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학을 전공하면서 셰익스피어를 만나지 않기란 9호선 급행열차로 통근하면서 인간을 혐오하지 않기만큼 어렵다. '셰익스피어 1', '셰익스피어 2' 처럼 노골적인 과목이 있는가하면, '서양문학사조', '문학비평이론' 처럼 두루뭉술한 과목에서도 셰익스피어는 튀어나온다. 오늘날까지 꾸준히 소환되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걸 보면 그가 위대한 작가임엔 틀림없다. 그 위명에 눌려 좋아해보려고 노력했는가 하면, 아니요. 나는 원래도 남들이 다 좋다고 하면 괜히 삐딱선을 타는 사람인데, 억지로 배우기까지 해야하니 더 싫었다. 그래서 페데리치님이 이 책에서 셰익스피어를 까는 걸 보며 속이 후련했다.
"If it looks like a duck, swims like a duck, and quacks like a duck, then it probably is a duck."
작품을 읽을 때 그게 여성 혐오 같고, 유대인 혐오 같고, 계급 차별 같고, 인종 차별 같다면, 실제로도 그냥 그런 것일 가능성이 높다(아니라면 나와서 항변해보시지, 셰익스피어). 그를 변호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관점과 견해, 해석과 재해석, 선해가 필요하다면 그냥 표면적으로 보이는 게 전부일 수도 있는 것이다.
(165) 여성은 비이성적이고 허영심이 강하고 난폭하고 사치스럽다고 비난받았다. 비난은 특히 불복종의 도구로 간주된 여성의 혀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가장 주된 악한은 순종하지 않는 아내였으니, 이것은 "잔소리꾼", "마녀", "창녀"와 더불어 극작가, 대중소설가, 도덕가들이 가장 즐겨 공격하는 대상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1593)는 시대의 선언서였다. 셀 수 없이 많은 여성혐오증적 희곡과 소책자가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여성의 불복종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고 찬미했다.
(166) 한편 집 안팎에서 여성의 행실을 다스리기 위한 새로운 법률과 고문방식이 도입되었는데, 이는 여성에 대한 문학적 비방이 그들로부터 자율성과 사회적 힘을 완전히 박탈하려는 정치적 기획에 조응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내가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캐서린이라면 나는 과연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저항할 수 있을까. 내가 나답게 사는 것의 대가가 물리적, 사회적 죽음일 때 나는 과연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있을까.
(272) 사실 우리는 이웃이나 친구, 친지가 화형대에서 불태워지는 광경을 목격하는 일이 여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들이 쥐고 있는 피임 주도권이 악마적인 도착의 산물로 해석될 수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마녀사냥을 당한 여성들과 같은 공동체에 속했던 다른 여성들이 이들에게 자행된 참혹한 공격에서 얻었을 생각과 느낌, 결론을 이해할 수 있다면(다시 말해서 바스토우가 <마녀광풍>(1994)에서 그랬던 것처럼 마녀에 대한 박해를 "안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박해자의 의도를 파악하려 애쓰는 대신 마녀사냥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미친 영향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마녀사냥이 여성들의 출산을 통제하는 데 사용해 왔던 수단을 악마적인 방법이라고 몰아붙임으로써 이를 파괴해 버렸고, 여성의 신체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제도화함으로써 여성의 신체를 노동력 재생산에 종속시킬 수 있는 조건을 마련했음은 분명해진다.
당사자가 아니라면? 만약 당신이 마녀사냥에 회부된 여성의 아버지나, 남편이나, 아들이라면, 희생을 막기 위해 나설 수 있었을까? 나아가 그게 당신의 딸이나, 아내나, 어머니였어도 당신은 마녀사냥을 했을까?
