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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어진 시대 1~3 세트 - 전3권 혁신과 잡종의 과학사
남영 지음 / 궁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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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알라딘 서재에 아예 접속하지 않았다. 처음엔 의도한 일이 아니었으나, 이게 얼마나 놀랍도록 마음이 편한 지 발견한 뒤로는 적극적 결정이 되어 북플과 알라딘 앱까지 지웠다. 일전에 브런치와 인스타그램을 대차게 까며 서재에 입주신고를 한 바 있다. 그 두 플랫폼에 죄가 없단 건 아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내가 SNS의 성질을 띠는 모든 것에 몹시도 지쳐있었다는 점이다. 플랫폼을 바꾸는 건 해결책이 아니었다. 비슷한 그 무엇도 하지 말았어야 했던 거였다. 그런데 공개적으로 글을 쓰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임계점을 넘어버렸고, 염치 없이 슬금 돌아왔다. 아마 앞으로도 이런 느슨한 형태의 운용이 되지 않을까.


짝꿍은 내가 본 어떤 인간보다 공부에 특화된 사람이다. 흥미 여부와 관계없이 본인이 모르는 무언가를 알아가는 데 게으름이 없다. 그가 아니었으면 나로서는 얼레벌레 눙치고, 잊고 넘어갔을 것들을 그는 성실히 알아보고 설명해준다. 그로써 내 생각을 넓혀준다. 부작용은 간혹 아주 엉뚱한 문제로 다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와 관련해 짝꿍은 지상군을 동원한 본토전으로 갔으면 인명 피해가 훨씬 컸을 것이다, 일본은 항복을 안 했을 것이다, 나는 일본이 패전할 것이 이미 명백한 단계였다, 반인륜적이고 불필요한 실험이었다로 논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니(휘어진 시대 3권 p. 289~292) 그가 이야기한 근거는 대의명분, 내가 이야기한 근거는 대의명분 외의 세 가지 이유 중 세 번째 이유로 제시되어 있었다. (다른 두 맥락은 1) '거대과학의 운명' 즉, 그렇게 많은 예산과 자원이 투입된 프로젝트에서 아무런 가시적 성과도 없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 원폭은 개발되기로 결정된 순간부터 사용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것과 2) '진주만'에 대한 미국의 복수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린 사안에 복합적으로 작용한 여러 요소를 두고 네 건 틀렸고 내 말이 맞다로 쓸데없이 다툰 거였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우리는 특정 근거에 더 꽂혀서 그 이유만이 옳게 사안을 꿰뚫고 있고, 사실관계를 더 잘 설명하고 있다고 믿을까.


어떤 결정의 뒤에는 단 하나의 동기가 있을 수도 있고, 수십수백가지 동기가 있을 수도 있고, 아무 이유조차 없을 수 있다. 그런데 왜 그 중 어떤 설명이 다른 것들보다 더 '설득력' 있게 느껴질까? 왜 그 설명만이 '진짜'인 것처럼 느껴질까? 실제로는 모든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거나 아무 것도 진실에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 제시된 근거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해 각자가 느끼는 이러한 설득력의 차이가 때로는 파괴적으로 치닫는 많은 논쟁의 진짜 원인일 것이다.


'제시된 근거에 대해 각자가 느끼는 설득력의 차이'를 근본적 입장 차로 볼 수 있을 것이고, 바로 여기에서 진정으로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발생한다.


이때 각각의 근거가 가진 내재적, 외재적 차이, 즉, 해당 사실이 얼마나 진실한지, 해당 요소가 결정에 얼마만큼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각 요소가 사안과 얼마만큼 관련되어 있는지, 사안과 별개로 해당 요소가 도덕적, 윤리적, 사회적, 역사적, 정치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 각 요소는 각기 어떤 층위에서 작용하는지, 해당 요소나 맥락에 대한 설명이 얼마나 단순한지, 복잡한지, 잘 알려져 있는지, 숨겨져 있는지 등은 부차적 문제일 것이다.


이번에도 문제는 각자가 지닌 위치성과 당파성이 아닐까. 당신은 무엇에 설득되도록 살아온 사람인가. 당신은 숨겨진 맥락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느끼는 사람인가 널리 공인된 사실일수록 더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인가. 통계와 자료에 설득되는 사람인가 사유와 직관에 더 의존하는 사람인가. 당신은 어디에 이입하고 무엇을 배척하는가.


어떤 논쟁에서든 결국 비슷한 사람들이 어느 하나의 근거 뒤로 몰려들어 다른 하나의 근거 뒤편에 모여든 다른 무리의 비슷한 사람들과 진부한 싸움을 반복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맥락, 근거, 요소, 사실, 설명. 무엇이라 부르든 그것을 정교하게 다듬고, 확인하고, 점검하는 건 꼭 필요한 일이겠으나, 궁극적으로는 무용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239) 트루먼은 포츠담 회담의 준비기간에 베를린의 폐허들을 둘러보았다. 회고록에서 그는 이런 글을 썼다.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이보다 슬픈 광경은 본 적이 없다...... 이제는 평화가 자리 잡을 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술은 도덕이 따라잡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 수백 년은 더 발전한 것 같다. 아마 도덕이 기술을 따라잡을 때가 되면 더 이상 도덕이 지킬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글을 쓴 바로 그가 도덕이 전혀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의 무기 사용을 최종 명령하며 도덕과 기술의 격차를 극적으로 높여버렸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방대하고 아득한 과학적 발견, 과학자들의 개인사, 시대사회적 배경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문외한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엮어낸 훌륭한 과학사 교양서를 읽었다.


