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은 강제와 부자유, 부당의 대명사가 된 듯합니다.

하지만 훈련소에서 어느 의식 있는 중대장의 말을 듣는 순간 저는

'군'을 '군'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 같습니다.


"온갖 부당함을 견뎌내라."


그것이 부당함에 맞서라는 말인지, 부당함에 동화되지 않고 너의 길을 가라는 말인지,

부당함을 탓하지 말라는 말인지 모호하지만, 그 순간에는 제대로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환경은 사람을 더욱 단련시키고, 사람들을 긴밀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제 군생활이 행복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좋은 사람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이죠.


이 글을 이벤트 중간에 보여드리는 것은 물론 '저의'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제 순수 창작으로 이벤트를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벤치마킹 혹은 표절의 의미가 깊다는 점을


고백하려고 합니다. 어쨌든 이 글이 이벤트의 근원이 됨은 사실이니까요.


그때는 정말 치열하고 진지했다는 생각이 조금 듭니다. 즐독 하시기를..


그리고, 경로는 묻거나, 정보사령부 같은 데에 제보는 하시지 않았으면^^;;;




회원특집 <3> - 오승주님 - 박상원 作 (05.4.19)


우선 다사다난한 역경을 극복하고 이렇게 오승주 님의 회원특집이 무사히 완성될 수 있음과, 참을성있게 답변을 작성해주신 승주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제 자신의 소감은 일단 '힘들었다'는 겁니다. 승주님의 방대한 인문학적 체계를 모두 밝혀보겠다는 제 초기의 결심은 온데간데없고, 승주씨와 대화의 수준을 맞추기 위해서 오로지 전심전력을 다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자 시작해봅시다~



====병장 양영준====


1. 플라톤이 현대에 어떠한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요?


☞ 첫문항부터 플라톤이 나오는군요. 이등병 때 잠안자고 화장실에서 4시간 동안 플라톤 '국가'를 읽다가 '탈영'의 오해를 받고 죽게 갈굼당했던 기억이 납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플라톤의 손가락은 하늘을 가리키듯이 플라톤의 철학은 '이데아'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것 중에 진정한 것을 기리는 작업입니다. 그러한 고도의 추상성 안에서 항상 부여잡은 덕목은 지(知)·덕(德)·체(體)였습니다. 대개 서양에서 '덕'이란 힘을 말하는 것 가운데 곧 정치력입니다. '체'도 그렇습니다. 플라톤 고도의 추상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덕목들이 항상 플라톤 곁에 있었다는 것은 나로서는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얼마 후 렘프레히트(철학사가, 『서양철학사』, 을유문화사)는 플라톤의 철학을 논하며, 그의 철학은 '윤리'와 항상 맥이 닿아 있기 때문에 '윤리'의 입장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조언을 했습니다. 고도로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추론을 펼칠 때도 '윤리'는 언제나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이데아와 윤리와 행동[체]의 유기적인 만남. 그것이 플라톤이 현대에 주고 있는 의미입니다.


사려와 검증이 뒷받침된 행동은 '전례'가 됩니다. 우리들의 잠재적 의식 속에 '선비에 대한 동경'이 들어 있는 것은, 그들의 지식이 아니라 그들의 '지고지순한 행동'과 인물됨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민하고 성찰한 부분을 온몸에 새겨넣습니다.


행동하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 과정을 하나하나 배려한 철학이 플라톤 윤리학이며, 그의 사유를 따라가면서 우리는 그의 인품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플라톤이 평생에 걸쳐 등장시킨 소크라테스의 행보를 살펴본다면 그의 사유가 차가운 이성 안에 녹이기에는 너무나 원시적이고 건강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방향성을 가진 이데아이자 행동을 위한 이데아이죠. 곧 동서양의 공통된 학문의 목적이 바로 플라톤의 철학 안에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2. 승주님의 글에서는 참여적 성격보다는, 내공 쌓기에 주력하신다는 느낌이 듭니다.

승주님에게 독서(공부)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 '내공 쌓기'보다는 '숨고르기'로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땅 속에 담겨 있는 김치입니다. 나는 나의 계절을 가지고 있고 나의 계절을 꿈꿉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보다는 넌지시 에둘러 표현하고, 완곡하게 인용하여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은 듯 하는 것은 동양의 오래된 비전입니다.


그것은 영준님이 예리하게 지적하신 '공부'도 사실은 맞습니다. 나는 나의 '환경설정'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안의 '나'가 나와서 어서 이야기를 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평생 따라다녔지만 좀처럼 내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나'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시겠죠. 그 이유를 고민하던 끝에 '나'가 나와서 이야기하기에 나는 너무나 어지럽고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지적인 강요 혹은 무지가 '나'를 멀어지게 했으며 '나' 역시 나에게 오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영변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오실' 길에 뿌리는' 것이 나의 '목적'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내가 하는 이야기, 내가 참여하는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나는 그저 여러 송이의 진달래꽃을 따다가 '나'가 올 길에 뿌릴 뿐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아직 청소가 덜 되었습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그가 무지하다는 말이고, 그런 표현들은 그가 '진정한 글쓰기'에 도달하지 못하고 겉만 맴돈다는 말입니다. 나는 좀더 쉬워지겠습니다. 함석헌 할아버지처럼.


3. 우리 삶을 지배하는 코드로 돈과 권력, 국가와 자본주의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의견은?


☞ 전에 우경님과의 대화에서 '세상의 모든 것은 양방향을 지닌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보이는 것들은 '단면성' 투성이인 것 같습니다. 나는 그 코드들의 이면을 드러냄으로써 코드 자체를 조롱할 생각입니다.


돈·권력·뇌물 등의 코드를 다른 쪽에서 사용한 예에 익숙해야 합니다.


제가 가장 길게 쓴 독서후기인 '동서열전 - 1'에 테미클레스 편이 있습니다. 그가 현명한 아리스티데스를 온갖 구차한 방법으로 추방시켜 정계의 1인자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흔히 비열한 권력투쟁의 단면에 익숙해져 있어서 이 사건 안의 진실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당시의 그리스는 중대한 시기였기 때문에 힘의 분산은 곧 국가의 몰락을 의미했습니다.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통합을 통해 현실을 타개해나가야 했습니다.

(아리스테데스 또한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도와 그리스의 영광을 재현하게 됩니다.)


또 인지도 있는 자에게 막대한 뇌물을 주어 정계에서 떠나게 한 것도 그 자의 인물됨이 국가를 이끌어가기에는 부족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연합군의 사령관에게 뇌물을 제공한 것도 그의 소인적인 기질을 독려해 전선을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사회의 어둡고 지저분한 코드를 전혀 그렇지 않은 방향으로 드러내는 것은 참 재미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병장 김학현====

4. 독서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 저의 책읽기는 뚜렷한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유아 때부터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의 시기.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대입 전까지의 '진공'에 가까운 시기, 대학 새내기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기. 어려서 몸이 안좋았어요. 그래서 집에 있는 이원수 씨의 '세계소년소녀명작동화집'을 주섬주섬 꺼내 읽었고, '소년소녀 상식 백과' 같은 것도 거의 '무의식'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별걸 다 아는 놈'으로 통했죠. 3학년 때 도서부장 하면서는 첫 독서 시기의 절정이었습니다.


그 이후 오락실과 도박·도벽 등에 빠져들어서 제 인생은 기나긴 침체기에 빠져 듭니다. 딱 10년의 기간동안 단 한 권의 독서도 하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촌구석이라는 환경은 저에게 강한 고립이 되었습니다. 그 긴 겨울 덕분에 지금 이렇게 '미친 듯이' 읽어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 때 누군가가 우리집 책꽂이에 '정음사 세계문학 전집' 같은 책만 꽂아두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재미있는 생각을 해봅니다.


워낙에 '사유'에 익숙해 있던 터라 대학 1년 때 모든 것이 폭발했습니다. 지금도 '고향' 하면 '고립'이 생각나 약간 우울해지는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다 대학 2년 '첫사랑'을 만났습니다. 서울에서 이 먼 곳(제주)까지 온 그녀는 '다른 사람과는 좀 다른 나'를 금새 알아보고 우리는 급속히 가까워져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해 여름 위에 종양이 생겨 한철을 병원에서 보내면서 그녀가 가져다주는 책들을 모이 주어먹듯 주섬주섬 집어먹었습니다. 헤세의 데미안, 싯다르타, '모래알 한가운데' 무엇보다 윌 듀런트의 '철학이야기'가 내 사유의 불을 당겼습니다. 그 이후 '에티카'를 여름 내내 읽으면서 정서로 베껴쓰기도 하던 시기가 나를 '철학'으로 인도했던 것 같습니다. 첫사랑은 첫사랑이 되어버렸지만, 나는 활활 타는 사유의 불 안에 자꾸만 책의 장작을 던집니다. 이미 무서운 기세로 타고 있는 사유의 불.


이것이 내가 독서를 시작한 계기입니다.


내 안에 꿈틀거리던 사유의 응어리를 버리지 않고 지켜갈 수 있었던 것, 그것이 활활 타기 위해서 '철학 이야기' 한 권으로 충분했습니다.


5. 주로 어떤 글들을 읽으셨는지요?


