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8
최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최윤의 소설『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이하 ‘꽃잎’)은 소설로서 묘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일단 작품 안에서 뚜렷한 반동 인물이나 갈등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이 소설의 창작 의도와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글쓴이는 하나의 이야기에 여러 가지 시점을 배열하여 사태에 대한 다각적 조명을 은유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그 목소리는 다분히 신비롭고 희미하며, 메시지의 전도사는 가장 힘 없는 자, 그것도 제정신이 아닌 ‘소녀’를 필두로 세웠다. 즉 글쓴이는 5․18 참극의 현장에 모자란 소녀와 불안정한 장씨, 미미한 젊은이 몇몇을 담궜다가 끄집어 내서 소설 위를 걸어다니게 만드는 데 그들은 가슴 한 쪽에 결여를 하나씩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찾아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나는데, 이 이야기는 바로 ‘기약 없는 여행에 관한 기록’이다.

이 이야기의 시작점과 구조는 명확하다. 그날을 시작점으로 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그날 이후 싫지만 대면할 수밖에 없는 흔적․고통을 하나씩 걸머지고 인물들은 여행을 떠난다. 때문에 소설은 표면적 갈등보다 이면적 갈등에 더욱 관심을 쏟으며 장막, 희미함, 비정상, 약자의 이미지가 주를 이루는 것은 이 점을 더욱 부각시키려는 의도이다.
그것은 일종의 조직적 낯설게 하기이며 독자에게 커다란 물음표를 던지려는 글쓴이의 의도이다. 글쓴이의 언어로 표현하면 ‘바이러스’에 걸린 독자들은 그 ‘물음표’에 주목하기 시작했으므로, 시선을 소녀에게 맞춰둔 채 소녀의 비문법적이고 암호 같은 말들과 그보다 더 이상스런 행동들을 따르며 소설 끝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중심인물들의 대체적인 특징은 자신 안에 이중성, 모순성, 동요를 곳곳에 노출시킨다는 것인데, 그것은 그 폭력이 정당한가, 폭력에 대항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정의와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혼란에 기인하며, 그것은 국가, 곧 나라에 대한 폭력과 이를 강요하는 권력 앞에 약자들이 놓이게 되는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것을 소설 속에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 ‘장’이다. 장을 말할 때는 그가 일정한 벌이 없는 방랑아이며 초여름의 무더위, 짜증, 불안, 공격성 등의 이미지와 함께 보아야 한다. 무모한 공격성은 장면#2를 연상케 한다. 만약 나에게 이 소설의 첨삭 권한이 주어진다면 ‘장’에게 진압군에서 탈영하여 숨어산다는 조건값을 주고 싶다. 유리된 불만 많은 떠돌이에게는 일반적인 전형을 연상하기 어렵다. 때문에 ‘장’은 소녀가 필요한데 그 근거마저 한미하다고 본다. ‘장’이 자신의 소설적 캐릭터마저 반납하고 소녀에 매달릴 정도의 가치가 있었을까. 이 부분이 글쓴이가 가지고 있는 ‘소녀’와 ‘사건’에 대한 집착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제주도를 떠나지 않고서는 도저히 작가적 관점에서 이야기를 쓸 수 없었습니다.’

4․3을 다룬 소설 ‘순이 삼촌’의 저자 현기영의 회고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이 소설은 여러 시선을 가지고 ‘그날’을 조명하고자 한 작가의 세심한 의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의식’과 ‘단면적 불균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건’이 시종일관 은유와 환상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에 비해 소녀는 좀더 맹목적이고 적극적으로 짊어진 ‘짐’과 상대하려 한다. 소녀는 ‘가족’이라는 역사의 가장 실질적이고 명확한 주체를 상징하는데, 때문에 소녀의 숙제는 오빠를 찾는 것과 엄마의 그림자를 극복하는 것이다. 그 중간지점은 오빠를 닮은 ‘장’과의 동거였으며, 종착점은 죽은 이들에 대한 위로와 고행이다. 실제로 무덤마다 꽃을 꽂아주었으면서 소녀는 왜 다시 떠나야 했을까? 그것은 이 소설의 맨 첫마디에서 암시되고 있는 것 같다.

‘다른 수많은 소녀들이 여전히, 언젠가는, 성실한 시선과 충격에 마모된 몸짓으로 젊은 당신의 뒤를 좇아와 오빠라 부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녀는 장막의 형상에서는 자유로웠지만 더 어두운 자신의 허상, 역사의 진실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들 자신의 허상을 상대하러 떠난 것이다. 즉, 소녀는 떠나간 진실이며 우리들은 그 진실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글쓴이의 우려 섞인 속삭임은 아니었을까?
그러면 우리는 결론적으로 소녀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소녀는 희미한 진실의 흔적을 지닌 채 우리에게 걸어오면서, 동시에 우리로부터 떠나고 있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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