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특권]인셀 혹은 비자발적 독신
'여성 혐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남성 혐오라는 대칭적 용어의 발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혐 대 남혐'이라는 이분법이 그것이다. 이분법은 A와 not A라는 타자화의 문법으로, 평등으로 여겨지기 쉬운 속임수다. 미소지니라면 다르지 않았을까. 미소지니는 대립 구도를 만들어내기 힘든 단어다. 그대로 수용될 수 있다. 남성 위주 사회는 너무 오래된 역사라서 여성에 대한 비하와 차별은 남녀 모두에게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를 자각하고 여성이 자신의 이중 노동, 여성에 대한 폭력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이 (남성) 혐오인가? - 정희진 <낯선 시선> p.83
혐오는 특정 대상을 싫어하는데, 그 이유가 자기 자신에게 있다. 자기 문제의 반영이자 합리화다. 혐오는 자신과 타인의 인간성을 훼손한다. 악플이 대표적이다. 이에 반해 분노는 자신을 억압하는 대상에 대한 정당한 판단이며 스스로를 격려하고 존중하는 힘이다. 이처럼 혐오와 분노는 이유, 양상, 효과가 전혀 다른 인간 행동이다. - 정희진 <낯선 시선> p.84
나는 정희진 쌤의 분석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며, 용어를 제대로 정의하는 것의 중요성에도 공감한다. 언어는 우리가 싸우는 데 필요한 무기이다. 용어만 제대로 정의해도 싸움은 수월해진다. 원하는 방향으로 전력을 집중할 수 있고, 의도치 않은 소모전을 줄일 수 있다. 케이트 만이 1장에서 용어부터 섬세하게 정의하고 들어가는 것 역시 그가 펴고자 하는 논지에 적합하게 도구부터 손질하는 작업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남성 특권>을 읽을수록 이건 '여성 혐오'가 맞다는 생각이 든다.
케이트 만이 정리한 용어를 몇 가지 가져와 보려고 한다.
(17) 힘패시himpathy란 권력이나 특권을 가진 남성이 성폭력을 저지르거나 여성혐오적 행위를 했을 때 오히려 여성 피해자보다 더 공감과 염려를 받는 현상을 일컫는다.
여성혐오가 가부장제의 "법적 실행"의 일부분으로 개념화되어야 한다는 제안과 관련하여(여기서는 여성혐오를 미소지니로 바꾸어 읽었을 때 개념이 더 잘 와닿는다) (21) 여성혐오라는 구조는 젠더화된 규범과 기대치를 존속시키고 집행하는 동시에 여성들을 극한의 적대적 환경에 몰아넣는다. 다시 말해 여성들은 수많은 요인 중 여성이라는 성별로 인해 그런 환경에 처하게 된다. (...) 여성혐오는 보통(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여성들이 성별 논리가 내포된 "법과 규칙"을 위반했을 때 촉발되는 반응이다. (...) 적극적으로 누군가를 해하지 않을 때조차 여성들을 어떤 경계 안에 옭아매는 것이 여성혐오다. 우리는 경계를 위반하거나 어떤 과오를 범할 때에야 비로소 애초에 왜 자신이 경계 안에 갇혀 있었는지 그 이유를 깨닫는다.
(21) 성차별은 여성혐오와 대조적으로 가부장제의 이론적, 이데올로기적 부산물이다. 가부장제의 규범과 기대치를 이성적으로 납득시키고, 자연스럽게 만드는 데 복무하는 신념, 관념, 전제들이 전부 여기에 해당된다. 성차별에 기반한 노동 분배와 대대로 남성의 권력과 권위가 작동해온 영역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우위를 점하는 일들이 성차별의 예다.
(26) 이 책은 여성혐오, 힘패시, 남성 특권이 여타의 억압적 시스템과 결합해 작동하면서 불공평하고 왜곡된, 때로는 기이한 결과를 낳는 과정을 추적한다. 이러한 결과물은 여성들이 대대로 여성적 재화로 여겨져온 것들(예컨대 섹스, 돌봄, 양육, 재생산노동)을 특정 남성, 다시 말해 종종 특권적 지위를 누리는 남성들에게 제공하도록 요구받는 데서 기인한다. 동시에 여성들은 대대로 남성적 재화로 여겨져온 것들(즉 권력, 권위, 지식에 대한 권리)을 소유하지 않도록 요구받는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재화들은 특권적인 남성들이 마땅히 누릴 권리가 있다고 암묵적으로 동의가 이루어진 것들이다. 그리고 여성들에게서 강제로 이런 것들을 갈취하는 남성들은 자주 남성(가해자)들에게만 허락되는 관대한 공감을 얻는다. (...) 요컨대 이 책은 하나의 위법으로서의 남성 특권이 매우 너른 범주의 여성혐오적 행위를 초래할 수 있음을 제시한다. 여성들은 남성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그렇다고 간주된] 것을 제공하지 못할 경우 처벌과 보복을 받는다.
