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살고 싶다.

좋은 글을 써보려면 공부도 공부려니와 오래 살아야 될 것 같다. 적어도 천명을 안다는 50세에서부터 60,70.100에 이르기까지 그 총명, 고담의 노경 속에서 오래 살아보고 싶다. 그래서 인생의 깊은 가을을 지나 농익은 능금처럼 인생으로 한번 흠뻑 익어보고 싶은 것이다.

- 이태준 <무서록>  '조숙' 중 

 

 

 

 

이렇게 노골적으로 '오래 살고 싶다'고 표현할 수 있는 이의 집을 다녀왔다. 비가 긋던 오전. 촉촉하게 젖은 고택의 대문은 활짝 열려 있고 까페로 활용되는 이곳에서 달짝지근한 모과차와 쫄깃한 인절미를 먹으니 이런 곳에서 글을 썼다면 '오래 살고 싶다'는 말을 절로 내뱉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상허 이태준이 1933년부터 1946년 월북할 때까지 살았다는 이곳. 그가 붙인 '수연산방'이라는 당호는 지금도 유효하다. 그의 수필집 <무서록>에 이 집을 지은 과정이 나와 있다기에 급하게 읽어보았는데 그의 수필 전편이 실려 있는 게 아니라 '수연산방' 이야기가 제대로 나와 있지 않아 아쉬웠다. 또 아무래도 걸러지지 않은 당시의 표현과 한자어 등이 접근을 쉽게 하지 않아 제대로 완독했다고 하기 어렵다. 그저 오렌지 빛깔의 손바닥 만한 아취 있는 수필집을 손에 넣은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선풍기를 틀지 않아도 덥지 않은 집. 건넌방 앞의 툇마루에서 난간에 기대어 본 아담한 마당의 풍경은 보면서도 절로 그립고 아쉬웠다. 하룻밤 자고 갔으면 싶은 집. 왠지 내가 아이가 되어 팔짝 팔짝 뛰면 할머니가 내다보고 손수 만든 식혜와 인절미로 나를 부를 것만 같은 집. 나는 인생으로 한번 흠뻑 익어가고 있는 것인가. 익는 과정에서 놓치고 가는 것들이 한없이 아린 날이다. 나도 오래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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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3-08-03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우와 우와아~~!!! 멋져요. 찜해놨다가 꼭 챙겨서 가봐야겠어요. 이런 멋진 집을 두고 월북을.. 음.. 아니 어쩜 훨씬 더 빨리 월북했을텐데, 이런 멋진 집 때문에 월북이 늦어진 것일지도.. 어찌됐든, 월북하셨어도 이 집은 많이 그리워하셨것 같아요. 저도.. 한 오백년 살고싶어요. ^^;;;

blanca 2013-08-04 07:28   좋아요 0 | URL
메리포핀스님, 여기 참 고즈넉하니 좋더라고요. 이런 데에서 한달 정도만 살아보고 싶어요. 새도 지저귀고. 꽃도 피고. 손수 건축에 관여하고 그랬던 것 같은데 참 아까워요. 그래도 이렇게 남아 보고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 의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순오기 2013-08-04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서울에 있는가 봐요?
다음에 서울가면 가보고 싶네요.
좋은 소식 알려줘서 고마워요!!

blanca 2013-08-04 13:29   좋아요 0 | URL
예, 순오기님, 성북동에 있어요. 가을에 가면 더욱 좋을 것 같아요. 어떨 때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예약을 해야 할 정도라네요. 화장실 뒤켠도 너무 좋고. 구석 구석 구경하고 기웃대도 민망하지 않은 분위기로 참 일종의 전통찻집이에요.