마이트너는 베를린의 폰 라우에에게 하이젠베르크와 폰 바이츠체커를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 두 사람을 대단히 훌륭한 인물로 생각했으나 ‘그것은 실수였다.‘고 했다. 그랬더니 마이트너와 동갑나기인 고귀한 인품의 라우에는 별로 놀라워하지도 않고 이렇게 통찰력 있게 답신했다.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은 스스로를 현실의 거대한 비합리성과 화해시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상상 속에서 공중누각을 짓곤 합니다. 자신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좋은 면만을 찾아내려는 터무니없는 행동을 한답니다. 그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지요." 하이젠베르크의 행동에 대해 필자가 읽은 가장 설득력 있는 통찰이었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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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을 받은 사람의 우화 옥타비아 버틀러의 우화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장성주 옮김 / 비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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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야기의 줄기를 따라가야 하는 독자에게 주인공 로런 올라미나의 일기는 현재로 기능한다. 즉, 거기에 붙은 딸 라킨의 주석은 모두 사후적인 것이 된다. 갓난아이일 때 납치당해 입양아로 자란 라킨은 그를 납치한 극우 기독교 분파의 가치관을 주입받으며 억압 속에 자란다. 해당 기독교 분파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익숙한 슬로건 아닌가. 이 책이 현실을 예언했기에 새삼 차트를 역주행해 베스트셀러가 됐다고 한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당선된 재럿 대통령을 등에 업고 광신과 맹목 속에 그들만의 십자군 전쟁을 치른다. 로런이 일군 공동체에도 침입해서 납치, 폭력, 강간, 살인, 약탈을 자행한다. 공동체의 삶의 터전인 에이콘을 '재교육소'로 만들어서 사람들을 강제로 수용하고 목줄을 채워 노예로 부리며 '교화'시킨다. 라킨은 이런 자들이 가르치는 정통 기독교 교리를 배우며 자랐고 따라서 라킨에게 로런의 '지구종'은 사이비 종교이고 로런은 '사이비 교주'에 불과하다. 이처럼 이 책의 두 주요 화자 사이에는 커다란 시점과 관점의 격차가 존재한다. 게다가 '잃어버린 딸'과 '딸을 찾지 못한 엄마'라는 데서 오는 권력차도 있다. 로런을 부당하게 비난해도 괜찮은 존재가 있다면 그건 라킨뿐일 것이다. 두 화자의 엇갈리는 관점 사이에서 독자는 어느 화자도 온전히 신뢰할 수 없으며 양쪽 모두를 어느 정도 의심하게 된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긴장감이 책 전반을 지배한다.


이 책은 묻는다. 그토록 사랑을 강조하면서 정작 사람들이 서로에게서 등돌리게 만드는 종교가 과연 옳은가. 그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올라미나의 '지구종'에도 전혀 설득되진 않았으나 굳이 골라야 한다면 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잘해주는 쪽을 고를 것이다. 광기와 굴종, 배반을 경계하고 이성과 상식, 배려에 가치를 두는 쪽이 당연히 더 낫다.


한편 이 책은 최악의 인간성은 어떤 기전과 형태로 발현하는지 보여주는 생태 보고서 같다. 보고 있기 괴로울 정도로 극악한 온갖 인간군상이 등장하는 와중에도 최악의 빌런을 꼽자면 로런의 남동생인 마크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마크는 얼핏 보기에 무해하고 심지어 선한 사람으로까지 보인다. 그러나 지나칠 정도로 인정 욕구가 강하고 자신의 인정 욕구를 채우기 위해 그 어떤 비겁한 선택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마크가 엇나간 데 로런의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로런은 자신이 일군 공동체에서 마크가 필요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지구종'을 망칠까봐 그가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도록 내버려뒀다. 하지만 로런은 마크를 성노예 포주에게서 구출해왔고 그의 생명을 구했다. 반면 마크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파가 로런에게 잔학행위를 저질렀음을 알면서도 그를 외면했고 로런을 설교의 재료로 써먹었으며 진즉 라킨의 행방을 찾고도 로런에게 알리지 않았다. 로런이 라킨을 애타게 찾는 걸 알면서도 진심으로 찾는 것 같지 않다며 로런을 비난했다. 아마 그런 식으로 상대를 비난하면서 본인이 저지른 짓을 정당화했을 것이다. 세 살에 아이를 찾고도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입양 가정에 방치함으로써 로런이 딸을 찾을 기회뿐만 아니라 라킨이 사랑받으며 자랄 기회 역시 박탈했다. 


우화 시리즈 1권에 해당하는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이후 후속편이자 완결판인 <은총을 받은 사람의 우화>가 번역되어 나오기까지 1년 넘게 기다렸다. 1권의 주요 문제가 '일단 살아남기'였다면 2권의 주요 문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더 가깝다. 1권이 로런이라는 개인과 그 개인을 구성하는 특질(초공감능력 등)에 더 집중했다면 2권은 보다 구조적인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따라서 2권은 더 나은 삶과 안정을 바라면서 되려 불안과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을 지도자로 뽑아버린 이들에게 충분히 '우화'로 기능할 것이다.


