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회근 선생의 알기 쉬운 논어강의 - 상
남회근 지음, 채책 기록. 송찬문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독후감이라고 쓰니 참 감회가 새롭다. 이것을 번역해서 뜻을 알아낸 것은 최근이었는데 '읽은 후의 감동'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남회근 선생의 논어강의라는 책은 다시 생각해봐도 너무 비싸다. 특히 나처럼 별다른 생계도 없는 학생에게 삼만여원의 돈은 형성하기 힘들다. 게다가 상하권을 구입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린다. 그래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내게 있어서는 하나의 발견이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친 김에 미친척하고 하권을 주문했다. 그리고 하권이 도착하기 전에 냉큼 상권에 대한 독후감을 써버릴테다.

글을 쓰는 건 아무리 봐도 힘들다. 방금 전까지 독후감을 쓰기 위해 책을 좀 봤는데 지금 내 눈 사정이 말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눈을 더 좁혀서 거의 졸린 눈을 하고 쓰고 있다. 작가들이 참 존경스러울 때가 바로 지금이다.

하나의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해 글을 쓸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러나 원작에 촛점이 실리느냐, 독자에게 촛점이 실리느냐에 따라서 내용이 달라지게 된다. 전문직종이 아닌 바에야 대체로 쓰는 타입은 후자가 될 것인데 그것도 아직 숙성하지는 않다. 내가 글을 쓰는 방식이 그러한데 머릿속에 생각나는 것을 다 비워내야 속이 풀린다. 그것은 시적 거리감을 위해서도 위험한 일이다. 그렇다고 감상으로 도배를 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이럴 거면 차라리 창작을 하는 편이 수월하겠다. 다른 책을 보고 혹은 작품을 보고 그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자기 지론이나 문장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할 것 같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더 솔직한 이유는 전일에 노래를 부르고 다녔던 그리스 철학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서다. 많은 자료들 앞에 선뜻 집필을 하기가 머뭇거려지지만 빨리 내가 선정한 자료들을 훑어보고 칼을 뽑아야겠다. 아! 오늘도 서론이 너무 길다.

사실 논어에 관한 에세이라면 논어 자체의 내용만 두고라고 유익한 일이다. 덕분에 나는 논어와 한 노인의 이야기 두 맛을 한꺼번에 보았다. 그전에는 그래도 논어책 한두번은 읽은 경력으로 자신있게 책을 쥐었다.(참고로 이 책을 읽기 전에 논어 전편을 어느 텍스트라도 잡고 봐두면 도움이 크다) 그러나 이전에 내가 익혔던 해석의 방침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말았다. 대개 이러한 경우에 남는 것은 허무한 공허나 독단의 기만 정도인데 그것이 아니다. 오히려 남회근이라는 파격적 해석자는 모습을 살짝 감추고 건강한 원시의 깔끔함이 남겨졌다. (공맹 유학을 원시 유학이라고도 한다) 확실히 노인의 노련함이 진가를 발휘한 것이다. 남회근이라는 노인이 구름을 걷어가고 남은 뚜렷한 자리는 사실 한마디 뿐이다. 그것은 '경으로 경을 이해한다'는 이른바 '以經解經'이다.

나는 책을 고를 때 대개 머리말을 보는 타입이다. 머리말에 들어가기 전에 흑백사진으로 남회근 선생의 근영이 나왔는데, 일자눈썹에다 코든 머리든 손가락이든 볼이든 둥글둥글하다. 웃는 표정도 그렇다. 그 웃는 표정은 머리말에서 나에게 한가지 암시를 주었다. 그것은 마지막 대목이었는데

이 책이름을 '별재別裁'라고 정한 것도 이번의 강의가 정통유가의 정학 밖에서 다른 체재로ㅎ 이루어진 단지 개인적인 견해일 뿐, 학술적인 부류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학상달下學上達의 일을 논할 만한 정도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초판 머리말 중에서

별재라는 것은 아마 우리말로 별책부록 정도가 아닐까 한다. 저잣거리에서 파는 눈요기용 책이라는 의미가 문맥에 보인다. 왜 정통유학에 깊이 통하고 불교 도교에다가 대학 교수까지 하여 논문이라면 달인이 되었을텐데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물론 이 의문은 책을 선택한 후에 자세히 느낀 것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남선생이 문화와 민족의 근대사적 아픔을 온몸으로 쓰리도록 감당했고 누구보다 사랑했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욕구에 가득 차 있다는 억측으로 본다면 이는 분명히 이전 학문적 접근에 대한 회의일 것 같았다. (이것에 대해 여친은 좀처럼 수긍할 수 없다는 눈치다) 그리고 어투를 존댓말로 써 내려가는 것도 내게는 인상적이었다. 존댓말로 써 내려간다는 말은 내가 생각할 때 상당한 경지에서 나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그리고 차분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실타래를 풀어나가듯이 말 속에서 같이 돌면서 풀어나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크리슈나무르티가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은 종전에 원문과 주석을 두루두루 보던 습관을 버리고 주석을 일단 버려둘 것을 제안한다틀렸다고 하기 일쑤다. 이 글을 읽고 과거 문화와 선인들을 내가 얼마나 과소평가하고 있었는지 새삼 알게 되었다. 그것은 특히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그 원문을 앞뒤좌우로 잘 살펴보라고 한다. 뭐가 보이지 않느냐 하면서. 사실 우리는 죽은 사람들의 위치나 존재를 너무 자의적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정리해내지 못하면 그것을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내 의도와는 관계없이 선현들을 무시하거나 마음대로 다루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기 때문에 더욱 가려내기 어렵다.