프레이야 2013-08-04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집이라면 정말 오래오래 살고 싶다고 노래라도 부르고 싶을 것 같아요. 무서록을 한번 펼쳐보게 하는 페이퍼, 더위도 잠시 잊게 만드네요.^^

blanca 2013-08-06 17:36   좋아요 0 | URL
아, 프레이야님, 여긴 진짜 너무 너무 더워요. 아침에 일어나면 온몸이 끈적끈적. 고문이 따로 없네요. 저런 집에 한달 만 요양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transient-guest 2013-08-09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심속에 아직도 이렇게 고즈넉한 장소가 남아있다니요. 관리가 좀 힘들겠지만, 하루 종일 사색하고 책 읽기에 더없이 좋은 집 같습니다.

blanca 2013-08-09 10:14   좋아요 0 | URL
여기 너무 너무 탐났어요. 이런 데에서 글쓰고 책 읽으며 산 작가가 참 부러웠고요. 우선 더위도 콘크리트 건물보다 덜해서 선풍기를 안 틀어도 바람이 살랑살랑. 작은 마당은 내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고즈넉해지고요.
 

아이가 길가의 퀼트공방을 자꾸 기웃거리다 급기야 저기에 들어가서 바느질을 하겠다고 했다. 물론 어린이도 가능한 분위기였지만 아직 취학전 아이는 없는 것같다. 몇 번 망설이다 데리고 들어가니 강사가 조금 난감하다는 표정이지만 한번 해보자고 한다. 처음에는 헤어핀부터 시작해서 아이는 매일 바느질을 한다.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치듯 아이는 매일 그 공방으로 쏙 들어가 서툰 홈질을 해서 이것저것 만든다. 공방에는 초로의 아주머니도 젊은 아이 엄마도 초등학생 들도 온다. 다들 고개를 숙이고 가방을, 지갑을, 인형을 만들면서 적당히 함께 있다는 느낌 속에서 안온하다. 그네들이 유일하게 부담없이 참견할 수 있는 대상이 아이다. 단지 조그만한 아이가 함께 바느질을 한다는 이유로 쏟아지는 관심. 엄마는 어디에 있냐는 질문. 엄마는 몇 걸음 떨어져 엉덩이가 터질듯한 딱딱한 의자 위에서 책도 읽고 이리저리 기웃대기도 한다.

 

11월 하순의 어떤 아침을 상상해보시기를. 벌써 20년도 전, 겨울이 다가오는 조짐이 보이는 아침을. 한 시골 마을, 옆으로 널따란 낡은 집의 부엌도 머릿속으로 그려보라. <중략>

백발을 짧게 자른 여인이 부엌 창가에 서 있다. 여인은 테니스 신발을 신고 여름옷처럼 가벼운 무명 원피스 위에 모양없는 회색 스웨터를 입고 있다. 체구가 작고 당닭처럼 씩씩하지만, 젊었을 때 오랫동안 병을 앓아 여인의 어깨는 가련하리만큼 구부정하다. 남다른 얼굴은 링컨의 얼굴과 별로 다르지 않을 만큼 볼이 울퉁불퉁 홀쪽하고 햇볕과 바람에 찌들어 바랬다. 하지만 생김새가 섬세하고 뼈대가 고우며 황갈색 포도주 빛깔의 눈은 소심해 보이기도 한다. "어머나!" 여인이 외치자 입김이 되어 창문에 어린다. "과일 케이크를 만들기에 좋은 날씨네!"

- 트루먼 커포티 <크리스마스의 추억>

 

이 끈적끈적한 여름, 트루먼 커포티는 자신이 곱 살때 이미 예순 살이 넘었던 사촌 숙이 크리스마스 케잌을 굽던 그 정경을 영롱한 구슬을 내밀듯 쓰윽 가지고 온다. 너무 아름답다. 아이가 바느질에 집중하는 시간, 나는 내처 그 정경 속으로 또르르 굴러들어간다. 어머니, 아버지를 떠나 친척 집에 맡겨진 외로운 아이는 오랜 독신의 조금 모자란 듯한 사촌 할머니와 마음 깊이 교감한다. 그들이 수레를 끌고 바람에 떨어진 피칸을 줍고 크리스마스에 쓸 과일케이크를 만들 기금을 모아 마침내 그 케잌을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풍경. 그리고 선물로 서로 연을 주고받고 그 연을 날리는 대목. 소년이 할머니가 아니라 '친구'라고 불렀던 사촌 숙은 "세상을 떠날 때 오늘의 광경을 내 눈에 담아 가고 싶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눈물겨운 마지막. 소년은 성장하고 '친구'는 노쇠해진다.