"우린 온갖 방식으로 학대당했어요. 모두 상처받은 사람들이죠. 온 힘을 다해 낫는 중이고요. 그러니까, 아니에요. 우린 정상이 아니에요. 정상인 사람들은 우리가 이겨낸 걸 이겨낼 필요가 없었어요. 만약 정상이었다면, 우린 이미 죽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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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6-05 0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 번에 나온 한권이 끝이 아니었군요 그 책 읽지는 않았지만... 이건 2032년부터 나오다니, 지금하고 차이가 많이 나지 않네요 예전 소설에서 앞날을 상상하고 쓴 게 맞을 때 많죠 다 똑같지는 않더라도... 미국은 신앙이 지배하는 나라 같은 느낌도 듭니다 어느 나라든 신앙이 없지는 않지만... 신앙이라는 게 나쁜 건 아닌데, 그걸 이용해서 안 좋은 걸 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네요


희선

책먼지 2023-06-08 10:48   좋아요 0 | URL
희선님 말씀처럼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현실에 비춰볼만한 지점이 많았어요!! 기후변화로 인해 삶의 터전이 사라지고 사회체제가 무너지는 모습이라던가 혼란한 사회를 틈타 자격없는 자가 득세했을 때 어떤 비극이 벌어지는지 등이요!! 신앙을 도구로 이용했을 때 무서운 점은 개인이 생각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고도 그게 정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는 점 같아요ㅠㅠ
 
워드슬럿 - 젠더의 언어학 Philos Feminism 3
어맨다 몬텔 지음, 이민경 옮김 / arte(아르테)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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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인간적 매력이 글을 뚫고 나온다. 솔직하고 유쾌하고 똑똑하고 포용적이되 자기 주관과 취향이 확실한 사람. 곁에 있다면 딱 친구 삼고 싶은 유형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반성을 많이 했다. 내가 영어를 배우면서 규준으로 받아들였던 많은 것들이 지배 이데올로기의 산물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전문적이고 자신감이 없어보이니 하지 말라고 배웠던 많은 말습관들이 실은 매우 효과적인 목적과 기능을 가지고 사용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런 말습관이 공격당하고 기피당하는 까닭은 주도적인 사용자가 여성이기 때문이었다.


(154) 사람들은 남성이 그렇게 말하는 건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그저 여성이 말할 때 신경을 긁는 일이 된다. 우리 문화가 보컬 프라이, 업토크, '라이크'에 대해서 드러내는 억하심정은 사실 그 발화 특질과 그리 관련이 없다. 현대에 여성들이 그 특질들을 먼저 사용했다는 사실이 문제가 된다.


보컬 프라이, 업토크, '라이크like' 같은 필러를 통한 헤지hedge는 불안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권위와 관련이 있다. 말이 지나치게 단정적이거나 명령조로 들릴까봐 청자를 배려해 타협한 결과에 더 가깝다.


보컬 프라이는 주로 발화의 끝에 목의 힘을 빼고 낮은 저음으로 말을 하는 걸 가리킨다. 나는 이걸 '먹는 소리'로 느낀다. 발화를 시각화할 수 있다면 글자가 바깥으로 나가서 퍼지는 것이 아니라 목으로 다시 빨려들어가는 모습일 것이다. 보컬 프라이에는 목을 긁는 듯한 쇳소리가 살짝 섞이곤 한다. 이 소리 때문인지 나는 누군가가 보컬 프라이를 할 때 그걸 섹시하다고 느낀다. 목에 힘을 풀고 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목소리가 작아지고 발화가 불분명해지므로 이걸 기피해야 한다고 배웠다. 내 경우 의도적으로는 하지 않지만 말을 아주 많이 했을 때 목이 피로해지면 저절로 말끝에 보컬 프라이가 일어나곤 했다. 그럴 때의 나는 뭔가 좀더 원어민(?)스러워 진 것 같아서 남몰래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이걸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이유가 메시지의 분명한 전달과는 별 관련이 없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보컬 프라이가 '권위'와 '지루함'의 표현이므로 감히 여성이 이걸 하는 게 거슬렸던 거다.


업토크나 '라이크'는 소위 말하는 밸리걸 억양을 떠올리면 된다. 업토크는 끝을 올려서 말을 맺는 걸 가리킨다. 영어를 쓸 때 말끝을 올려서 맺지 말고 '라이크'를 지나치게 섞어서 말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사람들도 많이 하는 말인 것 같다. 그런데 이 밸리걸 억양이야말로 내가 캘리포니아 사람들을 친근하게 느꼈던 계기였다. 높낮이가 거의 없는 모노톤으로 쏘는 듯이 빠르게 말을 뱉던 뉴욕 사람들과 비교해서 캘리포니아 사람들은 노래하는 듯한 억양으로 느긋하게 말을 했다. 그때 내가 느낀 감상을 요약하면 "서부 사람들 너무 친절해!" 쯤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 다정하다는 인상은 많은 부분 그렇게 쓰지 말라던 밸리걸 억양과 '라이크'에서 오는 거였다. '라이크'가 다 같은 '라이크'가 아님을 이 책은 조목조목 설명한다. 평서문도 의문문처럼 끝을 올려서 말하는 것 역시 말하는 내용에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한다. 말의 내용이 강할 때 끝을 내려서 말하면 가르치거나 강압적으로 지시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으므로 상대를 배려하고 공감을 일으키기 위해 끝을 올리는 거였다. 듣는 사람에게는 이게 대화로 초대하는 것으로 느껴질 테고 '내가 말을 해도 안전하구나'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오는 위와 같은 발화 방식들을 부정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금지하고, 화자의 인격까지 모독하는 이유는 화자를 깎아내림으로써 우위를 점하고 그의 목소리를 빼앗기 위함일 것이다. 나는 하지 말라는 걸 안 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내가 영어로 말할 때 실제로 늘 자신감이 없고 불안하기 때문에 특정 말습관이 불안하고 전문가답지 않아 보인다는 지적이 나라는 과녘의 정가운데를 관통한 것이다. 딱 거기에서 생각을 멈추고 나는 그걸 그냥 받아들여버렸다. 그보다 더 나쁜 것은 지적을 받기 전까지 내가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던 말투를 이후로는 거슬려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그럼으로써 나에게 그런 생각을 주입한 이들에게 힘을 보태고 그에 동조한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데서 폭력과 악이 시작되는 건데.


