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나의 관심분야가 경제는 아니었다. 나는 지금도 경제학에 대해서 문외한이다.
처음에는 시와 소설에 열중을 하다가 머리 속에 든 게 너무 없어서 설사똥 같은 작품만 삐죽이 나와서 창작을 접고 철학에 빠져들었다. 문학에서는 도스또옙스끼와 김유정을 전집으로 보았으며(도스또옙스끼는 후기), 박노해, 기형도, 백석, 김수영, 정지용 등의 시인에 푹 빠졌었다, 여느 문청이 그러하듯이.. 스피노자와 플라톤을 즐겨 읽었는데 철학사적 관점에서 철학을 보라는 교수의 조언으로 윌 듀런트(철학사는 아니지만), 러셀, 램프레히트, 코플스톤, 힐쉬베르거 등 철학사를 즐겨 보았다. 하지만 서양철학사는 너무 협소한 기분이 들어 동양으로 틀었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 존경 받는 한학자 선생님께 사서삼경을 3년간 배웠다. 그 분은 유학 연구가이므로 노자와 장자는 따로 보았고 한비자를 좋아했다. 최근 바로 직전에는 소설을 쓰기 위해 사기열전, 전국책, 국어, 오월춘추 등 춘추전국시대의 역사서를 탐독하다가 드디어 촛불이 터진다. 소설을 쓰려던 생각은 무기한 유예를 해둔 상태이며 그 즈음부터 경제 대중해설서를 읽기 시작했다.
내가 경제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내가 소설쓰기를 무기한 접게 된 이유와 같다. 내가 소설쓰기를 접은 것은 '기사'와 '포스트'와 같은 전투적 글쓰기를 할 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형식을 갖춘 글을 쓰기에 세상의 사정이 너무 녹록치 않다.
철학이 형이상학적 세계를 다룬다면 경제학은 형이하학적 세계를 다룬다. 그리고 문학만큼 운치 있는 것도 아니다. 사회학의 영역 중에서도 경제학은 너무 고집스러워서 가장 먼저 절멸될 학문이라는 악평도 있지만 차가운 경제학적 관점으로 사물과 세계를 대해야만 정말 싸우는 글쟁이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맑스, 장하준, 우석훈의 가르침
대학 시절 사과학습(일명 '사회과학 학습')이라는 것을 받은 마지막 세대로서 이런 저런 시인들과 지식인들을 알게 되었는데, 한 선배가 '자본론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선문답처럼 던졌던 기억이 있다. 그 때 도서관에 가서 자본론을 찾아 봤는데, 비봉출판사에서 출간된 새빨간 책이었다. 자본론과의 첫 만남이다.
하지만 10년 동안 만남은 실현되지 못헀다. 헌책방에 가서 낱권을 사 모으긴 했지만 도저히 접근 불가였다. 몇 자 보기는 했지만 무슨 말인지 도통 몰라서 덮을 때가 허다했다. 이런 어려움을 지인에게 토로했더니 지인은 "자본론은 '강독'을 해야 한다"고 힌트를 주었다. 혼자서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책이므로 힘을 합쳐 읽어야 하며, 읽는 방법이 있다는 거다. 그런데 아주 우연한 기회에 자본론을 읽는 세미나 공간을 알게 되었고 올해 가을부터 강독을 시작했다.
맑스는 처음부터 '상품'과 '욕망'이라는 화두로 책을 시작했다.
"상품은 우선 우리의 외부에 있는 하나의 대상이며, 그 속성들에 의해 인간의 온갖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물건이다" - 자본론 제1장 '상품'
▲ 자본론을 읽기 위해 수많은 메모를 동원해야 했다.
맑스는 '노동'이라는 인간의 절대적 가치를 상품생산과 교환의 전 과정에 투입시킴으로써 특유의 유물론적 사유를 전개하고 있으며 인간의 가능성을 상품거래와 화폐제국으로부터 지키고자 부단히 노력한 학자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온갖 모순을 연구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금융위기를 비롯한 세계 경제의 환란기를 성찰할 수 있는 힘을 주는 학자다. 셰익스피어를 좋아하는 교양 넘치는 신사의 책은 너무 어려워서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고 깨끗하게 정서를 해야 하지만 이 터널을 뚫고 와야 사회구조와 경제구조에 대한 최소한의 시각이 열릴 것 같다.
장하준도 쉽지는 않다. 하지만 지적이고 따뜻한 문장과 실증적이고 방대한 데이터를 가지고 현상을 정확히 진단하고 있다. 특히 국가가 해야 할 역할에 대해서 설득력 있는 혜안을 제시하고 있다. 장하준의 말과 같이 국가가 움직여주기만 한다면 한국 경제는 물론 세계 경제도 서로 윈윈하는 길을 모색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장하준의 정력적인 메시지는 불행하게도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수신자 부재 상태다. 현 정부와 경제 담당자들은 합리적인 사고는 물론 최소한의 상식도 통하지 않기 때문에 장하준의 소중한 조언과 충고들은 모두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이 점이 무척 안타깝다. 장하준은 환란기를 견뎌내고 대안을 설계할 때 꼭 필요한 경제학자라고 생각한다.
위의 두 경제학자는 내 식대로 이야기하면 '경제학의 형이상학적 영역'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학은 처음부터 형이하학을 지향하지만 경제학 내에서도 현실과 바로 살 부딪치는 형이하학이 아니라 논리가 잘 갖춰진 품격 있는 논문이다.