☞ 지금까지 정신을 산란케 하는 정신 자체에 대한 글을 많이 읽었던 것 같아요. 스피노자의 에티카, 파스칼의 팡세, 라 로슈푸코의 '잠언과 성찰', 자기로부터의 혁명, 톨스토이의 '인생이란 무엇인가' 도스또옙스끼의 대표작들(특히 후기의 비극), 논어, 맹자, 대학, 중용, 한비자 같은 것들. 이런 정신 자체를 고조시키는 서적 덕분에 '정신의 체질'은 많이 강건해졌지만 '실제'가 나에게는 많이 모자랐습니다. 그런 '정신의 정수'들을 검증할 예시도 거의 없었고요. 그래서 '실제'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보기로 했습니다. '김유정 전집'의 해학과 사마천 사기의 인물들, 영웅전의 전기, 지금 하고 있는 과학 서적 여행, 군 오기 전에 재밌게 읽었던 헤로도토스 '역사', 그리스의 희극과 비극, 이집트 신화 같은 것들, 선배가 소개해준 만화책(용오, 베르세르크, 천재 유교수 등)


신문 열심히 보기. 이렇게 한 맥에서 한 맥으로 옮겨가기가 제 책읽기의 특징이 되어 버렸습니다. 과학 여행이 일단락되면 '역사 여행'을 떠나볼까 합니다. 헤로도토스, 펠로폰네소스, 전국책, 사기,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삼국사기, 유사, 블로델의 대작, 토크빌 같은 것들이 물결 옮겨가듯 거쳐가는 것이 희망사항입니다.


6. 지금껏 많은 글들을 읽었지만.. 독서를 통해서 느끼는 핵심 포인트는 무엇입니까?


☞ 독서는 '자극'이라 생각합니다. 파스칼은 '나의 저작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당신의 글에는 대부분 다른 사람의 사유가 담겨 있으므로 당신의 것이라 할 게 별로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저작이라고 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나의 사유가 100권의 다른 사람의 저작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 안에는 그만의 '고유한 사유'가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자극을 통해 자신을 깨우는 것이 독서의 포인트가 아닐까요. 그나저나 일어나세요. 지금이 몇 시인지 아십니까?


7. 지금도 열심히 하시고 있는데 앞으로의 시간계획은 어떻게 짜놓고 생활하시는지요?


☞ 일단 우리나라의 돈없는 고학생이며, 그렇지만 꿈많은 청년이란 점을 고백합니다. 나도 다른 고학생이 가는 길을 가고 있을 겁니다. 다만 음모를 꾸미면서. 짧은 이후의 시간 계획은 정리이겠죠. 그 안에는 북클럽과의 약속이 큰 부분일 겁니다. 가장 즐거운 일이기도 하고요. 나아가서는 '독서지도사'의 길을 밟으려 합니다. 동시에 '민족문화추진회'의 입학공부를 하고 들어가서는 '한문 번역사'가 되는 것이 그보다 좀 더 긴 계획입니다. 이보다 긴 계획은 며느리도 몰라요.


====병장 김승태====


8. 엔트로피를 읽고 후기를 쓰셨는데 승주님께서 생각하기에 현 패러다임에서 엔트로피 패러다임으로의 변환이 좋다라고 생각하시는지? 아니면 승주님께서 달리 생각하고 계신 패러다임이 있는지?


☞ 제가 동양인이어서가 아니고, 엔트로피 패러다임은 '천지인(天地人)'을 과학적으로 해석한 하나의 관점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모든 것은 우주 전체의 입장에서 수렴되어야 하는데, 내가 나서는 것이 어떤 사람의 기를 꺾어놓는 것은 아닌지가 우리 선조들의 주된 고민거리였습니다. 누군가 큰 부자가 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돈을 갈취한 것이며, 돈의 커다란 맥을 꽉 쥐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이들에게는 광범위하게 깔려 있었습니다. 부자에 대한 반감이라고만 해석하면 반쪽의 의미밖에 없습니다. 부자의 부는 반드시 전체적 기의 흐름을 눌러서 거기서 득을 얻었기 때문에 다른 부분에서 소통시켜야 하는 것 역시 부자들이 당연하게 생각한 사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의(義)와 선(善)과 직(直)에 자신을 맞춰가면서 행동했습니다. 그것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적절히 변형시키며 오묘한 생을 살았습니다. 마치 공자의 교육방법처럼요. 서당 다닐 때 훈장님께 '조선자의 비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서양의 정교한 치수 방식과는 달리 조선자는 한치 정도의 허름한 척도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의 체형에 따라 손톱 하나 정도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어떤 할머니의 한복점이었는데, 외국에서 공부해서 다른 한복점을 차린 딸은 어머니의 '솜씨'를 절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과학적으로 설명하기에는 좀 그런 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그냥 몸에서 몸 전체로 전수되는 가운데 유지되어 온 동양의 이런 방식이 참으로 신기하면서도 일면으로는 '그냥 이해가 되어 버리는' 거 있죠.


그것은 패러다임이라 하기에도 좀 쑥스러워요.


다만 동서양이 통합할 때 그것은 서양의 언어로도 표현할 수 있는 '엄밀함'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죠.


만일 선조들이 현대를 살아간다면 멀고도 다른 두 세계를 하나로 잇는 중대한 비유를 열심히 발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의 패러다임이라고 한다면 '개인과 전첵와 국가와 지방과 세계를 감안한 행위' 정도가 될까요.


9. 詩에 대해 시적으로 표현하자면? (승주님만의 생각으로)


☞ 그에게서 들리는 목소리인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들었던 목소리인지 누군가 그와 비슷한 이야기한 것도 같은데, 뚜렷이 생각은 나지 않고 아마 그와 나의 생각이 반쯤 섞였나보다 싶게 이야기하는 것(사람)


이것은 예전에도 있어왔는데 그가 하니 전혀 새로운 것 같기도 하고 오묘하게 나의 예측을 벗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싶게 지나가 버리는 것들. 사뿐히.


====병장 이우경====

10. 어떻게 하면 그렇게 긴 글을 쓸 수가 있나요? (덕분에 좋아하는 글임에도 짜투리 시간밖에 없는 저는 나중에 봐야지 나중에 봐야지 하다가 놓쳐버린게 수개입니다. 프린트라도 해놓았다가 근무설 때 읽어야 할 지경)


☞ 저는 장편을 쓰고 싶어요. 되도록 '대하(大河)'에서 느낄 수 있는 힘있는 줄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밀한 연결과 발상의 포석과 그것을 아우르는 구조. 복잡미묘한 것들이 말끔히 정리된 듯한 한 인간. 이것에 제가 바라는 것인데요. 대학 시절 선배의 말을 인용한다면 '처음에는 시어에서 시어로, 시에서 시로, 시집에서 시집으로, 시인에서 시인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거기에 한마디 덧붙인다면 '그것들의 과정이 가지런히 놓여 있어야 한다'


공교롭게도 저에게는 긴 글을 올리는 것과 긴 글을 읽는 것이 동전의 양면과 같군요.


한 권 두 권은 분명히 짧지 않은 분량이지만, 한 질 두 질 역시 한 권 두 권에 비해 실상은 큰 부담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란 게 참 단순해서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같은 크기로 보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경님까지의 거리와 여기서 태양까지의 거리가 별반 다를 게 없죠(이것은 스피노자의 사상입니다.) 이것이 아마 일일 생활권이나 유비쿼터스를 창출해낸 발단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분량과 깊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느끼고 있기만 한다면. 짧은 글도 긴 글 못지 않게 정밀하게 다듬기가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긴 글 역시 짧은 글을 확대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생각보다 차이가 없다는 것을 요즘은 더욱 많이 느낍니다.


그래도 난 아마 짧은 소설은 쓰지 않을 것 같습니다. 좀 익살스러운 예로 도스또옙스끼가 긴 글을 쓰는 이유는 '판매 부수'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공산이 큽니다. 한 번 써보세요. 길게. 제 말이 틀린지 맞는지.


11. 독서량만해도 대단하신데 북클럽에서 활동 시간도 대단하십니다. 비결이 있다면? (부럽습니다)


☞ 저도 북클럽의 글들을 꼼꼼히 읽을 수준은 못됩니다. 게다가 요즘은 부사수(원이) 눈치 보여서 접속도 힘든 걸요. 그래서 북클럽도 아예 인수인계를 해버렸습니다. 짬을 먹고 처부 업무와 생활은 원만히 돌아가고 해서 그런지 제 직속상관님도 접속한 거 보고 아무 말 안합니다. 그 분은 소설을 접속해서 읽는걸요. 그냥 하루 종일 접속해놓고 왔다 갔다 하며 눈에 들어오는 글은 코멘트를 남기는 정도. 솔직히 고백하건데 저는 그 중에서 제 글을 제일 많이 읽는 것 같습니다. 나르시즘 중증 증세라 할 수 있죠.


12. 하루 중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 1시간뿐일 경우 일주일 7시간의 사용계획


☞ 이런 조건 부 물음이 대답하기 가장 어렵습니다.


꼭 일주일이어야 하나요. 나는 꾸준한 계획과 구체적인 실천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므로 활용을 생각하지도 않고 그냥 개기면서 부자유스러운 23시간을 위로하는 데 시간을 보내겠어요. 마찬가지로 일주일 동안은 161시간의 시간들이 비탄에 빠지지 않게 잘 위로하고 북돋워 주는 데 쓰겠어요. 뭐 뒹굴기나 멍하니 먼 산 보기, 북클럽 접속 같은 거나, 신문 읽기 같은 걸로 머리를 식혀주는 것이 되지 않을까요.


