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상 읽고 싶은 책이 손 안에 들어오면 주춤하게 될 때가 있다. 꼭 봐야겠다고 결심했던 영화도 그 앞에 서면 멈칫하게 된다.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제대로 듣겠다고 결심하면 하나의 과업이상이다.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읽는 것도 보는 것도 해가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은 나만의 여과기가 더욱더 고착화되어가고 있다는 예증이다. 그래서 숱한 오해와 오독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결국 나는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만을 임의적으로 '보았다', '들었다', 고 표현하는 지도 모른다.

 

 

 

 

<위대한 개츠비>를 보았다. 원작처럼 화자는 토비 맥과이어가 분한 닉 캐러웨이다. 모성애를 불어일으키는 눈망울을 지닌 배우가 연기하는 닉은 개츠비와 데이지의 사랑의 관찰자, 때로는 조력자로서 무력하지만 마지막까지 남아야 하는 증언자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다. 영화에서 그는 여러 정신질환들에 시달리면서 의사의 상담을 받는 환자로 개츠비를 둘러싼 일들의 회고록의 저자로서 나온다. 눈이 내리는 바깥의 황량한 풍경과 대비적으로 1920년대의 그 소비향락적인 흥청망청의 분위기의 귀환은 화면 전체를 압도하며 화려하게 복원된다. 백 년 가까이 전의 젊은이들의 사치스러운 파티는 당시의 재즈 음악과 현대의 힙합이 적절히 배합된 사운드트랙으로 오늘날처럼 역동적이고 생생하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서도 종종 언급되었던 흥겨운 찰스턴춤을 추는 그들을 보면 아이돌들의 약속이나 한 듯한 일률적인 댄스 동작보다 더 배워보고 싶은 욕구가 일게 한다.

 

데이지역의 캐리 멀리건은 원작에서보다 오히려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모습과 매력을 보여준다. 짧은 금발 머리, 코와 입술 사이의 절묘한 지점의 점, 순수해 보이는 눈망울이 참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원작에서보다 조금 더 개츠비에게 몰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데이지는 개츠비를 사랑한다. 내가 느꼈던 데이지의 개츠비에 대한 감정은 원래 사랑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개츠비가 데이지를 위하여 만든 그 어마어마한 저택에서 수많은 셔츠들을 꺼내 보여주며 과시하던 대목에서 데이지가 흘리던 눈물에 대한 해석도 원작과는 다르다. 너무 아름다워서 울었다,고만 표현하며 데이지의 물질에의 그 다소 천박한 욕망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곤 하던 원작과는 달리 영화에서는 닉의 설명을 빌어 데이지가 톰 뷰캐넌과 해온 결혼생활의 비참함에 대한 속내를 그저 숨기고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그려진다. 결론적으로 데이지는 개츠비가 그렇게 평생을 바쳐 모든 것의 의미를 부여할 만한 여인이 아닌 것으로 귀결되는 것으로는 같지만 그 종착점으로 가는 길에서 영화와 소설은 갈린다. 그래서 영화에서 데이지가 조금 더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인물로 그려지다 갑자기 설명 없이 개츠비의 죽음 앞에서 매몰차게 돌아서는 결론은 설득력을 상실한다. 어쩌면 피츠제럴드가 꾸준히 데이지를 묘사하며 풍겼던 그 가벼운 정서가 데이지 그 자체를 이해하는 데에는 더 용이했는 지도 모른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타이타닉호>의 그 앳된 소년의 모습과는 다소 다른 중후한 매력을 풍긴다. 눈물을 가득 머금고 자신의 과거와 데이지와의 사랑을 닉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은 장중한 사운드트랙과 함께 그가 연기해 낸 개츠비의 속살을 가감없이 드러내어 공감을 자아낸다. 영화는 최대한 원작에 근접하려고 노력했고 개츠비의 슬픈 몰락과 대비되는 그 화려한 흥청망청함을 잘 살려낸 성실한 느낌이다. 닉이 개츠비에 대하여 다 쓰고 마지막에 "The Great"를 덧붙이는 대목은 개츠비의 그 허망한 사랑이 결론의 중추가 아님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그리고 화면을 떠도는 닉의 마지막 이야기들은 거의 정확하게 원작의 마지막과 겹친다.

 

개츠비는 오직 저 초록색 불빛만을 믿었다. 해가 갈수록 멀어지기만 하는 가슴 설레는 미래를. 그것은 이제 우리 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무슨 문제인가. 내일 우리는 더 빨리 달리고 더 멀리 팔을 뻗을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어느 찬란한 아침......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새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p.225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멈칫한다. 영화의 완성도도 완성도지만 <위대한 개츠비>의 그 허망하면서도 장중한 결말 덕택일 것이다. 삶도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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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3-05-16 15: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에서의 데이지는 원작보다 훨씬 사랑스럽군요^^ 그것도 나쁘진 않을듯~~~
저도 내일 보려고 하는데 왜이리 설레이는지 ㅎㅎ
영화 안나 카레니나보다는 확실히 뜨겠죠?

blanca 2013-05-17 07:30   좋아요 1 | URL
아, 오늘 보실 예정이군요. 제 생각에 흥행 성공할 듯해요. 어제도 꽉 차 있었어요. 그리고 끝날 때까지 다들 자리도 안 뜨고. 중간에 나가는 사람들 생기기 시작하면 그 영화 흥행은 --;; 안나 카레니나는 연극 무대 같은 장치가 오히려 영화를 조금 더 난해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어요. 그리고 일단 음악이 너무 너무 좋아요!