맞춤법이 말의 내용이나 화자를 무시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 역시 비슷한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보다 전방위적으로 일어나며 대상이 반드시 여성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사실 맞춤법은 어떤 사람의 인격이나 지적 능력을 판단할 근거가 못된다. 맞춤법을 잘 지킨다는 건 그저 그 사람에게 맞춤법을 배울 기회와 자원이 있었다는 뜻일 뿐이다. 맥락은 다르지만 이 책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194) 문법과 도덕은 사실상 별 상관이 없다. 그리고 적들의 형편없는 문법을 지적하는 일은 당신이 더 나은 사람이라는 걸 입증해 주지 못한다. 이 말은 당신이 교육받을 기회를 더 가졌음을 의미하고, 더 많은 시간을 표준 영어를 배우는 데 들였다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누군가가 하는 말의 도덕적 중요성은 내용에 있지 문법에 있지는 않다.


(195) 교육을 많이 받은 이들이 문법 경찰로 나설 때, 그들은 여성들이 업토크나 보컬 프라이를 할 때 여성 혐오자들이 하는 일과 같은 걸 하는 셈이다. 누군가가 어떻게 말하는가에 비추어서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다. 식견 있는 청자라면 오히려 누군가의 문법에 대해 언급하는 행위가 그저 메시지를 피하려는 것임을 안다. "언어를 가지고 현학적인 척하는 건 속물 행위이고 속물 행위는 편견에 근거하죠." 캐머런은 말했다. "그리고 그건, 장담하건대, 자랑스러울 일이 못 돼요."


페미니즘을 접한 이래 내가 억압자의 언어와 사고를 빌려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었구나, 피억압자인 내가 그들의 억압을 돕고 누군가를 억압하고 있었구나, 깨달을 때마다 소름끼치게 부끄럽곤 하다. 이 책을 읽고도 어마어마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평생 모르고 살 뻔했다는 두려움에 비하면 이 부끄러움은 하찮기 그지없다. 앞으로도 나는 더 부끄러워야 하고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책을 더 만나고 싶다. 책이 나의 인식과 관점을 바꿔놓았다는 걸 나의 부끄러움이 증언한다. 좋은 것(언어)과 좋은 것(페미니즘)이 만나 반드시 더 좋은 게 되지는 않는데 이 책은 그 일을 해냈다.




아래는 이번 달 <정희진의 공부>에서 나왔던 이야기들이 연상되어 인용한다.


1. 낙태금지법을 두고 싸우는 대신 성관계에 피임은 필수라는 걸 남성들에게 먼저 가르쳐야 한다는 내용 관련


(222) 그런 세상을 얻을 수 있으려면 여성들에게 위해로부터 자신을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 가르칠 게 아니라 남성을, 이상적으로는 굉장히 이른 시기부터 가르치는 데 달렸다. 세상이 전부 그들의 것이 아니라는 걸 가르쳐야 한다. 남자들이 어린아이일 때, 양육자이자 선생님으로서 우리는 남성성에 대한 문화적 상상을 깨부술 필요가 있다. 남성이 여성에게 공감해도 괜찮다. 다른 남성이 언어로나 다른 방법으로 여성을 쓰러뜨리려 할 때 남성이 여성에게 공감하고 동조하고 지지해도 괜찮고, 정말 권장돼야 한다.


여기에 더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너를 좋아할 확률은 아주 낮다는 것도.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너를 좋아한다면 그건 기적이고 그저 그에 무한히 감사하라는 것도. 너를 싫어한대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며 거기에 대해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꼭 가르쳐야 한다.


