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비파 레몬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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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쿠니 가오리. 유명하다. 일본의 3대 여류 작가 중 한명이며 우리나에서도 인기가 좋다. 나도 그녀의 팬이다. 번역되어 나온 그녀의 책은 빼 놓지 않고 다 읽었다. 그녀가 우리나라에서 뜬 계기는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점이 때로는 그녀의 발목을 잡기도 한다. 최신 번역작인 <장미 비파 레몬>의 띠지가 그녀를 아직도 <냉정과 열정 사이 (이후 냉열)>의 작가로 소개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아직까지 그 작품에 경도 되어 있는 것도 같다. <냉열>도 좋은 작품이기는 하지만 그녀의 모든 것을 보여 준다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에쿠니 가오리는 일상에 대한 세세한 묘사, 참으로 다양한 사랑과 삶의 모습을 그려내는 힘이 탁월한데 개인적으로 봤을 때는 <냉열>이 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사실, <냉열>은 Blu와 Rosso의 시너지 효과도 무시할 수 없는 작품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울 준비는 되어 있다>,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등의 단편집과 <낙하하는 저녁><반짝반짝 빛나는>, <호텔 선인장> 등이 그녀만의 풍부한 감성이 담긴, 에쿠니 가오리의 참 맛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이번 책 <장미 비파 레몬>은 그녀의 느낌이 아주 물씬 배어 나는 책이다. 9명의 여자들과 그들의 남편 혹은 남자 친구들이 얽히고 설켜 있는 이야기는 복잡할 것 같으면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모든 것이 원래 그러했던 것처럼 흘러간다.


"음악은 치유 효과가 있고 담소에 방해되지 않는 엔야를 선택했다." (53p)


 작품 속의 주인공들이 사랑하는 방식 (혹은 살아가는 방식)은 어찌 보면 쉽게 와 닿지 않는다. 이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까? 그냥 즐기는 불륜이거나 아니면 정 때문에? 저런 만남들도 어찌 보면 사랑이 될 수 있을까? 솔직히 어떤 정해진 틀의 답변을 구하고자 하면 쉽지 않다. 그저 단지 이런 모습도 있구나라고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싶다. 분명히 어디의 누군가는 작품 속의 도우코와 동질감을 느낄지도 모르며, 또 누군가는 에미코에게 감정 이입할 수도 있다. 아니면 또 다른 누구는 야마기시에게 동질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숨 쉬며 살아 가고 있는 이 세상이란, 사실 이 소설 속과 다를 바가 없을테니까. 소설이니까 조금쯤은 과장이며 비현실적이겠지라는 생각은 버리자. 이 세상 최고의 소설과 이야기는 바로 현실 세계이며 모든 소설 작품은 바로 그 현실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도우코, 소우코, 레이코, 에미코, 마리에, 미치코, 에리, 아야, 사쿠라코. 그리고 미즈누마, 야마기시, 츠치야, 곤도. 이렇게 많은 등장 인물들이 나오지만 책의 줄거리에 대한 요약은 따로 얘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줄거리가 단순해서가 아니라 주인공들의 관계를 미리 안다고 해서 책을 읽는데 도움이 되지는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단지 초반에 일견 복잡해 보이던 주인공들의 관계는 중반으로 흘러가다 보면 자연스레 머리 속에 그려지게 된다. 거기에 후반부로 갈수록 각 인물들의 에피소드 호흡이 가빠지면서 책을 읽는 독자도 그 가쁜 호흡에 따라 책의 엔딩으로 치닫게 된다.

 엔딩은 요즘 흔히 듣는 말로 하자면 열린 결말이다.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가던 흐름에서 소설도 끝이 난다. 누군가의 불륜의 결말은 어땠을지, 마음 속의 연인을 잊지 못하고 결혼을 택한 누군가의 후는 어떠했을지 혹은 새로운 불륜을 시작하기로 결심한 누군가의 뒷 이야기는 어떨지도 궁금하지 않다. 그저 책이 처음부터 독자에게 보여 주었던 그런 흐름으로 등장 인물들의 삶도 계속 흘러 가겠지라는 아련한 상상만 든다.


"컴퓨터. 카세트테이프. 메모지 몇 장. 사전. 책상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 아직 정리하지 못한 파일 몇 개. 누가 여행을 다녀오면서 사다 준 쿠키.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 받아놓고서 며칠이나 그대로 내버려둔 캔디 바. 파란색 클립. 만년필. 지구 모양 서진. 수정액. 비타민C 정제. IYOU라고 쓰여 있는 머그잔에 절반쯤 남은 채 식어버린 커피. 액자에 넣지 않고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놓은 사진 두 장(한 장은 작년 홈 파티 때 찍은 시끌벅적한 사진, 다른 한 장은 웨딩 드레스를 입은 도우코와 교회에서 찍은 사진)." (83p)