2013-05-16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17 0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3-05-16 1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일찍 보고오셨군요. 저도아침 첫 시간으로 달려갔답니다. ㅎㅎ 캐리 멀리건이 아주 이뻤어요. 원작보다 사랑스럽고 이해 가능하게 만들었더군요. 디카프리오는 갈수록 더 좋아요. 전 토탈 이클립스에서그가 참 좋던데 중후해지면서 다양한 표정을 가진 배우로 더 멋지게 변하고있네요. 엔딩의 닉 대사, 전 펭귄클라식 것으로 뒤져보려구요. ^^

blanca 2013-05-17 07:33   좋아요 1 | URL
프레이야님도 보셨군요! 그죠, 저는 사실 이 배우 잘 몰랐는데 <오만과 편견>에 나왔었다고 하더라고요. 디카프리오는 그렇게 나이가 들었는데 어쩌면 몸에 군살이 하나도 없는지. 제 자신 반성좀 했습니다. ㅋㅋ 토탈 이클립스 기억하죠! 저랑 동생이랑 정말 좋아했던 영화예요. 영화보고 나서 책 뒤져 보니까 그것도 색다른 재미가 있더라고요.

Jeanne_Hebuterne 2013-05-16 18: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칸느에서 오프닝 파티를 하던데, 바즈 루허만은 영화의 평과는 별개로 칸느에서 유독 사랑받는 감독인 듯 합니다. 블랑카님의 글, 잘 읽고 가요!

blanca 2013-05-17 07:36   좋아요 1 | URL
영상이 너무 예쁘고 일단 음악!! 제이지가 참여했다고 하는데 1920년대 2013년의 조화가 아주 근사하더라고요. ost를 구입할까 생각중이에요. 쟌느님은 어떻게 볼지도 궁금해요. 하여튼 화면이 너무 화려해서 보고 나면 일상의 풍경이 다소 초라해 보이는 부작용은 있습니다.^^;;
 

중학교 때였던가?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집에 실비아 크리스텔 주연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 비디오가 눈에 띠었다. 부모님이 외출을 한 틈을 타 큰 기대를 가지고 봤지만 실망했던 기억. 숲의 음산한 분위기. 그리고 실비아 크리스텔의 두툼한 입술의 잔상만 남아 있다.

 

나중에서야 그 원작이 데이비트 허버트 로렌스의 것이며 고전 반열에 올라 있는 작품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여전히 나에게 채털리 부인은 몽환적인 에로티시즘으로 대변된다. 로렌스의 <아들과 연인>을 읽고 그가 얼마나 사물이나 현상을 언어로 형상화하는 작업에서 치밀하고 섬세한 자신만의 재능을 가졌는 지에 알게 되자 그의 대표작인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 다시 제대로 다가가고 싶었다. 오해와 곡해만으로 이 광부의 아들이었던, 스승의 아내와 사랑에 빠졌던, 항상 이단아였던 작가를 인식하고 싶지 않았다.

 

 

 

 

 

 

 

 

 

 

 

 

 

 

민음사 판대신 펭귄 클래식을 택하게 된 이유는 도리스 레싱의 서문이 있다는 것과 아무래도 책의 가로 판형이 민음사판보다는 조금 더 넓어 보기 편한 면도 있었다. 다만 펭귄 클래식에서 아쉬운 점은 각주가 아니라 미주라는 점이다. 주가 많은데 일일이 책의 뒷면에서 찾아 봐야 한다는 게 사실 쉽지 않다. 나중에는 다 읽고 주석만 몰아 읽었다.

 

이 글은 과거에 대한 기도이며, 우리로 하여금 계절과 조화롭게 사는 시대, 세월의 커다란 수레바퀴 속에서 조화하며 살아가는 시대로 되돌아가기를 호소하고 있다. 그가 쓴 다른 글과 마찬가지로 이 글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마치 어떤 주문처럼 이 글을 따라가게 되고 마음속에 품고 있었을지 모르는 연약한 이의는 모두 설득당하여 제기할 수 없게 된다.

- 도리스 레싱 <서문> 중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도리스 레싱의 서문은 로렌스의 생애에 대한 개관과 더불어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 대한 의미를 그녀의 명료하고 직설적인 어조로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여기에서 로렌스가 이 작품을 죽기 4년 전 썼다는 사실과(그는 페결핵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가 최종판인 제3판을 가장 최고라 주장했다는 점, 우리가 만나게 되는 작품이 바로 그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한다. 또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 1차 세계대전 후의 상흔과 인간에 대한 실망, 좌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그 시대적 배경에 주목하는 것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한 환기도 있다. 어두운 질곡에서 피어오르는 인간애에 대한 기대, 남녀의 진정한 소통이 가지고 오는 환희는 더 남다른 것일 수밖에.