2. '자매애는 불가능하다' 관련


(330) "저는 늘 '여성의 인식을 표현한다'는 언어에 담긴 생각에 회의적입니다. 그게 어떤 인식이고, 어떤 여성에게 속하게 되는 걸까요? 모든 여성이 공유하는 인식의 집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집단적 자매애를 느끼는 건 좋지만, 여성의 경험은 복잡한 스펙트럼을 구성하고, '자매애'는 하나만 의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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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5-14 07: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가 너무 좋음을 나의 흥분이 증언한다.......... 먼지님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워드슬럿찜
 
자살에 대하여 - 죽음을 생각하는 철학자의 오후
사이먼 크리츨리 지음, 변진경 옮김, 하미나 해제 / 돌베개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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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 막판에 지친 게 틀림없다. 무책임하다고 할 정도로 결론이 아쉽지만 책이 전반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저자 크리츨리는 자살을 크게 둘로 구분한다. 1) 죽음이 삶의 괴로움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인 경우 2) 죽음 자체가 목적인 경우. 둘 중 우리를 더 두렵게하는 것은 후자다(납득할만한 설명이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1번의 경우는 목적에 따라 다시 세분할 수 있다. 1-1) 극도의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피하기 위한 죽음 1-2) 자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 대의를 위한 죽음 "(119) 대의를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전우, 조국, 정당, 저항운동 또는 신을 위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1-3) 개인 또는 사회에 대한 보복이나 앙갚음으로써의 죽음(여기에 해당하는 살인-자살 현상에 대해 저자는 "(110) 굳이 원한다면 당신 목숨은 버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죽이지 마"라고 드물게도 강력히 규탄한다).


크리츨리의 관심은 2번의 경우에 더 쏠려 있는 듯하다. 그저 죽음을 원한다는 이유로 바로 지금 여기에서 누구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질문은 왜 죽는지가 아니라 왜 사는지가 될 것이다. 이를 탐구하기 위해 그는 에두아르 르베 <자살>,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장 아메리 <자유죽음>을 가져온다 (역시 이 책 읽어야 하나). 죽음이 삶에 일관성을 부여할 수 있다고 해서 자살을 택한다면 죽음의 순간이 삶의 복잡성을 지워버리는 방식으로만 일관성이 획득될 것이다. 즉, 자살이라는 치명적 순간으로만 삶이 해석되는 걸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방식의 일관성 획득은 무용하다. 삶의 부조리에 대한 대응은 자살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끝까지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묻는 것은 오류이다. 의미 찾기에 실패한 인간에겐 존재의 이유가 없다는 잘못된 결론이 도출될 위험이 있다. 자살은 인간만이 가진 능력이다. 이 힘을 지니고 있는 한 인간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롭다. 그렇다고 그 힘을 당장 사용할 필요는 없다. "(135) 죽음이 어떤 문제든 해결해주고 보상과 보복과 응징을 하고 우리를 자신으로부터, 타인으로부터, 세계의 고통스러운 혼란으로부터 구해줄 거라는" 건 "낙관주의적 망상"이다. 자살을 통해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저자는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를 인용하며 삶의 정지된 순간에서 '일종의 충분함'을 찾기를 촉구한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눈 속에서 황홀감이 솟아오른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뭐라는 거야?! 앞서 말했듯 결론이 좀, 많이, 미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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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끼 2023-04-13 23:4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왜인지 <보르헤스의 말> 책이 생각나요…. “나는 여러 번 자살을 생각했어요. 그러나 언제나 그걸 미뤄두었지요. 이렇게 생각했어요. 내가 왜 걱정을 해야 해? 자살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는데 말이야. 그와 동시에 난 한 번도 그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어요. 앞으로도 그걸 사용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P74
이게 생각난 이유는 아마 책먼지님이 올려주신 “이 힘을 지니고 있는 한 인간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롭다. 그렇다고 그 힘을 당장 사용할 필요는 없다.”라고 말씀주신 부분 때문일듯요.

책먼지 2023-04-14 10:45   좋아요 2 | URL
우끼님 읽지 않고도 이 책 간파해버리셨음요!!! 정확히 이 책에서도 ‘무기’에 비유해요!!! 어떤 무기는 사용할 때가 아니라 그저 가지고만 있을 때 (가지고만 있어야) 가장 큰 효용을 내기도 하잖아요(예를 들어 핵??) <보르헤스의 말> 담아둡니다!!!

공쟝쟝 2023-04-14 19:12   좋아요 2 | URL
우끼님... 이거 사표 품고 다니는 월급노동자의 마음 같은데요?ㅋㅋㅋㅋㅋ

우끼 2023-04-16 19:53   좋아요 1 | URL
책먼지님//흑흑 어쩌면 이후에 자살에 관해 보르헤스가 한 말도 옮기면 1-3과, 1-1의 내용도 있었던것같아요
제가 핵이란 단어에 버튼눌려서 줄줄이 반핵 반전 주장을 적었는데.. 혹여나 부담일까 지웠습니다. ㅠㅠ 너무늦었지만요. 책먼지님께 주장하는 바라기 보다는 제가 요즘 고민하는 주제이기도 하구요.. 서로 용기가 되고 보듬고 이런 관계에서야 어떤 논의가 가능한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ㅠㅠ
항상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공쟝쟝님// 오오 말씀듣고보니 정말 그렇네요…!!

책먼지 2023-04-16 20:36   좋아요 1 | URL
우끼님 제가 지우신 댓글은 보지 못했지만 그 댓글에도 틀림없이 크게 공감했을 것입니다(저 역시 기본적으로 반핵주의자입니다!!) 제 무신경하고 부주의한 댓글로 혹시 우끼님께 폐를 끼친 것은 아닌지 염려됩니다!!! 어떤 댓글을 주시든 일단 귀기울여서 들어볼게요!!!

