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녕, 성석제 같은 작가 요즘 진짜 잘 쓰잖아.

 

교양국어 시간. 대학교 1학년. 나는 그 작가를 잘 몰랐고 그래서 그로부터 십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그 둘을 혼동한다. 나는 분명 수많은 강의들을 들었을 테고 수많은 것들을 잊지 않기 위해 필기까지 했을 테지만 유독 그 시간의 이 이야기를 잊지 못한다. 그래서 아쉽게도 그 공간 안에서 그 작가의 이야기나 문체의 향내와 내 청춘이 혼재하는 소중한 추억으로 그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는 학생들에게도 어떤 기호나 평가를 떠나 당당하게 잘 쓰는 작가로 소개될 정도의 그런 인물이었다,로 남아있는 것이다.

 

 

 

소설가가 쓰는 에세이는 막간의 휴식 같은 느낌이 있다. 하지만 윤대녕의 이 에세이는 마지막 장을 덮고 그의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어떤 그녀와의 해피엔딩의 고백을 떠올리며 잘된 장편 소설을 읽은 후와 비슷한 감동의 여운에 가슴이 저릿한 그런 느낌을 받았다. 너무 솔직하고 초연하고 애절한 그의 삶에 대한 고백들, 나도 내가 떠나온 그 공간들이 하나씩 귀환하는 듯한 환상에 내내 행복했고 가슴이 뛰었다. 주저리 주저리 자기 과거의 미화에 함몰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노마드처럼 끊임없이 이동해야 했던 슬픈 유년, 청년기의 사연들에 엄살을 떨지도 않으며 삶의 갈피짬마다 쓰는 자로서 겪어야 했던 에피소드들이 그의 소설의 결처럼 섬세하고 생생하고 추연하게 복기된다.

 

쓰기 위해 자신의 공간이 장소로 고착화되고 저물게 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유랑하는 그의 삶이 참으로 고단해 보이면서 다시 한 번 '작가로 산다는 것'의 무게를 실감했다. 어쩌면 작가란 자신의 삶 자체도 하나의 제물로 바쳐야 검은 활자로 이야기를 받아낼 수 있는 기회를 얻는 참으로 슬픈 직업일런지 모르겠다. 아니, 윤대녕의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그것은 차라리 하나의 고문이자 하나의 운명 같다. 

 

한때 출가를 꿈꿨다는 그가 소개하는 '사원들'은 기억해 두고 언젠가 한번 꼭 방문해 보고 싶다. 이를테면 그가 하나 하나 소개했던 "봄의 선암사, 가을의 내소사, 출가의 욕망을 자극한다는 부여 부석사 무량수전, 사과나무 길을 통과해야만 닿을 수 있다는 영주 부석사, 마룻구멍으로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양양 낙산사 홍련암"...

 

무엇보다 이 이야기의 절정은(그렇다, 이 에세이들은 발단, 전개, 절정, 결말까지 구비한 완벽한 하나의 이야기에 상응한다) 대한극장이 고전을 재상영하던 시기 밤새 함께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고 자신한테 과하다고 느껴 이별을 선고하고 유럽으로 도망치듯 떠났다 헝가리의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밤거리에서 괴로워하며 다시 전화기를 들어 재회를 기약한 여인과의 결말이다. 군데 군데 그를 현실로 내려오게 하는 아내에 대한 간간의 언급은 이 여인과의 에피소드의 솔직함에 아내가 기분나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솔직했던 그의 대담함의 이유가 결말이다. 아내. 바로 중년 부인이 된 샴고양이라고 묘사한 아내가 된 그 비장한 러브스토리의 여주인공이 참으로 궁금하다. 이 해피엔딩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제 삶의 비의를 탐구하기 위해 더이상 인간 관계를 확장하지 않고 도통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방랑벽의 이 사내의 지상에서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현실의 아내가 돌연 존경스럽게 보였다. 그녀는 '윤대녕'이라는 작가를 가능하게 하는 토양의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을까.