에덴에 혼자 사는 아담이 외로울까봐 그의 갈비뼈를 내어 하와를 만들었다는 성경의 이야기는 남성 특권에 관한 얼마나 완벽한 비유인가.
이 책의 2장에서 주로 논의하는 '인셀'과 관련하여 다락방님의 페이퍼에 달린 수하님 댓글을 참조해 관련 기사를 읽고 도입부만 거칠게 번역해보았다.
인셀 문제
데이트 상대가 없는 사람들을 위한 지지 모임이 어쩌다 인터넷상의 가장 위험한 하위문화 가운데 하나가 되었는가
잭 뷰챔프(Zack Beauchamp) 2019. 4. 23
1990년대 후반 태평양 연안에 사는 어느 외로운 십대가 이야기할 사람을 찾으려고 전화 접속 모뎀을 달궜다. 수줍음 많은 아이로, 현실 세계에서 온전히 편안함을 느끼기엔 지나치게 내성적이었던 그는 연결감을 느끼려고 초기 인터넷의 빈약한 웹 포럼에 접속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친구를 찾았다. 마찬가지로 현실 세계에, 특히, 섹스와 데이트에 서투른 사람들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모임은, 본인들이 느끼는 연애의 어려움을 일컬어 “비자발적 독신 상태”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한 커뮤니티가 되었다. 추후에 이 용어는 “인셀”이라는 줄임말이 된다.
이제는 “ReformedIncel”이라는 필명을 써서 오프라인에서의 삶을 인터넷 기록으로 남기는 그때의 그 십대는 애정을 담아 1990년대와 2000년대 온라인 인셀 세계를 회상한다. 여성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 지 모르겠는 남성이 커뮤니티의 여성 회원에게 조언을 구할 수 있었던(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따뜻한 곳이었다고 한다. “일종의 사회 정의 투사 커뮤니티” 였다고.
초기 인셀 커뮤니티가 연합한 지 20여 년이 지난 2018년 4월, 토론토에서 대학생 정소희씨는 도서관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도보로도 가까운 거리였기에 지하철이 더 빨랐겠지만 정씨와 정씨의 룸메이트 소라씨는 햇볕을 쬐고 싶었다.
둘은 영영 도서관까지 가지 못했다. 가는 길에 밴 한 대가 인도로 돌진해 보행자를 덮친 것이다. 정씨는 사망자 10명 가운데 한 명이 되었고, 소라씨는 부상자 16명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밴 운전자는 스스로를 인셀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20년 전에 커뮤니티를 창설했던 이들은 지금의 인셀 커뮤니티를 알아보지도 못할 것이다. 지금 인셀은 섹스 없는 삶을 여성의 탓으로 돌리는 게시글로 온라인 포럼의 분위기를 흐리는 남성과 소년뿐이다. 심지어 일부 게시글 작성자는 사건 당일에 용의자를 칭송하며 다른 인셀들에게 “산acid 테러”와 “집단 강간”으로 동참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한때는 따뜻한 지지 모임이었던 것이 다중 살인자에 대한 칭찬이 용인되고 정상으로 취급되기까지 하는 곳으로 타락한 것이다.
“분노가 완전히 장악해버렸다”고 ReformedIncel은 말한다.
토론토 사건이 있던 해에 나는 인셀의 웹사이트와 서브레딧을 주기적으로 읽으며 인셀들의 활동을 밀접하게 추적했다. 두 사이트 관리자를 포함하여 현재와 과거의 인셀 포럼 글 작성자 십여 명 이상을 인터뷰했고 토론토 사건이 있었던 시점의 인셀 채팅방 기록도 입수했다.
내가 발견한 것은 커뮤니티가 본래 형태의 그로테스크한 패러디로 왜곡됐다는 사실뿐만이 아니다. 기술 덕에 한 집단의 가장 뿌리 깊은 편견들이 어떻게 새로운 환경을 장악할 수 있는지, 온라인 공간을 넘어 실제 삶을 바꾸고, 심지어 정치의 궤적마저 틀 수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수만에 달하는 인셀 커뮤니티가 지난 20년 간 소위 “검은 약blackpill”이라는 극심한 성차별주의 사상의 지배하에 떨어졌다. 선택이 주어진다면 가장 매력적인 남성만을 고를 얄팍하고 잔인한 피조물이라는 라벨을 여성에게 붙이며 여성의 성 해방을 근본적으로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검은 약 이론의 논리가 극단으로 가면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매스컴은 토론토 사건 같은 다중 살인의 위험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그러나 인셀을 잠재적 살인자로 취급하는 데 급급하다 보면, 보다 미묘한 위협을 놓칠 위험이 있다. 추행부터 난폭한 폭행까지 인셀들이 일상적으로 폭력 행위를 저지르거나 다분히 그들 곁에 있는 여성들을 비참하게 만들 조짐 말이다.