13. 커서 (?) 뭐 될거예요? 그리고 생계는 무엇으로 유지 하실건가요?


☞ 나는 작가가 될 겁니다. 추상적으로 '창조하는 사람'이 될 거에요. 무엇인가 낳지 않으면 내 안의 꿈틀대는 '이것'이 나를 그냥 두지 않을 거에요. 그리고 다른 시간들은 거기로 가기 위한 과정입니다. 생계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 같은데요. 제 애인만 동의해 준다면 돈보다 시간과 기회를 갖는 직업을 택하고 싶어요. 지금까지 '반드시 대박 터뜨리니까 기대해'하고 강하게 뻥을 쳐놓긴 했는데.. 제 인생 참 아슬아슬하죠?


14. 미디어로서 TV 와 영화에 대한 생각과 개선 보안되어 나아가야 할 방향


☞ 고집스런 단방향과 설익은 양방향을 지적하고 싶군요. 양자가 제대로 만나기 위해서는 각자 독자적인 완결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미디어는 장르와 매체로서의 정체성을 찾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만약 일가를 이루었다면 진정한 의미의 양방향 소통은 이루어지리라고 봅니다. 유치하게 관객과 청중을 끌어들이지 말란 말이에욧!


====병장 하진환====


15.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페리클레스의 정치는 엄밀히 말하면 독재라고 할 수 있는데요, 시민의 지지하에 이룩 된 독재에 대한 의견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 페리클레스는 2권에 나옵니다. 그 때문에 2권의 후기를 쓰고 싶었지만, 다른 생각이 들어서요. 지금도 그렇지만 '시민의 지지'라는 게 참으로 무상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는 그들(페리클레스, 테미스토클레스)의 '통로'에 애정을 가질 뿐입니다. 역사를 두고 보았을 때 이미 검증된 가치는 움직이지 않은 것이며, 그것이 그들의 의도와 선택에 기인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겠지요. 게다가 그들은 인간이기에 완벽하지 못한 모습에 애절한 동정마저 느낍니다. 좀더 많은 시민들(당대의 시민, 후광을 입거나 영향을 받은 시민, 그를 검증한 시민)이 그에게 크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의 독재는 일단 긍정할 만한 것이라고 봅니다.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는 故 박대통령도 '논란'이 될 수 있다는 점에 한해서 가치를 인정합니다.


시민의 지지 하에 이룩된 독재는 혹시 '나치즘'을 염두한 것인지 궁금하군요. 좀더 커다란 시민이라면 용납합니다. 전국 시대는 중국인이 여러 시민들로 나뉘었지만 그들의 일반적인 염원[흑! 부사수 이름]은 통합이었습니다. 나치는 '차별성'에서부터 시작하였기 때문에 비판받아 마땅하며 실패한 필연적 이유가 됩니다. 그리고 세계의 시민들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도 증명이 된 것 같습니다.


만일 전세계 시민들이 지지하는 독재자라면 그것이 사기일지라도 환영합니다.


16. '사기 열전'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전 흉노 부분이었습니다.)


☞ 저는 사기 전편에 등장하는 '금상(今上 ; 한무제)'에 대한 다각적인 묘사를 가장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당대의 임금을 향해 이렇게 과감하고 적나라하고 문학적이고 인간적으로 파헤친 작가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사마천은 그의 임금을 사랑했던 것이겠지요.


이것이 사기의 커다란 두 흐름이라고 생각합니다. 흉노와의 관계사와 함께.


편명만을 말한다면 역시 자객, 유협, 화식, 흉노 등의 조명입니다. 그 균형감각이 정말 탐스럽습니다. 엄정한 역사서에 사관의 감정을 개입시킨 점까지 합해서 말입니다. 신선한 충격이라고 할까요.


17. 전공이 무엇입니까? (혹시 철학과?)


☞ 공식적인 전공은 에너지공학과[공대생이었다우]를 3학기나 다니다가 남은 5학기를 국문학, 철학(복수전공) + 역사 부분을 보았습니다. 졸업한 이후에 더 많이 공부해야 하는 과목들이죠. 문, 철, 사의 제대로 된 삼각형을 그려보는 게 제 전공적 소망입니다.


====병장 이우경====


18.책가지에는 글이 없고 책마을에만 글이 있는 이유.


☞ 완곡한 압박이시군요. 무서우십니다.


사실 요즘 책 읽고 쓰기에 탄력이 붙어서 칼럼은 붙잡지 못했습니다. 꿈만 꿀 뿐이죠.


한일관계와 독도문제 등에 대한 '쓰나미'급의 칼럼(쓰나미 이후 같은 칼럼 말이죠)을 준비 중입니다. 사건 이후부터 지금까지 간간히 나오는 기사들이 한 뭉치군요. 좀더 객관적이고 '지식in'적으로 써보려 합니다. 평형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어른들이 읽는 동화 '분도(忿島 ; 해석하자면 '성난 섬' 정도 되겠죠)'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제하(帝下)'라는 연적과 아내(이름은 미정)를 다투는 골격인데, 좀 비극적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삼각관계나 로맨스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참여 문학'이라고나 할까요. '무한 공유'라는 주제로 몽상적인 글을 쓰려 하는데 이 세 가지 중에 몇 개나 완결될지 모르겠습니다.  


====상병 한상천====


19. 독서의 영역이 참으로 넓은데 가장 흥미를 가지고 있는 분야와, 앞으로의 방향은?


☞ 지금 읽고 있는 장르들은 무기이자 도구입니다. 문학, 철학, 인문, 과학, 역사 등의 도구가 어느 정도 갖춰지면 그것들이 어우러진 '인물'들을 탐험할 것입니다. 프루스트, 톨스토이, 괴테, 도스또옙스끼, 연암, 다산 등의 인물들과 만나면서 인정세태를 광범위하게 논하고 싶은데, 쩝.. 문제는 '시간'이겠죠.


20. 전역인사는 슬슬 준비하시는지 마지막으로 남기게 될 목록과 여러가지에 대한 기대가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 전역인사는 준비하고 있어요. 시간은 좀 있으니, 마지막 목록은 제가 여러 번 언급했듯이 '부분과 전체', '종의 기원(가능하면 이기적 유전자와의 합권 후기도 추가)'의 후기를 끝으로 북클럽에서의 정식 후기는 마감하려 합니다. 거기에 이제까지 썼던 후기의 짤막하고 명쾌한(?) 그리고 내 생각이 많이 들어간 '다이제스트'를 써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남은 여가 동안 (전에 열심히 읽었던) '바른 국어생활과 문법'인가 하는 방송통신대 문법론 교재의 요약과 '한글 맞춤법의 재미있는 소개'와 위의 글에 바탕을 둔 '북클럽 우리말 윤리규범(강제성이 아닌 점을 강조하기 위해 '윤리'를 살짝 데려왔음. 치사하죠)'. 이 정도입니다. 남은 시간은 한 달인데, 후기는 그렇다 치고, 아마 휴가기간을 내내 여기에 쏟아 부어야 할 듯.


====병장 권호중====


21. 글 쓰는 스타일이 어떠세요? 한번에 쭈욱 쓴다던지 한단락씩 쓴다던지.. 써놓고 추가한다던지.


☞ 제가 쓰면서 개발한 '3단 필터 방식'을 소개하면 될까요. 제가 배운 선현들은 한 순간에 대개 두 세 가지의 일을 중첩해서 하는데 능숙했다고 보입니다. 저도 그런 훈련을 좀 했죠.


만약 여자친구를 따라 나와 별 관계가 없는 '교육학' 강의를 받으러 갔을 때, 그녀의 입장에서는 '시간을 할애'했다거나 '소비'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데, 나는 그 애와 함께 있으면서 동시에 교육학이란 어떤 것일까 하는 호기심을 풀 기회를 찾는 것입니다. 제 군 생활도 전반적으로 2중 3중의 중첩된 의미망을 갖습니다.


'독서 후기에 국한해서 말한다면'

일단 책을 읽고 '옳거니!' 하는 부분을 형광펜으로 긋습니다. 그리고 다 읽고 나면 그것을 타이핑합니다.(손으로 읽습니다.) 타이핑이 끝나면 인쇄해서 오탈자도 확인할 겸 다시 읽습니다. 또 '옳거니' 하는 부분은 형광펜으로 칩니다. 몇 번 더 읽으며 언급할 부분이나 의지할 부분, 문제삼을 부분은 좀더 진한 '녹색' 형광펜으로 칩니다. 그리고 책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이 전체적으로 들어올 때까지 쓰는 것을 지연해서라도 계속 읽는 편입니다. (아마 그러면 죽을 때까지 읽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대개는 시간의 중재를 받아들여 글을 쓰는데, 여기에는 '모험성'이 다분합니다. '우연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읽다가 메모를 한 부분과 형광펜 부분을 보면서 논리의 배열과 순차, 형식, 스토리, 인용부 등이 한꺼번에 이루어지고, 중간중간에 인쇄하면서 살펴보고 하는 지극히 기계적인 작업을 통해 이루어진 '결과'가 여러분들이 보고 있는 후기입니다. 그래서 '내공쌓기, 공부'의 의미가 깊이 함유되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썼던 후기의 '원작'은 당분간 거들떠도 안봅니다.