문화와 기술이 언제부터 결별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혹은 결별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둘은 서로 뜻이 맞지 않았는지 기술은 앞만 보고 내달렸고 문화는 가만히 멈춰 버린 것 같다. 선현들과 이전문화의 성실치 못한 재판(再版)에 불과한 우리는 실마리도 알지 못하고 사장시켜버린 고귀한 유산들이 얼마나 많은가. 축성술, 건축술, 종을 만드는 기술, 도자기 만드는 기술 등 많은 기술은 선현의 업적을 따라가지 못할 뿐더러 제대로 모방하지도 못한다고 한다. 그것은 책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마침 최근에 내가 다니는 서당의 훈장님이 말씀하셨는데, 이전에 편집 기술은 정말 오묘하고 세밀하다고 한다. 그 때도 당연히 '영원한 맹자'를 보고 있었는데, 맹자는 권도라는 말은 한마디도 안하면서 권도에 대해서 여러 방향으로 말하고 있었다. 맹자도 이러할진대 할아버지 혹은 증조할아버 격인 논어는 어떠하겠는가? 한학에 정통한 학자들도 한문의 문장은 모두 맹자나 논어에서 나온다고 한다. 당시로 말하면 세계제일의 인재들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논어라는 책을 편찬하였다. 지금 각국의 석학들이 성경을 자국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과 비슷하다. 남회근 선생은 논어의 문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기적으로 연결된 잘된 글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러한 문맥적 상호작용을 염두해 두면서 한권의 책을 서술해 나갔다. 역사가는 하나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카아가 말하듯이 한 사상에 대한 해석도 관점으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물론 관점이 있으면 그에 대한 비약도 따르기 마련이다. 간간히 그런 부분이 없지 않지만 노인의 숙련된 이야기로 충분히 커버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 다음으로 눈에 띄는 부분은 이전의 해석에 대한 비판이다. 중국이 한창 문화혁명이 일어나고 있을 때는 많은 중국인들이 세계 정세에 궤를 같이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절박한 위기감에 휩싸였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래서 공자의 상을 부수고 그의 토대 위에 세워진 문화를 논리적, 비논리적으로 비판하려고 달려들었지만 화무십일홍처럼 얼마 못가 다시 복원하기 시작하였고 오히려 비판에 가세하던 서양에서 공자를 배우려고 혈안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의 시대가 그들에게 준 너무나 무거운 짐을 어떻게든 감당하려는 절박한 발상에서 시작한 사건이었다고 저자는 그들을 조용히 두둔해주고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최근 김교수라는 사람이 공자를 죽이고자 나섰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읽어보았는데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지금도 변하지 않는 생각이지만 나는 그가 진정으로 공자를 죽이기를, 그렇지 못한다면 후세에 교훈이 되도록 정당하게 죽이려는 시도라도 남겼으면 했다. 진정한 질문이 진정한 가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서점에서 그 책을 보았는데 커버 색깔이 시원한 바다출판사 색으로 바뀌었고 판과 쇄를 수십번 하였더랬다. 씁쓸한 미소 외에 별로 느껴지는 게 없었다. '당신은 공자를 죽였다기 보다 쉽게 열정을 보이는 국민의 기질을 이용해서 돈을 챙긴 거요?'라는 질문을 견딜 수 있는지 마음속으로 물음을 가져본다.
논어강의의 저자는 공자의 해석자들이 공자를 의곡하였기 때문에 지금의 이 사태에 직면했다고 풀이하고 있다. 물론 내 생각에 그것은 하나의 가설이라고 본다. 좀 더 다른 무엇이 요구되는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공자가 영원에 닿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지금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논어텍스트는 대개 주자집주일텐데 주자주 정도를 버리는 것은 아깝지 않으나 존경하는 율곡선생의 구결까지 때로는 버려야 한다는 대가가 따른다. 한문에 달려 있는 토씨를 구결이라고 한느데, 그것은 옛부터 율곡 선생의 그것을 따르고 있다고 한다. 구결이 바뀌면 문장 성분도 바뀌고 해석 자체가 바뀌게 된다. 이것이 저자가 보이는 두번째 억측의 여지도 되지만 그는 자신의 해석의 확실한 근거들을 들고 있다. 가끔 쉽게 넘어가 버리기는 하지만 다른 해석들처럼 빙산을 절단기로 깎아서 공허하게 하는 형세가 아니라 새로운 빙산으로 예전의 빙산을 쳐서 대치시키는 형세라고 표현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을 보고서 내가 얻은 소득이라면 숨겨졌던 문맥이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경전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故의 수수께끼'에 말려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의 내용 뒤에 '때문에'라는 말이 나오면 분명히 인과관계가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 없을 때가 있다. 이전에 논어를 읽을 때 공자는 어쩔 때는 유동적이며 인정세태에 두루 통한 듯한 인상을 주지만 어떤 때는 완고한 할아버지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공자의 말 자체가 이해가 안 가는 부분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어려움에 특히 배려를 하고 문맥을 살리고 공자의 본의를 복원하는데 거의 모든 페이지를 썼다. 덕분에 나는 공자의 올바른 모델에 접근하는 상을 머릿속에 갖게 되었고, 한 이십년 정도 젊은 공자를 모시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읽은 가장 큰 소득이다.

좀더 본격적인 글을 써서 이 글이 나타내고 있는 특징들을 살펴보고 싶지만 글의 성격도 성격이고, 그렇게 할 시간이 없기도 하기 때문에 예고편으로 하나의 대목만 귀뜸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논어의 제일 첫편은 학이편으로 '배움'이라는 의미를 알려주는 중요한 장이다. 이 때의 '학'이라는 개념은 좀 더 확장을 해야 하는 개념이다. 나는 독서라는 개념에서부터 출발해서 더욱 넓은 개념으로 가고자 하였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이 '학'의 개념은 심오하기도 해서 지금까지 논란의 여지가 많았다. 나름대로 그것을 해석해 본다면 '하나하나 체험하고 직접 깨우쳐 가면서 얻은 진정한 지식이 몸에 배어 있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자하는 '현명한 자를 벗으로 두어 자기의 잘못을 고쳐나가고 제힘껏 부모를 모시고 온몸으로 주인을 섬기고 벗과 교제할 때는 신의 있게 말을 한다면 비록 글공부는 하지 않았다고 할지라고 나는 반드시 학문을 한다고 평가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공자가 말하는 학문정신의 모습이 보인다. 또한 자로가 공자에게 '선생님, 백성들이 있고 사직이 있는데 꼭 독서를 해야만 학문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은 대목에서는 분명히 차이점이 드러난다. 학이시습지운운 하는 장 다음에는 바로 유자가 효제를 강조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효제와 학을 연결시켜 이해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즉 효제는 가족들에 대한 윤리를 강조하고 있는 덕목이며 뿐만 아니라 독특하게 벗과의 교제도 강조한다. 가족은 가깝게는 어버이를 섬기는 일이 있는데 어버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리는 것이 효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몸을 잘 아껴서 과로사에 이르거나 상하지 말하야 하며 형제들과의 우애도 잘 지켜야 한다. 이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안다. 세상에 가족에 대해서 부끄러운 점이 없거나 잘못이 없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일 것이다. 그 점으로 따지면 아직 나는 '학' 자의 한 획도 긋지 못했다. 항상 누나에게는 성급하고 애티나는 말을 쉽게 내뱉고 내몸을 관리하지 못해 벌써 열번이 넘는 전신마취를 하여 부모의 속을 태웠다. 이것은 나를 모르는 다른 사람에게 적절히 대응하는 것의 몇백배는 더 힘든 경지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과거 중국의 국가 개념은 하나의 대가족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유가는 그러한 관계에 주목한 학파다. '가'는 할아방(할아버지)의 할아방의 할아방 중에 왕할아방에서부터 시작해서 씨를 낳고 또 그 씨가 씨를 낳아서 형성된 국가이다. 때문에 왕실이 한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효제라는 것은 나라 전체로 연결되는 개념이다. 게다가 친구와의 관계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라면 사회관계까지 효가 걸쳐 있는 셈이다. 그것이 바로 '인'과 '학'의 근본이자 시작이라고 저자는 보고 있다. 일단 본문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한다.

논어의 백미는 담박함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논어를 읽고 있으면 자꾸 눈물이 나려구 한다. 안연이 죽어서 공자가 통곡할 때는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공자가 제자들과 산책을 가거나 조용하게 한마디 하는 대목에서는 이상하게 가슴이 뭉클 답답하고 눈물이 콱 쏟아질 것 같다. 그 이유를 한번 고민해봐야겠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하권을 보고나서 논어를 마음속에서나마 정리해야겠다.