우끼 2023-04-17 13:45   좋아요 3 | URL
전혀 부주의하지 않았어요 ㅜㅠ 전체 맥락에선 동의할지라도, 각자 평상시에까지 신경이 곤두서는 맥락은 다 다를거구요.. 그런 면에서라면 저야말로 부주의하게 사는걸요. 설령 저에게 폐를 끼친들 어떻습니까 ㅠㅠ 그렇다 해도 제가 책먼지님께 뭐라 할 입장은 못될거에요. 저 역시도 그렇게 다르지 않을 것 같기도 하구요… 책먼지님 잘못하신거 전혀 하나도 없습니다(강조*3)
그때 달았던 댓글은 전쟁을 막기 위해 안보라는 명목으로 무기를 사고 팔고 만드는 행위가 결국 평범한 사람을 죽게 만드는 일인데 이 메커니즘을 깨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전쟁없는 세상이 되려면 나도 타인에게 해를 끼칠 수 있고 타인도 나에게 그렇다는 것을 인지한 긴장상태일때 가능한데, 그걸 무기수출입없이(무기업자들이나 특정 국가가 돈버는 구조가 아닌채로) 어떻게 가능할까에 관한 고민을 적었습니다. 핵은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 그걸 다루는 기술자에게든, 가까이 사는 인간에게든 해로우니 그게 무기가 되지는 않았으면 해서요 ㅠㅠ

희선 2023-04-14 03: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살, 스스로 자신을 죽이는 것... 잘 모르겠어요 막연히 죽으면 이런저런 것에서 자유롭겠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여러 가지에서 벗어나고 사람에서도 벗어나고 바라는 것에서도... 사는 데 어떤 뜻이 있다고 할 때 그런 걸 못 찾으면 그것 또한 힘들겠습니다 예전엔 그럴까 했는데, 지금은 그런 걸 꼭 찾아야 할까 합니다 그저 자기 삶을 살다 가는 게 낫겠다 생각합니다


희선

책먼지 2023-04-14 10:53   좋아요 3 | URL
이 책도 삶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지 말고 결국 작은 순간에서 충만함을 누리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제게는 이게 너무 쉬운(더 생각하기 싫어 타협한) 자기계발서식 결론으로 느껴졌어요!! 무명의 저는 당연히 아주 작은 데서 삶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만 명색이 자살을 탐구해보겠다는 철학자가 나무 아깝게 저러면 안 되는 게 아닌가요!!! (워워..) 희선님의 생각의 흐름에 너무너무 공감하면서요!! 저는 그 혼란(?)에 불편하고 두려운 주제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대처하기로 한 것 같습니다!! 굳이 들여다보지 않고도 사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면 참 편하지 않을까 싶은데.. 제가 이렇게 생겨먹은 사람이라 어쩔 수가 없.. 어흑..

잠자냥 2023-04-14 0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 책에서도 <자유죽음>이 나오는군요. 자살 관련 이야기할 때 그 책을 제외하긴 어려울 거 같긴 해요. ㅎㅎ

책먼지 2023-04-14 10:55   좋아요 2 | URL
잠자냥님이 미리 귀띔해주셔서 나 이 책 들어봐써 훗.. 크리츨리 별거 없구먼 하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ㅋㅋㅋ 결국 <자유죽음>을 거쳐가야 하는 모양입니다!!!

은오 2023-04-15 16: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흐음 이거 전에 찜해둔 책이었는데 먼지님 이 리뷰 읽고 패스.... 자유죽음은 저도 추천합니다 근데 자유죽음 읽으면 진짜 자살하고싶어지긴하는데 암튼 장 아메리는 자살했지만 전 살아있구요ㅋㅋㅋㅋ

책먼지 2023-04-16 20:34   좋아요 2 | URL
은오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저와 이렇게 알라딘으로 놀아줄 수 있는 선택을 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졌다 졌어.. 은오님까지 추천하시는데 이제 참을 길이 없습니다!! 자유죽음 담는김에 장 아메리님 다른 책도 담습니다💕😘

2023-04-20 1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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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고 사치한 글을 읽고 싶었는데 예상에서 크게 벗어난 엄청난 것을 읽어버렸다. 이건 조작되고 왜곡되고 은폐된 어느 여성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있다. 해럴드 배너가 쓴 장편소설인 <채권>, 앤드루 베벨이 대필작가를 통해 쓰고자 했으나 미완으로 남게된 자서전 <나의 인생>의 초안, 아이다 파르텐자의 회고록인 <회고록을 기억하며>, 밀드레드 베벨의 일기 <선물>. 각기 다른 화자가 각기 다른 형식으로 밀드레드 베벨의 초상을 진술하고 있다.


이 소설을 라쇼몽에 비유하는 건 게으른 선택이다. 이건 오히려 밀드레드 베벨의 진실에서 가장 먼 순서대로 배열된 이야기를 따라 진실로 가까이 다가가는 여정에 가깝다. <채권>과 <나의 인생>의 허구 속에서 일말의 진실을 발견할 수는 있다. 그러나 각자의 입장에 따른 각자의 진실이 있고 실체는 모르는 것이란 식의 해석을 들이댄다면 나는 그 사람을 상대하지 않을 것이다. 앞서 '게으르다'는 언급이 그에게 주어지는 가장 관대한 평이 될 것이다. <채권>과 <나의 인생>은, 지나치게 뛰어나서 전통적인 성 역할로 도저히 가둘 수 없는 한 여성을 '미친 여자'나 '가정에 충실한 순종적 아내'로 뒤틀고 축소하는 전형적인 가부장제의 문법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각 부가 각기 다른 작품이라고 할 때 내가 매길 별점은 각각 별 2개, 별 1개, 별 5개, 별 4개가 될 것이다. 그토록 너른 스펙트럼을 보여준 에르난 디아스에게 바칠 별은 결과적으로 다섯 개가 되었다.


