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5. 육아는 오디션이다
(부제 : 냉장고 위에 장난감을 올리는 부모님께 (2))

아이를 기르는 부모님은 오디션을 치르는 배우와 같습니다. 심사위원은 바로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행동을 보고 마음 깊이 새기고, 나중에 똑같이 따라합니다. 형제끼리 싸우고 있을 때 싸움을 무력으로 저지하는 부모님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학교에 가거나 사회에 나가서 싸우는 모습만 보면 덮어 놓고 반대하거나 싸움을 멈출 생각만 하는 사람이 됩니다. '왜 싸우는가?' 하는 생각은 영원히 사라집니다. 버스나 지하철이 파업하면 우리가 습관적으로 비난만 하는 것처럼. 가정에서 배운 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증자가 말했다. '열 개의 눈이 부릅떠 보고 있고 열 개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데 무섭지 않은가
ㅡ 대학6장

가정에서 아이들이 경험하는 일들은 사회에 나가서도 무한반복되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입니다. 어쩌면 인생 자체가 하나의 오디션인지도 모릅니다. 서울생협의 의뢰를 받아 조합원 어머니들에게 강연을 하고 나서 점심을 함께 먹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한 아주머니가 아기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수업을 들었던 유모차 엄마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이들이 계속 울고 떠들어서 전 집중을 잘 못했는데, 선생님은 강의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으셨나요?”

만약 그 순간 내가 ‘뭐, 그런 부분도 있죠.’라고 대답했다면 나는 인생 오디션에서 실패했을 것입니다. 다행히 나는 순간 나의 대답의 찾았죠. 

“물론 아이들이 울고 떠들면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강의하는 데 지장을 미치죠. 하지만 부모 강의를 계속 하다 보니까 처음에는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들어왔는데, 그 다음에는 아이 엄마의 마음이 들어오더군요. 오죽했으면 아이가 떠들어 실례가 됨에도 불구하고 강의를 들을까? 이 마음이 대견하고 고마워요.”

갑작스럽게 받은 질문에 대해서 답변을 한 거였지만, 나중에 집에 돌아가고 나서 안도했습니다. 어른들끼리의 대화에서도 이렇게 살 떨리는 오디션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아이들과의 일상에서는 어떨까요? 부모님들의 주의집중과 긴장이 요구됩니다. 동양에서는 ‘마음 씀’과 ‘마음 반응’을 정확히 구분합니다. 강연을 할 때 아이들이 떠들면 주의력이 분산되고 짜증이 올라오는 것은 마음의 반응입니다. 마음은 원래 도망을 잘 치고, 조그만 것에도 반응을 잘 합니다. 맹자는 도망치지 않으면 마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학문의 길이란 다름이 없다. 그 달아난 마음을 찾는 것뿐이다."(맹자11-11)라고 말했습니다. 유명한 ‘구방심(求放心)’이 바로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마음을 쓴다는 것은 알아봐준다는 것이고, 사정을 헤아린다는 것입니다. 예양이란 자객은 자신의 주인을 위해 복수를 하다가 실패해 죽게 되자 조양자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서 죽고, 여인은 자기를 아껴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
- 사마천, <사기열전> ‘자객열전’

장난감을 가지고 다투는 아이들을 보면서 부모는 그저 욕심 때문에 서로의 것을 빼앗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아이들이 장난감 가지고 열 번을 다툰다고 해도 열 가지의 서로 다른 사정이 있기 마련인데, 이걸 알아주지 않으니 다툼은 더욱 심해지고 원망은 커집니다.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유명한 친구관계인 관중은 친구 포숙의 마음 쓰는 방법을 이렇게 칭찬합니다. 

“나는 세번 싸움에 나갔다가 세 번 모두 달아났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 사마천, <사기열전>, ‘관안열전’

냉장고에 장난감을 올리는 부모의 행동은 나름대로 아이들의 싸움에 대한 합리적인 결론을 내렸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 씀’이라기보다는 ‘반응’에 가깝습니다. 누군가 내 마음을 알아주면 표정이 편안해집니다. 부모님이 냉장고 위에 장난감을 올려놓으면 아이들 표정이 편안해지나요? 여기에는 다만 힘의 논리만 작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이의 마음에서 어떤 생각이 일어나고 있는지 동양철학의 목소리로 한번 들어볼까요?