사람의 뼈대를 형성하는 것은 고전이지만 고전에 침잠하면 그만큼 고전적인 사람이 된다는 단점이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고전적인 부분을 유머로 승화시켜서 하나의 장점을 갖지 못한다면 어딜 가서 사랑받을 생각은 애초에 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그것이 요즘 나의 큰 숙제이다.



* 賢賢易色, 事父母, 能竭其力, 事君, 能致其身,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胃之學矣 -學而 8
** 有民人焉, 有社稷焉, 何必讀書, 然後爲學
- 先進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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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8
최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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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최윤의 소설『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이하 ‘꽃잎’)은 소설로서 묘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일단 작품 안에서 뚜렷한 반동 인물이나 갈등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이 소설의 창작 의도와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글쓴이는 하나의 이야기에 여러 가지 시점을 배열하여 사태에 대한 다각적 조명을 은유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그 목소리는 다분히 신비롭고 희미하며, 메시지의 전도사는 가장 힘 없는 자, 그것도 제정신이 아닌 ‘소녀’를 필두로 세웠다. 즉 글쓴이는 5․18 참극의 현장에 모자란 소녀와 불안정한 장씨, 미미한 젊은이 몇몇을 담궜다가 끄집어 내서 소설 위를 걸어다니게 만드는 데 그들은 가슴 한 쪽에 결여를 하나씩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찾아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나는데, 이 이야기는 바로 ‘기약 없는 여행에 관한 기록’이다.

이 이야기의 시작점과 구조는 명확하다. 그날을 시작점으로 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그날 이후 싫지만 대면할 수밖에 없는 흔적․고통을 하나씩 걸머지고 인물들은 여행을 떠난다. 때문에 소설은 표면적 갈등보다 이면적 갈등에 더욱 관심을 쏟으며 장막, 희미함, 비정상, 약자의 이미지가 주를 이루는 것은 이 점을 더욱 부각시키려는 의도이다.
그것은 일종의 조직적 낯설게 하기이며 독자에게 커다란 물음표를 던지려는 글쓴이의 의도이다. 글쓴이의 언어로 표현하면 ‘바이러스’에 걸린 독자들은 그 ‘물음표’에 주목하기 시작했으므로, 시선을 소녀에게 맞춰둔 채 소녀의 비문법적이고 암호 같은 말들과 그보다 더 이상스런 행동들을 따르며 소설 끝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중심인물들의 대체적인 특징은 자신 안에 이중성, 모순성, 동요를 곳곳에 노출시킨다는 것인데, 그것은 그 폭력이 정당한가, 폭력에 대항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정의와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혼란에 기인하며, 그것은 국가, 곧 나라에 대한 폭력과 이를 강요하는 권력 앞에 약자들이 놓이게 되는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것을 소설 속에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 ‘장’이다. 장을 말할 때는 그가 일정한 벌이 없는 방랑아이며 초여름의 무더위, 짜증, 불안, 공격성 등의 이미지와 함께 보아야 한다. 무모한 공격성은 장면#2를 연상케 한다. 만약 나에게 이 소설의 첨삭 권한이 주어진다면 ‘장’에게 진압군에서 탈영하여 숨어산다는 조건값을 주고 싶다. 유리된 불만 많은 떠돌이에게는 일반적인 전형을 연상하기 어렵다. 때문에 ‘장’은 소녀가 필요한데 그 근거마저 한미하다고 본다. ‘장’이 자신의 소설적 캐릭터마저 반납하고 소녀에 매달릴 정도의 가치가 있었을까. 이 부분이 글쓴이가 가지고 있는 ‘소녀’와 ‘사건’에 대한 집착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제주도를 떠나지 않고서는 도저히 작가적 관점에서 이야기를 쓸 수 없었습니다.’

4․3을 다룬 소설 ‘순이 삼촌’의 저자 현기영의 회고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이 소설은 여러 시선을 가지고 ‘그날’을 조명하고자 한 작가의 세심한 의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의식’과 ‘단면적 불균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건’이 시종일관 은유와 환상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에 비해 소녀는 좀더 맹목적이고 적극적으로 짊어진 ‘짐’과 상대하려 한다. 소녀는 ‘가족’이라는 역사의 가장 실질적이고 명확한 주체를 상징하는데, 때문에 소녀의 숙제는 오빠를 찾는 것과 엄마의 그림자를 극복하는 것이다. 그 중간지점은 오빠를 닮은 ‘장’과의 동거였으며, 종착점은 죽은 이들에 대한 위로와 고행이다. 실제로 무덤마다 꽃을 꽂아주었으면서 소녀는 왜 다시 떠나야 했을까? 그것은 이 소설의 맨 첫마디에서 암시되고 있는 것 같다.

‘다른 수많은 소녀들이 여전히, 언젠가는, 성실한 시선과 충격에 마모된 몸짓으로 젊은 당신의 뒤를 좇아와 오빠라 부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녀는 장막의 형상에서는 자유로웠지만 더 어두운 자신의 허상, 역사의 진실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들 자신의 허상을 상대하러 떠난 것이다. 즉, 소녀는 떠나간 진실이며 우리들은 그 진실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글쓴이의 우려 섞인 속삭임은 아니었을까?
그러면 우리는 결론적으로 소녀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소녀는 희미한 진실의 흔적을 지닌 채 우리에게 걸어오면서, 동시에 우리로부터 떠나고 있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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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서중석 지음, 역사문제연구소 기획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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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국의 현대사는 오욕과 공작, 기득권의 역사이자 투쟁과 저항, 반성의 역사이다. 격동적인 역사성은 민족의 감성을 타고 크고 작은 너울을 이루며 사납게 흘러간다.

그러나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에 비해 이를 서술한 역사서는 이론에 치중하거나 너무 학문적이어서 생명을 불어넣지 못했다. 특히 역사는 권력의 쟁투사와 서민의 일상사를 담아낼 수 있어야 하는데, 이전까지의 역사서는 역사의 어느 한 면만을 부각시킨 측면이 없지 않다.

이이화 선생은 그래서 ‘어느 누가, 때로는 암울하고 때로는 처절하고 때로는 열정에 넘치는 우리의 현대사를 쓸 수 있을까, 나는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추천사)’고 술회하고 있다.

그렇다고 현대사를 가만히 놔두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우리의 전통이 현대사를 통해 어떻게 계승되었으며 왜곡된 것은 무엇인지 알아야 미래에 대한 강한 확신이 생긴다. 그러나 나 자신부터도 현대사에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동아전과 위인 계보에서 말석을 차지한 전두환 대통령에게 커다란 존경심을 가졌던 일은 철없는 어린 시절의 일이었다 치더라도, 지금도 나는 박정희와 6월 항쟁, 제주도 4.3 사건 같은 굵직한 역사에 대해서 단 한마디의 언급을 덧붙일 자신이 없다. 접해본 역사서도 프롤레타리아의 관점에서 본 편파적 역사 아니면, 자학적인 역사, 강자에 의해 좌우된 정치권력사가 전부이다. 관점을 전혀 달리하는 두 역사관 사이에 어떠한 연관관계도 비유도 이끌어낼 수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이것은 우리 젊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처지인 것 같다.