다른 종류의 글쓰기도 대개 이렇습니다. 특히 무엇을 보고 쓸 때 저는 좀 집요한 편입니다. 그리고 글쓰기 자체를 두고 봤을 때는 일단 초안으로 골격은 유지한 채로, 텍스트와 끊임없는 '째려보기' 혹은 '눈싸움'을 통해 다듬어 갑니다.


22.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시는 것은?


☞ 나를 하루고 이틀이고 방치시키면, 이 녀석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으면서도, 혼자 실실 웃으면서 재미있게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혼자놀기'를 좀 잘하는 편입니다. 먹을 것과 외로움을 달래줄 친구만 좀 있다면 죽을 때까지 혼자 놀 자신이 있습니다. 대개 책을 읽거나 이상한 음모를 꾸미고 '실천'에 들어가는 식이지만요.


23. 운문과 산문중에 어떤 글이 더 마음에 드세요? 자신의 경우에는 어느쪽이 더 잘 써지시는지..


☞ 저는 운문이 정말 쓰고 싶고 잘 썼으면 좋겠는데, 자타가 공인하는 글 쓰기는 역시 산문입니다. 특히 비평 능력에 대해서는 제 지인 여럿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죠. 산문의 길을 따라 그리운 운문을 만나러 떠나는 나그네의 심정이랄까요.


====병장 노준오====


24. 승주님의 글을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올때가 한두번이 아닌데, 저 같은 범부들을 위해 글 잘쓰는 '비결'을 한가지만 알려주신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 이성복 시인에게 누군가 이와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왜 이렇게 시를 잘 쓰느냐고. 그는 그저 시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나는 그 시인처럼 내 글을 사랑할 자신이 없어요. 그저 내 생각이 종이 위에 제대로 그려질 수 있도록 바라볼 뿐이죠. 예전에는 나를 감싸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유난히 갈망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형식도 역사도 파괴하고 맘껏 휘갈겨 보았는데 그렇게 몇 번 해보니 내가 무엇 위에 서 있는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고전에 파묻히는 이유가 되기도 하겠죠.


웬만한 글쓴이들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두려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두렵다는 것은 한 줄의 글에 혼신을 기울인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집필 후에는 대개 기진맥진하기도 하고 코엘류처럼 부인과 잠자리도 같이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마치 고행과 같은 일련의 과정들 아닌가 생각합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내가 글을 쓰는 방식은 주로 '나를 괴롭히기'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텍스트와 내 의식이 지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것이 아닌데(특히 후기에 있어서) 텍스트와 그 주변 도움자료를 훑는다든지, 내 의식에 온전히 저자의 의도와 진의가 그려질 때까지 좀처럼 펜을 들지 못하는 습관은 이로부터 생긴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소설가 한승원이 정약전(정다산의 형)의 일대기를 담은 소설책 한 권을 마침내 끝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게 벌써 9년입니다. 한승원은 정약전의 유배지에서 9년을 맴돌면서 마침내 한 권의 책을 들고 기어나왔습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였는데, '나는 나를 가둠으로써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정해진 텍스트나 주제 안에 나를 가두고 벗어나려고 발악하는 고된 과정 후에 나는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아요. 길게 늘어뜨려 보았는데, 요지는 내 마음속에서 나오는 소리를 받아적기 위함입니다.


25. 평소 책을 보실때 어떤 식으로 읽으시는지 궁금하네요. (저같은 경우는 빨리 한번 읽은 후 두번세번 계속 읽으면서 머리에 담는 식인데요.) 뭐. 한줄한줄 아주 꼼꼼히 읽는다던지, 메모를 해서 책을 걸레로 만드신다던지.


☞ 3단 필터라고 하는 방식입니다. 3단으로 읽고 나면 거의 걸레가 되어 있죠. 김대중 대통령의 서재에 빼곡히 쌓인 책들이 하나같이 페이지마다 형광펜으로 도배가 되어 있다고 하던데, 그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우선 책마다 다를 텐데 '쓰려고 읽는' 책이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공격적인 독서가 되기도 하고 다른 방식의 독서가 되기도 합니다. 우선 군대에서 습득한 공격적 독서는 위와 같습니다.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일단 책을 읽으면서 문제되는 부분을 형광펜으로 칠합니다. 다 읽고 나서 형광펜 되어 있는 부분을 그냥 '칩니다.' 치고 나서 뽑고 뽑은 것을 보는 과정에서 오탈자를 검색함과 동시에 더욱 파고들 내용을 좀더 진한 형광펜으로 칠합니다. 그리고 수첩에는 따로 테마나 주제, 문제제기 같은 것들이나 각종 이정표 등을 메모해 놓고, 메모가 지시하는 대로 독서가 이루어집니다. 그러고 나서는 반복이지요. 어느 정도 쓸 말이 있겠다 싶을 때는 '집필'에 전념합니다. 글을 쓰는 과정은 순서에 국한하지 않고 뒤죽박죽 하다가 나중에 정렬합니다. 이 독서는 어디까지나 저의 지적 모험과 글쓰기에 관련된 활동이므로 독서인지 창작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이지만 매우 유익한 경험이 된답니다. 좀 덜 공격적인 독서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당분간은 좀더 '고전'에 전념하려고 하고 에세이를 읽을 때는 공격적 독서를 주로 하려고 합니다. 아마 내 홈피 같은 데는 새로운 독서후기가 널려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3단이라 하면 처음의 형광펜이 1단이고, '쳐서 뽑는 것'이 2단이며, 뽑은 것을 보면서 '좀더 진한 형광펜으로 칠하는 것'이 3단입니다. 3단의 과정을 통해서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을 읽는다'는 확신에 도달하는 것 같습니다.



26.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라고 감히 말할수 있는 책 한권을 꼽는다면?


☞ 스피노자의 '에티카'가 아닌가 합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사의 정류장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고대와 중세의 온기를 간직하면서도 근대와 현대의 예지를 깊게 품은 철학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수가 모아진 '행동'은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철학보다 그의 인생에서 많은 영감을 얻곤 합니다.


아직도 그가 남긴 덕목은 내게 유효한데, 어떤 분야의 사람이든 육체노동 한 가지는 갖고 있어야 한다는 미덕과, 물심동일론(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육체적으로 경험한 것에 한하여 정신세계를 확장시킬 수 있다 정도일까요), 나아가서 니체에게 깊은 감명을 준 몸 철학(니체는 '정작 중요한 것은 바로 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스피노자는 육체와 정신 중 육체를 등한시하는 전례에 의문을 던집니다. 정신은 어쨌든 육체의 행동 반경 안에 있기 때문에 정신이 나아가기 위해서는 육체의 등을 타야 한다는 요지입니다.), 그리고 무한표본론(우리가 느낄 수 있는 표본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인간의 계 내에서 판단한 것을 절대시 할 수 없다),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인간의 계를 넘어서 신의 배려와 사려에 닿음으로써 나는 구질구질하고 허무한 세태에 붙잡히지 않는다), 격정이해론(감정은 나를 죽음이나 불행에 몰고갈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지만 일단 그것을 이해하기만 한다면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이런 주제들은 나를 사로잡기 충분했습니다. 파도가 나를 밀어 '전혀 다른 인간'이 되게 하였던 '마녀의 빗자루 효과'라는 것도 내겐 짜릿한 경험이었습니다.


27. 인간복제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신지?


☞ 마치 종의 기원이 발표된 당대의 분위기를 연상케 하는 문제입니다. 찬반양론이 격한 과열현상을 지나 우리가 지금은 그 사실을 당연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미래에도 인간 복제에 관해 이런 인식이 굳어져갈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의 발견이라는 것은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시기가 도래하여 인간이 그것을 붙잡은 거라고 봅니다. 물론 플루토늄이나 핵물질에 대한 처리방인이 문제제기를 하겠지만, 예컨대 방사능을 공중으로 퍼뜨렸을 때 수십에서 수백만년 동안 그 주변은 죽음의 땅이 된다고 하는데, 죽음의 땅에서 삶의 땅으로 만드는 것 역시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강한 긍정은 맹신과 불신을 초월하며, 모든 부정을 포함합니다. 설익은 윤리나 생명 존중을 들이대 복제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축소 해석한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을 거라고 봅니다. 좀더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설익은 긍정과 '강한 긍정'의 차이를 생각해서, 이것으로 인해서 우리의 삶이 좀더 희망에 가까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7급 하지연====


28. 승주님 때문에 장정일의 삼국지를 다시 읽게되었어요. 관심분야가 상당히 광범위하신데 놀이삼아 재미로 하시는 분야와 학구적인 탐구가치를 가지고 연구하시는 분야가 있으실것 같은데...


☞ 평소 하지연 님의 글에 많은 걸 느끼고 있었는데 이렇게 질문까지 받게 돼서 즐겁군요. 장정일의 삼국지 계획서는 읽어보았는데 삼국지 자체는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나가면 읽어보려 해요.


제가 관심 갖는 독서의 분야를 대부분 광범위하다고 보시는데, 부끄럽습니다. 좀 예리한 분들은 제가 얼마나 허겁지겁 독서에 열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전에 말씀드렸는지 모르겠지만, 제게는 10년간의 진공기간이 있었고, 대학 입학 때부터 줄곧 콤플렉스에 가깝게 의식하여 왔습니다. 일단 대학 문 안에 들어가면 자신이 가지게 될 전공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하고, 거기에 '고전'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찾아서 읽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공대생이든 인문대생이든 법대생이든 말이죠.