 

우리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어서 우리는 이 시대를 비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p.51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리고 귀족 계급인 클리퍼드 채털리와 부유한 지식인 계급 출신의 코니의 결혼. 1920년 이 부부는 탄광촌의 굴뚝이 뿜어내는 수증기과 연기의 영향권에 있는 렉비의 대저택으로 돌아온다. 이 이야기가 가지는 기본적인 갈등구조가 암시되는 부분이다. 클리퍼드는 참전으로 하반신이 마비되어 왔고 코니는 그런 남편의 시중을 들며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고사되어 간다. 클리퍼드는 저택 가까이의 탄광촌의 광부들을 사람으로 보기보다 탄광촌의 부속품으로 여기며 자신의 육체적 죽음을 사변적 탁상공론으로 위장하곤 한다. 둘은 서로를 필요로 했지만 진정 원하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 가라앉아 있다. 코니가 사냥터지기 멜로즈를 만나 육체적 사랑에 빠져드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20세기 초엽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문득 문득 적나라하고 과감하다. 로렌스가 뒤에 덧붙인 말처럼 외설이라는 것은 정신이 육체를 경멸하고 두려워할 때, 그리고 육체가 정신을 증오하고 저항할 때에만 나타나는 것이라면, 이러한 솔직과감한 성에 대한 묘사에 움찔 움찔 놀라는 21세기 독자들은 아직도 그 외설이라는 말에 끄달리는 중인가 보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것은 학창시절 인기를 끌었던 하이틴 로맨스나 삼류 외설물들과는 확실한 차별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로렌스의 언어로 걸러 올린 인간의 육체에 대한 탐구, 교감에 대한 묘사는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단발성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더 근원적인 본능, 실재에 대한 예리한 탐사에서 나온 진실의 핵을 겨냥하고 있다. 귀부인과 사냥터지기의 사랑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그 구획, 계급, 관념에 대한 도전을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장치이다. 그러나 그 경계를 넘나드는 그들의 교감은 상투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중요한 사람이요. 적어도 내 자신에게는 말이요. 나는 내 존재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소.-p.224

 

사냥터지기 멜로즈는 비굴하지 않다. 표준어가 아닌 사투리를 쓰고, 왈패 같은 전처가 있고 클리퍼드의 손에 좌지우지 되는 하찮은 업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지는 자긍심과 자존감에 대한 제대로 된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멜로즈는 로렌스의 하나의 분신 같은 인물이다. 그는 거칠고 투박하지만 사회가 부여하는 신분 상승의 기회, 타협, 물질에의 굴욕을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코니와 함께 있을 때에는 최선을 다하지만 그녀를 속박하지 않고 그녀에게 속박되지 않는다. 도무지 아씨와 사랑에 빠진 머슴으로 보이지 않는다. 로렌스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육체 그 자체가 아니라 어딘가에 끄달리지 않고 속박되지 않고 비겁하지 않은 진정한 자아의 표현이다. 이 모든 것을 가로막는 것으로 그는 언어의 위선, 전쟁, 기계화, 사회적 압력 등을 거론하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을 내재화한 인간 자신이 자신을 끊임없이 고문하는 것으로 돌아온다. 에로티시즘을 빌려, 외설이라는 비판에 대항하며 그가 정작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이러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시쳇말로 야한 대목들은 전체의 깊이와 그 진정성 안에 조화롭게 포용된다.

 

"인생이란 언제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꿈 아니면 광란인 듯했다."는 로렌스의 이야기는 잔혹하지만 때로 아름다운 진실에 접근해 있다. 알면서도 또 그러는 것. 그게 삶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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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5-16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래전에 한 권짜리로 읽었거든요(출판사가 기억나지 않아요),
마지막에 사냥터지기가 채털리 부인에게 편지를 쓰잖아요. 자신의 성기와 그녀의 성기에 이름을 붙여서요(그 이름도 기억나지 않네요;;). 그 장면도 인상깊었고, 그녀를 둘러싼 부자 남자들은 그녀를 성적으로 만족시키지 못한것도 인상깊었어요. 최근에 읽은건 로렌스의 단편이었기 때문인지, 단편이 진짜 끝내준단 생각이 들어요. 창비에서 [패니와 애니]로 나왔던데, 블랑카님, 로렌스의 단편도 도전해보세요. 정말 좋아요. 저는 이제 [아들과 연인]을 읽어봐야겠네요. 단편 읽고 완전 반해서 [아들과 연인]을 사두었거든요. 블랑카님은 [아들과 연인]을 먼저 읽으셨으니 저랑 읽는 순서가 반대네요.

