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4. 냉장고 위에 장난감을 올리는 부모님께 (1)
남자 형제를 키우다 보니 아이들의 취향이 서로 비슷합니다. 또봇Z 신제품을 하나 사주면 서로가 갖겠다며 전쟁이 벌어집니다. 설거지를 하고 있거나 다른 일을 보고 있을 때는 소리를 크게 지르거나 맞아서 우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아이들이 싸우는지 알게 됩니다. 갑자기 화가 치밀어오릅니다. 아이들에게 가서 장난감을 빼앗은 다음에 아이들이 볼 수 있게 냉장고 위에 올리면서 한마디 합니다.
“장난감 때문에 싸우면 냉장고에 올릴 거야!”
냉장고 위에는 또봇뿐만 아니라 파워레인저, 각종 자동차 등 장난감이 이미 많이 올라갔습니다. 혹시 여러분의 가정에서 벌어지는 일은 아닌가요? 나도 한때는 냉장고에 장난감을 올리는 아버지였습니다. 형제를 키우는 부모님 중에서 냉장고에 장난감을 올리지 않는 부모님은 참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참 많이들 싸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TV를 보면 국회에서 멱살을 잡고 최루탄을 뿌리는 모습을 잘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싸움을 잘 하는 게 아니라, 싸움에 취약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싸우는 상황에 무척 취약합니다. 소리를 지르거나 주먹이 나가거나 멱살을 잡는 게 더 편합니다. 오죽했으면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까지 나왔을까요? 동양은 예부터 싸움 잘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오묘한 도를 설파하는 노자로부터 전쟁의 신이라 추앙받는 손자에 이르기까지 동양이 말하는 ‘싸움의 기술’은 싸움 자체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듭니다.
훌륭한 사관(士官)은 무용(武勇)을 앞세우지 아니하고 잘 싸우는 사람은 성을 내지 아니하며 잘 이기는 사람은 적과 맞붙지 아니하고 사람을 자 부리는 사람은 그 사람 밑으로 내려간다. 이를 일러 다투지 않음의 덕이라 하고 이를 일러 사람 부리는 힘이라 하고 이를 일러 하늘의 짝이라 하니 옛날 도의 지극함이다. – 도덕경 68장
동양에서는 완력이나 지위, 목소리 등으로 위협하는 싸움을 비웃었습니다. ‘나는 용감함을 좋아합니다.’라고 말하는 맹자는 “왕께서는 작은 용감함을 갖지 마십시오. 대저 칼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화낸 눈초리로 쏘아 보며, '그가 어찌 감히 나를 당해 내랴!'고 한다면, 이것은 필부의 용감함으로, 한 사람만 대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맹자2-3)라고 충고했습니다. 아이들이 싸울 때야말로 싸움의 기술을 가르칠 최적의 타이밍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 이렇게 싸우는 모습을 보면 나는 참 슬플 것 같습니다. 동양철학 중에서도 ‘믿고 쓰는’ 정신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느림’입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 제목처럼 동양은 느리게 걷고 느리게 사고합니다. 느린 시선으로 냉장고에 장난감을 올리는 부모님의 마음을 보면 ‘평화에 대한 집착’을 읽을 수 있습니다.
송나라에 사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밭에 심은 벼싹이 자라지 아니하는 것을 가엽게 여겨 이를 다 뽑아버렸다. 그 사람은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에게 말했다 ‘오늘은 피곤하다. 내가 벼싹을 자라게 도와 주었다’ 그의 아들이 황급히 뛰어나가서 밭을 살펴보니, 벼싹은 이미 말라버렸다. 천하에는 벼싹을 자라게 도와주지 않는 사람이 적을 것이다.
- 맹자3-2
평화는 어떻게 찾아오나요? 한번 격렬하게 싸우고 나서 ‘우리 이렇게 살지 말자’는 반성이 들면 평화가 옵니다. 미국이 인종차별에 대해서 세심한 제도를 갖출 수 있었던 까닭은 엄청난 인종차별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일이 극우정당에 대한 정치적 견제 장치가 강한 까닭은 나치 정권의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럽이 노동자 의식과 연대, 가치에 대한 높은 수준의 이해를 보여주는 까닭은 잔인한 착취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시민운동, 시민사회, 시민 그 자체에 대한 사회적 이해가 부족한 까닭은 그만큼 역사가 짧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책과 라디오 등 미디어들이 어떻게 평화를 찾게 되었는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기막히게 드라마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디어 전문가인 마셜 매클루언은 “새로운 미디어는 이전의 오래된 미디어가 평화롭게 가만히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두 개의 해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듯 새로운 미디어는 낡은 미디어가 새로워진 환경에 맞는 새로운 형태와 자리를 발견하는 순간까지 쉬지 않고 압박을 가합니다. 인류학자이자 언어학자인 다니엘 네틀, 수잔 로메인에 따르면 지난 5백 년 동안, 우리에게 알려진 세계의 언어들 중 거의 절반 가량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제주 방언 역시 2010년 12월 유네스코에 의해 ‘심각한 위기에 처한 언어(Critically Endangered Language)’로 분류되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언어와 미디어가 평화를 찾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싸우는 아이들을 보면서 부모가 갖기 쉬운 ‘평화에 대한 집착’에 대해 한번쯤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라디오가 나타난 뒤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에서는 옛날에 쓰던 말들이 되살아 났고, 이스라엘에서는 더욱 놀라운 언어의 부활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지금 수 세기 동안 책 속에서 줄어 있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 마셜 매클루언, <미디어의 이해>(커뮤니케이션출판부), 515쪽
아이들이 장난감을 차지하려고 싸우는 모습에서부터 다서 한번 천천히 생각해보면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싸우는 아이들을 무턱대고 수수방관할 필요는 없지만 부모님의 빠른 반응은 아이들의 성장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앞으로 평생 동안 이와 비슷한 상황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무척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이들이 장난감 가지고 다투는 것은 어른들이 이해관계나 가치판단 때문에 서로 옳다고 다투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부모님들이 평화상태에 집착해 다투는 아이들을 서로 떼어 놓고 장난감을 냉장고에 올릴수록 아이들은 부정적인 상황에 대한 대응능력이 떨어집니다. 아이들 마음의 밭에 뿌려 놓은 벼싹을 뽑아버리는 일과 같습니다. 충분히 서로 감정표현을 할 수 있도록 기다리고, 주먹다짐을 하더라도 성급히 떼어놓지 않아야 합니다. 아동심리학자들도 어린아이들의 근육과 완력이 세지 않기 때문에 어릴 적에 주먹질을 하거나 얻어맞은 경험을 미리 해두는 것이 좋다고 조언합니다.