 

그가 언급한 숱한 공간들과 나의 공간들은 일치하는 구석이 없었다. 아쉽게도. 그런데 마지막 단락. 마침내 못 만날 듯 못 만날 듯 했던 만남이 이루어졌다. 손만두집. 두 번 정도 가 본 그곳. 아름다웠지만 막상 맛은 심심했던 그곳을 이 작가 덕택에 다시 가보고 싶어졌다. 그의 존재를 스물 언저리에 어렴풋이 알아차리고 이제 어쩌면 마흔으로 가고 있는 나는 쉰 살의 문턱을 넘은 작가가 풀어 낸 자신이 거쳐온 공간들에 대한 사유에 절로 잠기고 말았다. 누구의 인생도 닮아 있는 구석이 있고 만날 대목이 있는 법이니 이러한 유려하고 솔직하고 아름다운 고백들은 절로 아름다운, 때로는 슬픈, 때로는 부끄러운 추억들로 타박타박 걸어들어가게 한다.

 

마흔을 훌쩍 넘기고도 행복이 가능할까. 사는 게 지루하지 않을까. 한자에 약하니 도통 집중이 안 되네. 창밖을 내다본다. 화창한 교정. 나는 청춘을 소진하고 있었다. 늙음으로 가는 길. 그것이 삶임을 그때는 미처 몰랐구나. 이제 곧 나는 마흔의 나를 대면하게 될 것인데. 윤대녕을 이 때에서야 만나게 될 터인데. 그것을 몰랐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로 2014-09-24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윤대녕 작가와 잘못 만났어서 그런지 그 이후로 그분의 책이 나와도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네요,,
블랑카님 글 읽으니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참! 핑크 공주는 여전히 핑크 좋아해요??ㅎㅎㅎ 저희 막내는 많이 변했어요,,,쬐끔 귀여운 구석이 여전히 있기는 하지만~~.ㅋ

blanca 2014-09-26 00:03   좋아요 0 | URL
아롬님, 핑크 공주는 이제 핑크를 좋아했던 자신을 부정하기까지 합니다. ㅋㅋ 귀여운 구석이 점점 사라져 가서 슬퍼요. 아기 때 동영상을 우연히 발견했는데 괜시리 코끝이 찡하더라고요. 내 자신은 시간의 흐름을 잘 실감 못하는데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면 시간이 흘렀구나, 해요.
 

읽을 책이 한 권이라도 없으면 초조하다. 대체로 사서 읽는 편이니 책은 나날이 늘어간다. 결혼하기 전에는 한 단에 스무 권 남짓 들어가는 오 단 정도짜리 책장이 차는 정도였고 그나마 아버지가 조용히 처분하셨고 신혼집에서 서울로 이사 오기 전 또 그 정도 가량의 책을 기증하고 다시 시작했음에도 그리고 두 번 다시 읽지 않을 것 같은 책은 바로바로 중고로 팔고 있음에도 새로운 책은 들어올 자리가 없다. 애초 아이를 위해 구입한 오 단 책장은 천장 부분만 아이 것으로 채워지고 나머지는 또다시 나의 것으로 그것도 앞 뒤로 빼곡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이 정도 되면 다른 가족 구성원에게 심히 눈치가 보인다. 먼지가 앉고 햇빛에 바래 두 번 다시 들춰지지 않은 책들. 책등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 펼쳐도 보며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기증할 대상을 선별해 보기도 하고 때로 너무 낡은 것은 분리수거날 폐지류로 버려지기도 한다. 그래도 끝이 안 보인다. 이제 나도 마흔이 멀지 않았으니 욕망대로 내달릴 수만은 없다. 그리고 활자욕도 아무리 그럴 듯하게 포장해도 또 하나의 사회적으로 좀 덜 비난받는 개인의 욕망이 아닌가, 하는 생각. 결국은 사실은 나도 욕심쟁이였다.

 

 

 

이 책을 읽으며 줄을 긋지 않았다. '장서의 괴로움'을 읽으며 나는 이 책도 처분의 대상이 될 것을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줄 긋고 싶은 대목이 군데군데 나온다. 결정적으로 괴로운 것은 저자 오카자키 다케시의 의견에 끊임없이 동조하게 된다는 것. 그러니 이 책은 좀 더 가지고 있으려 한다.

 

2013년 봄 나는 쉰여섯이 되었다. <중략> 지적 욕구로 허세를 부리는 일은 어지간히 쇠했다. 슬슬 장서를 엄선하고 응축하는 데 마음을 써야할 때가 아닌다.