(280) 여성들에 대한 의혹의 분위기를 이용해서 [평소에] 못 마땅했던 아내나 연인과 헤어지거나, 자신이 강간하거나 꼬드긴 여성들의 복수를 무력화시킨 이들도 있었다. 확실한 것은 재판에 연루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여성을 상대로 한 악행에 반대하지 못한 남성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이런 범죄로 재판을 받은 남성의 대다수는 마녀로 의심받거나 확인된 이들의 친척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년에 걸친 선동과 공포심은 남성들 사이에 여성과의 깊은 심리적 거리감에 씨를 뿌렸고 이로 인해 계급적인 연대가 붕괴되고 이들 고유의 집합적인 힘이 잠식당했다.
답은 당신이 기회주의자냐, 침묵하는 다수냐, 저항하는 소수냐에 따라 달라진다.
(249) 마녀사냥이 일어난 역사적 맥락과 피소자들의 젠더와 계급, 박해의 영향 등을 살폈을 때 우리는 유럽의 마녀사냥이, 자본주의적 관계의 확산을 저지하려는 여성들의 저항에 대한, 그리고 섹슈얼리티와 재생산에 대한 통제력과 치유능력을 통해 여성들이 획득한 권력을 공격한 것이었다고 결론지어야만 한다.
그 모든 박해 속에서도 여성은 가장 먼저 들고 일어나 가장 끝까지 싸웠다. 오랜 기간 축적해 온 경험적 지식의 명맥이 끊겨도 여성은 언제든 다시 시작한다. 공감과 연민, 연대와 결속은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다. 그것만이 우리가 가장 높은 확률로 생존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지난 주에는 회사 일+외주 번역까지 맡게 되어 좀처럼 끈덕지게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오늘은 여유가 좀 생겨 남은 부분을 마저 읽었다. 흐름을 파악하며 집중해서 읽었어야 할 책을 중간중간 쫓기듯 읽었으니 제대로 이해했을리 없다. 그런데 어떻게든 이 책을 읽어보려고 들고 다녔던 한 주의 기억이 책에 덕지덕지 묻어 있어 당장은 다시 읽기가 싫다. 그래서 일단 부족한 것은 부족한 대로 두려고 한다.
화요일: 재택근무
수요일: 전시회 보러 가자고 짝꿍과 연차 써놓고 둘 다 일하고 있는 슬픈 상황 (이러고 짝꿍은 다음 날 급작스런 제주도 출장)
그래도 영화관에서 <슬램덩크>는 보았다!! (태섭이 너 뭐야.. 서운해.. 가면 간다고 말이라도 좀 해주지..)(원작에 없던 미국행에 당황)
토요일: 외주 번역
일요일: 짝꿍이랑 카페에서 일
하지만 만일 과거의 교훈을 현재에 적용시켜 보면 1980년대와 1990년대 세계 곳곳에서 마녀사냥이 재등장했던 것은 "시초축적" 과정의 분명한 증표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는 토지와 다른 공유자원의 사유화, 빈곤의 만연, 약탈, 한때 끈끈했던 공동체에 분열의 씨뿌리기 같은 것들이 다시 세계적인 의제로 상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 P343
이는 바스 부인이 다섯 명의 남편을 묻은 뒤 "여섯 번째 남편이여오라. ...... 인정사정 보지 않고 서두르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배우자 하나가 떠나고 나면 또 다른 기독교 남성이 나를 책임지리라"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던 초서의 세계와는 다른 성질의 것이다. 초서의 세계에서 나이 든 여성의 성적인 왕성함은 죽음과 대립관계에 있는 생에 대한 긍정을 의미했다. - P286
신체는 이 과정에서 점점 더 정치화되었다. 즉, 사회적 규율의 외적 한계, "타자"로 탈자연화되고 재정의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17세기 신체의 탄생은 [역설적으로] 신체의 종말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신체라는 개념은 더 이상 특정한 유기적 실체를 의미하는 대신, 계급관계의, 그리고 착취지도에서 계급관계를 만들어 내는, 꾸준히 변동하는 경계들의 정치적 기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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