 너와 내가 같다는 입장이 무척 강합니다. 가정에서 배워야 할 중요한 덕목이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경계해야 할 대목입니다. 민주주의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과 맹자의 말을 함께 인용해 보겠습니다. 

국가는 본성적으로 하나의 복합체다. 따라서 국가는 복합체에서 점점 더 통일체가 되어갈수록 국가 대신 가정이 되고, 가정 대신 개인이 될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도서출판 숲), 66쪽

천하의 근본은 나라에 있고, 나라의 근본은 집에 있고, 집의 근본은 자신에게 있다.
ㅡ 맹자7-5

권위주의 정부 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말했던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말을 기억하시나요? 동양권 국가 중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꽃피었다고 할 수 있는 나라를 찾기가 어려운 것은 동양철학이 가지고 있는 반(反) 민주주의적 특징 때문입니다. ‘국가와 가정과 내가 하나’라는 말은 일견 타당하지만 하나이기도 하고 하나가 아니기도 합니다. 얼핏 보면 모순돼 보이지만 그것이 바로 ‘성숙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와 나의 구분을 할 때 얻을 수 있는 효과와 너와 나의 구분을 하지 않을 때 얻을 수 있는 것, 그리고 잃을 위험이 있는 것을 모두 검토해야만 제대로 된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개인의 인격이 있기에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부분, 가족관계로 강제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복합성은 나의 생각과 다른 여러 가지 생각이 공존하면서 하나의 완성체인 국가가 성립된다는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맹자>라는 책을 보면 맹자가 거의 억지에 가까운 주장으로 ‘이단’의 학설들을 배척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유학의 정통을 지키기 위한 눈물겨운 투쟁으로 볼 수 있겠지만, 학문의 다양성 측면에서는 유치하고 편협한 억지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공자 역시 “누가 방문을 통하지 않고 집밖으로 나갈 수 있겠는가? 어찌하여 올바른 이 도를 따르지 않을까!“(논어6-16)라며 이단학설을 경계했습니다.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사서(四書)로 정리한 송나라의 주자는 자신의 철학에서 불교의 학설을 많이 인용하지만 도교와 불교를 한데 묶어 허무적멸(虛無寂滅)이라고 싸잡아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대학 서문) 편협할 뿐만 아니라 정직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동양철학을 보다 보면 이렇게 위선적인 대목이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노자와 장자는 아예 대놓고 유학의 위선적인 모습을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동양철학을 읽는 태도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 아니라 반고지신[反故知新]의 방법을 써야 합니다. 온고지신은 논어에 나온 말로 옛 것을 따뜻하게 데워서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는 말인데, 따뜻하게 데우는 수준으로는 부족하고 펄펄 끓여야 진정한 새로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고전을 돌이켜보되 좋은 점과 그렇지 않은 점을 냉정하고 상식적인 관점에서 엄밀히 찾아보고 활용해야 합니다. 즉, 동양의 철학자들이 의도한 것뿐만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것까지 보아야 아이들에게 선물할 만한 가치가 됩니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라는 극한의 시간 동안에는 유학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사실에는 동양철학의 비극이 숨어 있습니다. 현실감각이 부족하고 고루하게 이상만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유학이 비현실적인 철학을 추구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동양의 고대사는 편법과 궤변, 임기웅변, 권모술수의 경연장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동양철학 전문가는 오히려 동양철학의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할 위험이 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동양철학의 교조주의가 몸에 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상식의 눈으로 동양철학을 바라보고 옥석을 제대로 가려낸다면, 지금까지는 보지 못했던 동양철학의 아름다운 모습이 드러날 것입니다. 만약에 동양철학이 반민주적인 요소만 있다면, 고루하기만 하고 쓸모가 없다면 애초에 관심을 끊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양철학에는 ‘뭔가가’ 있습니다. 몇몇 가지 독소들 때문에 동양철학의 진가가 발휘되지 못하고, 지적인 유산들이 방치되고 있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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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고전] 1. 뭔가 불편한 육아서


지금은 다섯 살이 된 첫째 아들 민준이가 태어날 때 나는 노자를 읽었습니다. 그 전에도 노자를 읽은 적이 있지만 노자의 마음을 잘 몰랐는데, 아빠가 되고보니 가슴에 새겨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전에는 없던 경험과 시간과 감정이 쌓였기 때문입니다. 노자는 육아서로 읽기 좋습니다. 노자의 초상화를 보면 백발노인이지만 얼굴만큼은 아기 표정 같은데, 아기를 이상향으로 생각하고 철학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중후한 덕을 품은 이는 갓난아이와 같으니, 독충이 쏘지 않고, 맹수도 덮치지 않으며 독수리도 할퀴지 않는다. (노자, 도덕경)


여성, 어린 아이, 약한 것, 부드러운 것, 낮은 것과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이야기는 뭔가 어른스럽고 아빠에게 필요한 양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학생이었을 때는 전혀 모르던 세계가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한 사람의 아빠가 되니 문득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양철학의 황홀함은 잠시뿐이었습니다. 다른 부모들처럼 육아서를 찾아 읽었습니다. 뭔가 관심 있는 주제가 생기면 파고드는 성격이라 육아서에 만족하지 못해 아동심리학에 관한 책들도 뒤적였습니다. 뭔가 불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동양인은 정서와 직관이 무척 발달돼 있습니다. 그만큼 논리적 과정과 실험방식에 대해서 낯설죠. 육아서는 대부분 서양 심리학에 의존하며, 아동심리학은 서양의 것인데 동양 사람들이 서양 문화에 압도적으로 의존하는 점이 불편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그렇게 자라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 느낌을 잘 압니다. 나를 동양고전으로 밀어넣은 사건 역시 이 느낌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대학 시절 시 쓰는 걸 좋아해서 시집을 읽다가 기형도라는 시인을 만나서 빠지게 되었습니다. 기형도 시집을 옆구리에 끼고 읽다 보니 싫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라는 유명한 문장이 들어 있는 시작메모처럼 기형도 시인은 서양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나는 서양식 건물에서 회색빛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벙거지를 입더라도 동양의 산천을 누비고 싶다는 생각에 동양고전을 뒤적거렸습니다. 기분이 훨씬 나아졌습니다. 그래서 대학 시절 나의 시인은 기형도가 아니라 백석이 되었습니다. 백석이 동양사람의 정서를 잘 담아냈기 때문입니다. 공교롭게도 백석의 시인에는 동양고전이 많이 나오죠. 