-p.37

나도 그렇지만 사실 자신이 어떤 책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 지 제대로 파악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같다. 저자도 예외가 아니다. 있는 책도 또 사고 분명 가지고 있는 책인데 찾을 수 없어 도서관에 그 책을 빌리러 가는 지경이다. 헌책방 업자가 직접 출장을 와서 이천 권 가량을 사갔음에도 꿈쩍도 안 하는 서재. 이 정도면 '장서의 괴로움'을 호소할 만하다. 이 책은 이러한 저자가 책을 처분하는 이야기, 소문난 장서가들의 책의 보관, 이동, 처분에 관련된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갈피짬마다 어우러져 지금 여기에서의 관심사가 책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나 흠뻑 빠져 경청할 만한 것들이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자꾸 나의 책장을 돌아보게 된다. 일본은 지리학적 특성상 지진이 빈번하고 목조 가옥이 많아 책의 무게로 집의 바닥이나 천장이 기울거나 무너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 모양이다. 이 지경에 이르러 장서 처분이나 이동을 결심하는 사람들의 사연이 재미있다. 그러나 저자나 저자가 다루는 사람들에게 전자책이나 문서책을 전자화하는 '자취'는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일흔이 훌쩍 넘은 노시인이 자신이 가진 책들을 전자화하여 아이패드로 보관하고 그것으로 장서량을 간소화하는 이야기가 유일하다. 아이튠스에서 <채링크로스 84번지> 영화를 내려받아 본다는 그의 고백이 왠지 뭉클하다. 고서점의 주인과 고객이 주고받는 편지 내용으로 이루어진 영화. 그의 '자취'가 종이책 그 자체에 대한 진한 그리움과 사랑마저 희석시키지는 못했나 보다.

 

대미를 장식하는 '1인 헌책시장'의 묘사가 너무 아름답고 따사로워 접어두고 싶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실 다소 생소한 분위기의 헌책처분 광경이다. 옛날식 민가 갤러리를 빌려 책을 사랑하는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하여 개인의 장서를 처분하는 주인공은 바로 이 책의 저자 자신이다. 사흘 동안 열린 이 축제에 손님이 와 줄까 걱정했던 지은이의 우려는 기우였다. 축제는 성황리에 끝난다. 비록 여기에서 처분한 책은 겨우 자신이 가진 책의 3% 정도라고 이야기했던 주변 사람도 있었지만. 책을 다 팔고 난 수익금으로 뒤풀이 비용을 대는 것을 어떨까, 하는 조언도 따뜻하다. 고등학교 시절 동창과 재회하는 풍경도 정답다. 질투날 정도로 예쁜 날씨들이 소중한 요즘 나도 이런 시장을 열거나 가보고 싶은 꿈을 꾼다.

 

여하튼 책을 사랑하는, 그래서 책 앞에서 속수무책인 사람의 이야기는 언제나 얼마나 들어도 지겹지 않다. 그리고 그러한 책들이 또 나의 책장 한켠을 위무도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는 것또한 사실이다. 책을 처분하라,고 독려하는 이 책이 또 자리를 차지하는 아이러니. 사실 인생이라는 게 다 그런 모순, 아이러니로 채워지는 것도 무시할 수 없기에 나는 오늘도 책장 앞을 서성인다. 무언가 반드시 처분하거나 기증하거나 해서 제발 책장을 깔끔하게 만들고 앞으로 올 또다른 책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로. 볕이 잘 들고 먼지가 앉지 않도록 관리되는 깔끔하고 널찍한 서재. 그리고 바다가 보이는 책상 같은 허무맹랑한 꿈도 좀 꿔보고. ^^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실 2014-09-10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누군가 빌려주고는 생각나지 않아 재구입한 경우가 몇번 있어요. 빌려주고 후회하고의 반복입니다.
먼지 뽀얗게 앉고 빛바랜 책들은 버려야 하는데 엄두가 나지않네요. 책좀 그만 사야겠죠?ㅎ

blanca 2014-09-11 11:21   좋아요 0 | URL
세실님은 그래도 명분이 있잖아요. 사서님이시니까요. 저는 사실 책을 사들이는 명분이 빈약해서요. ㅋㅋ 책을 빌려주고 받는 과정 참 어려운 것도 아닌데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저도 빌려주고 못 받은 책들 몇 권이 기억나기는 해요. 무언가를 '빌려준다'는 것은 '안 돌려받아도 된다'는 전제가 안 되면 속상하게 되는 일인 것 같아요.

