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3. 솔직히 말하는 동양철학 (2) 공자와 맹자는 왜 아내 이야기를 하지 않나?

가정을 갖기 전에 읽었던 동양철학과 가정을 갖고 나서 읽었던 동양철학은 느낌이 아주 다릅니다. 특히 논어와 맹자 등 유학 경전을 볼 때는 아주 놀라울 정도로 의아했습니다. 가장 먼저 든 의문은 공자와 맹자는 왜 아내에 관한 이야기가 별로 없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공자는 홀아비였습니다. 공자뿐만 아니라 공자의 아들 역시 홀아비가 되었습니다. 홀아비 공자와 홀아비 아들이 방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그려 보십시오. 갑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심지어 공자의 홀아비 아들은 공자보다 일찍 죽었습니다. 가족의 눈으로 볼 때 공자는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홀아비 공자와 홀아비 공자 아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동양철학에서 가족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진항이 백어에게 물었다. "당신은 특이한 가르침을 들은 게 있겠지요?" 그가 대답하였다. "없습니다. 일찍이 홀로 서 계실 때에 제가 종종걸음으로 마당을 지나가는데, '시를 배웠느냐?'하고 물으시더군요. '배우지 못했습니다'하고 대답하니, '시를 배우지 않으면 남과 말할 수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물러나 시를 배웠지요. 
다른 날 또 홀로 서 계실 적에 제가 종종걸음으로 마당을 지나가는 데, '예를 공부했느냐?' 하고 물으시더군요. '못했습니다.'하고 대답하니, '예를 공부하지 않으면 남 앞에 설 수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물러나 예를 공부했지요. 들은 것은 이 두 가지입니다."
진항은 물러나와 기뻐하며 말하였다. "한 가지를 물었더니 세 가지를 터득하였다. 시에 대해 들어서 알게 되었고, 예에 대해 들어서 알게 되었고, 또 군자는 자기 자식을 멀리한다는 것도 들어서 알게 되었다." - 논어 16-13

위 구절에서 보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보면 마치 군주와 신하의 관계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의 가족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친구 같은 아빠'라는 신조어 프렌디(Frienddy : Friend + Daddy)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집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아들과 딸을 낳은 아버지가 딸을 대하는 모습과 아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뭔가 다릅니다. 동양의 아버지들은 무의식적으로 '부자관계=군신관계'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프렌디는 최근에 나타난 현상일 뿐 많은 가족들이 권위적인 아버지를 두고 있습니다. 
동양철학에서는 육아와 관련한 희귀한 구절이 있는데, 이를 통해서 조상들이 육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확실히 볼 수 있습니다. 

" '아버지가 정도로 나를 가르치시지만, 아버지는 정도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면, 이는 서로 감정을 상하는 일이다…그래서 옛날에는 자식을 바꿔서 가르쳤다" (맹자7-18)

아버지가 자식을 가르치는데 생활하는 동선이 겹치기 때문에 자식은 때로는 아버지의 가르침과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식의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것과 아버지의 일상의 행실이 다르기 때문에 의심이 듭니다. 이 문제가 동양의 아버지들을 무척이나 골치아프게 했나봅니다. 그래서 맹자가 생각해낸 아이디어는 역자(易子) 즉, 친구와 서로 아이를 바꿔서 가르치는 방법이었습니다. 조선 선비들도 맹자의 방법을 따라 해서 친구와 자식을 바꿔서 가르쳤는데 이를 교자(交子)라고 했습니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아버지들은 일종의 '격리 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친구가 자식을 가르치기 때문에 자신의 의도대로 아이를 교육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상생활을 하면서 아이의 의심을 받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의를 상할 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맹자와 맹자의 방법을 따른 선비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가족의 모습입니까? 

군대에 가면 모든 부대의 유리창이나 벽에 써 있는 글자가 있습니다. 바로 효(孝)라는 글자입니다. 한마디로 '배반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유학으로 대표되는 동양철학은 아버지들에게는 참으로 편안하고, 임금과 상급자에게는 참으로 편안한 이론입니다. 하지만 가족의 약자인 아내나 자식들에게는 참으로 못된 학문이고, 노동자나 하급자, 신하들에게는 참견을 많이 하는 학문입니다. 그것은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가족 자체가 현대에서 말하는 가족과 전혀 다른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양철학의 가족은 다분히 정치적인 용어입니다. 동양철학이 말하는 가족이라는 용어를 육아에 그대로 썼다가는 낭패입니다. 그래서 동양철학에서 의도하지 않은 것을 보라고 말한 것입니다.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가족'이라는 의미를 과감히 거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순수한 의미에서 '가족'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전면적으로 배격할 필요는 없지만, 정치적 의도가 담긴 용어라는 사실을 알고 동양철학을 받아들이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동양과 서양의 아버지가 자식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드러내주는 글을 소개합니다. 동양의 아버지들이 한번쯤은 생각해볼 만한 화두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나이 어리면 부모를 사모하고, 여색을 알면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좋아하며, 처자가 있으면 처자를 사모하고, 벼슬을 하면 임금을 사모하며, 임금에게서 신임을 받지 못하면 속이 탄다. 큰 효자는 평생토록 부모를 사모한다. 
- 맹자9-1

십대가 되기까지는 대개의 부모가 아이를 효과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부모 자신이 더 이상 변화할 수가 없어서 계속해서 성숙하고 달라지는 아이의 요구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 결과 좋은 부모로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느 경우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 스캇 펙, <아직도 가야 할 길>

위 글을 비교해 보면 동양은 자식의 사랑에, 서양은 부모의 사랑에 포인트를 두고 있습니다. 동양철학은 특히 아버지와 아들, 즉 남성의 관점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성다움'에 대해서 고민한 흔적은 의외로 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동양의 남성상'을 찾는 것이야말로 아빠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는 동양철학의 다른 면모를 통해서 '남자다움'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편(아빠)의 정체성은 무엇이고, 아내(엄마)의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어떤 과정을 통해서 아이가 어른이 될지 궁금하지 않나요? 여자는 아이를 낳는 과정을 통해서 엄마가 됩니다. 정말 명확한 통과의례죠. 그런데 아빠(남편)은 어떤 통과의례를 통해서 아빠(남편)가 될까요? 명확하게 떠오르는 게 없습니다. 임신처럼 분명한 통과의례가 없다보니 철부지 아빠가 부지기수인지도 모릅니다. 동양 땅을 밟고 사는 남자들이 일단 이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아서 동양의 가족관계가 왜곡되어 왔습니다. 결국 사랑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 아내와 아이들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장자>에서는 아내가 죽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내가 죽자 장주(장자)는 곡을 하지 않고 웃으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주위에서 의아해서 묻자 저승 가는 아내 앞에서 울면 아내가 얼마나 슬퍼하겠느냐며 웃으면서 보내주고 싶다고 말합니다. 장자는 아내를 사랑한 사나이였습니다. 다산 정약용도 다정한 남편이자 아버지였습니다. 다산이 유배지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어머니께 효도하라는 글이 있습니다. 남자는 양이고 여자는 음이지만, 아버지가 없을 때는 어머니가 양이 되고 아들은 음이 되니, 어머니를 아버지처럼 따르고 존경해야 한다며 이론적으로 사뭇 진지하게 자식들을 설득하는 아버지 다산의 모습을 보면 '사나이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다산과 장자를 동양 아버지의 표상이자 성공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공자와 맹자를 실패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곡된 가족관계, 특히 아버지의 모습을 바로잡는 것에서부터 육아를 위한 동양철학의 성찰이 막힘 없이 흘러나올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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