 더불어 이 책이 마음에 들었던 또 한 가지 이유는 바로 김난주씨의 번역이라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 번역 되어 나온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은 크게 김난주씨와 신유희씨가 번역한 작품으로 나눌 수 있다. 초창기에는 거의 김난주씨가 번역을 했는데 언젠가부터 신유희씨의 번역작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최근에는 김난주씨의 번역작이 더 많이 나오는 것 같다. 사실 두 역자가 같은 작품을 번역한 것이 아니기에 함께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게는 김난주씨의 번역이 조금 더 에쿠니 가오리의 느낌이 아닌가라고 와 닿는다. 내가 일본어를 할 줄 아는 것도 아닌데다가 원작을 읽어 보지도 않았기에 신유희씨의 번역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번역이라는 것은 단순한 직역이 아닌 또 하나의 창작 과정이라고 난 생각하는데, 그런 면에서 김난주씨의 역이 내 마음에 훨씬 더 와 닿는 것 뿐이다.
 
 사실 바로 직전에 읽었던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에 많이 실망을 했던 터에 이 작품은 달리 기대를 하진 않았다. 책이 나온 줄도 몰랐었고 우연히 서점에 갔다가 충동적으로 산 것이다. 그런데 이번 충동 구매는 아주 200% 만족이다. 정말 오랜만에 에쿠니 가오리 식 감성에 푹 빠질 수 있었다. 에쿠니 가오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올 겨울, 이 책 한 권 읽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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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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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9월의 어느 날 밤. 난 부산에서 제주도로 향하는 여객선의 3등 선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들어간 식당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신문의 1면을 가득 채운 불타는 빌딩 사진이었다. "응? 무슨 엄청난 영화길래 1면에 광고를 하지?"라는 것이 내 머릿속에 처음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 생각과 함께 자리에 앉아 TV를 틀었을 때, 난 내 눈과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TV 화면을 가득 채운 무너지는 빌딩의 모습. Breaking News라는 외국 방송사의 화면과 함께 끊임 없이 쏟아지는 아나운서의 멘트. 아......그냥 눈물이 났었다. 저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 아마 TV를 보지 못했다면 그저 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일 줄 알았던 것들이 화면 가득히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9.11이었다. 2001년의 그날 이후로 아프가니스탄과 탈레반, 오사마 빈 라덴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 중 하나가 되었다. 이 말들은 우리 삶을 구속하는 어떤 가치의 하나로 자리 매김했으며 온 세계가 그 단어에 매여 움직이는 것 같았다. 사실 그 끔찍한 테러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우리들 대다수는 아프가니스탄이 어디 있는 나라인지, 아니 실존하기는 하는 나라인지 몰랐을지도 모른다. 탈레반은 무엇이며 오사마 빈 라덴이 누구인지도 영원히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9.11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었으며 이제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에 대해 쏟아지는 기사들, 특히 죽음과 테러, 전쟁에 관한 기사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아수라한 전쟁 통에, 탈레반의 통치 중에, 여성이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두 주인공 마리암과 라일라가 겪은 이야기는 결코 소설일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전쟁의 참상 속에서, 시대의 흐름 속에서 약자일 수 밖에 없는 두 여자들이 겪은 한 편의 다큐 연대기를 보는 것 같았다."


 전작 <연을 쫓는 아이(The kite runner)>로 이름을 알린 할레드 호세이니의 두번째 소설인 <천 개의 찬란한 태양(A thousand splendid Suns)>은 바로 그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작가가 아프가니스탄의 여인들에 관해 쓴 소설이다. 호세이니는 9.11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알지 못했을 아프간의 역사와 현재가 간직한 슬픔들을 두 여인의 지난한 삶을 통해 매우 극명하게 보여 준다. 책을 처음 읽게 된 계기는 한 친구의 권유 때문이었다. 친구는 여자라면 - 그런데 난 여자가 아니다. - 한 번쯤 읽어 봐야 할 소설이라며 내게 이 책을 추천해 주었다.

 하지만 처음 100여 페이지를 읽은 후에 난 이 책을 잊고 있었다. 다른 일 거리와 읽을 책들이 많기도 했거니와 초반 전개가 지루해서 진도가 쉽게 나아가질 않았다. 한동안 잊고 있던 이 책을 다시 집어든 건 얼마 전이었다. 그런 다음 처음부터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책을 내려 놓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3일 동안 일을 마친 후에는 이 책을 붙들고 있었고, 자기 전까지 계속 읽었다. 역자의 말처럼 책의 초반이 지루하긴 했지만 인물들의 연이 엮여 가는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는 흥미를 더해 가며 날 붙들어 놓았다.