제가 궁극적으로 관심 갖는 분야는 '창작' 혹은 '창조'입니다. 과학 서적이나, 역사 같은 분야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그러한 인물을 그리기 위함입니다.


어찌 보면 놀이 삼아 재미로 하는 분야는 따로 없고, 또 어찌 보면 내가 관심 갖고 읽는 모든 것들이 '노는 행위'의 일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창조적인 행위'라는 것은 마치 어린이가 재미있게 노는 것과 같이 하지 않으면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좀더 좁혀서 말씀드리면, 제가 전공으로 더 하게 될 것은 '동북아 비교한문학' 같은 고전문헌과 한문학 범위가 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제가 기대고 온 국어국문학과 철학의 영역은 제대로 짚고 가고 싶습니다. 다른 부분들은 감히 건드릴 수 없고 그저 교양 수준으로 보는 것일 테지요. 만일 바깥 세상으로 나가서 좀더 자유롭게 뭔가를 할 수 있다면, 한문 원전에 파묻히고 싶어요. 다만 지기가 별로 없어서, 혼자 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기회가 되면 '한문강독회' 같은 조그만 동아리를 만들어 보고 싶은 꿈도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제가 학문적인 탐구가치를 두고 있는 것은 제 일상적인 생활입니다. 적잖은 동서양의 성현들과, 소설 속의 상황들, 그들이 내포하는 철학적 가치들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제게 찾아오는 고난들은 현명하게 이기기 힘든 것이 많습니다. 세상은 내게 아직도 만만치 않은 친구이고, 그런 세상을 대하는 나의 무기라는 것이 초라하기 그지없어서 나는 일상과 단절되지 않는 공부가 되기 위해서 항상 안과 밖을 살펴볼 뿐입니다. 제가 관심 갖고 앞으로 하게 될 일들을 주섬주섬 적어 보았습니다. 답변이 되셨는지요.


====병장 권정훈====

29. 일전에 글을 적기도 했지만 종교적인 갈등으로 남녀가 헤어진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 하시는지요. 좀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요. ex) 제사를 지내는 남자 측 집안과 절실한 크리스천 며느리


☞ 종교적인 권역의 가족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겪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 후배 중에 크리스챤인 여자애와 무교인 남자애가 있습니다. 걔들은 99년부터 사귀기 시작했으니 햇수로 벌써 7년이군요. 그런데 여자애의 가족은 아직도 그 친구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더라구요. 여자 후배의 두 언니는 모두 크리스챤 가족과 맺어졌습니다.


사랑이라면. 가족들을 설득할 자신이 있었기에 7년 전에 그들은 사귀지 않았나 싶네요. 사람이 자신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종교가 다가오는 것 못지 않게 영적인 것이고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종교를 일으킨 것도, 면면히 이어가는 것도 인간이니까요. 어찌 보면 종교가 닿지 않는 곳에도 인간은 있으니 애초부터 종교적인 문제로 남녀가 헤어진다는 것은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간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이 문제를 종교적으로 시작하기보다는 인간적으로 시작하는 것이 어떨지요. 종교적인 문제로 헤어짐을 거론한다거나 걱정한다는 것은 사실 사랑이 미약하여 주위의 역경과 장애에 쉽게 동요되는 현상이 아닐까요.


====병장 이우경====

30. 여자는 얼마나 변 할 수 있나요!!!! "쉬운 예를 들자면 시간 관념도 장소 관념도 없어서 약속 시간으로부터 반시간~한시간 정도 후에 약속 장소 근처로 도착하는 여자를 정시에 정해진 장소에 도착하게 만들 수 있나요?"


☞ 저는 여자에 대해서는 좀 헌신하는 편입니다.


여자는 한결같고 헌신적이고 지속적인 모습에 쉬이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한 시간 정도 매일 늦게 도착하는 그녀도 항상 어쩌다보니 늦는 것이고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 생각과 같이 습관처럼 그러지만은 않을 거에요.


만약 남자가 그 자리에 반듯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본다면 그녀는 행복하고 또 미안할 거에요.


반대로 화가 난 표정으로 서 있거나 만나자마자 짜증을 부린다면 절대 미안해하지 않을 거에요. 남녀의 특성상 오랜 동반의 세월을 두고 보았을 때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은 주로 여자 쪽인 것 같으며, 때문에 여자는 그러한 헌신에 앞서 그녀의 노력이 가치가 있을지 남자를 끊임없이 시험합니다.


둘 사이의 대립관계가 그렇듯이 한쪽이 반듯하고 안정적으로 넘어온 공을 받아내면 상대편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양측 중 누가 얼마나 많이 당황하고 흔들리고 속느냐에 따라 성패의 국면은 정해집니다. 마치 운동 경기에서 페인팅에 흔들린다면 심리전에 말려들어서 수비에 실패하지만, 굳게 지킨다거나 자신의 수비 방식을 다듬어 그 방법론에 의거해 안정된 플레이를 했을 때는 반대로 페인팅을 건 쪽에서 흔들리는 것처럼요. 좀 시간을 두고 지속적으로 일관된 모습을 보인다면 상대가 여자든 남자든 점점 당신의 쪽으로 기울기 시작할 겁니다. 제 경험상 그러했습니다.




=================인터뷰=======================




촌장이에요. 회원특집 질문 답하시느라 참 노고가 많으시네요. 좋은 내용들이라 빨리 회원들한테 보여주고 싶은데요.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셨던 인터뷰를 시작할게요. 제 소개는.. 음음음. 안하셔도 잘 알고 계시죠?


1.

첫번째 이야기를 해봐요. 혹시 승주씨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읽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저한테 무진은 전남 순천만의 실제적인 장소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청년기를 맞이한 젊은이들이라면 한번쯤 들를 수 있는 방황과 갈등, 자폐로서의 공간이자 완벽한 사회화 이전의 자아가 완벽한 심리적 이유기(離乳期)를 가지기 직전의 방황현상이 벌어지는 심리적 공간으로 이해했어요.


즉, 우리는 무진에 들러 청춘의 온갖 혼란을 겪다가 '안녕히 가십시오.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라는 팻말을 보며 혼란스러운 자아와 작별하고 어른이 되어가는 거죠.


승주씨에게는 이러한 무진에 버금가는 젊은 시절이 있었습니까? '개성은 고독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잖아요. 너무나 고독해서 견딜 수 없었던 시간이 있었습니까? 그 안에서 승주씨는 어떤 것에 대해 고민했습니까. 꿈이라든가, 절망이라든가, 슬픔이라든가,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점철된 청춘의 기억을 들려주세요.



☞ 다행히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도시의 열망을 뒤로 하고 촌구석에 숨은 자의 고독을 수음으로밖에 달랠 수 없었던 젊은 날의 기억이 진하게 남는군요. 저는 그렇게 대단한 고독은 아니더라도 두 가지 그와 비슷한 순간이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첫 번째는 가장 뜨거웠던 첫사랑에게 결별 선언을 듣고 나서 시골로 내려갔습니다. 사나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이불만 뒤집어쓰고 있다가 계시처럼 책에 매달렸습니다. 내가 잡은 책은 윌 듀런트의 ‘철학 이야기’였습니다. 내용도 들어오지 않았고 글자도 잘 읽히지 않았는데 마치 경전처럼 손에 들고 계속 읽어갔습니다. 아마 프란시스 베이컨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높고 위대한 철학은 종교로 기울지 않을 수 없다. 형이상의 최정상, 유물론의 최정상, 인식론의 최정상에서 우리는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풍광을 경험한다.’


그때부터 저는 이별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 있는 나의 사색을 펼쳤고, 더 이상 죽을 만큼 괴롭지는 않았습니다. 그러자 세상이 달라 보였습니다. 이미 나는 그애의 회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던 겁니다. 결국 그애는 제게 돌아왔습니다. 만약 여태 아파하고 괴로워하며 시름시름 앓았다면 사랑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으리라 생각되며 찾아오더라도 제가 준비가 되지 않았겠죠.


두 번째는 그보다 전에 있었어요.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가난한 고학생입니다. 그래서 고교 졸업 후 감귤 과수원과 작업장(선과장이라고 합니다. 과일을 선별하는 마당이라고나 할까요)에서 일했고, 2학년 때는 소위 ‘노가다판’에서 한여름을 굴렀습니다. 좀더 다른 직업을 찾을 수도 있었는데, 그 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밑바닥을 경험하고 싶다는 단순한 욕구였을까요.


고독했어요. 특히 아침 일찍부터 해직녘까지 계속되던 단순작업과 육체노동의 반복, 하루 이틀, 한 주 두 주 이렇게 가는 동안 허무했고 마음은 삭막해져 가는 것 같았습니다. 다신 느끼고 싶지 않았던 기분이죠.


일이 끝난 저녁은 도서관에 올라가서 막차 시간까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었어요. 만약 스피노자에게 구원받지 못했다면 저의 세계관이 좀 일그러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은사이신 소설가 한림화 선생은 이 점을 우려해서


‘네가 가난에 시달리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가난은 사람을 변형시키거든.’


이 말은 지금도 제게 묘한 균형감각을 주고 있습니다. ‘야생 온실론’이 그것인데요, 지금까지 별다른 사회생활을 한 경력은 없지만 나름대로의 밑바닥 생활은 저를 온실에만 가두지 않았고, 전후 세대들이 지겹게 겪었던 가난 콤플렉스에서 자유로울 수 있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혼의 비용’을 치렀습니까.