처음엔 1부가 소설 속의 소설인 줄 모르고 읽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기준이 되었다. 벤저민 래스크가 앤드루 베벨이고 헬렌 브레보트가 밀드레드 베벨이겠구나, 하고 읽다가 3부에서 완전히 세계관이 재편됐다. 3부에서 비로소 "세상의 원형이 뒤집혀 있다는 걸 알았고, 현실이 뒤집혀 있어도 한눈에 이해(334)"할 수 있게 된 것이다.


3부의 화자인 아이다 파르텐자는 앤드루 베벨이 세상에 자신만의 버전으로 본인의 이야기를 남기기 위해 고용한 대필작가이다. 최종 면접에 남은 후보자들을 보고 아이다는 강렬한 유사성을 느낀다. 그건 베벨이 대필작가로, 아내인 밀드레드와 유사한 사람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다는 밀드레드에게 쉽게 공통점을 느끼고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그래서 베벨이 아이다가 재구성한 밀드레드의 이야기를 가차 없이 편집할 때 배신감을 느끼며, 베벨이 극도로 제한한 정보 속에서 밀드레드에게 실체를 부여하기 위해 아이다가 자신의 어린시절에서 가져온 이야기를 베벨이 마치 본인의 생각인 것처럼 이야기할 때 "기억을 표절당하는 데"서 오는 "엽기적인 폭력성(406)"을 느낀다.


(이하 스포일러 있습니다)


베벨의 표절에는 전적이 있다. 그가 금융업계의 신화가 된 데에는 그가 쌓아올린 막대한 부도 한몫했지만, 시장의 흐름을 정확히 예측하고 한발 앞서 대응하는 그의 수학적 정확성이 더 큰 역할을 했다. 그런데 책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밀드레드의 일기에서, 사실 베벨의 신화를 형성한 사업적 능력이 밀드레드의 것이었으며, 베벨이 대공황 때 엄청난 자본력을 바탕으로 재난을 유도했고 시장의 혼란을 키웠다는 게 밝혀진다. 이후에도 베벨은 티커 키보드 관리자를 매수해서 미리 시세를 알아내는 범죄 행위를 저질렀고 이 모든 과정에서 엄청난 이윤을 챙겼다. 자신이야말로 미국의 경제 성장에 이바지했고, 금융 체질을 개선하는 데 기여했으며, 한 개인에게 금융시장 전체를 움직일 힘은 없다던 베벨의 말이 더욱 오싹하게 다가오는 대목이다. 그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며, 만약 실수가 있다면 "현실을 조정하고 구부려서" 현실을 일관성 있게 만들 능력이 있는 사람인 것이다.


소설 속 화자들이 앞서 글을 쓴 사람이 왜 그런 글을 썼는지 의도를 모른다는 데서 기묘한 틈이 생긴다. 가장 먼저 밀드레드의 일기가 쓰였겠으나 이건 공개되지 않았다(회고록을 쓰던 시점의 아이다에게 유일하게 발굴된다). 밀드레드 사후 베벨 부부를 겨냥한 배너의 장편소설 <채권>이 세상에 나온다. 그 소설에 반박할 목적으로 베벨이 자서전을 기획했고, 아이다는 50년 후 이 모든 걸 되짚어 회고록을 쓴다. 아이다는 모든 문서에 접근 가능했던 유일한 사람이지만, 본인이 직접 개입하지 않았던 두 글에 숨겨진 의도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소설 밖의 세계에서 이 모든 글을 쓴 것은 결국 작가 에르난 디아스이다. 디아스는 이러한 소설적 장치를 통해 장편소설 <채권>을 읽고 아이다가 <채권>의 작가 배너에게 품는 의구심을 노출함으로써 독자에게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1부를 반추하고 재평가하라는 독법을 제시할 수 있게 된다. 독자가 충분히 숙고할 시간을 준 뒤 아래와 같이 하나의 답까지 제시해준다. 얼추 그 답에 근접하게 베벨과 배너의 의도를 읽어냈던 나는 퀴즈를 잘 맞췄다는 기쁨과 동시에 작가의 손에 놀아났다는 (즉, 작가가 의도한 이상으로 읽어내지 못했다는) 패배감을 느꼈다.


(346) 자서전을 써야겠다는 베벨의 결심은 많은 부분 아내의 오명을 벗기고 그녀가 배너의 소설에 나오는 은둔한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겠다는 바람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이 글을 읽어보니, 베벨은 밀드레드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보다 그녀를 완전히 특징 없고 안전한 인물로 바꿔놓는 것을 더 원했던 것 같다--베벨의 목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내가 당시에 읽었던 위대한 남자들의 자서전에 나오는 아내들과 똑같이 말이다. 밀드레드를 그녀의 자리로 돌려놓으려고.