페크pek0501 2014-09-11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하면서 2백권 정도 버린 것 같아요. 이삿짐 센터에서 기증할 데가 있다며 수거해 갔어요.
아마 고마원 같은 곳에 주는 것 같아요.
천 권을 넘기지 말자, 하고 결정했는데 잘 될지 모르겠어요.
천 권인 상태에서 구입한 책이 50권이 되면 헌 책 50권을 버리면서 책이 늘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
책이 늘어났다고 느낄 때마다 늘어난 만큼의 수만큼 버리는 거죠. 일단 이렇게 결정했어요.
책을 살 때 꼭 사야 할 것만 사자고, 신중해지자고 결심하지만 책의 유혹은 어찌나 강렬하던지
매번 제가 지고 말아요. 괜히 샀어, 하는 책이 있곤 합니다. ㅋㅋ
저자의 고민이 와닿습니다.

blanca 2014-09-12 11:40   좋아요 0 | URL
저는 제가 몇 권을 가지고 있는 지 파악도 못하고 있어요. 이제 좀 파악해 보려구요. 막연히 한 이백 원 있나 했더니 이미 이백 권은 애저녁에 돌파한 지도 모르고...아, 페크님은 전체 장서량도 파악하고 계시고 오십 권 체제, 그것 괜찮네요. 살짝 따라해 볼까요? 지금도 책 사고 싶은데 계속 참고 있어요. 이 인내가 참 쓰네요^^;;

마태우스 2014-09-16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안읽으려고 제껴놨는데요 블랑카님 리뷰 보니까 꼭 읽어야겠군요. 감사합니다. 아버지가 조용히 처분,이란 대목과 가족들에게 눈치가 보인다는 대목이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도 제 아내는 책을 얼마나 갖고있건 신경쓰지 않는데, 전 행운아네요

blanca 2014-09-17 11:32   좋아요 0 | URL
마태우스님 ㅋㅋ 저희 아버지는 그러시면서 당신의 책을 사서 모아놓으셨더군요. 알라딘에서 제가 책선물을 보내드린 적도 있고요. 이게 아무래도 공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나와 있는 게 다 내 책이다 보니 괜히 제가 찔려서요. ^^ 행운아 맞으시네요.
 

시간이 지날수록 '한계'를 실감한다. 특히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어떤 고난, 고통, 상실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체험하고 진정한 의미의 공감과 위로를 줄 수 있을까,에 대한 어떤 체념적 회의가 든다. 그러니 평생 노력할 일이다. 너무 아프더라도 '인간'이란 그런 존재이니까. 그러니 그것을 위선이나 가식으로 폄하하는 것도 어떤 오만이다. 이룰 수 없다 해서 갈 수 없다 해서 그 '과정'까지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조지 오웰은 <위건부두로 가는 길>에서 보통 사람이 지옥에 있으리라 상상할 만한 게 모두 있는 곳으로 탄광을 이야기했다. 비좁은 막장에서 온몸을 구부려서 쉬지 않고 일곱 시간 반을 석탄을 뜨는 광부들의 처참한 노동환경은 위의 볕 좋은 세상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비극의 현장으로 묘사된다. "우월한 인간들이 계속 우월하기 위하여 광부들이 피땀을 흘려야 한다",는 그의 냉소적인 이야기는 이미 반세기 가량 전 에밀 졸라에 의하여 서사화되었다. 슬프고 처참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대지 위에 피어나는 새싹을 이야기하는 제목 '제르미날'을 고집했던 에밀 졸라의 희망은 조지 오웰의 앞에서 무력하게 스러지고 만 것이다.