블랑카님이 이렇듯 소설을 읽으시고 감상을 얘기해주시는 게 전 참 좋아요.
:)

blanca 2013-05-16 13:36   좋아요 0 | URL
아, 로렌스의 단편도 좋아요? 꼭 읽어볼게요. 그 <무지개>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아들과 연인> 꼭 읽어보세요. 로렌스의 자서전 같아요. 로렌스의 필력, 그 감성의 결은 정말 남다른 것 같아요. 결코 평범하게 살고 갈 수는 없는 시선, 표현력을 지닌 것 같아요. 개인적인 삶은 파란만장하고 좀 서글픈 구석이 있는 것 같아요.
 

할머니는 마흔이 훌쩍 넘어서야 딸 다섯 아래 아버지를 낳으셨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세살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성취이자 또다른 삶이었던 것같다. 모자는 밀착되어 있었고 죽음으로 헤어질 때까지 서로를 애달파 했다. 꿈에서라도 할머니를 만나면 아버지는 오열한다. 나는 아이를 낳으면서 할머니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산고를 열번 가까이 외롭게 겪고 생떼 같은 자식들을 때로 앞세우기도 했던 당신의 삶. 시대는 변해도 어머니와 자식의 그 치밀하고 절절한 애착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는다. 그 어떤 언어로도 그것을 모두 주워담을 수 없다. 그저 느끼고 또 잊었다 뒤돌아 보고. 여기까지다.

 

스물다섯 살의 로렌스는 암으로 죽어가며 누워 있는 어머니에게 바치기 위해 이 작품을 집필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그녀에게 고통스런 삶을 보상해 주기 위한 시도였다.-켈렌 바론과 칼 바론 

 

 

 

 

 

 

 

 

 

 

 

 

 

 

 

 

 

 

D.H.로렌스 하면 흔히 떠올리는 <채털리 부인의 사랑>. 그는 흔히 에로티시즘과 연결된다. 그의 작품을 시작한다는 것은 왠지 그래서 불온해 보인다. 실제 그의 작품 중 상당수가 20세기 당시 선정성으로 출판 불가 판정을 받았다. <아들과 연인>도 상당부분 삭제된 판본으로 독자와 만나오다 드디어 무삭제 케임브리지 판본의 번역본으로 한국 독자와 만나게 되었다. 이 책에는 평생 어머니와 밀착되어 있었던 로렌스의 자전적인 부분이 상당부분 반영되어 있다. 광부의 아내였던 모렐 부인의 서른한 살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마침내 그녀가 죽고 장성한 둘째 아들 폴이 세상으로 나가는 부분까지 장대한 가족 서사시다. 모렐 부인은 로렌스의 어머니 그 자체다. 풍광에 대한 묘파가 뛰어나고 사람의 내면 심리에 대한 간파가 놀랍다. 그에게 에로티시즘의 멍에가 씌어졌다면 그것은 모든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냄새 맡는 것에 로렌스가 얼마나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적시에 적절한 언어로 그것들을 포박했는 지에 대한 몰이해가 아닌가 싶다. 그의 앞에서 모든 사물은 농밀하게 그려진다. 생명력은 놀랍다. 그리고 그것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기에 다소 선정적으로 느껴지는 것같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그 아이는 어머니에게 환멸의 쓰라림이 가장 견디기 어려울 때, 삶에 대한 그녀의 믿음이 흔들리고 그녀의 영혼이 황량하고 외로울 때 태어났다. 그녀는 아이를 대단히 소중하게 여겼고 아이의 아버지는 그것을 질투했다.

-1권 p.40

 

모렐 부인은 상류층 귀부인 같은 우아함을 지녔지만 그의 남편은 술과 유흥에 탐닉하며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만났던 그 활기 있고 매력적인 청년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그녀는 그를 점점 경멸하게 되었고 그 사이 사이 윌리엄, 애니, 폴, 애덤이 태어났다. 어머니가 열정적으로 사랑했고 전장에 그녀의 총애의 표시를 달고 나간 기사와 같았던 장남 윌리엄은 폐렴으로 어이없이 죽어버린다. 그리고 그녀의 삶은 다시 차남 폴에게 닻을 내린다. 폴은 로렌스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모든 일을 어머니를 위해 했던 폴과 모렐 부인의 유대는 각별하다. 그가 두 여인 사이에서 갈팡질팔 할 때도 그의 지향은 정작 어머니였다. 긴 시간에 걸쳐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렐 부인에 대한 묘사는 인간의 의지, 꿈, 소망이 그 잔인하고 초라한 종결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하게 스러지는 지에 하나의 예시이자 전언이다.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어머니에게 모르핀을 과다 투여하는 그 남매 간의 암묵적인 합의 장면에서 가슴이 저릿했다. 사랑하는 나를 세상에 내어 놓았던 그 강한 어머니가 작게 오그라들며 고통에 허덕이는 장면. 우리는 대체 뭘 할 수 있을까. 그 명철했던 수전 손택도 죽음 앞에서는 무기력했다. 아들은 어머니를 보내고 그 장면을 또 복기하고 복기하며 대체 뭘 더 어떻게 했어야 했나, 자문하고 또 자문한다. 이런 장면에서 누군들 자유로울 수 있을까.