어쩌면 해럴드 배너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똑같은 일을 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왜 소설에 밀드레드의 망가진 모습을 그린단 말인가? 이건 <채권>을 처음 읽은 이후로 내가 자문하고 또 자문한 질문이었다. 밀드레드는 그토록 명석했던 게 분명한데, 왜 그녀를 미친 사람으로 만드나? 세월이 지나며 나는 여러 가지 답을 생각해보았지만--질투, 복수심, 단순한 악의--배너의 인생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몰랐기에 늘 같은 결론으로 돌아왔다. 배너가 밀드레드의 정신과 몸을 망가뜨린 것은 단지 그게 더 나은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었다고(설령 밀드레드에게 모욕이 되고 결국은 배너 자신을 파괴할지라도, 그가 쓰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었던 이야기인 것이다). 배너는 역사 전체에 걸쳐 출현한 비극적 운명의 여주인공, 자신의 파멸을 구경거리고 내놓는 그런 여주인공이라는 고정관념에 억지로 밀드레드를 끼워맞췄다. 밀드레드를 그녀의 자리로 돌려놓으려고.


디아스는 소설의 독법뿐 아니라 작법도 엿보게 해준다. 위의 인용문에서도 살짝 등장하듯 글을 쓰다 막힐 때마다 아이다는 문체나, 캐릭터나, 어휘와 배경을 얻기 위해 공립도서관으로 가서 필요한 책들을 훑고 필요한 것들을 얻어낸다.


(311) 나는 브루클린 공립도서관에서 그런 책 몇 권을 빌릴 수 있었고, 이어지는 주에는 혼란스럽고도 무계획적인 방식으로 그 책들을 훑었다. 별 체계 없이 한 책에서 다른 책으로 건너뛰며 출처를 적지 않은 채 아무 내용이나 메모했다. 나는 문서 연구에 대해서나 서지 정보를 제대로 다루는 방법에 대해 제대로 훈련받은 적이 없었다. 알고 보니 그게 이점이었다. 나의 거칠고 타협의 여지 없이 비체계적인 접근법 덕분에 책들은 서로 합쳐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 남자들 각각의 개인적인 특징은--카네기의 자족적인 독실함, 그랜트의 근본적인 품위, 포드의 딱딱한 실용주의, 쿨리지의 수사적 검양 등등--당시 내가 생각하던 그들 모두의 공통점 앞에 무너져내렸다. 즉, 그들은 모두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의 이야기는 들을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자신들의 말이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야 마땅하다고, 자신들의 결점 없는 삶에 관한 이야기는 반드시 전해져야 한다고. 그들 모두가 내 아버지에게 있던, 바로 그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품고 있었다.


아이다의 아버지는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로 무정부주의자이다. 아이다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의 목소리는 철저하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묻힌다. 권력자인 베벨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배버의 소설과 인생이 어떻게 소거되는지 그 과정을 보면 역사를 구성하지 못한 이야기들의 면면을 추측해볼 수 있다. 역사는 당대에 그걸 주무를 자격이 있었던 자에게만 유효한 현실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손에서 구겨지고 버려진 조각들 속에 권력의 눈에 거슬렸던 수많은 약자들의 목소리가 숨어있을 것이다.


(291) 당시 저택은 가장 융성할 때였고, 내게 끼치도록 고안된 모든 영향을 끼쳤다. 저택은 내가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나 자신이 어색하고 더럽게 느껴졌다. 뭘 달라고 하는 입장도 아닌데 거지가 된 것 같았다. 그래, 난 압도되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딸답게, 나는 역겨움과 분노를 느끼기도 했다--저택 때문에든, 저택에 대한 나의 순종적인 반응에든.


나는 아이다가 처음 베벨의 저택에 발을 딛으며 느낀 감상을 고급 호텔의 로비에 들어설 때 느끼곤 한다. 특히 반얀트리나 워커힐처럼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가기 어려운 호텔일수록 더.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고난 자체가 내가 그곳을 이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임을 증언하고, 언덕을 지나 마침내 호텔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비싼 외제차나, 평일 낮인데도 호텔의 야외 골프장에서 한가로이 골프를 치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 난 그걸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거지가 된 것 같아진다. 내겐 이게 역사가 우리를 배제하는 방식에 대한 은유로도 느껴졌다. 개인의 욕망이 무관해지는 압도적이고 철저한 배제.


(267) 베벨 투자회사에서 시험과 면접을 보는 동안 나는 평생 여러 차례에 걸쳐 확인할 기회가 생긴 한 가지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권력의 근원에 가까워질수록 주위가 조용해진다는 것이다. 권위와 돈은 침묵으로 스스로를 둘러싸고, 사람은 누군가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를 그들을 둘러싼 침묵의 두께로 측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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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3 1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4-04 1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3-05-03 15: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을 다 읽고 이 글을 크게 눈 뜨고 읽었습니다.
말씀하신 부분들 공감합니다.
이 책 읽기 힘들었던 이유 중 하나가 등장인물(화자) 모두가 좀 싫어서 더 그랬던 거 같아요-
심지어 밀드레드조차... 저는 음....

책먼지 2023-05-04 10:38   좋아요 1 | URL
으아 힘들게 완독하고 이 글까지 눈 크게 뜨고 읽는 서윗함.. 이 차갑지만 다정한 도시의 고양이!!
저는 이 책 오바마 대통령 추천 리스트에 있길래 읽었거든요(<모스크바의 신사> 이후 무한신뢰 중입니다) 저한테는 얼추 다 잘 맞는 것 같아요!!
화자가 다 싫으면 소설은 읽기 정말 너무 어렵죠ㅠㅠ 자냥님이 추천해주신 것은 제게도 다 좋았는데 (특히 최근의 자유죽음이요!!!)안타깝습니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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