고독은 두 가지 얼굴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도 하지만 단련시키기도 하는 것 같아요. 무엇인가를 견디고 소화시킬 수 있는 한에 있어서 경험은 유익한 것 같아요. 그 중에서는 버거운 것도 있을 테니 어떤 경험이든 견딜 수 있도록 체력을 단련시키는 것이 고독한 자의 철칙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 제가 묘한 균형감각으로 세상에 많이 다치지 않고 살아가게 해준 것들에게 고마움을 표합니다.


2. 3


두번째 질문을 드립니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극복할 수 없는 간극. 우리는 같은 시니피앙을 보고 있지만 서로 다른 시니피에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 즉,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의 본질로 여겨지는 단 하나의 관점'과 '독자가 느끼는 본질 사이의 갈등'은 꽤 해묵은 종류의 갈등으로 느껴집니다.


이미 플라톤은 전자로 여겨지는 일원론적인 관점을 이데아라 정의한 바 있으며, 후자를 자신의 주관, 좀더 심하게 말하자면 편견에 가까운 뜻인 doxa 라고 치부해버렸습니다. 내용의 본질에서 벗어난 논의는 모두 '반(反)진리' 집합에 속하는 의미였죠.


후대의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의 논의는 물론 플라톤보다는 멀리 와있지만 이 다툼에서 멀리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 맥락을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는 것으로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의 맨처음 장의 내용을 간략하게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텍스트는 열린 체계이지만 닫히려 하고, 닫힌 체계이지만 열리려 한다. 이 열린 체계와 닫힌 체계의 긴장이 바로 텍스트이다.'라는 촌평으로 문제의 핵심을 짚고 있습니다.


얼마전 책마을에서도 이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표준어를 논하자는 영준씨의 글이 게재되었죠. 저는 그 칼럼의 인용문에서 권력과 자본, 표준어를 사용하기로 내정한 구체적인 세력을 적(敵)으로 규정한 결론에 그리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더 무서운 것은 텍스트를 '닫힌 체계'로 만들려는 우리 자신들의 인식인것 같아요. 요컨데, 진정한 적은 우리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죠.


제가 승주씨에게 주목하는 지점은 바로 책가지에서의 시도 등을 통해 텍스트를 열린 것으로 받아들이는 승주씨의 태도이자 전략인것 같습니다. (이러한 부분에서는 승주씨와 민관씨가 대조적이라는 생각도 드는군요. )


궁금한 것은 바로 승주씨가 지향하는 열린 세계의 구체적인 모습인데요, 과연 승주씨의 '즐거운 음모'란 어떠한 모습을 띄고 있습니까? 그것은 전복입니까? 아니면 기존의 유산을 바탕으로 한 창조입니까? 최대한 자세하게 그려주세요.


이것이 두번째 질문이며,


인간에게 과연 구조주의에서 탈구조주의로 넘어갈 수 있는 희망이란 있는 것인지, 승주씨의 개인적인 견해를 (어떠한 관점에서든요) 듣는 것이 세번째 질문이에요.



☞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는 저도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텍스트는 열린 체계이지만 닫히려 하고, 닫힌 체계이지만 열리려 한다. 이 열린 체계와 닫힌 체계의 긴장이 바로 텍스트이다.'


저는 닫힌 체계와 열린 체계보다는 '텍스트의 강요'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닫힌 체계나 열린 체계 역시 하나의 체계를 '강요'하고 있다는 점은 피할 수 없다고 봅니다. 독서를 하는 것도 일종의 '지적인 강요'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강요이기도 하고 애정이기도 하기에 우리가 반드시 횡단해야하는 인간의 띠로 이루어진 여정입니다.


그 순례의 길 안에서 나는 나를 만나게 되며 이제까지 내가 다가왔던 모든 강요가 사실은 나를 만나기 위한 배려의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밑그림이 '즐거운 음모'의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요즘에는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를 읽고 있는데요.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의 탄생 배경이 잘 나와 있습니다. 뉴튼의 고전물리에 대해 두 개의 새로운 물리학은 도전이라기보다는 고전물리학이 더 이상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을 위해 태어난 세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완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세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질적인 두 개의 체계가 공존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가 대면하는 세계는 거대한 미지를 품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전복도 아니고, 기존의 유산을 바탕으로 한 창조와도 약간 다르군요. 기존의 유산이 분명히 바탕과 소재가 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결과가 전과 같을 거란 보장은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전의 개념과 의미를 다시 한 번 물을 뿐입니다. 사실 많이 속고 있다고 생각하며, 개념을 새롭게 추궁할수록 우리가 얼마나 개념에 어두운지 알 수 있었습니다.


'용어를 다스리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용어는 사전적인 이해부터 출발을 해서 비유의 묘한 유대를 통해 세계의 망을 형성합니다. 우리들의 세계는 듬성듬성한 망 속에 위태롭게 걸쳐 있습니다. 듬성듬성한 세계는 전체 세계 안에서 버둥거리다 결국은 함몰되고 말 것이며, 영원히 구조주의의 틀 안에서 맴돌 수밖에 없습니다. 전체의 망과 대응하며 함께 호흡하고 유대 할 수 있는 진정한 비유의 망과 의미의 망이 제가 바라는 가치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새롭게 언어를 배우는 사람처럼 다가가지 않으면 안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 있어왔던 세계' 안에 갇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보게 되는가는 그가 바라보는 대상에도 달려 있지만, 이전의 시각-개념상의 경험이 그에게 무엇을 보도록 가르쳤는가에도 달려 있다.'


토마스 쿤의 이 말과도 같이 이전의 시각에서 자유롭게 위해서는 그것을 해체하거나 이탈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그것을 껴안고 진지하게 성찰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함께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나를 사로잡던 구조와 자유로운 나는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두번째와 세번째의 답변을 대신할까 합니다.


여담이지만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에서 제가 아직도 생각나는 장면은 맨 마지막 장면입니다. 김현의 죽음이 얼마 안 남은 상태에서 아주 짧은 메모가 제 기억을 사로잡았습니다. 죽음이 바로 옆에 온 순간 주위는 어두워지고 신의 방문을 맞은 것처럼 경건함과 엄숙함, 두려움이 밀려온 가운데 '살아있다'라는 그의 한마디 메모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한마디는 불우하고 절망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방향과 모습을 잘 그려낸 것 같습니다. 김현이 죽음으로 그려낸 마지막 발언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쳤을 때 나를 지금도 단련시켜주고 있습니다.



다시 2. 3


이번에는 세번째 질문에 대한 보론을 잠깐 이야기할게요. 회원특집을 보시는 독자분들께도 이해가 되어야죠.


승주씨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근대는 이성과 진보의 믿음에 확실한 기반을 두고 있었죠. 신과 종교는 이제 진리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었습니다. 가끔 인식론자들의 철학에서 신에 다다르는 경지는 있었지만요. 중세의 지배 사상이었던 종교는 정치와 학문에서 영향을 잃고 믿음의 영역으로 국한되었죠.


로크니, 흄이니, 스피노자니, 헤겔이니, 칸트는 이성의 탐구 작업을 탐구할 수 있는 곳까지 추진했고, 영국에서는 경험론 이후 공리주의 철학과 철학적 급진주의 정치 운동이 활발했습니다. 이 운동의 핵심 세력이 바로 벤담과 밀 부자였죠.


다름 아니라 이성을 이야기하면서 공리주의를 이야기하려는 이유는 바로 벤담이 고안한 일망감시체계(펜 옵티콘)에 대해서 입니다. 미셸 푸코가 쓴 '감시와 처벌'은 바로 펜 옵티콘에 반발해서 쓴 책이죠.


푸코는 '감시와 처벌' 에서 중세부터 펜 옵티콘까지 대두된 형벌의 역사를 서술합니다. '감시와 처벌'의 모든 내용을 요약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요지는 인간의 이성이 처벌의 역사에 미친 결과는 결국 형벌의 정교화, 인간의 예속, 지식과 신체의 심화된 통제라는 비극적인 영향을 끼쳤고, '이것이 과연 이성의 믿음에 기반한 진보인가?' 라는 숨겨진 질문으로 독자를 큰 충격에 빠뜨렸죠.


비슷한 시기에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 말미에서 실존주의자 사르트르와 역사에 대해 심각한 논쟁을 펼칩니다. 요약하자면, 역사라는 것은 순환되는 것이며 한가지 시점을 강요할 수 없는 구성체이기 때문에 진보라는 개념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동시대의 구조주의적 맑시즘의 알뛰세, 정신분석학의 라깡까지 이렇게 네 명의 학자가 '구조주의 4인방'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처럼 구조주의가 1900년대 초반에 일어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 것은 바로 소쉬르의 강의 노트인 '일반 언어학 강의' 라는 조그마한 책자에서 유발된 것입니다. 랑그와 빠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에 대한 이 언어학자의 조그마한 강의록의 요지는 언어가 단순한 기호이상의 의미를 넘어 언어 밑에 심층적인 인식체계가 자리잡고 있다는 아이디어를 당대의 철학자들에게 제공한 것입니다.