역할극을 마음속에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대개의 부모님들은 형제들을 피고나 원고, 또는 변호사나 검사를 앞에 둔 판사처럼 행동합니다. 결론을 내 주는 거죠. 하지만 아이들이 싸울 때 부모가 할 수 있는 좋은 역할은 바로 ‘기자’입니다. 기자는 상반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취재하면서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 보고 기사에 반론을 싣습니다. 기자 스스로 판단을 하지 않고 독자들의 판단에 맡깁니다. 판사가 가지는 마음이 책임감이라면, 기자가 가지는 마음은 ‘궁금함’입니다. 궁금하지 않으면 혼을 내고 장난감을 냉장고에 올립니다. 나는 두 형제가 장난감을 가지고 싸울 때 조금 기다리고 개입할 타이밍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차분한 어조로 한명씩 이유를 물어봅니다. 아이들의 고조된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일을 그르칩니다. 부정적인 감정, 즉 화가 날 때는 속도가 급격히 빨라집니다. 부정적인 감정일수록 일부러 속도를 느리게 가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나는 종이와 펜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화가 나서 감정이 빨라진 상황에서 느리고 차분하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디어가 주는 효과를 따로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가 세 살이기 때문에 두 살이 많은 형에게 맞고 나서 울면서 찾아올 때가 많습니다. 종이와 펜을 준비하고 최대한 다정하게 물어봅니다. “민서(둘째 이름)야, 왜?” 둘째는 울먹이면서 “형아가 때려쪄!”라고 대답합니다. 나는 종이에 둘째가 말한 내용을 소리 내서 천천히 받아 적습니다. 이때 둘째의 표정을 힐끗힐끗 바라보면서 변화를 관찰합니다. 그 다음에 ‘문제’의 형인 첫째를 부릅니다. 이 때 주의할 점은 취조를 하듯이 물어보거나, 아이가 방어를 하도록 물어보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살살 달래며 마치 ‘낚시’를 하듯 물어봅니다. “민준(첫째 이름)아, 민서가 울고 있네. 형아가 때렸다고 하던데.” 첫째는 자기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점을 항변하기 위해서 대답합니다. “민서가 내 장난감 가져가잖아.” 나는 둘째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펜으로 첫째가 했던 말을 소리 내서 천천히 받아 적습니다. 역시 첫째와 둘째의 표정을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변화를 관찰합니다. 자신이 한 말을 부모가 받아 적었을 때 아이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습니다. 아이들이 엄마에게 이야기할 때 엄마는 대개 돌아서서 설거지를 하고 있거든요. 아빠들은 책을 보거나 TV에 시선을 떼지 않고 입으로만 아이의 말에 대답을 하거든요. 이런 엄마 아빠가 아이가 한 말을 경청하고 펜으로 받아적는다는 것은 충격적인 경험입니다. 부모가 아이를 존중한다는 강력한 표현이거든요. 둘째에게 다시 물어봅니다. “민서가 형아 장난감 가져갔다는데?” 둘째는 억울하다는 듯 대답합니다. “형아가 주기로 해놓고서 안 주잖아.” 둘째의 말을 똑같이 따라 씁니다. 아이들의 표정을 힐끗 힐끗 보라고 한 것은 아이들 표정에서 화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 처음 싸웠을 때 화가 풍선만큼 커졌다면, 펜으로 받아 적으면서 이야기를 듣고 나면 탁구공만큼 작아졌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말을 소리 내서 따라 하는 이유는 역시 존중의 표현입니다. 누가 잘못하고 누가 잘했는지,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판단하지 않아도 당장 아이들의 감정 상태를 존중하기만 하면 아이들의 화는 누그러집니다. 굳이 판단을 할 필요도 없고 잘잘못을 가릴 필요도 없습니다. “너희들이 장난감 때문에 싸우면 내 마음이 슬퍼져.”라고 말해도 충분합니다. 형제가 있는 아이들 싸우는 문제가 부모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옆에서 한 엄마가 한마디 합니다. 이 말에 모든 부모님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잠잠해집니다.
“우리 가족은 아들만 하나라서 장난감 가지고 싸울 기회조차 없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