 

이게 우리가 함께 보낸 마지막 크리스마스다.

 삶의 행로가 우리를 갈라놓는다.

-p.325

 

이 단편집에는 트루먼 커포티의 자전적인 기록이 군데군데 별처럼 박혀 있다. <추수감사절에 온 손님>은 '리'에게 헌정되었고 가장 비열한 소년으로 그려진 오드 헨더슨의 이야기가 왜 유년 시절 이웃 친구이자 <앵무새 죽이기>의 작가 '리'에게 헌정되었는지 고개가 좀 갸웃거려지기도 하지만 그의 유년 전반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던 사촌 숙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에서도 나온다. <어떤 크리스마스>에서도 자신을 버리다시피 한 아버지와의 어색한 재회를 뒤로 하고 사촌의 따뜻한 품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소년의 소망이 나온다. 면 "첫 별을 보고 또 다른 별을 보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작가의 토양은 이러한 너그러운 유년의 사랑에 기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꼭 부모가 아니어도 소년의 엉뚱함, 치기 들을 온전히 받아주었던 그러한 완충지대가 오늘날 아직도 그 소년의 글을 많은 사람들이 읽고 감동받게 되는 유인이 된 것같다.

 

아이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없다면 그런 것들을 찾아주고 싶다. 트루먼 커포티의 이야기. "살아 있다는 것은 물고기가 뛰노는 갈색 강과 한 여자의 머리카락에 내려앉은 햇빛을 기억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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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3-07-31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 어린 따님이 꼬물꼬물 퀼트하는 모습 상상만으로도 사랑스러워요~~~~
나이 차는 고정관념인데 자꾸 의식하게 되네요. 일곱살과 예순살의 교감...도 참 멋진 일이죠.
어제 천안 호두과자 한개만 사니까 아들내미가 할머니꺼는? 하는데 부끄럽더라구요. ㅎ

blanca 2013-07-31 18:35   좋아요 0 | URL
세실님, 저는 바느질에 취미가 없어 솔직히 학창시절 친구들 덕을 많이 봤었거든요. 그래서 저도 이제 막 시작하고 싶은데 너무 못해서 솔직히 면이 안 서 시작을 못하겠어요. 이것도 못하냐,고 강사가 놀랄까봐요--;; 책을 넣어 다니는 가방을 하나 시도해 보고 싶긴 한데... 자수도 배우고 싶고요. 저도 할머니와 교감을 많이 나눈 편이라 마지막에 소년이 숙과 헤어지는 장면이 절절하게 다가오더라고요. 삶의 행로가 우리를 갈라놓는다, 이 표현. 너무 슬퍼요. 할머니 잘 챙기는 아드님 저는 그러지 못했기에 상대적으로 너무 부럽고 부끄러워요.
 

부러워하면 지는 거라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진심으로 부러웠다.

 

 

 

 

 

 

 

 

 

 

 

 

 

 

저자 김화영은 알베르 카뮈 전집, 장 그르니에의 <섬>, 플로베르의 <마담 보봐리>, <카뮈, 그르니에 서한집 1932~1960> 등 90여권의 번역서가 있는 전문 번역가이자 고려대학교 불문학과에서 30여년 동안  교수로 재직한 불문학자이다. 이제는 현직에서 은퇴하여 자신의 서투르고 달뜬 청춘과 풋풋한 신혼을 보냈던 엑상프로방스에 곱게 나이 든 아내의 손을 잡고 다시 돌아가 그의 일생을 동행했던 카뮈, 마르셀 프루스트, 장 지오노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 나라의 언어를 평생 연구하고 공부하고 그 언어와 사람들의 정서로 빚어진 아름다운 문학 세계를 탐사한 이방인이 자신의 기억과 사랑과 동행과 함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 이야기하는 것들은 영롱하고 눈부시다. 누구나 엑상프로방스에 갈 수는 있겠지만 저자가 느끼는 그 깊이 있는 즐거움과 관조는 요원해 보이면서 불현듯 질투가 인다.