그 아래에 우석훈이 놓여 있는데, 우석훈은 일반인, 고딩/중딩들과 이야기하기 위해 일부러 경제학 용어를 쓰지 않는다. 그야말로 형이하학적인 담론을 구사한다. <88만원 세대>에서 우리 세대의 속사정이 제대로 터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장하준처럼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자신의 이론을 구사했기 때문이 아니다. 주류 경제학자들의 무시와 욕을 받으면서도 철저히 대중들과 '접속'을 유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 우석훈은 일개 블로거에 불과한 나에게까지 관심을 가질 정도로 마음이 따뜻한 경제학자다. (그의 문체는 그보다는 조금 더 무미건조하지만^^)
형이하학 혹은 세속의 경제논객 미네르바 VS 미네르바 딜레마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처럼 밀렸는데, 모두 한곳으로 밀어넣고 '미네르바 글 모음'을 인쇄해서 읽고 있다. 사람들이 미네르바에 열광하는 것은 사람들이 우석훈의 <88만원 세대>에 열광하는 것을 보면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미네르바는 우석훈과 마찬가지로 '형이하학적인 경제담론'을 구사하며, 조금 더 심하게 말하자면 '허리하학적'이기도 하다. 영웅은 난세에 등하며 스타 논객은 처참한 상황에서 빛처럼 등장한다. 미네르바의 글을 읽으면서 가장 자주 접하는 단어는 '개~'로 시작하는 욕바가지인데, 욕이 없으면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로 상황이 개처럼 흘러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어쨌든 사람들은 미네르바의 욕을 쳐먹으며, 혹은 욕지거리를 구경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를테면...
이 만수 이 병딱 같은 노인네야..
누가 9월 달에 예전 IMF 처럼 팡... 하고 터진데?..
9월을 분기점으로 최소 6개월내로 한국 산업 경제 전반이 개박살이
난다는거지?..
거기에 대한 대비책이 서민기준 연봉 1억 2천으로 포커스를 맞춘 세
금 경기 부양이냐?.
차라리 그럴려면 미국처럼 수표를 집집마다 배달해 주든가..아예...그럼
욕이라도 안 나오지.. 확...
세금 감세 경기 부양으로 인한 경기 부양 효과가... 얼마? 6.7%???...
7%?... 이걸 가지고 경기 부양이라고 한다면 그냥 이젠 디져라... 솔직
한 심정이다...
아니면 학교 졸업한지 너무 오래 되서 대가리가 굳었던가...
- 미네르바 글 모음 2권, 98쪽
미네르바의 문체가 거칠기는 하지만 이 정도 강도로 쏟아붓지 않고서는 헐떡거리는 빠킹 코리아가 도무지 자극을 받지 않는다. 그만큼 상황이 매우 극단적이다. 마치 몰핀으로 중병환자를 치료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런데 한 가지 우려되는 상황은 지금 미네르바라는 몰핀을 맞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아주 히로뽕에 뿅 가서 미네르바를 우상시하고 있는 상황이다.
▲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2,000여 명 가입에 방문자만도 2만명에 육박한다. 평일에는 이것의 두 배가 넘는다.
미네르바는 미네르바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자후를 강력하게 날려줄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른바 '미네르바의 딜레마'에 빠져들 수가 있다. 미네르바는 현 상황을 극단적이고 비상식적으로 진단하고 있으며, 정부는 이를 부추기는 미친 정부라고 호되게 비판하고 있다. 극언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좀처럼 자극이 되지 않다 보니 이런 용어를 쓰는 게 이상하지 않다는 점은 앞서서도 말했지만, 문제는 미네르바의 신호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이를 극단적으로 받아들이는 현상이다. 단적인 예를 들면, 미네르바 글 모음 카페에서 제공하는 미네르바 글 모음에는 미네르바의 관습적인 문법 사용과 비어, 사어들이 산재해 있는데 편집자는 아주 기본적인 오탈자나 맞춤법이 맞지 않은 글자들도 그대로 싣고 있다. 동양에서 경전 작업을 할 때 이런 식으로 하는데, 이것은 미네르바를 합리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라고 할 수 없다. 미네르바 글 모음집이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며 날개돋친 듯 팔리는 마당인데, 그렇다면 미네르바가 사용했던 비맞춤법과 비어 등이 그대로 노출된다.
이것이 딜레마다. 우리가 합리적인 국민이었다면 미네르바라는 존재가 태어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네르바의 메시지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합리성을 담보해야 하는데, 우리들은 미네르바의 신호에 대해 '추종'이라는 응신을 할 확률이 매우 높다. 조선일보가 탄생시킨 것이 언소주이듯, 이명박 정부는 미네르바를 낳았다는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이명박 정부가 까놓고 사실대로 고하고 국민에게 용서를 구하고 낮은 자세로 경제문제를 챙기고 경청했더라면 미네르바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미네르바의 글들은 강력한 개념글로 이해해야 하며, 미네르바는 자신의 표현대로 '늙은이'로서 존경해야 한다. 미네르바의 신호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관건인데, 비합리적인 우리들이 미네르바를 합리적으로 받아들이기가 무척 갑갑하고 힘이 들겠지만, 미네르바의 알맹이만 빼고 껍데기는 모두 벗어던져야 한다. 미네르바를 추종하거나 황우석처럼 숭앙한다고 해법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자기 위안일 뿐이다. 최소한 미네르바는 스스로 대안이 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것이 미네르바가 나에게 준 가르침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미네르바를 한정시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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