육아서가 불편한 점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육아서와 아동심리학에 ‘철학’이라는 말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자기계발서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육아란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이해’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곧 인문학입니다. 인문학을 담아내지 못하는 육아서는 불편합니다. 부모님들이 육아서를 읽고 나면 괜히 죄 지은 것 같고, 미안하고,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마땅히 ‘육아철학’이라는 분야가 세워져야 하는데 이런 분위기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글은 ‘육아철학’을 표방합니다. 결국 나는 서가에 꽂혀 있는 육아서와 아동심리학, 발달심리학 책들을 다 치워버리고 심리학의 고전들을 읽어나갔습니다. 프로이트, 윌리엄 제임스, 에이브러햄 매슬로. 육아를 논한 동양의 심리학자들보다 서양의 심리학자들에게서 위안을 얻었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철학과 심리학이 분리되지 않았던 시절의 심리학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읽었던 심리학 고전의 저자들이 동양철학을 깊이 탐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매슬로는 <존재의 심리학>에서 노자 철학을 심리학에 적용할 때의 한계를 이렇게 고찰했습니다. 


아이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때때로 도교의 무위(let-be)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한 인간에 대한 나의 입장은 도교의 무위를 수정한 것으로, 이런 입장을 '원조직 무위(helpful let-be)'라고 공식화할 수 있다. 즉 사랑과 존중의 도교이다. 이러한 입장은 성장 및 성격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성장에 대한 두려움, 느린 성장 속도, 성장을 방해하는 것들, 병리적 특성 및 병리적 이유 또한 인정한다. - <존재의 심리학>(문예출판사), 160쪽


서양의 심리학자들이 동양철학에 주목한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심리학자는 아니지만 아이를 키우는 아빠로서 이 점이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때부터 동양고전을 육아와 심리학에 접목해서 연구를 해봤더니 노자 도덕경뿐 아니라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사마천 사기, 한비자, 손자병법 등 모든 동양고전은 육아의 지혜를 모아놓은 보물창고와 같았습니다. 나는 한 번도 동양고전을 육아의 관점에서 읽어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아이를 생각하면서 논어의 한 구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아이가) 행동하는 이유를 살펴보며, 

(아이가) 할 수밖에 없는 까닭을 관찰하며, 

(아이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마음이 편안해지는지를 고찰하면 (아이의)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

- 논어2-10

子曰:  「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人焉廋哉? 人焉廋哉? 」


두 살 터울의 아들 형제를 키우고 있기 때문에 우리집에서는 날마다 싸우는 소리, 맞아서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부모는 아이들이 싸우는 소리를 들으면 화부터 나기 쉬운데, 화를 내고 아이를 혼내는 까닭은 궁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궁금하면 혼내지 않고 물어봅니다. 아이들이 하는 말을 다 듣고 나서 혼을 낼지 판단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시기소이(視其所以), 행동하는 이유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싸우는 모습을 잘 관찰하면 또봇 장난감이 형에게만 있고 동생에게는 없기 때문에 하나 밖에 없는 장난감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 자주 싸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아이의 물건이 차이나지 않도록 균형을 맞춰 주고, 각자의 물건에 대해서 구분을 지어 주면 싸울 일이 훨씬 줄어들 수 있습니다. 이것이 관기소유(觀其所由), 시간을 두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원인을 살펴봅니다. 세 살 민서는 헝겊 인형을 좋아하고 이야기 그림책을 좋아합니다. 다섯 살 형 민준이는 장난감 칼과 또봇 장난감, 곤충 그림책을 좋아합니다. 각자 좋아하는 것을 잘 살펴서 채워주면 집중을 잘 하고 책도 곧잘 읽습니다. 각자가 좋아하고 편안해하는 것을 고찰하는 찰기소안(察其所安). 여기서 ‘편안하다’는 것은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육아를 위해 동양고전을 읽어보려는 것도 육아서와 서양 심리학이 주는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입니다. 동양철학은 그 자체가 마음공부이기 때문에 오래된 심리학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논어보다 더 오래된 <시경>이라는 책에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지닌 것을, 내가 이를 헤아려 안다’(他人有心予忖度之)라는 대목도 있습니다. 


요컨대 아이 아빠가 동양고전을 읽게 된 까닭은 동양고전은 그 자체가 하나의 심리학이면서 오래된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서양의 심리학자들도 진지하게 탐구할 만큼 심리학적인 가치가 충분합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동양의 문화를 지배한 언어를 가지고 육아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동양고전을 소환하게 되었습니다. 동양고전이 하나의 문학작품이라는 점도 매력 포인트입니다. 즉 문학과 심리학과 철학이 유기체처럼 뭉쳐 있어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 동양고전이므로, 아이들과 엄마 아빠들에게는 훌륭한 선물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과 느낌을 담아서 우리의 언어로 육아를 이야기할 때입니다. 우리는 '느낌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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