그러던 중 좋은 역사책을 만날 기회를 얻었다. 현대사의 한 맥락에 관해 자료를 찾으러 서점에 갔는데, 사진과 그림, 만평 등을 함께 수록한 재미있는 역사서를 발견한 것이다. 그 자리에 앉아서 네 시간 동안 다이어리에 베껴 쓰고 숙제를 해결하였는데, 이와 다른 사건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다. 이참에 현대사의 대강이라도 훑어보는 게 좋을 듯하여 덜컥 책을 사버렸는데, 이 책은 빈약한 내 현대사적 감각에 균형을 잡아주었다.


먼저 문체부터 평이하고 차분하다. 글을 읽는 내내 조용한 찻집에서 대화를 나누듯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고, 앙금이 깊은 부분에서는 나름대로의 격정도 드러내고 있었다.


‘당시 여의도 KBS 건물 담벼락에는 이산가족을 찾는 벽보가 수만 장 붙어 있어 애간장을 끓게 했다.’(본문 321쪽)


오랜 시간 숙고하여 냉정을 끝까지 유지하고 있었으며, 우리가 필요 이상으로 반감을 가지는 독재자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긍정적 측면을 짚고 있었다.


유신체제는 정치적으로만 질곡을 가져다준 것이 아니었다. 그런가 하면 유신체제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신은 새로운 사고의 지평을 열었고, 사회, 문화, 예술에 참신한 자극이 되었다. (글쓴이 서문)


그리고 서술의 논리와 현장성을 높이기 위해 당시의 만평이나 사진 등 각종 시청각 자료를 첨부하거나, 사건일지나 당사자의 수기를 덧붙여 글이 갖는 일방성을 극복하고 다양한 그림을 보여줄 수 있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서는 재고(再考)를 요구하고 있다. 예컨대 박정희의 상징인 새마을 운동은 대부분 장면 정권의 구상에 의지하고 있었으며, 국가보안법은 일제 시대 총독부에 의해 제정된 치안유지법이, 이승만 정권의 필요에 의해 사용된 법률이다. 그리고 4.3사건에 대한 글쓴이의 견해도 타당하면서 흥미롭다.


1948년 4월 3일 한라산에 봉화가 오르고 무장대가 경찰서와 서청 등을 습격하면서 본격적인 항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외부와 고립된 제주도 지형을 고려할 때 그것은 무모한 결정이었다. (본문 81쪽)


역사를 전체적인 틀 안에서 비교적 냉정하게 서술하면서도 이 책에는 하나의 관점이 있다. 그것은 역사적 인물과 사건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미화하거나 증오해서는 안 되고, 모든 사건은 현대를 이루는 소중한 재료가 된다는 생각이다.


나는 이 책의 저술에서도 각별히 유념했지만, 현대사를 가르칠 때 학생들이 현대사를 긍정적으로 이해하도록 마음을 많이 쓰고 있다. 해방이 얼마나 혁명적인 변화를 수반했는가, 그래서 역사상 처음으로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되었고, 상당히 빠른 수준으로 보통선거를 실시할 수밖에 없었던 점 그리고 교육의 확대로 한글세대가 대거 탄생하고 토지개혁이 이루어져 1950년대에 1960~1980년대 경제발전의 초석이 놓였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가르친다. 특히 나는 한국 사회를 발전시킨 역동적인 힘을 중시한다. 역동성의 기반인 평준화가 왜 그렇게 빨리 성취되었나를 설명하고, 1956년 정ㆍ부통령 선거 등 여러 선거에서 유권자의 한 표가 독재정권을 위협했던 것을 강조한다. (글쓴이 서문)


참고로 이 책을 쓴 서중석 교수(성균관대)는 역사교육연대 상임대표이고 한중일 공동역사교과서 제작작업에 한국 대표로 활약했다. 그 동안 요즘의 역사 논란을 보고 있으면, 역사는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지키고 이어나가고, 가능성을 발견해 나가는 실천의 대상에 가까운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모르고 넘어갔던 사실이나 잘못 이해했던 사실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현대사적 감각을 가다듬는 기회를 삼아도 즐거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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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북
리처드 도킨스 외 지음, 피터 탤랙 엮음, 김희봉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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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과학혁명의 구조 등 과학 교양 서적을 읽고 나서 들끓는 욕구로 과학사 책을 하나 정해서 보기로 했다. 시중의 과학사는 주로 과학사의 연대를 몇 부분으로 나누고 이에 대한 의의를 서술하는 식이었다. 문학사든 철학사든 흔한 방법중의 하나이다. 그 중에서 눈에 띈 것이 이 책이다.

이 책의 장점은 처음부터 읽지 않아도 된다는 점, 시간 여유가 많이 없을 때 아무 페이지나 볼 수 있다는 점, 집중적으로 하나의 주제에 매달린다는 점, 기억할 만한 사건과 기억할 만한 과학자, 그리고 주제와 인물을 적절히 표현하는 그림이다.

'사이언스 북'은 텍스트 한 면, 그림 한 면으로 되어 있어, 왼편에 있는 글을 읽으면서 오른쪽의 그림을 참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중간에는 대표저자들이 총론에 해당하는 두 페이지짜리  글을 써놓았다.

역사 서술로 따지면 편년체(編年體)라 할 수 있는데, 기원전 35000년부터 인간 유전체 지도가 작성된 2000년까지 유구한 과학의 역사를 담아낸 250개의 장면 안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도 있지만, 알고 있지 않은 이야기나, 알 도리가 없는 내용을 실감나게 알려주고 있다. 혈액형 ABO가 항체인 것은 알지만, 동물의 피를 수혈해 왔고, 때로는 성공하기도 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과학자들은 추상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한다. 수학이나 기호를 표현하는 것도 단순화의 극단적 표현이다. 그들은 대나무의 텅빈 속처럼 뚫려 있다. 어디 매이지도 않고, 쓸데없는 오해를 조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이야기가 단조롭지 않다. 그들이 발견한 세계는 시인과 철학자들이 발견한 정신세계와 같이 신비하고 아름답지만 보다 다채롭고 선명하다. 만약에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들이 만들어 놓은 비유의 강을 예술적 원천으로 삼아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이들의 표현하는 과학 안에는 정치, 속설, 종교, 민간신앙, 배신, 모략 등이 인간계보다 훨씬 넓은 자연계 안에서 펼쳐진다. 그들에게 '인간'이라는 개념은 만물의 주인이자 하느님의 아들이며, 이성적인 동물과 같은 영예로운 것이 아니다. 동물과 같은 계를 가지며, 동물과 같은 사회 안에서 서로 먹고 먹히면서 동물의 본능을 공유하는   좀 특이하고 관심이 더 가는 존재일 뿐이다.

