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보다 출근이 조금 늦었다. 회사가 유연근무제를 택하고 있어서 8시부터 10시 사이에 출근하면 출근 시간에 따라 5시에서 7시 사이로 퇴근 시간이 정해진다. 9호선 급행열차는 어느 시간에 타도 밀집도 극상이지만 8시에 출근해서 5시에 퇴근하는 게 그나마 낫다. 아침에 집에서 6시 50분쯤 출발하면 넉넉잡아 7시 40분쯤엔 사무실에 도착한다. 그런데 오늘은 집에서 7시 40분에 나왔다. 늦잠을 자서도 아니고, 아침을 먹어서도 아니고, 입은 옷이 마음에 안 들어서 여러 번 바꿔 입느라 그랬다. 자기 전에 머릿속으로 계획해 둔 옷이 막상 입어보니 되게 별로였고, 거기서부터 일이 꼬였다. 그냥 출근이 싫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느라 출근 인파가 정점을 찍는 시간에 딱 걸려서 일반, 급행, 일반을 보내고 나서야 급행에 올랐다. 미쳤지, 내가 미쳤지, 진짜. 뒤에 선 사람이 손잡이를 잡은 팔에 눌려 고개가 모로 꺾이고 사방에서 압박하는 통에 발이 반쯤 뜬 상태로 출근하면서 숨은 막히고 어지러운데 더는 화가 나지 않았다. 이 지경인데도 임산부 좌석에 아무도 함부로 앉지 않는 걸 발견하고 마음이 좀 누그러진 것이다.
한번은 지하철에 타자마자 반대편 문 쪽의 좌석까지 쭉 밀려서 사람 무릎에 앉을 뻔한 적이 있었다. 간신히 손잡이를 낚아 채고 상체가 뒤로 젖혀진 상태에서 버티고 있으려니 앉아 계시던 분이 끌어안고 있던 백팩을 눕혀 무릎 앞쪽으로 스윽 밀어주었다. 여차하면 이 위로 앉으라는 듯이. 그분도 나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것이다.
이태원 참사 이후 한동안 조심하던 사람들은 다시 남을 밀치고 몸을 던지는데 주저함이 없어졌다. 지하철 량을 늘리겠다던 공약은 또 어디로 쑥 들어가버렸다.
각설하고 본론은 3월의 책탑이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완전판 세트를 질렀다. 로버트 하인라인 중단편 전집 북펀드 광고 메일이 자꾸 들어오기에 북펀드 직전까지 갔다가 이걸 살 거면 차라리 아시모프를 살까 싶어 주문했다. 여기저기서 언급되는 통에 이전부터 궁금했기 때문이다(어릴 때 읽었던 <설득의 심리학>에서 "왜냐하면"을 붙이면 분명 상대를 설득할 확률이 높아진다고 배웠다).
마음 먹고 3월에 새로 생긴 책을 쌓아보았다. 분명 더 있는데 하도 여기저기 책을 흩어 놔서.. 일단 기억나는 것만 모았다.
선물 받은 책과 내가 산 책. 이미 읽은 책, 읽다 만 책, 읽고 있는 책, 읽을 책이 마구 섞여 있다.
짝꿍이 생일 선물로 뭘 받고 싶은지 묻기에 일정도 없고, 아무도 만나지 않는 3일을 선물로 받고 싶다고 답했다. 호텔이든 에어비앤비든 혼자 숙소 잡고 콕 박혀서 책만 읽고 싶다고. 그런데 그 3일을 만들기가 진짜 너무 어렵다. (생일과 관계없이) 짝꿍에게 뜯어낸 아렌트 철학 전기와 존 스튜어트 밀 선집은 오는 중이다.
선물받은 와인잔을 바로 써 보려고 설거지를 하다 하나를 깨뜨렸다. 짝꿍이 수습하면서 너한텐 날짜 지난 한겨레 신문보다 오늘 자 중앙일보가 더 가치 없는 거 아니까 이거 쓴다, 하고 신문에 유리 파편을 샥샥샥 감싸서 야무지게 종량제 봉투에 갈무리한다. 그 말에 웃다가, 선물해준 친구에게 미안해서, 네가 보내준 거 잘 받았는데 설거지 하다 바로 하나 깨뜨렸어, 하고 연락하니, 아무렇지 않게, 너 그럴 줄 알았어, 그거 너무 얇긴 하지? 한다. 혼술용으로 쓰라고 두 개 보낸거야. (네???) 나의 허술함과 덤벙거림을 나 빼고 모두가 알고 있다.
고기를 못 먹는 날 위해 우리 가족은 외식 때 주로 해산물을 먹으러 간다. 그 와중에도 몇 년 간 생일상 받기는 잘 피해왔는데 이번엔 덜미가 잡혔다. 그리고 이런 기상천외한 게 준비돼 있었다. 혼자 보기 아까워 공유한다.
마지막으로 폭신하고 아름다운 발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