 

 

 

 

 

 

 

 

 

 

 

 

 

 

 

 

마침내 모렐 부인이 죽고 이제 자식들은 어머니의 죽음을 공적으로 전환해야 했다. 어머니가 죽고 난 세상. 폴이 느낀 것은 이러했다.

 

그의 어머니는 진정으로 그의 삶을 지탱해 주었었다. 그는 어머니를 사랑했고 그들 모자는 실제로 함께 세상을 대면했었다. 이제 어머니가 없었으므로 그의 뒷전에서 삶은 영원히 갈라져서 틈새가 생겨낳고 베일이 찢어져서 마치 죽음을 향해 이끌리듯이 그의 삶은 천천히 표류하고 있었다.

-2권 p.383

 

<아들과 연인>을 읽고 나면 그저 가슴이 먹먹해진다.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가 그려낸 어머니와 자신의 삶과 작별은 잔인할 정도로 사실적이라 읽는 이를 절로 괴롭게 만든다. 어린 아들 앞, 시장에서 막무가내로 값을 깎아서 산 자신의 형편에는 호사스럽게 느껴지는 접시를 자랑핬던 젊고 예쁜 엄마는 어느 날 더 이상 우리와 함께 하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또 그러한 우리를 낳는다. 그런 게 삶이라고 생각하니 가슴 한 켠이 뭉근하게 아파온다. 이 모든 것에 허무한 끝이 있다는 명제는 절망적이기도 하고 희망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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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3-05-08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제 이 책은 자전적 요소가 강한데,로렌스의 아버지는 광부,어머니는 교사여서 당시 영국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회적 게급이 틀린 이들끼리의 결혼이었다고 하더군요.이후 로렌스의 어머니는 남편에게 실망해 자식들에게 애정을 쏟았는데 특히 몸이 약한 로렌스를 더욱 사랑하고 아꼈다고 하더군요.

blanca 2013-05-09 10:06   좋아요 0 | URL
정말 책 내용이 비슷하군요! 이 책 읽다 보니 정말 소설을 읽는다기보다는 로렌스의 자서전을 읽는 느낌이었어요. 참 슬프고 뭉클한 이야기였어요. 어머니가 로렌스를 각별히 여겼군요.

세실 2013-05-09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을 읽다보면 자전적인 내용이 들어갈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수필 한편을 써도 내 삶이 들어가는데 하물며 긴 긴 소설은........
요즘 아들에게 서운한 일 있는데 이 책 읽으면 더 서운하려나? ㅎㅎ

blanca 2013-05-10 08:58   좋아요 0 | URL
세실님 어떤 서운한 일이 있으신지 궁금하네요^^;; 내리사랑이라는 말. 참 맞는 것 같아요. 여긴 봄비가 추적추적 내려 운치 있어요. 즐거운 주말 보내시기를....
 

이제 정말 하늘을 향해  튀긴 팝콘 같았던 벚꽃은 엔딩을 향해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뒤를 이어 그 어떤 인공 향수로도 흉내낼 수 없는 달콤하고 향그러운 라일락 꽃망울이 터진다. 시작과 끝은 항상 이렇게 맞물린다.

 

아름다운 계절. 어울리지 않는 어두운 책인 줄만 알았다.

 

캘리포니아 주 몬터레이의 캐너리 로는 시이고 악취이고, 삐걱거리는 소음이고, 독특한 빛이고, 색조이고 습관이고, 노스텔지어고 꿈이다. 캐너리 로는 모여 있는 동시에 흩어진 곳이고, 함석과 쇠와 녹과 쪼개진 나무이고, 잘게 부서진 보도와 잡초가 무성한 나대지와 고물 수집장이고, 골함석으로 지은 통조림 공장이고, 초라한 극장이고, 식당과 매음굴이고, 북적이고 작은 식료품점이고, 연구소와 싸구려 여인숙이다. -존 스타인백 <통조림공장 골목>

 

 

지금은 상류층 거주 지역으로 알려져 있는 몬터레이. 존 스타인벡이 그려낸 과거의 그곳, 통조림공장 골목은 이 도입부의 환유법으로 대치된다. 소란 없이 조용히 타협하는 방법을 아는 중국인 이민자 리청이 운영하는 식료품점, 엄숙하고 당당한(?) 도라의 매음굴, 그레고리 성가를 듣는 닥의 해양 생물학 연구소, 그리고 이러한 닥의 잔심부름을 하기도 그를 성가시게 하는 사고뭉치들 맥 패거리. 이들의 좌충우둘 에피소드는 고상하지는 않지만 때로 웃음을 터뜨리게도 하고 뭉클한 감동을 주기도 하는 에너지로 부글부끌 끓는다. 작가 존 스타인벡은 살리나스 계속의 3대에 걸친 그 대서사시를 장중하게 완성했던 그 동일작가가 분명한데 여기에서는 계속 독자를 포복절도하게 만든다. 소재와 배경은 우울에 물들 만도 한데 그 안의 과육은 어찌나 달큰한지 다 먹기가 아까울 정도이다.