만약 데카르트가 '정신'이 아니라, '진실과 거짓'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일주일간 성찰한다면 그는 '과학자'라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2000년 밀레니엄을 기념하여 나온 듯한 이 책이 만약 5년 정도만 늦게 발간되었다면 우리나라 연구팀의 자랑스런 연구결과도 게재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책을 덮었다. 과학의 각 분야에서 독자적인 세계를 가지고 있는 저자들의 세련된 필체와, 세심하게 배려한 배열을 따르며 과학사의 넓은 밑그림을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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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핵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
조셉 콘라드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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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핵심』- 무시무시한 진실


들어가기 전에


요즘 영문학 작품을 가지고 독서스터디 비슷한 것을 하고 있어요. 좀 쫓기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읽고 토론하고 배출하는 모양이 어느 정도 되는 것 같아요. 그 첫 작품이 암흑의 핵심은 아니에요. '테스'였는데, 아직 제가 정리를 못했네요. 비교적 짧은 분량인 이 이야기가 영문학 첫번째 후기가 되었군요. 두 주 동안 세 작품 정도 남았는데, 영문학 후기는 일단 5편이 될 것 같아요. 소설에 관해 후기를 쓰는 것은 낯설군요. 차라리 소설을 쓰듯이 후기를 남기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아무튼 제 사제 데뷔작이었습니다.



벌거벗은 진실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수년간 끌려다닌 끝에 삶을 위한 투쟁에서 도의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죄수들만이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알게 모르게 온갖 방법과 수단을 쓸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잔혹한 폭력, 도둑질, 심지어는 친구까지도 팔아넘겼다. 어떻게 불러도 상관이 없겠지만 천만다행히도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던 소수의 우리들은 가장 훌륭한 사람들은 돌아올 수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빅터 플랭크, 『죽음의 수용소에서』 중에서


우리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암흑을 가끔 상상하지만, 진짜 경험해보지는 못한다. 대개 암흑을 끊임없이 그리는 가운데 그려진 그림이 암흑이라고 판단하기 쉽지만, 진정한 암흑은 우리의 상상보다는 오히려 본능에 호소하는 것 같다. 인간성의 심연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극단의 정글에서 제국주의는 드디어 분열된 자아를 드러낸다. 이 이야기는 화자인 말로가 콩고로 가는 제국주의의 기선을 타고 가는 선장으로서, 거기서는 이미 전설이 되다시피한 ‘커츠’라는 사람에게 점점 다가가는 틀로 진행된다. 어떠한 가식적 이념도 여지없이 알몸을 드러내길 요구하는 밀림 안에서 화자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분열된 이상이며, 그 이상을 둘러싸고 서식하는 ‘백인’들의 행태이다. 그가 '백인‘이라는 표현으로 그들과 단절하는 이유는 밀림이 이야기하는 진실과 그 진실의 세례를 온몸으로 견뎌낸 커츠라는 인물을 통해 서서히 드러난다. 그것이 지배인이 오래도록 건재하며 커츠가 죽음에 이르게 된 이유이다. 커츠는 콩고행 직전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제국주의가 표방하는 정의의 이념을 주창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제국주의는 목적이 분명한 제국주의임이 드러나자마자 커츠의 이상은 표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진실에서 통속적인 가치밖에 갖지 못한 지배인은 당당히 살아남고 보다 깊숙이 진실로 다가가려는 커츠와 화자는 죽음에 이르거나 죽음에 준하는 국면을 맞게 된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사뭇 그 지역에 고용되어 있었던 흔한 상인 중 한 사람이었을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의 명에 복종했지만, 그가 사람들에게 애정이나 두려움의 감정을 불어넣진 못했고 또 존경도 받지 못하고 있었지. 그는 그저 불안감만 불어넣고 있었던 거야. 불안감, 바로 그거였어. 어떤 명확한 불신감이 아니라 그저 불안감이었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구. 이런, 뭐라 할까. 이런 능력이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는지는 알 수가 없지. 그에게는 일을 조직한다든가, 주도권을 잡고 일한다든가, 심지어는 질서를 잡는 재주 같은 것이 없었어. 그 주재소의 형편이 말이 아닌 상태에 있었다든가 하는 그런 몇몇 가지 것을 보면 그 점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지. 그는 학식도 지성도 갖추고 있질 못했어. 그가 지배인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연유는 어디 있었을까? 그건 아마도 그가 병에 걸린 적이 없었기 때문일 걸세……. 그는 거기서 3년 임기를 이미 세 번이나 채웠으니까……. 일반적으로 뭇사람들의 체질이 그곳 기후로 인해 망가지는 판에 혼자서 기세등등하게 건강을 누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기 때문이야.
- 본문 중에서



인간의 기층과 기생하는 무리들



이 이야기는 커츠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마치 원심 운동을 하듯이 전개된다. 커츠는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다방면의 진실을 함의하고 있는 인물이다. 빛과 어둠과 진실을 모두 함유한 모순이 바로 커츠라는 인물 안에 그려져 있으며 어떤 이는 거기서 어둠을 살라먹기도 하고, 빛을 맹신하기도 한다. 화자가 처음 만난 회계 직원에게 커츠는 ‘주목할 만한 인물’인데, 그것은 ‘그 고장에서도 가장 오지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그는 다른 모든 교육소에서 수집한 상아를 모두 합친 것만큼 많은 상아를 보내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커츠라는 인물의 기층 중 가장 테두리를 형성하는 진실의 모습이다.



그분은 마치 천둥과 번개처럼 원주민들 위에 군림했던 겁니다. 원주민들은 일찍이 그런 걸 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아주 무서워했던 겁니다. 그분은 아주 무서운 사람으로 비쳤던 거지요. 우리가 커츠 씨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는 여느 사람에 대한 판단을 내리듯이 할 수가 없다구요. 없고말고요.
- 본문 중에서


화자가 말하는 그의 마지막 제자라는 청년은 커츠를 위대한 이념을 갖춘 사상가로 보고 있었다. 사실 원주민들이 생전 보지 못했던 모습이란 것은 다름아닌 이념을 말한다. 이념은 죽음보다 강하다. 이념 아래 추장들은 매일같이 그의 앞에서 기어다녔던 것이며, 커츠씨가 화자에게 우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젊은 마지막 제자에게는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젊은이는 커츠에게 반항하다가 심판받은 자들의 목을 가리켰다. 커츠의 막사 양쪽 기둥에 하나씩 그들의 목은 박혀 있었다.



그는 내가 그곳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하면서, 그 말뚝 위의 머리들은 커츠에게 반항한 자들의 머리라는 것이었네. 내가 웃으니까 그는 몹시 충격을 받는 듯했어. 반항자들이라니! 그간 원주민들을 적이니 죄인이니 일꾼이니 하는 말로 지칭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지만, 이제는 그들을 반항자라고 부르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던 걸세. 그 말뚝에 꽂힌 반항자들의 머리는 내가 보기에 완전히 진압되어 있는 듯했네.
- 본문 중에서


그러나 마지막 제자가 커츠와 같이 파멸에 이르지 않은 이유는 ‘이념’이 그를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이념’이 진실을 가려 주는 대신 그의 젊음을 자극하여 주었다.



