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단편 또는 손바닥소설을 보면서 즐거운 것은 카프카 장편의 실마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독의 3부작(성, 소송, 실종(아메리카))과 대표작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의 기억이 워낙 강렬해서 단편에서 비슷한 부분을 만나면 내 감각 센서가 벌써 알림을 울린다. 내가 『성』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대표작으로 부르는 까닭은 카프카가 모든 주요 작품을 쓰고 나서 마지막으로 쓴 작품이 바로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이며, 카프카의 모든 작품을 이해하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고독의 3부작을 한 권으로 압축해놓은 것이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인 것이다.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는 영업 사원이었다. 영업이 좋은 날은 다른 직원들보다 몇 배씩 월급을 가져가지만 안 좋은 날은 기본급이 너무 적어서 불안정했다. 퇴로가 없는 삶에 질려 버린 잠자는 그대로 벌레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승객』의 승객은 잠자를 떠올리게 만든다. 여행을 가는 승객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교통수단에 탑승하는 승객이기 때문이다.


나는 전차 승강장 위에 서 있다. 이 세계에서, 이 도시에서, 나의 가족에게서 나의 처지를 되돌아볼 때 나는 정말 불확실하다. 더군다나 내가 어떤 방향에서든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요구에 어떤 것들이 있을지, 나는 임시로라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이 승강장 위에 서서, 고리에 의지하고 있는 것도, 전차에 몸을 내맡긴 채로 서 있는 것도, 사람들이 전차를 피하거나 혹은 조용히 가거나 혹은 진열장 앞에 멈추어 서든 간에 어쩔 수가 없다 ㅡ 물론 어느 누구도 나에게서 그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승객』


도입부만 놓고 보면 「승객」과 『변신』에서 별다른 점이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승객」에서는 다른 승객, 전혀 다른 승객이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나'는 전차 승강장 위에 서 있고, 소녀는 막 전차에서 내리려고 하고 있다. 그는 전차와 한몸인 것처럼 전차의 벽에 기대거나 만진다. '나'가 가장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소녀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순간'은 어떤 목적으로 가기 위한 정거장이거나 징검다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소녀는 '순간' 자체가 목적으로 보인다. 순간에 집중하고 순간을 즐긴다. 순간과 하나가 되고, 순간을 빨리 뛰어넘어 어떤 목적지로 가려는 의지 자체를 보이지 않는다. '나'에게 전차는 의미 없는 공간이고, '승객'이라는 존재는 단지 목적지에 가기 위해서 전차의 규칙을 따르는 임시 존재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는 전차에서만 임시 존재인 것이 아니라, 처지 자체가 임시적인 존재다. 그리고 '나'는 임시인 것을 느끼고 그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자괴감을 느끼기까지 한다. 나는 원래부터 임시였던 것일까? 도대체 내가 있는 지금 이 순간과 전차 승강장이라는 공간은 왜 의미가 없는 것인가? 나는 왜 지금과 이곳에 의미를 둘 수 없는가? 명령과 목적이라는 압박에 자석처럼 끌려가기 때문이다. 자력이 너무 강해서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날이 하루 하루 쌓이면 '임시'라는 것이 하나의 정체성이 되고 말 것이다.


어린이 수업을 하면서 카프카가 「승객」에서 소녀를 본 '나'의 모습을 느낀다. 나도 어린이처럼 순간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예전에는 임시라는 꼬리표를 떼어내려고 노력했지만, 이제는 그것도 상관 없다. 임시는 임시 그 자체로도 의미 있는 것이고,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니까. 어떤 명령이나 의무, 직업, 목적이 아무리 강력한 자력으로 나를 끌어당긴다고 하더라도 조금씩 끌려가고 있는 이 순간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 느낌이 사라지면 카프카의 벌레라는 또 다른 압력이 나를 기다린다. ‘이모셔널 리터러시’(emotional literacy)!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훈련을 해야 무기력과 폭력의 연쇄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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