 

 

 

 

부랑자 맥 패거리가 식료품점 주인 리청이 외상 대신 받아낸 창고를 겁박으로 점령하다시피 하고 닥을 위한답시고 그의 생물학 연구소에 필요한 개구리를 잡고 어처구니 없는 깜짝 파티를 준비하는 장면은 시트콤보다 재미있다.

 

그러나 경제적인 울분은 맥 패거리를 깊이 잠식할 수 없었다. 그들은 상업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기쁨을 팔린 물건으로 재지 않았고, 자존심을 은행 잔고로로 재지 않았고, 사랑을 그 값으로 재지 않았다.

-p.162

 

"캐너리 로에서 이른 아침은 마법의 시간이다." 이 시간 통조림 공장의 골함석은 진줏빛 광택을 발한다. 스타인 벡이 명명한 이 '진주의 시간' 에 대한 이야기. 결국 미워할 수 없는 이 구제불능의 맥 패거리들과 마을 주민들은 연합하여 마을의 거의 유일한 지식인이다시피 한 닥을 위하여 성공적인 파티를 공모한다. 실수투성이, 결함투성이의 이들의 파티는 캐너리 로 주민 전체로 연결되고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거대한 파티를 끝으로 이제 해가 거의 중천을 넘어가는 것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게 된다.

 

 

자, 이제 해가 막 떠오르는 진주의 시간이 품은 눈물과 그 눈물이 해를 받아 빛나는 시기에 대한 이야기라며, 저녁의 시간에 대하여 이야기할 차례다.

 

 

 

 

어린 시절 영국으로 이주하여 살게 된 일본인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이 작품은 한번 읽고 말 이야기가 아니었다. 설명할 수 없는 저릿함, 아름다움, 감동은 <통조림공장골목>이 다루었던 하류층, 활기, 애환들과 상치되는 영국의 상류층을 지척에서 수행했던 노집사의 담담한 회고록 전체에서 배어 나온다. 평생 독신으로 오직 위대한 사람을 제대로 보필함으로써 그 위대함과 품위를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었던 집사의 지난 인생에 대한 합리화는 이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역설을 힘겹게 서술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가 섬겼던 위대하다고 생각했던 주인은 나치의 협력자로 판가름난다. 주인의 죽음 후 다른 미국인에게 저택과 함께 일괄 거래된 그의 인생은 잠깐 동안의 휴가로 이어지고 그 휴가의 갈피짬마다 노집사는 자신의 삶의 여러 편린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일관성과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발버둥친다. 누구의 인생인들 이러한 모순과 자가당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우리도 결국 삶의 퇴로없는 저녁즈음에 '나의 삶'을 제대로 누군가에게 설명해 내고 싶은 욕구를 참아내지 못할 것이다. 이 집사가 전부로 알고 섬겼던 주인처럼 우리도 삶의 전체를 통하여 무언가에 끄달리고 지배당하고 좌우될 것이다. 남아 있는 나날 앞에서 돌아본 그것들이 너무나 빈약했음을 깨닫는 것이 인생이라면 얼마나 서글플까. 그 어떤 착각도 오해도 위선도 교정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내버려 두는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화법은 오히려 더 강력한 지향을 역설한다. 그 지향은 절대로 외부를 향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진주의 시간과 저녁의 시간. 이 두 책은 결국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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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13-05-14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황의 위태로운 합리화와 의미 부여를 피하기란 어지간한 통찰력이 있지 않고서야 힘들 것 같아요. 가즈오 이시구로는 늘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한 장면을 보여주었어요. 적당한 서사, 맥을 관통하는 힘이 조화를 이루는 작품이었어요.

덧-저야말로 제가 좋아하던 작품을 블랑카님의 글로 다시 떠올려서 참 즐겁습니다.

blanca 2013-05-16 08:45   좋아요 0 | URL
아, 쟌느님도 이 작가 읽으셨군요! 정말 묘한 글솜씨의 작가였어요. 다른 책도 읽어 볼까 하고 있어요. <녹턴> 같은 거요.
 

화장실에 들어갈 때는 --;; 어떤 활자라도 읽어 주어야 한다. 그러니 읽을 책이 떨어졌을 때 느끼는 초조감은 말도 못한다.

인지기능과 생리기능의 반사적 연합이라고나 할까 ㅋㅋ 요새 사람들은 하도 스마트폰을 가지고 들어가서 그 오염도가 말도 못한다고 뉴스에서 나오기는 했다. 어느 날 책은 똑 떨어지고 할 수 없이 대형서점에서 매달 발행하는 무가지를 들고 들어갔다 이 책을 만났다.