나는 일종의 감탄이랄까 아니면 부러움이랄까하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지. 그 매력적 아름다움이 그를 충동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했고, 그로 하여금 위해를 받지 않도록 해주었던 거야. 그가 밀림으로부터 얻어내고자 한 것은 숨을 쉴 공간과 뚫고 나갈 공간뿐이었어. 그에게 필요한 것은 가능한 한 최대의 위험과 최악의 궁핍을 감수하면서라도 존속하며 전진하는 것이었거든. 일찍이 절대적으로 순수하고 비타산적이며 비현실적인 모험 정신이 한 인간을 지배한 적이 있었다면, 그 정신의 지배를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니라 바로 그 얼룩백이 옷을 입고 있는 젊은이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
- 본문 중에서


 


하지만 그의 순수하고 젊은 헌신은 우상과 숙명론의 기만에 갇혀 있었다. 이들의 젊음은 ‘악한 의도’에 의해서 오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히틀러 유겐트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악행을 저지르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진실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때문에 화자는 '그 헌신이야말로 일찍이 마주쳤던 위험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커츠의 약혼녀가 서식하고 있는 기층은 커츠의 기억이다. 그것은 본성이나 밀림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젊고 자상한 애인의 기층이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한번이라도 들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분의 친구가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거예요.> 그녀는 말하더군. <그분은 사람들에게서 가장 좋은 점을 찾아내어 그것을 방편삼아 사람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곤 했지요.> 그녀는 감정에 겨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그건 위대한 사람들의 천품이기도 하지요.> 그녀는 말을 계속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녀의 나직한 목소리는 내가 기왕에 들은 적이 있는 불가사의함과 황폐함과 슬픔으로 가득한 다른 모든 소리들을 동반하고 있는 듯했지.
- 본문 중에서


그녀의 커츠에 대한 감정과 신념을 거짓이라고 하는 것은 부당할지 모른다. 그녀의 마음은 충분히 진실을 담고 있으며, 커츠 또한 감정을 속인 적이 없다. 그녀는 커츠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듣고 싶어한다. 화자를 전율케 했던 진실의 소리를 그녀에게 들려주는 것은 그녀에게 하나의 거짓을 조장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화자는 알고 있었다. 하나의 진실이 누군가에 의해서 거짓으로 둔갑하는 것은 우리들이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닌가. 차라리 적절한 거짓을 섞어서 그녀 나름의 진실에 위배되지 않을 정도로 타협하는 것이 화자에게는 최선의 선택인 듯 했다.



<그분의 마지막 한마디는 당신의 이름이었습니다.>
가벼운 한숨 소리가 들리더군. 그러자 어떤 끔찍한 희열의 외침,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승리와 말할 수조차 없는 고통이 섞인 외침으로 인해 내 심장은 갑자기 고동을 중단하는 듯했어. <저는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걸 확신하고 있었지요…….> 그녀는 알고 있었다는 거야. 확신하고 있었다는 거야.
……
내가 커츠를 정당하게 대접해서 그가 실제로 했던 그 무서운 말을 그녀에게 들려주었다고 하더라도 하늘이야 무너지지 않았을 거야. 커츠는 자기가 정당한 대접을 받는 것을 원할 뿐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나는 그를 그렇게 대접할 수가 없었어. 나는 그녀에게 진실을 말할 수가 없었던 거야. 그 진실이 그녀에게는 너무 암울하게, 온통 너무 암울하게만 들렸을 테니까.
- 본문 중에서


그것은 이를테면 하나의 데드라인이다. 그 선을 중심으로 커츠와 화자의 군과 ‘백인들’이 나뉘어진다. 지배인이 커츠에게 불평을 하는 것도 일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마지막 제자가 그 선을 넘어선 커츠의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증언해준다.



그분은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지요. 그래서 이곳 생활을 싫어했다구요. 그런데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떠날 수가 없었던 거예요. 나는 기회를 엿보아 그분에게 너무 늦기 전에 이곳을 떠나자고 간청해 보기도 했어요. 함께 떠나겠다는 제의도 했죠. 그럴 때면 그분은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지만 계속해서 남아있는 거에요. 또다시 상아 사냥을 하러 나선 후 몇 주일 동안은 보이지 않곤 했죠. 그는 이곳 원주민들 사이에서 자기 자신을 잊고 있었던 거예요. 아시겠어요?
- 본문 중에서



암흑의 핵심



핵심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각 기층을 하나씩 잡고 오르다가 비로소 기층과 대면하는 경우가 있고, 온갖 곳에 널려진 핵심의 강요에 못이겨 대면하는 경우가 있다. 화자에게 기층은 핵심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핵심이다. 그가 별다른 세계를 볼 줄 아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감수성만으로 눈을 뜬 것이다. 때문에 그는 콩고에 가기 전에 자기가 짐승과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고 화자가 콩고에 가서야 비로소 그것을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들을 감싼 관습 때문이다.



자네들은 이해할 수가 없을 거야. 자네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나? 자네들이야 단단한 보도를 딛고 서서, 늘 자네들을 격혀라거나 덤벼들 듯 다정한 이웃들에 둘러싸인 채, 푸주한과 경찰관 사이를 조심스럽게 오가면서, 추문과 교수대와 정신병자 수용소 따위를 거의 종교적으로 두려워하며 살고 있으니 자네들이 어떻게 상상인들 할 수 있겠나? 경찰관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철저한 고독으로 인해, 그리고 다정한 이웃이 여론이랍시고 속삭여주는 경고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는 철저한 침묵으로 인해 한 인간의 자유로운 발길이 어떤 특정한 태초의 땅으로 인간을 이끌고 갈 수 있는지를 자네들은 아마 상상할 수 없을 거야. 이런 경찰관이니 이웃이니 하는 사소한 것들이 있느냐 없느냐가 실은 큰 차이를 이루는 법일세. 그런 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자네들은 자네들 자신의 타고난 힘에 의존해야 하고 또 스스로 충실하게 살 수 있는 능력에 의존해야 해.
- 본문 중에서


콩고라는 땅은 화자의 오래된 본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이 화자로 하여금 소름끼치도록 만들었으나 비인간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이며, 커츠가 완전히 동화되어 버린 이유이기도 하다.



