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2. 솔직히 말하는 동양철학 (1) 동양에서 민주주의가 꽃피지 못하는 까닭은?


나는 소심한 남자입니다. 지금까지 2,000여 명의 가족들을 만나면서 육아와 책놀이 강의를 하면서 조금씩 인문학 내용을 덧붙여 왔는데, 동양철학을 이야기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년 넘게 엄마들을 만나면서 나는 보았습니다. 엄마, 아빠의 마음속에 담겨 있는 갈증을. 육아서가 보여주는 시선의 편협함, 미안하게 만드는 불편함을 넘어서 가족을 제대로 바라보고 제대로 사랑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나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내 육아철학의 정점인 동양철학까지 보여드렸지만 거부감은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편안하고 행복한 표정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좋은 걸 알았다면 처음부터 동양철학으로 육아 이야기를 할 걸 그랬습니다. 하지만 조금 다른 동양철학이어야만 합니다. 정직하지 않았기 때문에 철학이 이 모양이 되었다는 철학자 윌 듀런트의 말처럼 어렵게 만든 가족, 어렵게 낳은 귀한 아이들을 위해서 조금 더 가치 있는 선물을 주기 위해서는 정직한 눈으로 처음부터 다시 동양철학을 뜯어봐야 합니다. 동양철학은 두 가지 지독한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맹목적 숭배와 맹목적 배척이 그것입니다. 이를 들어내기 위해서는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의 작동원리를 살펴봐야 합니다. 서양철학은 이른바 ‘반발의 원리’가 숨어 있고, 동양철학은 ‘교조주의’가 숨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스승 플라톤의 철학을 반박하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진리를 구제하기 위해서는, 더구나 철학자로서는, 우리와 아주 가까운 것들까지도 희생시키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 보인다. 친구와 진리 둘 다 소중하지만, 진리를 더 소중하는 것이 경건하기 때문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도서출판 숲), 22쪽

만약 동양의 어떤 지식인이 공자의 철학을 반박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곧바로 파문을 당합니다. 파문(破門)이란 학교에서 쫓겨나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된다는 걸 의미하고, 생계가 끊기는 것을 말합니다. 노자와 장자 등 극소수의 지식인만이 공자를 비판할 만큼 동양철학의 교조적인 전통은 강고합니다. 이를 다른 말로 훈고학(訓詁學)적 전통이라고 하는데 동양철학의 특징은 주석가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스승의 철학에 대해서 반박은 못하고 주석을 달면서 작은 글씨로 자신의 생각을 부연하는 방식이 동양의 지적 전통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이런 방식으로 동양의 지혜를 찔끔찔끔 선사할 수 없습니다. 과감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승 플라톤에게 들이댄 척도로 동양철학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동양철학에 덧씌워진 편견을 걷어낼 수 있습니다. 벼룩 잡는다고 초가삼간까지 다 태울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의 또 다른 차이점은 야심이 넘치는 서양철학에 비해서 동양철학은 왠지 체제 순응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서양철학은 때로는 정치세력에 의해서 채택되기도 했지만 그 이상이었습니다. 세상을 설명하고 세상을 담아내려는 야심으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동양철학은 정권에 입맛에 맞게 적절히 활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치 주문자 생산 방식처럼 정권에 부역해왔던 역사가 있습니다. 노자와 장자가 대단한 까닭은 동양철학 중에서도 무척 예외적인 기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양철학의 가장 취약한 점은 민주주의를 약화시킨다는 데 있습니다. 서양철학은 너와 나의 구분이 강할 뿐만 아니라 나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히 강해서 자기중심적으로 느껴질 정도인데, 동양철학은 너와 내가 같다는 입장이 무척 강합니다. 가정에서 배워야 할 중요한 덕목이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경계해야 할 대목입니다. 민주주의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과 맹자의 말을 함께 인용해 보겠습니다. 

국가는 본성적으로 하나의 복합체다. 따라서 국가는 복합체에서 점점 더 통일체가 되어갈수록 국가 대신 가정이 되고, 가정 대신 개인이 될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도서출판 숲), 66쪽

천하의 근본은 나라에 있고, 나라의 근본은 집에 있고, 집의 근본은 자신에게 있다.
ㅡ 맹자7-5

권위주의 정부 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말했던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말을 기억하시나요? 동양권 국가 중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꽃피었다고 할 수 있는 나라를 찾기가 어려운 것은 동양철학이 가지고 있는 반(反) 민주주의적 특징 때문입니다. ‘국가와 가정과 내가 하나’라는 말은 일견 타당하지만 하나이기도 하고 하나가 아니기도 합니다. 얼핏 보면 모순돼 보이지만 그것이 바로 ‘성숙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와 나의 구분을 할 때 얻을 수 있는 효과와 너와 나의 구분을 하지 않을 때 얻을 수 있는 것, 그리고 잃을 위험이 있는 것을 모두 검토해야만 제대로 된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개인의 인격이 있기에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부분, 가족관계로 강제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복합성은 나의 생각과 다른 여러 가지 생각이 공존하면서 하나의 완성체인 국가가 성립된다는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맹자>라는 책을 보면 맹자가 거의 억지에 가까운 주장으로 ‘이단’의 학설들을 배척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유학의 정통을 지키기 위한 눈물겨운 투쟁으로 볼 수 있겠지만, 학문의 다양성 측면에서는 유치하고 편협한 억지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공자 역시 “누가 방문을 통하지 않고 집밖으로 나갈 수 있겠는가? 어찌하여 올바른 이 도를 따르지 않을까!“(논어6-16)라며 이단학설을 경계했습니다.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사서(四書)로 정리한 송나라의 주자는 자신의 철학에서 불교의 학설을 많이 인용하지만 도교와 불교를 한데 묶어 허무적멸(虛無寂滅)이라고 싸잡아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대학 서문) 편협할 뿐만 아니라 정직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동양철학을 보다 보면 이렇게 위선적인 대목이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노자와 장자는 아예 대놓고 유학의 위선적인 모습을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동양철학을 읽는 태도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 아니라 반고지신[反故知新]의 방법을 써야 합니다. 온고지신은 논어에 나온 말로 옛 것을 따뜻하게 데워서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는 말인데, 따뜻하게 데우는 수준으로는 부족하고 펄펄 끓여야 진정한 새로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고전을 돌이켜보되 좋은 점과 그렇지 않은 점을 냉정하고 상식적인 관점에서 엄밀히 찾아보고 활용해야 합니다. 즉, 동양의 철학자들이 의도한 것뿐만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것까지 보아야 아이들에게 선물할 만한 가치가 됩니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라는 극한의 시간 동안에는 유학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사실에는 동양철학의 비극이 숨어 있습니다. 현실감각이 부족하고 고루하게 이상만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유학이 비현실적인 철학을 추구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동양의 고대사는 편법과 궤변, 임기웅변, 권모술수의 경연장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동양철학 전문가는 오히려 동양철학의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할 위험이 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동양철학의 교조주의가 몸에 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상식의 눈으로 동양철학을 바라보고 옥석을 제대로 가려낸다면, 지금까지는 보지 못했던 동양철학의 아름다운 모습이 드러날 것입니다. 만약에 동양철학이 반민주적인 요소만 있다면, 고루하기만 하고 쓸모가 없다면 애초에 관심을 끊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양철학에는 ‘뭔가가’ 있습니다. 몇몇 가지 독소들 때문에 동양철학의 진가가 발휘되지 못하고, 지적인 유산들이 방치되고 있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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