 

 

나는 프랑스에 가본 적이 없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불어를 배우면서 하도 고생을 해서 솔직히 프랑스에 대한 큰 호감은 없다. 그러나 기회가 된다면 이 서점에는 찾아가 보고 싶다. 미국인인 저자 실비아 비치는 파리에 1919년 11월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라는 서점을 개업한다. 벽에는 시인들의 사진, 그들이 직접 그린 그림을 걸고 그 안은 모두 골동품, 파리의 영어책 전문 헌책방에서 사모은 책들로 채웠다. 실비아는 프랑스 작가를 미국에 소개하고 영어권 작가를 프랑스에 소개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서점은 초창기 비싼 책가격 때문에 주로 도서 대여점의 구실을 하게 되며 유명 작가들의 아지트가 된다. 앙드레 지드, 제임스 조이스도 회원이었다. 특히나 조이스는 반납에 불성실했다고 한다.  1920년 여름 실비아와 제임스 조이스의 첫만남은 그녀의 인생을 통째로 바꾸어 놓는다. 이 아일랜드 출신의 경제관념 없는 괴짜 작가에 대한 회고는 참으로 흥미롭다

 

 

조이스로 말하자면, 그는 항상 남들을 자기와 동등하게 대우했다. 상대방이 작가건, 어린애건, 웨이터건, 귀부인이건, 파출부건 간에 말이다. 그는 누구를 만나건 상대방이 하는 말에 흥미를 표했다. 자기는 어떤 사람을 만나서 한 번도 지루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가끔은 서점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동안 건물 관리인의 길고 긴 이야기를 경청하며 앉아 있기도 했다. 간혹 택시라도 타고 오는 날에는 택시기사가 하던 이야기를 마저 끝내기 전에는 결코 내리지 않았다. 누구나 조이스에게 매력을 느꼈다. 어느 누구도 그의 매력을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이다.

-p.67

 

세기의 이야기꾼은 무엇보다 세기의 경청자였다. 누구나 그 앞에서는 귀중한 연사 대접을 받았다. 그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을 흡수하여 다시 세상에 흩뿌렸다.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마침내 실비아를 만나 세상에 빛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율리시스>는 음란물 취급을 받아 세상에 정식으로 선을 보이기까지 온갖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이 미혼의 서점 여주인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오늘날 이 작품은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었을 지도 모른다.

 

 

 

율리시스의 방대함과 난해함, 나는 아직 이 책을 읽어 볼 용기를 내지 못한다. 평생 녹내장으로 고통받아 주변의 사물과 활자를 정확하게 제대로 편하게 관조할 수 없었던 이 아일랜드의 사내는 일상 생활과 경제 관념에서는 오히려 평균이하였다고 한다. 서점 주인이자 출판인이었던 실비아는 마침내 제임스 조이스의 가계까지 책임져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녀 또한 경제적으로 허덕였고 대책없는 몽상가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다녀야 했지만 위대한 작가의 위대한 책을 세상에 내어 놓는 일에서 말할 수 없는 보람을 느껴 그 고난의 과업을 자처했다.

 

 

 

 

 

 

 

우리가 무척 좋아했던, 그리고 아무런 말썽도 피우지 않았던 손님이 한 사람 있었다. 그는 매일 아침마다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의 한쪽 구석에서 잡지나 매리엇 대령의 소설 또는 다른 책을 읽었다. 이 사람이 바로 어니스트 헤밍웨이로, 내 기억이 맞다면 1921년 말에 파리에 처음 왔을 것이다.

-p.120

 

그녀의 헤밍웨이에 대한 호감과는 달리 각주는 냉정하다. 헤밍웨이의 허풍, 거짓말과 그것을 또 곧이곧대로 믿어주는 실비아에 대한 객관적인 해명. 그녀는 자신이 사랑했던, 숭앙했던 작가들을 지켜주고 싶어했다. 그녀의 회고록은 그래서 대체로 무덤덤하다. 작가와의 친분의 과시 대신 그 작가와의 교감이 태반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작가들과의 만남, 그들의 이야기가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 장교가 진열장에 남아 있던 단 하나의 책,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를 달라고 위압적으로 이야기하자 그녀는 황급히 서점을 정리하고 숨어 지낸다. 수용소에서의 생활도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녀가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를 지켜낸 것이 그녀 자신의 고된 수용소 생활보다 더 그녀 삶에서 의미 있는 일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헤밍웨이와의 재회. 담담한 회고록은 막을 내린다.

 

 

 

 

 

물론 그녀는 이미 고인이 되었고 그녀의 뒤를 이어 조지 휘트먼이라는 사람이 이 서점의 명맥을 잇는다. 지금도 가면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을 만나볼 수 있다. 그 서점을 들락날락하며 낭송회를 열고 책을 찍어내고 객쩍은 농담들을 교환했던 사라진 우리의 작가들은 이제 흔적 정도만 확인할 수 있겠지만.