그 땅은 이 세상의 땅같이 보이질 않았어. 우리는 정복당한 괴물이 족쇄를 차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는 데만 익숙해 있었거든. 그러다가 거기서 괴물이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던 거야. 그건 이 세상 풍경이 아니었고, 게다가 그 사람들은……아니야, 그들을 인간답지 않다고 할 순 없었어. 내가 가장 괴로웠던 건 그들 또한 비인간적이지는 않았다고 하는 바로 그 생각이었어. 그런 생각은 서서히 떠오르는 법이지. 그들은 소리지르며 깡충깡충 뛰거니 제자리에서 빙빙 돌거니 하면서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었어. 그러나 그 광경을 바라보던 우리를 몸서리치게 한 것은 그들 또한 우리들처럼 인간이라는 생각, 그리고 그 야성적이고 열정적인 소동이 우리와는 먼 친족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어. 그건 흉측한 생각이지. 아무렴, 흉측한 생각이야. 하지만 우리가 참으로 용감한 인간이라면 그 무섭게도 솔직한 소동에 대해 우리가 마음 속으로 희미하게나마 맞장구치는 흔적이 있다든가, 우리가 태초의 밤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 소동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이해할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생각이 든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네.
- 본문 중에서


커츠와 화자는 밀림이 말하는 모든 인상들을 공유한다. 극한의 배고픔과 맞서는 인간에게 미신이니, 믿음이니, 원칙이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며, 도덕이나 사회성 같은 것이 낄 자리가 없다는 것은 너무나 엄연한 사실로 다가왔다. 우리들은 사실 이 진실로부터 도시와 사회로 도망간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화자는 이미 커츠의 분신이다. 아니, 이 미지의 자연과 인간들 모두 우리들의 분신이다. 그들은 다만 이 진실이라는 갈림길에서 각자 헤어졌을 뿐이다.



내가 보기에 그간 내가 체험해 온 것은 바로 커츠의 극한 상황이었어. 사실, 그는 마지막 한 걸음을 성큼 내딛으며 죽음의 문턱을 넘어갔던 거야. 그러나 나는 그 문턱에서 머뭇거리다 물러서도록 허용되었지. 아마도 그와 나 사이의 차이는 바로 거기에 있을 거야.
- 본문 중에서


그러나 진실에 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인생이라는 건 우스운 것, 어떤 부질없는 목적을 위해 무자비한 논리를 불가사의하게 배열해 놓은 게 인생이라구. 우리가 인생에서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우리 자아에 대한 약간의 앎이지. 그런데 그 앎은 너무 늦게 찾아와서 결국은 지울 수 없는 회한(悔恨)이나 거두어들이게 되는 거야. 나는 죽음을 상대로 씨름을 해왔어. 그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다툼 중에서도 가장 맥빠진 다툼이지. 그 다툼은 어떤 막연한 회색 공간에서 일어나는데, 발 밑에 딛고 설 땅이 없고, 주변에 아무것도 없으며, 구경꾼도 없고, 소란도 없고, 영광도 없고, 승리를 향한 커다란 욕구도 없고, 패배에 대한 커다란 두려움도 없고, 미지근한 회의(懷疑)로 가득한 그 진저리나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 자신의 정당함에 대한 많은 믿음도 없이, 또 우리 적수(敵手)인 죽음에 대한 믿음은 더더구나 없이 다투기만 하는 거야. 만약 이런 것이 궁극적 지혜의 형식이라면 인생은 우리 몇몇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어. 나는 내 삶에 대한 최종 판단을 내릴 마지막 기회를 간발의 차이로 놓쳤지만, 어차피 내게는 아무런 할말도 없었을 것임을 알고 굴욕감을 느꼈을 뿐이야. 내가 커츠를 주목할 만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어.
- 본문 중에서


이 무시무시한 진실의 모습을 직접 대면한 커츠는 단지 <무서워라! 무서워라!>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고, 화자는 커츠의 사랑스런 애인 앞에서 은폐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진실의 핵심이자 암흑의 핵심이며 은폐될 수밖에 없고, 그것을 아는 사람은 위험하거나, 배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 이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진실을 가슴속에 품고 죽음의 장막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지도 모른다. 화자에 따르면 진실이란 위대하지만 비정하며, 우리들의 사회란 죽어가는 흑인 노예가 어색하게 두르고 있는 소모사(梳毛絲) 조각과 같다. 화자는 진실의 땅 위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작업장에서 쫓겨나 서서히 죽음을 기다리는 흑인 노예의 비유를 통해 희미하게나마 그려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곳은 다름아니라 작업을 돕던 원주민 중의 몇몇 사람이 물러나서 죽음을 기다리는 곳이더라구.
그들은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음이 분명했다네. 그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었고 죄수들도 아니었지만 이미 이 세상 사람다운 데는 없이 질병이나 기아로 인해 죽어가는 검은 셩상들에 불과했으며 그 침침한 녹음 속에 어지럽게 누워 있었을 뿐이야 일정 기간의 고용 계약이라는 합법적 수단으로 해안 각처에서 끌려온 후 자기네 체질에 맞지 않은 환경에 내던져진 채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다가 지금은 병이 들어 비능률적인 노동자로 전락하니까 작업장에서 기어나가 그늘에서 쉬도록 허락되었던 거야. 이 죽어가는 형상들은 이제는 공기처럼 자유로웠지만 한편 공기처럼 엷은 존재들이기도 했어. 나무 그늘 속에서 반짝이고 있던 그들의 눈이 보이기 시작했어. 그래서 내려다보니까 바로 내 옆에 한 사람의 얼굴이 보이더군. 그 피골이 상접한 검은 몰골은 한쪽 어깨를 나무에 기댄 채 다리를 죽 펴고 누워 있었어.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가더니 우묵히 들어간 휘둥그런 눈이 나를 멍청하게 쳐다보는 거야. 그러나 그 안구의 깊은 곳에서 새어나오던 이미 시력을 잃은 듯한 흰 빛은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중이었어. 그는 젊은이 같았는데 혹시 소년이 아닌가도 싶었지만 우리로서는 그들의 나이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웨덴 선장의 배에서 얻어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선원용 비스킷을 하나 그에게 내미는 일밖에 없었다네.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그걸 움켜잡긴 했지만 다른 동작이나 다른 눈길은 보이지 않더군. 그는 목에 하얀 소모사(梳毛絲) 조각을 두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왜 두르고 있었을까? 그걸 어디서 구했을까? 그건 배지였을까, 장식품이었을까, 부적이었을까 아니면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한 조처였을까? 혹시 어떤 이념이 그것과 관계되어 있기라도 했을까? 이런 생각이 들더군. 어쨌든 바다 건너에서 가져온 이 하얀 실 토막이 그의 검은 목에 둘러져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지.
- 본문 중에서



에필로그




“진실은 시간이라는 이름의 옷을 벗어버린 진실이지. 바보들이야 입을 벌리고 몸을 떨고 있겠지만,
용감한 인간이라면 진실을 알면서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을 것이네.”
- 본문 중에서

여기서 진실은 무엇인가?
→ 이 소설은 진실의 층위를 문제삼고 있다. 분열된 자아와 분열된 진실이라는 문제는 혼란된 시대상황만큼이나 우리들의 지적 체력을
요구하는 본격적인 문제들이다. 화자는 이 이야기에서 "백인들"과 나를 구분하고 있고, 오히려 "원시인"들에게 친근감을 느낀다.
사실 그것은 저자가 의도적으로 '뒤틀은 구조'이다. 여기서는 오직 '옷입은 원시인'과 '옷벗은 원시인'이 있을 뿐이다.
'시간'은 문명과 동의어이다. 이곳에서 원시인들이 보이는 원초적 행위들이 화자에게 익숙하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소름끼쳐 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전혀 다른 대상으로 보인다. 진실은 그들을 비웃고 있다. 물론 화자도 그
비웃음을 벗어날 순 없다. 진실은 화자에게도 좀처럼 속살을 보여주지 않으며 좀더 용감하다고 할 수 있는 커츠를 매혹시키고는
파멸에 이르게 한다. 여기서의 진실은 비정한 진실이자, 익살스러운 존재이다.