 

 

 

 

이 책은 김화영이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갓 귀국한 겁 없는 천둥벌거숭이였을 때 처음으로 낸 저서라고 고백한다.  역시 프로방스에 대한 이야기. 카뮈의 무덤 근처에서 우연히 만난 소년이 한 아름 안고 있었던 금빛 수선화를 받아들었던 여기에서의 기억은 사십 년을 훌쩍 넘어 은퇴한 노신사가 된 김화영에게 <여름의 묘약>에서 다시 돌아온다. "지금 당장, 여기서, 행복한 사람, 가득하게, 에누리 없이 시새우며 행복한 사람의 땅이었던 프로방스는 그래서 청년에게 낯설게 물러났던 프로방스는 삶의 굴곡을 겪고 그 지방의 언어와 문학에 침잠했던 노년의 사내를 이제는 라벤더, 타임, 로즈메리 향기로 따사롭게 안아준다. <행복의 충격>과 <여름의 묘약>은 시간의 풍화 앞에서 화자와 대상이 어떻게 변전하는 지에 대한 흥미로운 여정의 이정표가 되어 줄 것이다.

 

더 늙어지기 전에 나도 프로방스에 갈 수 있을까? 카뮈와 장 그르니에와 장 지오노를, 조르주 상드를 깊이 알지 못하고 불어도 프랑스의 지리적 위치에도 문외한이지만 그래서 저자가 프로방스에 작가들의 흔적에 느끼는 그 절절한 감정의 깊이에 온전히 가 닿을 수는 없겠지만, 고작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두 권 읽었지만, 나도 햇빛이 나비처럼 내려앉아 머물러 있는 그 풍경 속에서 고개를 까닥이며 스리슬쩍 낮잠에 빠지고 싶다. 저자가 이야기한 살바도르 달리의 '열쇠를 가진 잠'. 큼직한 열쇠를 쥐고 안락의자에 앉아 빠져드는 낮잠은 반드시 열쇠가 떨어져 바닥에 닿는 소리에 깰 것이므로 기분나쁘게 깊이 빠져들지 않을 수 있단다. 그런 잠. 그런 곳. 그런 느낌. 꿈꾸는 것만으로도 나비 한 마리가 파닥거리며 가슴 속에 들어오는 느낌. 여기에서 바라보는, 꿈꾸는 저기는 항상 그렇듯 실제보다 훨씬 근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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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23 2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24 1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3-07-24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꾸는 저기가 훨씬 아름다울 것이라는 글귀 따라 간절히 꿈꾸기 위해 두권의 책 담아가요. 블랑카님, 이곳은 연일 폭염이에요. 너무 깊이 빠지지않는 달콤한 잠에 들고싶은 날들입니다. ^^

blanca 2013-07-24 13:45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서울은 연일 비가 쏟아지고 남부는 폭염이고. 습도가 어마어마해서 빨래가 고민이에요.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온몸이 끈적이고. 아, 청량하고 시원한 가을이 너무너무 기다려져요. 이 책들 읽으니 진짜 누가 프로방스 가는 가방에 절 좀 넣어갔으면 ㅋㅋ 싶더라고요. 같이 읽으면 너무너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한참 격차를 두고 읽으니 내용이 잘 기억이 안 나서요.

감은빛 2013-07-24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일 쏟아지는 비에 빨래를 할 수가 없네요.
신발이 두 개나 흠뻑 젖었는데, 빨지 못해서 아침마다 신발 젖을까봐 걱정입니다.

북아프리카나 남부 유럽은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예요.
실제로 가보기는 쉽지 않을테니 책으로 대리 만족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네요.

blanca 2013-07-25 07:19   좋아요 0 | URL
저도 아직 가보지 않은 나라들이 너무 많아서 그곳들을 갈 기회가 있을지... 또 기회가 언제 올지 궁금해요. 사실 우리나라도 남해도 아직 가보지 못해서요. 숨은 비경들이 많더라고요. 건강하고 젊을 때는 돈과 시간이 허락치 않고 나이들어서는 기력이 따라주지 못해 여행을 못한다는 사실이 참 안타까워요^^;;
 

가끔 나이에 걸맞지 않는 총천연색의 짙은 화장과 지나치게 튀는 옷차림을 한 할머니들을 볼 때가 있다. 한때 엄청난 미인이었던 중년의 여배우가 자신의 나이와 마치 힘겨루라기도 하듯 과도한 성형과 짧은 치마로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짓는 모습은 때로 서글프다. 시간은 공평하고 잔인하다. 누구나 그 앞에서 불멸을 이야기하기란 쉽지 않다.