무력으로서 사람을 굴복시키면, 마음으로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 맹자3-3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는데, 무엇이든지 적응하려고 해서 탈입니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사람의 이런 성향을 휴리스틱(Heuristic)이라고 말합니다. 휴리스틱(heuristic)은 ‘찾아내다’ ‘발견하다’는 뜻의 그리스 말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말로, 불확실하고 복잡한 상황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가능한 한 빨리 풀기 위해 쓰는 주먹구구식 셈법이나 직관적 판단, 경험과 상식에 바탕을 둔 단순하고 즉흥적인 추론을 뜻합니다. 운전을 처음 할 때는 핸들이나 라이트, 기어, 핸드 브레이크, 미러 등의 조작 방법이 복잡해 보이지만 6개월 정도만 운전하다 보면 따로 생각하지 않고서도 익숙하게 기계를 조작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눈 감고도 운전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차선을 바꿀 때, 후진으로 주차할 때 역시 느낌만으로도 반듯이 하는 수준이 됩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과신하다 보면 접촉사고가 나는 경우도 생기죠. 휴리스틱은 익숙하고 반복되는 상황을 몸에 입력해 놓았다가 바로 반응해서 시간을 줄여주기도 하지만, 큰 실수를 유발하기도 합니다. 특히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휴리스틱에 의존하면 안 됩니다. 이것을 의식하지 않으면 부모의 관념 속에 아이를 밀어 넣고 선입견의 눈으로 바라보기 쉽습니다. 그러면 아이 역시 부모를 관념 속에 밀어 넣고 선입견으로 바라봅니다.이렇게 계속 가다가는 ‘그런 부모’, ‘그런 아이’가 되어 버립니다. 실제 부모와 실제 아이가 사라지는 겁니다. 이제 ‘마음 쓰기’를 해야 할 이유가 충분해졌죠?

장난감을 가지고 다투다가 한 아이가 울면서 다가오면 그저 말없이 안아줍니다. 너의 아픔과 슬픔을 알고 있다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울고 있는 아이와 같은 표정을 지어주면 아이는 부모가 자기의 편이라는 사실을 인지합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을 때린 아이 앞에서 하면 자연스럽게 때린 아이가 틀렸다는 메시지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두 아이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이렇게 해야 합니다. 한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에 동조해줄 때도 마찬가지로 다른 아이가 들을 수 없도록 귓속말로 해주거나 표정으로 동의를 해줍니다. 부모가 자기의 뜻을 알아준다고 생각하면 아이들은 분노가 누그러지거나 득의만면해집니다. 장난감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둘이 다투다가 가지게 된 아이가 가지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이의 장난감을 빼앗아서 냉장고에 올리거나, 다른 아이에게 장난감을 건네주는 것을 보면서 그 아이는 깊은 좌절감을 느낍니다. 다른 방법을 쓰는 게 낫습니다. 다툼이 있는 장난감은 둘 다의 소유물이거나 누구의 소유물도 아닌 것이 많습니다. 소유가 명확히 정해지면 아이들은 탐을 내는 일이 별로 없거든요. 가지고 놀다가 나중에 빌려줄 수 있느냐고 물어봅니다.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다면 답을 하지 않거나 거절하는데, 그러면 조금 기다렸다가 마음이 풀리면 다시 물어봅니다. 나의 경우는 ‘시간’을 의인화시키는 방법을 썼습니다. 

민준이가 한 살 많은 사촌누나와 주먹다짐을 하고 나서 크게 울면서 제게 왔을 때 안아주고 화해하게 했더니 사촌누나가 아직 준비가 안 된 상태였습니다. 아이에게 “민준아, 시간은 똑똑한 친구지? 시간한테 맡기고 조금 기다리면 어떨까?”라고 제안하고 그네타기를 같이 하면서 놀고 있었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사촌누나의 마음이 누그러졌는지 먼저 와서 아이에게 사과를 합니다. “그것 봐, 시간은 똑똑하다고 했지?”라고 말해줍니다. 물론 이렇게 좋게 끝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서 시간을 지연시키는 방법을 쓰면 언제나 효과가 있었습니다. 마음은 항상 달아나지만, 그때마다 되돌아오는 것도 잊지 않으니까요. 
이런 과정들이 어떻게 보면 상당히 번거롭고 복잡합니다. ‘이렇게까지 해야 돼?’ 하고 질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남은 세월을 생각해보세요. 부모가 없어져도 아이들은 부모와 관계 맺었던 경험을 종자돈으로 삼아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부모의 마음 씀이 아이의 인생에 큰 상처를 준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 중에서 한 가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개만 보면 벌벌 떠는 사람의 한탄입니다. 

"어른들은 모두 내가 어려서 그런 거라고, 크면 괜찮아질 거라고만 하셨어. 하지만 개에 대한 두려움은 커서도 없어지지가 않았고 난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개를 무서워했어. 그때 부모님이 나에게 개에 대해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무조건 피하기만 하지 않고 개에 대한 두려움을 스스로 극복하도록 도와주셨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스트레스를 받으며 힘들어하진 않았을 테니까."
- 상진아, <행복한 놀이대화>, 89쪽

마음은 외과수술처럼 제거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알아주고 감싸주면서 치유될 때까지 기다려주는 대상입니다. 장난감을 냉장고 위에 올리는 부모의 마음을 ‘마음 씀’의 방법으로 읽어 본다면, 아이들이 다투고 때리는 상황이 싫은 겁니다. 안타깝게도 그 원인이 장난감에 있다고 보고 애꿎은 장난감을 희생양으로 삼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부모님의 마음속에 펼쳐지고 있는 근원적인 모습을 보면 부정적인 상황이나 싸움을 보면 피하고 싶은 욕구가 담겨 있습니다. 부정적인 상황을 피하고 싶어하는 부모님은 마음은 부모 역시 어렸을 적에 부모로부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부모님의 부모님에게로 문제는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이들이 다시 부모가 되었을 때 또다시 부정적인 상황을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만큼은 상황을 직면하면서 슬기롭게 해소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선에서 문제를 해소하는 부모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부모님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