 

 

 

 

 

 

 

 

 

 

 

 

 

 

 

 

 

 

 

특이한 코의 배우 제라르 드빠르듀가 분한 동명의 영화로 유명한 작품이다. 에밀 졸라가 '한 가문의 역사'라는 테마 아래 기획한 '루공 마카르 총서'의 <목로주점>과 함께 민중을 전면에 내세운 대표적인 작품으로, 그의 장례식날 광부들이 참석하여 자신들의 초상화와 미래의 아름다운 청사진을 그려준 이 작품을 연호한 인상적인 에피소드로 유명하다. 흥미롭게도 <목로주점>의 여주인공 세탁부 제르베즈의 딸 나나는 <나나>의 주인공으로, 아들 에티엔은 <제르미날>에서 광부들의 파업을 이끄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책임자의 뺨을 때린 죄로 해고당한 청년 에티엔은 몽수탄광에서 광부로 일하게 되면서 성실하고 사람 좋은 마외를 만나게 된다. 그 자신이 도급제의 굴레의 책임자인 그는 탄가루 섞인 기침을 하는 노쇠한 아버지로부터 아직 어린 딸, 아들, 아내까지 모두 막장에 들여보내야 근근이 밥을 먹고 살 수 있는 탄광촌의 전형적으로 빈곤한 가족의 가장이다. 게다가 그들은 제대로 분리되지 않은 초라한 집구조로 남녀 형제들이 알몸을 보여야 하는 혼거생활까지 감내해야 한다. 에밀졸라는 가난의 추상성을 책임없이 흐릿하게 지워버리지 않고 적나라하고 때로는 곤혹스러울 정도로 세밀하고 생생하게 그려낸다. 광부들이 탄광에서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이 짐승처럼 하루 하루 위험한 노동 현장에서 사투를 벌이고도 항상 배고픈 현실에 우리 땅 밑의 그 애써 외면했던 모든 어둡고 슬프고 비극적인 것들이 떠오르는 듯해 눈을 질끔 감아버리고 싶은 환각마저 느꼈다. 이 정도면 이것은 소설적 차원에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고통스러운 삶의 르포의 현장에 와 있는 것이다. 어쩌면 여기에서 에밀 졸라는 조지 오웰의 탄생을 예비한 아버지였는 지도 모른다.  비록 실제 그 노동현장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폐소공포증을 극복하고서도 진실을 길어 올리기 위해 천착했던 그의 심정적 공감 노력은 실제 채굴작업현장에 내려간 조지오웰에 못지 않은 것으로 느껴진다.

 

마침내 에밀 졸라의 말처럼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되기 위한, 광부들의 대규모 파업이 일어난다. 그들 자신의 안위를 위협하는 갱목 보수 작업마저 채굴 작업 때문에 하지 못했던 그들에게 갱목 보수를 빌미로 교묘하게 지급임금을 낮춘 사측의 부당한 처사에 체념은 걸어나가고 분노가 일어선다. 그러나  배를 곯으면서도 자신들의 희망, 청사진을 포기하지 않던 그들은 결국 생존 앞에서 슬프게 투항하고 만다.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아이들이 굶어죽고 무력시위진압에 가족이 죽어나가면서 그들은 자의든 타의든 다시 그 지옥 같은 갱으로 케이지를 타고 내려간다. 이러한 광부들의 투쟁과 슬픈 투항 과정은 백 년이 훌쩍 지나 <빌리 엘리어트>에서도 그려진다. 소년 발레리노의 아버지와 형이 얼굴에 검댕을 묻히고 슬픈 눈빛으로 갱으로 내려가던 장면은 어쩌면 그렇게도 우리에게 끊임없이 돌아오는 소망의 좌절의 현현 같다.

 

급진 무정부주의자 수바린이 고의로 방수벽을 파괴함으로써 갱이 무너져 동료들이 갱내에 갇혀 사투를 벌이고 죽어가는 모습은 너무 참혹하고 생생해서 소름이 끼친다. 그 위에서 벌어지는 구조작업들. 생존하기 위하여 희망과 좌절의 틈새에서 스러져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의 것과 이리도 닮아있는지 다시금 가슴은 저릿하다. 에티엔은 사랑했으나 다른 남자에게 보내야 했던 마외의 딸 카트린을 죽어가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안게 된다.

 

작가와 소설에 대하여 '죽었다'는 표현이 감히 설득력을 띨 때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을 권한다. 힘겹게 오랜 시간 조금씩 읽고 나니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감동으로 다시 에밀 졸라라는 작가를 보게 된다. 언제나 비루하고 던적스러운 현실을 뛰어넘는 인간의 그 고단한 지향의 도정에 드문 드문 자리한 사람들로 인해 다시 희망을 꿈꾸게 된다. 붕괴된 탄광의 마지막이자 유일한 생존자인 에티엔이 실패한 자신의 꿈과 사랑에도 불구하고 4월의 따사로움을 만끽하며 "살아 있다는 건 참으로 기분좋은 일이었다"고 느낀 것은 에밀졸라가 지난한 현실 앞에서 내린 결론이기도 하다. 그는 인간의 가능성과 위대함을 믿었다. 아무리 추락해도 다시 도약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그의 시선은 치열한 탐사와 숙고에서 나온 것이기에 막연하게 보이지 않는다.