 

여자의 일생에서 꽃을 받을 수 있을 때, 꽃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여자가 더 이상 꽃을 받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꽃을 받는 일이 점차 뜸해지다가 완전히 없어졌을 때, 꽃의 역할은 훨씬 더 중요하다.

-에밀 아자르 <솔로몬 왕의 고뇌>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이 책을 쓰고 바로 다음 해에 로맹가리는 여기에서 '삼류의 죽음'이라고 비하했던 자연사 대신 스스로 자신의 삶에 마침표를 찍는다. 이 책은 마치 로맹 가리의 유서 같다. 시간, 죽음 앞에서 무력하게 스러지지 않게 투쟁하는 이들의 이야기. 그게 아무리 무모하고 가련한 시도라고 해도, 시간의 힘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불멸'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내고 마음의 안식을 얻곤 했던 스물다섯 살 청년 장이 아무리 어리석어 보인다고 해도, 우리는 로맹가리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 시도를 직감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누구나 그렇다. 죽음을 넘어서 지속되는 것이 있다는 희망이 있어야 우리는 이 전장 같은 삶 속에서 견딜 수, 버틸 수 있다. 로맹가리는 그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작가다.

 

택시를 운전하는 청년 장은 우연히 파리의 한복판에서 성공한 바지 사업가이자 여든 다섯 살을 앞두고 있는 솔로몬을 태우게되면서 그의 삶에 개입하게 된다. 솔로몬은 이 '기성복' 같은 세상의 삶에서 이름 없이 잊혀져 가는 수많은 이들과 한때는 매력적이고 잘 나갔던 퇴물 샹송 여가수 마드무아젤 코라를 지켜주는 일에 열정을 바친다. 그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 한켠에서 자원 봉사자들을 동원하여 고뇌하는 외로운 익명들의 전화를 받고 때로 그들에게 뛰어가는 '봉사의 구조회'를 운영하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솔로몬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나는 그 솔로몬이 젊은 시절 사랑했던, 하지만 응답을 받지 못했던, 이제는 환갑도 훌쩍 넘어 버려 꽃을 더이상 받을 수 없는 늙은 여자 코라에게 로맹가리가 할애한 애정어린 묘사에 시선이 갔다. 그녀는 마치 모든 찰나적인 것의 서글픈 종결의 은유 같다. 장과 솔로몬이 그녀에게 바친 위로들은 우리가 우리 청춘에, 우리 삶에서 지나치는 모든 것들에 대한 하나의 헌사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계산을 해본 적이 없어. 인생을 샹송처럼 살았어. 사람이 젊을 때에는, 언젠가 늙는다는 걸 상상할 수 없는 법이야. 너무 먼 미래의 얘기거든. 그래서 상상을 초월하는 거야.

-p.278

 

스물다섯 살의 청년 앞에서도 여성적인 매력을 발산하고 싶어하는 예순다섯 살의 그녀는 마치 <그리스인 조르바>의 오르탕스 부인같다. 또 그 부인의 그러한 마음과 여성으로서 존중받고 싶어하는 그 바람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보듬어 주는 조르바는 솔로몬과도 장과도 닮아 있다.

 

 

 

 

 

 

 

 

 

 

 

 

 

 