게다가 인셀은 단순히 외부 세계와 연결이 끊긴 고립된 하위문화가 아니다. 보다 광범위한 서구 사회에서 통용되는 (혹은 지배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여성에 관한 일련의 사회적 가치가 어둡게 반영된 것이다. 오랜 미소지니가 새로운 정보통신기술과 교차하여 우리가 어슴푸레하게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대항할 준비를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의 정치와 문화를 바꿔 놓고 있다.
사실 책의 내용에 보충이 될 법한 더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에 있는데 여기까지 번역하고 지쳤다. 헥헥.
케이트 만은 단호하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23) 우리는 어떤 사람이 여성혐오를 실행에 옮겼거나, 여성혐오가 가능한 환경을 조성했을 때 그 사람이 가슴 깊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알 필요가 없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훨씬 입증하기 쉬운 곳에 있다. 그건 바로 여성이 명백히 성별에 근간을 둔 적대와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위의 기사에 등장하는 토론토 사건에서 밴을 몰고 인도로 질주한 저 범죄자의 동기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그를 추앙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범죄를 부추기는 인셀들의 행동도, 저들이 대체 왜 저러는지도. 여기엔 답이 없는데. 이렇게 가해자의 동기와 심리를 알고자 하는 시도가 가해자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악용된다는 걸 아는데. 그 과정에서 정작 피해자는 지워지고, 외면받고, 비난받는다는 걸 알면서도 "대체 왜"를 묻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인과로 설명되지 않는 일이 불확실성과 무지에서 비롯되는 두려움을 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인과로 설명되지 않고, 인과로 설명해서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걸 머리로만 알 것이 아니라 몸으로도 받아들여야 할텐데.
번역하다 만 위의 기사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을 추가로 발췌한다.
John, a 30-year-old incel from New Jersey, tried pretty much everything he could think of to help himself succeed in the dating market. He works out regularly, eats vegetarian, and spends time reading up on fashion so he can try to dress well. He’s tried online dating for years and let some of his female friends set him up on dates.
But very few women have responded to his messages on dating apps. And when his female friends described him to their girlfriends, they would never describe him as “attractive” or even “cute.” Eventually, John concluded, he was just ugly — and there was nothing that he could do, no way he could eat or dress to fix that.
Like many incels, he was drawn to the community because he felt they were the only people who understood his experience. Other forum users were people he could commiserate with, virtual friends who swapped jokes and memes that helped everyone get through the day.
“Most people will not be in my situation, so they can’t relate. They can’t comprehend someone being so ugly that they can’t get a girlfriend,” John tells me. “What I noticed was how similar my situation was to the other guys. I thought I was the only one in the world so inept at dating.”
It’s hard not to feel for people like Abe or John. All of us have, at one point, experienced our share of rejection or loneliness. What makes the incel world scary is that it takes these universal experiences and transmutes the pain they cause into unbridled, misogynistic rage.
뉴저지에 거주하는 30세 존은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채식을 하고, 옷을 잘 입으려고 노력도 하고, 여사친들에게 소개팅도 주선받는 노력하는 인셀이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래 못생긴 건 도저히 극복할 수가 없어서 여자친구가 생기지 않는다고 한탄한다. 세상엔 이처럼 데이트에 소질이 없는 사람이 있다고. 다른 데선 이런 얘기를 해도 이해받지 못하지만 인셀 커뮤니티에서는 공감을 받고 위안을 얻는다고.
일단 '존'이라는 사람이 내가 생각하는 인셀의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나서 놀랐다. 운동, 채식, 옷 잘입기는 스스로를 돌보며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도 유용한 일들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모든 노력의 목표가 데이트이고, 데이트에 실패하면 그게 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믿는 저 사고방식이 좀 충격이었다. 아무리 봐도 단지 외모가 문제는 아닌 듯한데..
인용한 부분의 마지막 두 문장이 서늘하다. "우리 모두는 언제고 자신 몫의 거절이나 고독을 경험한다. 인셀 세계의 무서움은 이러한 보편적인 경험을 가지고 스스로 자초한 고통을 노골적인 여성 혐오로 변질시킨다는 데 있다."
위의 기사와 관련하여 잭 뷰챔프가 <The Neoliberal Potcast>에 출연해 기사 내용을 설명하는 에피소드가 있어 링크를 달아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