요컨대 시니피앙(기표-記表)과 시니피에(記意)의 개념은 레비스트로스에 의해서 신화소(神話素)에 대한 분석으로 나타납니다. 거의 모든 세계의 신화들의 상징물은 다른 모습(기표)로 나타나지만 그 신화가 의미하는 바(기의)에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야생의 사고'에서 레비스트로스는 문명이 닿지 않은 원시인 사회를 탐구하며 문명사회의 접점을 탐구합니다. 놀랍게도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이 그렇게 인간 존재 자체를 크게 변화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원시인 사회에서도 사회가 존재하고 관습과 제도가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데, 과연 이성에 의한 진보가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있냐는거죠.


구조주의의 주장을 종합하자면, 인간이 모여 사는 방식에는 특정한 형태의 공통점이 있고, 또 그러한 공통점의 기반 아래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여 산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이러한 공통점을 안고 있는 사고체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구조주의자들에게 진보란 개념은 상당히 회의적입니다. 동시에 구조주의 철학은 객관적이며 일원론적이고, 불변의 체계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구조주의 철학은 인간사회의 모습을 설명하는 건축에서의 뼈대와 같은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이죠) 사상인데, 그 사상이 성립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구조주의 사상에 기반한 인식은 바로 사람들의 인식은 일원론적인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바로 공통된 '시니피에' 로 인간의 인식이 유도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유도의 주체는 푸코에 의하면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가 초래한 결과죠.


탈구조주의는 그 체계 안에서도 인간의 자율성을 찾으려하는 철학이에요.


일부러, 탈구조주의 철학에 대한 설명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승주씨의 보충 답변이 혹 있다면 재미있겠네요(웃음)



☞ 예전부터 인간은 ‘하늘 세계의 것’과 ‘땅 세계의 것’을 나누는 습관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플라톤 철학에서도 ‘신체’나 ‘감정’, ‘욕망’ 등은 정신이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성에 의한 ‘감정의 극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이렇게 이분법적 대립의 체계를 끌고 가는 것은 ‘이성의 유혹’에 끌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이성을 추구하며 점점 이성에 중독되어 갔습니다.


우리는 반대로 ‘이성’에 반하기 때문에 제지되고 ‘극복되어야 했던’ 것들을 보듬음으로써 좀더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간은 감정적이며 자유를 추구합니다. 애써 구조주의에서 나가려고 하는 시도는 ‘구조주의 안에서 또 하나의 구조주의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어떤 때는 전혀 내가 아닌 나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제3자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연습을 가끔 하곤 합니다. 내가 나비의 꿈을 꾸는 것인지 나비가 내 꿈을 꾸는 것인지, 그리고 환상은 무엇이며 실제는 무엇인지, 특히 마술적 리얼리즘의 향기를 맡은 후에는 ‘사실’에 대한 일종의 ‘이의’가 생겼습니다.


우리는 좀더 전체적이고 다양한 시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에 대한 ‘집착’을 완벽히 버릴 수 있다면요. 탈구조는 다시 구조를 염원하는 과정으로 가게 되지 않을까 우려가 됩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동양의 사유로 여행하고 싶군요.


4

승주님이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 추천할만한 고전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예전에 상래한테 똑같이 한 질문이에요.



☞ 지금 가장 추천하고 싶은 책은 ‘부분과 전체’가 아닐까 합니다. 그 책에 대한 후기를 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 당장 끌리는 책은 그거 하나군요. 하지만 조금 인내하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그 책에 관한 이야기는 후기를 통해 보게 되리라고 생각하니까요.


두 권을 고르라면 도스또옙스끼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와 ‘악령’이란 책을 권합니다. 특히 ‘악령’이라는 책은 ‘어둠만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으며, 특히 소설을 읽으며 사람은 ‘권성징악’이나 ‘정의’, ‘희망’을 지향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틀이 되어 버린 것이 당시의 내 독서였는데, 그 책을 읽음으로써 좀더 ‘처절할’ 수 있었습니다. 꼭 사람이 처절해야 할 필요는 없으나, 정의의 이름으로 소리없이 행해지는 악행들을 놓치게 됩니다. 빛만 따라가다 보면요. 그리고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내 마음 속에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던 ‘관능과 감정의 심연’을 자극한 책이라고 말하면 거창하게 들릴까요. 그 책을 읽음으로써 좀더 솔직해 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권의 ‘고전’을 고르라면 단연 ‘사기열전’을 고르겠습니다. 온갖 인간군상에 대한 이야기가 사유의 언어가 아니라 인생의 언어를 통해 그려지고 있는 이 책은 우리가 어떤 사유나 이론의 사례를 구하고 싶다면 여기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보다 ‘전국책’을 추천하고 싶지만, 제가 아직 읽어보지 않았기에. 특히 이 책은 ‘본기’, ‘세가’와 같이 읽을 것을 권하는데, 역사를 ‘집단’의 사유체계로 받아들이던 이전의 사고를 ‘개인’의 사유체계로 전환시켜놓은 저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객관적으로 치밀하게 연구해서 작성하는 연구자들의 역사와 개인의 경험을 계기로 감성과 욕구가 마치 한 사람의 인간처럼 복합적으로 결집한 역사가 신기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언어에 국한돼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 책을 읽고 언어의 깊이와 세계를 한층 더 확장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평가할 때 직접적인 언술이 아니라 누군가 그와 대립되는 상대를 둠으로써 그의 본질을 다각도에서 명백하게 얻어낼 수 있습니다. 구조를 통해 관찰하고, 일상을 통해 관찰하고, 사건을 통해 관찰하고, 대립자를 통해 관찰하고, 친구를 통해 관찰하고, 동료를 통해 관찰할 수 있습니다. 사마천이 무제를 얼마나 다각도로 평가했는지 황홀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미끼‘를 통해 그 시대의 세계관과 인간관을 면밀히 검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역시 귀족과 서민에 동시에 닿아 있기 때문에 ’전체를 통한 고찰‘까지 가능하게 해줍니다. 하나의 사건과 한 사람의 인물에 여러 개의 이야기와 관점을 중첩시킴으로써 우리는 미처 알지 못했던 진리의 이면을 살펴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제가 사기열전을 계속 읽어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니 세 권의 추천이 되어버렸군요. 제 수법이지요. 음흉한. [웃음]


5


다섯번째 질문은 바로 언어에 관한 것인데요.


현재 가장 표준어와 우리말 사용을 승주님께서 강조하고 계시죠.


그런데 저는 어느정도 표준어가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책가지에서의 논의에 동의하고 있는 편입니다. 물론 당대의 언어학자라면 변해가는 언어의 모습을 계속 포착하여 하나의 일관된 역사체계를 만드는 작업은 물론 필요하겠지만요.


그렇지만 일원화된 언어체계를 반드시 사용할 필요는 있을까요? 언어라는 것은 물처럼 쉴틈 없이 변하는 특성을 지닌 체계입니다. 굳이 '정화'라는 개념이 필요한지도 의문입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본어 사용에 대한 성토도 또다른 민족주의의 발로로도 여겨질 수 있지는 않을까요?



☞ 다섯 번째 질문에 관한 답변을 드립니다.


일본어 사용을 자제하고 적절한 우리말을 골라 쓰자는 입장은 언어가 가지는 세밀하지만 큰 변화를 염두해둔 주장입니다. 언어는 쉴 새 없이 변하지만 변화에는 일련의 흐름이 있게 마련입니다.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질서가 또 있겠죠. 그 질서는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일본에서 만들어진 용어는 서양 문물의 창구 역할을 충실하게 하였기 때문에 많은 용어적 혜택을 일본에서 얻어다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부채’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우리말 철학사전’이라는 프로젝트가 나오는 것도 이와 맥을 같이하는데, 우리들의 용어를 가지고 어떤 사상을 해석하고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온전한 정통성과 문화를 가진 국가라면 빼앗기고 싶지 않은 고지일 것입니다.


우리들이 역사에서 ‘변화’를 경험한 사례들을 보십시오. 우리 스스로의 반성과 성찰에 의해서 얻어낸 변화는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외세의 압력에 의해 변화되는 것이라면 각종 부작용과 ‘풀 수 없는 문제들’만 양산할 뿐입니다. 저도 엔트로피의 주장과 같이 일정한 ‘자급자족’의 바탕 위에서 변화와 요구를 받아들이고, 점점 우리들의 세계를 넓혀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말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것들을 배척하자는 주장은 우리 세대들을 ‘한글세대’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그 중에서도 양식 있는 분들은 우리말의 원류인 한문 원전과 한자 공부를 시킴으로써 좀 더 완숙한 우리말의 세계로 젊은이들을 이끌었다고 생각합니다. 언어는 글자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사상과 인간과 역사를 포함해야만 언어가 체계와 구조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체계와 변화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일관된 체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일관된 체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하더라도 변화는 피할 수 없는 대세입니다. 정신없는 격랑 안에서 영혼을 잠식당하고 마침내 완전히 지배되느냐 아니면 격렬하지만 대등한 입장에서의 대결을 통해 좀더 성숙한 체계를 형성해 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일관된 어떤 체계만이 답해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좀더 신실한 세계관을 통해 다른 세계관을 받아들일 수 있고, ‘우리와 다른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받으면서 저는 다시 이렇게 물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밀려드는 언어와 하루에도 수십 수백개씩 만들어지는 신조어들은 ‘변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일까요.