 

 

 

 

 

 

 

이제 동네에는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같은 서점이 설 곳이 없다. 도서대여점도 보기 힘들다. 아니 종이에 찍힌 활자로 교감하고 소통을 나누는 풍경 자체가 점차 화석화되어 가는 것같다. 그러니 이 책들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향수, 그리움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은 다시 돌아 다시 종이로 된 책, 그 책을 쓴 작가, 그 책을 읽는 이들의 아지트가 활성화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곳이 다시 생긴다면 슬며시 들어가 가만히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싶다.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따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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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4-26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이 책들 싸안고 계실 봄날의 블랑카님 생각도 나고, 한동안 잊었던 파리가 막 보물안고 달려오는 것 같아요. 파리보다 황금보물이 필요해요, 요즘. 저도 불어를 그렇게 배워서(억양,발음 다 너무 이상했어요! 부끄럽고, 몸도 베베 꼬이고) 프랑스 정말 관심도 없어요--; (그치만 이건 과거 얘기)

지금은, 아프리카 오지에 보내준다고 해도 가서 안올 것 같아요. 그치만 화장실에 들어갈 때 무가지를 들고가시는 블랑카님이라니.. @.@

blanca 2013-04-28 10:38   좋아요 0 | URL
ㅋㅋ 예전에 에리히 케스트너인가가 엄마가 시장에서 채소 사오면 그것을 싸온 포장 신문도 읽었다는 이야기 듣고 웃었던 기억이 나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저도 심한 활자 중독이라서요.ㅋㅋ

불어 묘한 매력이 있는 언어는 분명한데 참 어렵더라고요. 응용보다는 암기가 골격인 언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저는 암기에 재능이 없어서 고등학교 때 별로 안 좋아했던 과목이랍니다.

세실 2013-04-27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우리도서관에서 인문학 강좌 하는데 주제가 고대 그리스 철학이고 율리시스가 필독도서네요. 두꺼움에 놀라고, 난해함에 놀라고....저도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아요^^
세계 고서점 탐방. 생각만해도 낭만이어라~~~~~

blanca 2013-04-28 10:39   좋아요 0 | URL
세실님 도서관 강좌 너무 알차네요. 그죠! 엄청 엄청 두껍죠. 아웅, 저도 언젠가 고서점 탐방 같은 것 해보고 싶긴 한데 언제가 될런지요.

프레이야 2013-04-27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이런이런 사랑스런 페이퍼라뇨. 세익스피어 앤 컴퍼니에 대한 이야기는 읽어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문학적인 블랑카님이 들려주시니 더 좋아요.
정말이지 꼭 가보고픈 곳 중의 하나랍니다. 파리의 고서점도 담아가요. 제가 요즘 부쩍 프랑스에 꽂혀서요.불어공부는 이제 두달했고 왕초보에 게으름뱅이지만 즐기면서 천천히 하려구요. 언젠간 갈 날이 있겠죠. 발원하면 이루어지리니^^ 행복한 봄날 누리시길~~♥

blanca 2013-04-28 10:40   좋아요 0 | URL
아, 맞다! 프레이야님 불어공부중이셨죠! 그럼 꼭 인연이 닿아 가실 일이 생길 거예요. 어제 날씨 너무 좋더라고요. 해바라기 하며 참 행복했답니다. 아, 아쉬운 봄이에요!

Jeanne_Hebuterne 2013-04-30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 전산으로 이루어지는 첨단 작업이 활개를 쳐도 사람은 어느정도의 아날로그를 추억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 보니 저보다 한참 어린 십대 소년이 언젠가 '음반을 왜 사요?'라고 묻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겪은 것을 내칠 수 없고 어찌되었든 소통하고 싶은 바람이 이끼처럼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자리잡은 공간이 블로그, 서재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나저나 블랑카님이 저런 고서점에 가시면 정말 재미있는 순례기를 들려주실 것 같아요!

blanca 2013-04-30 10:42   좋아요 0 | URL
그래서 또 <건축학개론> 같은 영화가 사람들의 호응을 끌어낸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의 스마트폰이 또 미래에는 추억의 물품이 될 수도 있을까요? 음반도 음반점 풍경도 참 흐릿해졌지요. 이 서재들 만큼은 과거의 것이 안 되었으면 좋겠어요. 나이가 많이 들어서도 쟌느님과 소통할 수 있도록요^^;;

다크아이즈 2013-05-01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율리시스는 훌륭한 리액션을 지닌 작가였네요. 잘 들어주고 잘 공감해야 잘 쓰는 작가...
율리시스 저 두꺼운 것, 무려 1300페이지 넘어요 ㅠ.
저것을 언젠가 반값할 때 사놓고 장식용으로 잘 활용하고 있다는 ㅠ

프레님이 열공해서 프랑스어 접수하고 프랑스 여행도 가면
우리 같이 세익스피어 앤 컴퍼니 후일담 들어보아요.
그러고 보니 여기 블랑카님 덧글에 제가 존경하는 분들 다 모였네요. ^^*

blanca 2013-05-03 11:37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저 책 사셨군요. 맞아요. 그때 세일하던 것 기억이 나는데. 저는 아예 시도조차 안 했답니다.^^;; 진짜 프레이야님 페이퍼 기다려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