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나이에 걸맞지 않는 총천연색의 짙은 화장과 지나치게 튀는 옷차림을 한 할머니들을 볼 때가 있다. 한때 엄청난 미인이었던 중년의 여배우가 자신의 나이와 마치 힘겨루라기도 하듯 과도한 성형과 짧은 치마로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짓는 모습은 때로 서글프다. 시간은 공평하고 잔인하다. 누구나 그 앞에서 불멸을 이야기하기란 쉽지 않다.

 

여자의 일생에서 꽃을 받을 수 있을 때, 꽃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여자가 더 이상 꽃을 받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꽃을 받는 일이 점차 뜸해지다가 완전히 없어졌을 때, 꽃의 역할은 훨씬 더 중요하다.

-에밀 아자르 <솔로몬 왕의 고뇌>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이 책을 쓰고 바로 다음 해에 로맹가리는 여기에서 '삼류의 죽음'이라고 비하했던 자연사 대신 스스로 자신의 삶에 마침표를 찍는다. 이 책은 마치 로맹 가리의 유서 같다. 시간, 죽음 앞에서 무력하게 스러지지 않게 투쟁하는 이들의 이야기. 그게 아무리 무모하고 가련한 시도라고 해도, 시간의 힘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불멸'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내고 마음의 안식을 얻곤 했던 스물다섯 살 청년 장이 아무리 어리석어 보인다고 해도, 우리는 로맹가리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 시도를 직감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누구나 그렇다. 죽음을 넘어서 지속되는 것이 있다는 희망이 있어야 우리는 이 전장 같은 삶 속에서 견딜 수, 버틸 수 있다. 로맹가리는 그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작가다.

 

택시를 운전하는 청년 장은 우연히 파리의 한복판에서 성공한 바지 사업가이자 여든 다섯 살을 앞두고 있는 솔로몬을 태우게되면서 그의 삶에 개입하게 된다. 솔로몬은 이 '기성복' 같은 세상의 삶에서 이름 없이 잊혀져 가는 수많은 이들과 한때는 매력적이고 잘 나갔던 퇴물 샹송 여가수 마드무아젤 코라를 지켜주는 일에 열정을 바친다. 그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 한켠에서 자원 봉사자들을 동원하여 고뇌하는 외로운 익명들의 전화를 받고 때로 그들에게 뛰어가는 '봉사의 구조회'를 운영하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솔로몬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나는 그 솔로몬이 젊은 시절 사랑했던, 하지만 응답을 받지 못했던, 이제는 환갑도 훌쩍 넘어 버려 꽃을 더이상 받을 수 없는 늙은 여자 코라에게 로맹가리가 할애한 애정어린 묘사에 시선이 갔다. 그녀는 마치 모든 찰나적인 것의 서글픈 종결의 은유 같다. 장과 솔로몬이 그녀에게 바친 위로들은 우리가 우리 청춘에, 우리 삶에서 지나치는 모든 것들에 대한 하나의 헌사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계산을 해본 적이 없어. 인생을 샹송처럼 살았어. 사람이 젊을 때에는, 언젠가 늙는다는 걸 상상할 수 없는 법이야. 너무 먼 미래의 얘기거든. 그래서 상상을 초월하는 거야.

-p.278

 

스물다섯 살의 청년 앞에서도 여성적인 매력을 발산하고 싶어하는 예순다섯 살의 그녀는 마치 <그리스인 조르바>의 오르탕스 부인같다. 또 그 부인의 그러한 마음과 여성으로서 존중받고 싶어하는 그 바람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보듬어 주는 조르바는 솔로몬과도 장과도 닮아 있다.

 

 

 

 

 

 

 

 

 

 

 

 

 

 

우리 모두 로맹가리, 아니 에밀 아자르가 장과 젊은 연인 알린의 입을 통해 이야기했듯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지속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하나씩 지속될 수 없는 것들 앞에서 초연해지는 것을 배워가며 늙어갈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불멸'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지 못한다. 그런 서글픎에 대한 아련한 묘사와 수긍과 이해에 대한 영롱한 이야기. 언젠가 화장품 가게에서 기기묘묘한 짙은 화장과 아가씨 차림으로 나를 놀라게도 서글프게도 했던 그 낯선 할머니를 이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같다. 누구나 그런 모습에서 자유스러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으니까. 그 할머니는 솔로몬의 여인 코라처럼 꽃을 받고 싶었던 거다. 그 어떤 여인도 심지어 나도 죽을 때까지 포기할 수 없는 그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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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22 16: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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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23 08: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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