진정한 의미의 변화란 ‘변’이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화’에 강조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화’는 ‘바뀌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변절과 변심이 아니라, 감화되고 융화되는 것이 변화의 본질이라 생각합니다. 패러다임이 교체되기 위해서는 이전 패러다임과 새 패러다임 양쪽을 만족시키는 체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만약 우리가 생각 없이 일본에서 만들어진 용어를 사용한다면 그 원류를 찾아내기가 힘들어집니다. 말에는 어원이 있고 거기에는 문화와 세계관이 스며 있는데, 좀 더 쓰기 편하고 익숙하다고 해서 여과 없이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장차 장기간에 걸친 정체성의 위기를 맞았을 때 발굴해야 하는 원류가 없어지거나 끊기는 것입니다. 예컨대 독일이 정체적의 심각한 위기에 빠졌을 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결정적인 단서는 구비문학이었습니다. 민간에서 내려오는 건강한 사유와 언어를 통해 한 국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미래의 중요한 결정에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언어가 가지고 있는 ‘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섯번째 질문에 대한 보충입니다. 요즘 읽는 '부분과 전체'라는 책을 읽으며 더욱 공감하는 부분인데요. 우리들이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세계보다는 크지 않겠지만, 세계와 비교했을 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국한된 크기를 갖는다는 것이 거의 확실한 것 같아요.


김수영 시인이 '시는 닻이다'라고 간명히 표현한 것과 같이 언어는 세계를 이해하는 닻인 것 같아요. 만약 누군가 언어에 한 언어를 추가할 수 있다면 그는 천재라고 한 도스또옙스끼의 말과도 같이 언어를 통해서 어떤 개념을 얻거나 우리가 생각하는 사유의 폭을 추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유용하며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일본의 용어는 어느 부분 우리의 사유 폭을 넓혀주었다는 데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추가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온전히 갖추고 있던 세계에 대해서 어떤 언어를 '받아들임'으로써 나는 그 세계를 넓혀갈 수 있는 것입니다. 혹은 우리가 전혀 모르던 지평을 누군가 넓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의 사유를 우리의 사유를 통해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한에 있어서 '사유의 진전'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는다는 게 사람에게는 복된 일인 것 같고, 누구나 그것을 그리워하는 것 같아요. 숨가쁘게 이어진 질문공세에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행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멋진 북클럽에 조금 더 애정을 가져주기를 바랍니다. 저는 사실 북클럽의 한 축을 맡거나 중심이 되려고 했습니다. 제 군생활은 북클럽을 만난 순간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으며 특히 독서후기라는 방식은 책읽기에 대해서 혹은 제 무미건조한 지적 생활에 심각한 위기가 찾아왔을 때 만난 오아시스 같은 곳입니다. 독서후기가 가지는 의미를 끊임없이 흡수하며 저는 나름대로의 ‘방법’을 만들 수 있었고, 그것은 아마 끊임없이 이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좀더 나를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군생활을 하면서 어떤 이는 좀더 여유롭게 이곳을 찾아올 수 있을 것이고, 어떤 이는 고된 훈련 후에 넘쳐나는 글들을 다 보지 못하고 별견하듯 지나치고 다시 어딘가로 가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과 상황, 사람과 사람들의 향취가 묻어나는 게 군 안의 인트라넷이고 그것이 북클럽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다행히 좀 여유로운 축에 끼어 행복감을 남보다 조금 더 맛볼 수 있었지만, 간만한 올라오는 그의 힘겹게 남긴 글을 보면서 나는 그가 되어보곤 합니다. 그런 메시지와 향기는 밖에서는 전혀 구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숨가쁘고 절실하며,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것들이 동시에 한 점 안에서 만나기란 그리 쉬운 게 아니죠. 일단 이곳을 찾았다면 여기가 바로 당신이 매일같이 몸 던지고 뒹구는 내무실이고, 티격티격 싸우는 부대원이고, 그보다는 좀 거리가 있는 타부대 아저씨들입니다. 특히 우리는 책과 문학으로 엮어진 관계이기 때문에 단번에 친구가 될 수 있고, 격론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민감한 감정의 집합이기 때문에 누군가 휙 왔다가 휙 가면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괜히 애절하고 처연한 마음마저 들곤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좀더 가까운 곳에서 좀더 사소한 이야기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술 한 잔 하자는 이야기입니다.





[댓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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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병 한상천 기나긴 글을 보면서 느끼는 스크롤의 압박보다는 대화법으로 소크라테스가 무지의 인간에게 말하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저의 무지를 너무 찌르시는게 아닌가 하네요)

예전의 상래씨와 승주씨이의 글을 보며 철학이란 학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소피의 세계란 책을 읽기

시작했음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철학하면 고2때 윤리 뒷부분의 서양과동양 철학을 읽고 필기만 해주시던 국사선생님의 덕에 철학은 더욱더 멀어져가

한 걸음더 나아가 인문계학부를 뛰쳐나와 사회를 맴돌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승준씨와 승주씨의 큰 영향으로 철학이란 학문을 조기 교육시키지 않는 현

교육을많이 원망해봅니다.


개인적으로 승주씨(형) 같은 분이 같은 고참이 있었으면 하군요.. 개인적으로 학문을 논할만한,

지식을 공유할만한 사람이 부대내에 없다는 사실이 많이 섭섭합니다.


몇일 남지 않는 군생활 잘 마무리해서 밖에서는 모든 꿈이 이루어 지시길 바랍니다 2005/04/19 x  


   병장 오승주 철학의 접근에 관한 상천님의 쪽지에 관한 저의 의견입니다. 혹시 같은 고민에 빠진 분들이 계실까 하여 쪽지를 공유합니다.


먼저 윌 듀런트의 '철학이야기'라는 책을 권합니다. 우리 나라에 굉장히 많은 해석본들이 있는데, 저는 문예출판사의 판본을 권하고 싶군요.


그 책을 읽고 한 사람을 찾아보세요. 그러면 그만으로는 좀 좁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혹은 선택한 철학자가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들지도 모릅니다. 균형감각을 키우기 위해서 철학사가 필요한데 러셀의 서양철학사(을유문화사)와 렘프리히트의 서양철학사(을유문화사)를 권하며, 좀더 깊이 있고 본격적인 철학사를 원하신다면 코플스톤의 여러 권으로 이루어진 철학사를 권합니다. '그리스 철학', '중세철학', '대륙합리론', '영국경험론'이 각권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철학의 시작과 끝에 반드시 '자신의 삶'과 관련된 방향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철학을 지식의 충족이나 학문으로 다룬다면 그 여정은 쉬이 전복될 것이라고 봅니다. 철학에 관한 '괜찮은 서론'을 본 후 바로 한 사람의 철학자를 택하라는 말도 바로 '인생'의 관점에서 그 철학자와 당신을 끊임없이 비교해 보라는 제안으로 이해해 주세요. 2005/04/19 x  


   병장 권정훈 WOW! 2005/04/20 x  


   병장 하진환 와. 또 길게, 잘 쓰셨네요. 하핫. 철학 공부를 인생과 연결시키라는 말씀은 꼭 새겨둬야겠네요. 제 질문에 대한 충실한 답변도 감사드립니다.

제 질문은 나치즘 보다는 박대통령을 염두에 두고 질문한 것이었습니다. 한 가지 코멘트를 달자면, 나치즘의 성립에는 상대적 소수의 지지와 상대적 다수의 정치적 무관심이 뒷받침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대중의 암묵적 동조'까지 지지로 해석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요. 치명적 독재의 예방과 건강한 민주주의를 위해선 '정치적 인간'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짧은 생각이었습니다. 2005/04/20 x  


   병장 김승태 성의가 깊게 스며든 답변. 잘 봤어요.

수고하셨습니다. 2005/04/20 x  


   병장 이우경 술자리에서 이런 이야기하면 뇌가 정지할지도 몰라요.(웃음)

승주님은 저에게 '독서'와 같은 시니피에를 가지고 있답니다.

대단히 수고하셨고 며칠더 더 수고하시고 감사합니다~ 2005/04/20 x  


   상병 김동환 부럽네요.

시간이 흐르면 저도 제 공부만 할수 있게 되겠지만

'네가 가난에 시달리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가난은 사람을 변형시키거든.’

이런 선두같은 말을 해주시는 분이 주위에 있다니요. 흠.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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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6-03-30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대에요... 군대학교에요..
군생활 유익하게 보내셨네요. 우아.. 길다. ^^;

마늘빵 2006-03-30 0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 부대에서 한 인터뷰??? 넘 길어서 다 못봤어요. 퍼갈게요.

페일레스 2006-03-30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클럽이군요. 작년 4월이면 제 형도 활동했을 터인데... 승주나무님을 알고 있을런지도 모르겠네요. ^^ 글 잘 읽었습니다.

승주나무 2006-03-30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주미힌 님//군대학, 재밌네요.
아프락사스 님//저도 요번에 읽었는데, 길어서 하루에 다 못 읽겠더라구요.
페일레스 님//형이 군인이셨다구요. 이런 인연이.. 지금은 전역하셨을 테지요^^?

페일레스 2006-03-30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닙니다. 5월에 전역이어요. 아마 그때는 일병 허원영이었을텐데... 아까 전화해 봤는데 승주나무님 안다고 하던데요? ^^

승주나무 2006-03-30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영 씨 알아요. 같이 필진을 했었거든요. 한 번 만나본 적이 있어요. 이번주 금욜날 만나기로 했는데.. 암튼 디따 반가워요^^ 안부 전해주3^^;

마늘빵 2006-04-01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북클럽이 머에요?? 군대내 동아리이름이에요?

승주나무 2006-04-01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대내 인트라넷 클럽이에요. 전군이 다 가입하고 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