 그런데 책을 읽는 내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생각은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 현대사다"라는 것이었다. 소련의 침공, 군벌들간의 전쟁, 잠깐 찾아온 것 같았던 평화, 폭력으로 사람들을 억누르던 탈레반의 통치, 다시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 또 다시 찾아온 것 같이 보이는 평화. 여러 매체의 기사를 통해 조금씩 알고 있던 아프가니스탄의 현대사가 이 소설 속에는 녹아 있었다. 그리고 그 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두 명의 여자 주인공들이 겪는 이야기는 결코 작가의 상상 속에서 떠오른 것이 아니었다. 아수라한 전쟁 통에, 탈레반의 통치 중에, 여성이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두 주인공 마리암과 라일라가 겪은 이야기는 결코 소설일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전쟁의 참상 속에서, 시대의 흐름 속에서 약자일 수 밖에 없는 두 여자들이 겪은 한 편의 다큐 연대기를 보는 것 같았다.


"라일라는 그것이 아프가니스탄에 돈을 주겠다던 원조가 오지 않고, 재건축이 너무 천천히 진행되고,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고, 탈레반이 다시 결집하여 돌아와 복수를 할 것이고, 세계는 다시 한 번 아프가니스탄을 잊을 것이라고 불평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답변이라는 걸 안다." (561p)


 제 1부. 마리암. 부잣집 남자의 사생아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낸 그녀. 그녀가 그토록 존경하고 믿어 마지 않던 아버지 잘릴은 그녀를 철저하게 버렸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을 견뎌 내면서, 목을 매고 죽어 버린 어머니의 말을 떠올린다. 처음엔 잠깐 행복할 것만 같았던 라시드와의 결혼 생활도, 그녀가 아들을 안겨 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다시 불행 속으로 빠져 든다. 제 2부. 라일라. 여자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딸을 열심히 가르치는 아버지. 전쟁에 나가 죽은 두 아들을 그리워하며 반쯤은 실성한 어머니. 하지만 그 내전의 와중에서도 연인 타리크와 라일라의 사랑은 깊어만 간다. 그리고 결국 새로운 세계를 찾아 온 가족이 떠나기로 결심한 바로 그날. 그녀의 인생은 로켓탄 한 발로 송두리째 뒤바뀐다.
 
 제 3부. 마리암과 라일라. 라시드의 교묘한 술책에 빠져, 아니 어쩌면 라일라 자신의 살아 남고자 하는 의지로 두 여인의 삶은 함께 엮여 가기 시작한다. 결국 그 혼란의 와중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던 건 고난을 함께 헤쳐 나가는 여인들뿐이었을까? 처음엔 으르렁대던 마리암과 라일라는 결국 서로에게 둘도 없이 의지하게 되며 함께 전쟁 통의 역경을, 탈레반 치하의 고통을 헤쳐 나간다. 그리고 라일라의 연인 타리크가 돌아온 그 날, 두 여인은 그 간의 역경을 오직 자신들의 의지로 마무리한다. 제 4부. 다시 라일라. 전쟁이 끝나고 탈레반은 물러가고 언뜻 보기에 평화가 찾아온 것 같아 보이는 카불. 이국에서의 평안한 삶을 마감하고 다시 고국의 소용돌이 속으로 돌아온 라일라. 여전히 혼란스러운 고국이지만 그녀가 수많은 전쟁의 세월을 견뎌 내고 역경을 헤쳐 왔던 이 땅은 결국 그녀가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곳이기도 했다.


"요셉은 가나안으로 돌아갈 것이니 슬퍼하지 마라.
헛간은 장미꽃밭으로 바뀔 것이니 슬퍼하지 마라.
살아 있는 모든 걸 집어 삼키려고 홍수가 닥치면
노아가 태풍의 눈 속에서 너희들을 안내할 것이니 슬퍼하지 마라." (561p)


 사실 라일라가 그 혼란 속의 아프간으로 다시 돌아간 것은 이해가 잘 되지 않기도 하고 안쓰러웠다. 아마 그게 모국에 대한 애국심이며 모국의 피가 흐르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회귀 본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일라가 카불로 돌아간 2003년으로부터 5년이 지난 2008년 현재까지 아프간에서의 전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새로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오바마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테러를 이번에는 종식 시키겠다며 열을 올리고 있다. 얼마 전에는 학교에 가는 여학생에게 여자가 학교에 간다는 이유로 염산 테러를 가한 탈레반에 대한 기사가 들려 왔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자살 폭탄 테러는 이제 더 이상 신문의 구석자리라도 차지할만한 기삿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들에게 평화는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그곳에서 라일라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무엇인가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사실 난 자신이 없다. 예전엔 라일라와 같은 사람들 하나하나가 모이면 언젠가는 그 힘들이 결국 큰 일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역사는 그렇게 변해 가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요즘의 현실은 우리들에게 그런 작은 상상마저 불허해 버리고 만다. 어쩌면 이 세상은 더 이상 희망을 볼 수 없는 곳으로 변해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마지막 힘을 짜내어 다시 한 번 상상해 본다. 라일라가 정착한 그 곳에 다시 평화가 찾아오고 모든 사람들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으며 삶을 살아가는 모습. 전쟁과 테러, 폭력과 죽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둘러 안은 슬픔이 그 곳에서 사라져 가는 모습을. 언젠가는 꼭 그렇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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