우리 모두 로맹가리, 아니 에밀 아자르가 장과 젊은 연인 알린의 입을 통해 이야기했듯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지속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하나씩 지속될 수 없는 것들 앞에서 초연해지는 것을 배워가며 늙어갈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불멸'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지 못한다. 그런 서글픎에 대한 아련한 묘사와 수긍과 이해에 대한 영롱한 이야기. 언젠가 화장품 가게에서 기기묘묘한 짙은 화장과 아가씨 차림으로 나를 놀라게도 서글프게도 했던 그 낯선 할머니를 이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같다. 누구나 그런 모습에서 자유스러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으니까. 그 할머니는 솔로몬의 여인 코라처럼 꽃을 받고 싶었던 거다. 그 어떤 여인도 심지어 나도 죽을 때까지 포기할 수 없는 그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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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22 16: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23 08: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풀잎 하프 트루먼 커포티 선집 2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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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살 나에게는 안타깝게도 콜린에게 돌리 같았던, 트루먼 커포티에게 숙 포크 같았던 '그녀'가 없었다. 트루먼 커포티의 자전적인 소년 시절의 추억담, 너무나 영롱하고 아름다워 한 줄 한 줄 아껴가며 읽었다. 가장 잘 할 수 있는 '자신의 유년'에 대한 이야기 앞에 선 작가는 저도 모르게 돌아갈 수 없는 그곳을 향해 하나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여기에 서면 소설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을 얻은 삶이 되어 읽는 이에게 건너간다.

 

어떤 마법사가 내게 선물을 주려 한다면, 그 부엌의 목소리들로 가득 찬 병을 하나 주었으면 좋겠다. 하하하 웃는 소리와 불이 속삭이는 소리. 아니면 버터와 설탕, 빵 냄새가 찰랑찰랑하는 병을 하나 주었으면.

-p.19

 

그 부엌에는 아버지의 사촌 누이인 돌리, 인디언 혈통이라 우기지만 실은 흑인인 캐서린, 그리고 그들보다 나이 차가 오십도 더 나는 어린 나', '콜린'의 십대가 있었다. 돌리는 여동생인 베레나와 평생 독신으로 살며 그 나이에 걸맞는 순응과 세파에의 오염 대신 조금 모자라 보여도 가을바람이 마른 잎사귀를 튕겨 내는 '풀잎하프' 소리가 이미 저 세상에 가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간직해서 전해 준다는 낭만적인 믿음을 가진 귀여운 할머니였다. 소년은 돌리를 사랑했고 그녀가 동생 베레나가 자신을 이용하려 한다는 생각에 역시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친구 캐서린과 집을 떠나 멀구슬나무 위의 오두막 위로 도망갈 때 함께 간다. 이 오두막 위에서 콜린, 캐서린, 돌리는 역시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일탈, 소외의 저변으로 밀려난 것 같은 쿨 판사, 소년 라일리를 친절하게 맞아들인다. 멀구슬 나무 위에서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우리들이 딛고 있는 지상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거야. 이파리 하나, 씨앗 한 줌. 이런 것들부터 시작해서 사랑이 뭔지 조금씩 배우는 거지. 먼저, 이파리 한 장, 떨어지는 비, 그런 다음엔 이파리가 네게 가르쳐준 것과 비 온 후에 익어간 것을 받아 줄 사람이 오는 법이다. 쉬운 과정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두렴. 일생이 걸릴 수도 있어. 오직 그게 얼마나 진실한지만 알지. 사랑은 사랑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사슬이라는 것을. 자연이 생명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사슬이듯."

-p.80~81

 

돌아온 콜린은 돌리의 죽음과 따스한 부엌 같았던 나이 든 그녀들과의 소중했던 추억과의 이별과 청소년기의 작별과 풀잎하프 소리의 귀환에 대한 믿음으로 이야기를 맺는다. 멀구슬나무 위의 오두막집에서 떠밀려 내려온 소년은 더이상 소년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으리라. 하늘 위의 별을 올려다 보던 자리에서 불현듯 떠밀려 내려와 지상에 착지하던 그 순간. '성장'이란 명명은 그 슬픈 추락을 합리화하려는 꼼수에 지나지 않는다. 트루먼 커포티는 그 지점을 정확하게 잡아내어 우리들의 그 아련한 성장기의 추억을 불러낸다. 모든 지나간 것들은 '풀잎하프' 소리에 실려 다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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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3-07-16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80~81쪽 인용한 문장이 좋아요. 그 문장만 곱씹어 볼수록... 차근차근 사랑에 대해 서로 알아가면서도 그 감정을 느껴봤으면 좋겠네요. ^^

blanca 2013-07-17 07:36   좋아요 0 | URL
cyrus님 오랜만이에요! 그죠! 군데군데 밑줄 그은 문장이 참 많아요. 너무 예쁜 소설이랍니다. 추천드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