커츠는 어떠한 유형의 식민주의자이며, 그는 식민주의의 어떤 측면을 대변하는가?
→ 커츠는 식민주의 그 자체이다. 즉 식민주의가 가지는 온갖 생리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커츠가 콩고에 들어가기 전에 제출한
보고서에 의하면 그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을 계도해야 한다는 사상이 다분히 드러나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커츠의 궁핍함이 그려진다.
식민주의자들의 양면성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겉으로는 교화를 외치면서도 실질적인 이익을 끝까지 추구하는 식민주의 근성이다.
그 모순은 커츠의 막사에 걸려 있는 두 개의 목을 만나 여지없이 드러난다.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중
용감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교화시키려는 백인들의 가식이 똑바로 보인다. 그들은 위압으로도 누를 수 없고, 설득시킬 수도 없다.
명분과 정의가 없다는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해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화자는 그들이 '진압된 것일 뿐'이라고 하는 것이다.
커츠의 가장 통속적인 측면에 기생하는 지배인과 회계 직원은 좀더 노골적으로 식민주의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오로지
실적에 의해서만 커츠를 판단하고 있으며, 지배인은 더 나아가 '좀더 뽑아낼 수 있었는데, 커츠가 괜히 반발심만 키워서 일을 그르쳤다'
고 불평하기까지 한다. 커츠가 식민주의의 늪을 빠져나오려고 한 순간 "백인들"에게도 "진실"에게도 용서받을 수 없다.
커츠의 죽음이 어떤 '죄과'를 의미한다면 이것이 커츠의 명백한 죄과일 것이다.


말로는 왜 커츠의 약혼녀의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아주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는가?
→ 그것은 이 이야기가 다루고 있는 '진실 자체'의 문제를 함축한다. 커츠는 진실을 가지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태다. 그가 진실을
말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오히려 왜곡될 수도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면 진실 자체는 이미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이다.
진실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때로는 조작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진실이 그만큼 진실과 멀다는 것을 말하며,
최소한 진실의 작은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말한다. 과학자들이 흔히 하는 오류는 순진하게 진실의 정당성을 맹신한다는 것이다.
아르키메데스가 그러했고, 갈릴레오가 그러했다. 우리는 그나마 진실의 편린을 정성스레 모아, 좀더 안정적인 진실의 상에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말로가 커츠의 약혼녀에게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이다.


커츠는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의 핵심’을 궁극적으로 인식하게 되는가?
→ 만약 '어둠의 핵심'을 '진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면, 커츠는 이미 죽는 순간 진실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물론 진실의 제일보를
보여준 것은 커츠였으나, 이제는 말로가 진실의 증언자가 되고 있다. 진실의 모습은 커츠의 삶보다 더욱 복잡하다.
커츠가 죽은 이유는 진실의 모습을 온전히 사유하지 못한 이유가 크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은 어느 정도 관조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커츠는 출발부터 진실을 배반하고 있었고, 자신이
대면한 진실의 일부를 꽉 움켜잡고 동화되어 버린다. 깊고 어두운 수렁에 빠져들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말로가 암흑의 핵심에서 살아돌아온 것을 보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의 모습이 궁극적으로 어두운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말로는 왜 커츠에게 집착하며 동질감까지 느끼는가. 영국에 돌아와서도 커츠를 기억 속에서 지우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 말로가 커츠를 찾는 이유는 의무감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보다 호기심이 더 강했다. 그의 보고서를 이미 보았고, 그에 관한 이야기는
무수히 들었다. 그 이야기 속에서 말로는, 원주민들이 자신의 오래된 본성을 일깨워주었듯이, 오래된 영혼을 일깨워준 커츠를 만나고자 한다.
즉 커츠는 말로의 분신이다. 진실은 오래도록 두 영혼을 묶어두고 있었으며, 그 구속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둘에게 부과된 사명이다.
커츠가 그 속으로 먼저 들어갔다. 거기서 온갖 모순과 원초적 본성에 시달리며, 그것을 정확히 주시하는 마지막 순간에 '두렵다'는
일말의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너무 늦게 알아버린 것이다.
말로는 이 지점에서 커츠와 헤어진다. 진실은 커츠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말로를 놓아주지만, 오른손을 놓아주었을 뿐이다.
말로는 또다른 손을 펴보기 위해 커츠만큼의 무시무시한 모험을 감행해야 하며, 그때까지 '유보된' 것이다.


말로의 이야기의 등장인물 중 왜 말로와 커츠만이 이름을 가지고 있을까?
→ 만약 저자가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이름을 붙일 필요를 느낀 인물이 있다면 이 두 사람 뿐일 것이다. 나머지 인물들은 모두
'백인들'이나 '약혼녀', '지배인' 등으로 부를 수 있다. 이들은 진실의 핵심이 아니라 각 층에 서식하는 기식자들이며, 배경과 같은
인물들이다. 때문에 이들은 진실이 굳이 구속하려 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에서는 이름을 가진 두 명확한 인물을 구심점으로 그려진 수채와와 같다.


왜 말로의 기억 속에서 커츠는 ‘목소리’ , ‘담론’ , 또는 ‘달변’으로 이미지화 될까?
→ 말로는 진실의 허상이다. 진실인 듯 보이지만, 이미 이만큼 진실에서 빗겨져 있다. 이야기 속에서 실제로 화자가 말로와 대면하는
지면은 극히 적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모든 지면은 커츠에 관한 풍문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곧 진실이 자신의 몸을 숨기는
오래된 습관과 일치한다. 진실이 백일하에 드러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진실이 아니다. 커츠의 존재가 '목소리'나 '담론'으로 이루어진 것은
진실로 가기 위한 '이정표' 혹은 진실이 파놓은 '함정'일 수 있다.
오히려 진실은 말로가 커츠를 만나기 위해 겪어가는 과정 속에 녹아들어 있으며 그것이 또한 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커츠는 분명 진실의 어느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애초에 진실의 증언자는 말로이며 그의 '행동'인 것이다.


화자가 말하는 진실의 모습이 왜 이렇게 무시무시할 수밖에 없었는가?
→ 어느 시인의 말처럼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생명을 걸어야' 한다. 곧 진실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저자의 진실은 희미하며 아슬아슬한 벼랑 위에 꽂힌 조그만 백년초와 같다.
그런 극단적이고 원초적인 조건이 없다면 진실은 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저자에게는 명백하다.
이미 진실을 포기한 군상들이 이야기 곳곳에 널려있지 않은가. 그들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진실이라 부르지 않는 건 명백하다.
우리들이 옛 성인처럼 달관의 경지에 있지 않고서야 생활 속의 관조는 불가능하다. 더구나 이렇게 인간성이 말살되고 모순이 팽배한
곳 속에서 진실을 얻기란 콩고의 어둠 속을 탐험하는 것보다 요원한 일일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신념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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