 

더위가 물러가고 다시금 파란 하늘.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말갛게 갠 그 얼굴처럼 현실도 그랬으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휴가는 휴가가 아니었다. 마음을 비우고 서울 시내를 다니기로 했다. 아직 돌쟁이 아기를 안고 집근처에서 간송미술전이 열린다고 해서 가족 전부가 함께 갔다. 사실 한달 전에 이 책을 읽었다.

 

 

 

 

 

 

 

 

 

 

 

 

 

 

 

 

어마어마한 재산을 상속받은 청년이 그 돈으로 일제강점기에 흩어져 있던 각종 우리의 문화유산을 되찾는 것은 처음 한 두 건은 일종의 호기, 과시욕으로 곡해될 수도 있겠지만 일생을, 자신이 가진 돈의 거의 전부를, 바친 것은 차원이 다른 것임을 알게 한다. 우리가 미술책에서나 보던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 정선의 그림들, 신윤복의 '미인도' 등이 전형필의 사비를 털어 일본인 수집가, 몰락한 양반 등에게서 되찾아 지킨 것이라는 점은 우리의 문화 유산이 거저 사수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것을 지키려고 되찾아 오려고 사투를 벌였던 그 행위 자체에 깃듯 열정, 노력이 우리가 일본에게서 독립을 되찾고 오늘날까지 우리 고유의 것들을 지켜오는 데에 일조를 담당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독립이 거저 주어진 것으로 곡해하고 우리 민족 고유의 힘과 얼을 폄하하는 발언들을 일삼는 몇몇 사회 지도자층의 발언은 간송 앞에서 어쩐지 코미디 같이 느껴진다. 이 책은 전형필의 이러한 삶을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따라서  문화재를 찾는 과정에서의 힘겨루기, 금전적 대가 등이 이야기의 얼개를 구성해 전형필 개인의 삶, 열정, 소망(사실 이런 것들을 복기하기란 현실적으로 대단히 어렵겠지만) 부분에 대해서는 다소 아쉬운 감이 든다. 여하튼 이 책을 읽고 나니 전형필이 사적으로 만든 박물관이 1년에 두 번 정도만 개방하여 그의 보물들을 보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의 소장 문화재들을 관람할 수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평일인데도 출입구는 붐벼 기다려서 입장했다. 전체적으로 조명이 어둡고 붐벼서 찬찬히 집중해서 감상하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나의 기억력으로는 문화재 하나 하나마다 그것을 구득하는 데에 얽힌 에피소드를 분명 읽었는데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 기염을 토해 어느 하나 제대로 감상해 낼 여력이 없었다. 여덟 살인 큰 애는 다소 지루해하는 표정이었고 둘째는 끙끙대다 잠을 자주어 출구 앞에서 다시 거꾸로 관람하기 시작했다. 출구 근처에는 그가 그렇게나 필생을 통해 구하려 애썼던 '훈민정음해례본' 앞에서 사투리 섞인 해설을 하는 아름다운 큐레이터 주변에 어린이들이 몰려 있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어문학 연구에 조예가 깊던 김태준의 중개로 그의 제자 이용준에게서 마침내 구한 것이었다. 이들이 사회주의 운동에 연루됨으로써 그 구하는 과정에 많은 곡절이 있었지만 마침내 간송은 꿈에도 그리던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함으로써 자신의 박물관의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이것은 한글을 만든 원리와 문자사용에 대한 설명과 용례를 상세하게 밝힌 것으로 집현전 학자들이 1446년에 만든 귀중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우리의 글을 우리의 손으로 만든 과정과 원리를 밝힌 책자는 그 자체로 우리 민족의 자긍심과 독립의지에 대한 하나의 상징 그 자체였다. 우리의 글, 우리의 이름을 자유롭게 쓰지 못했던 시대에 우리의 품에 안긴 그것을 유리벽 앞에 두고 고사리손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큐레이터의 열정적인 설명을 받아적고 있었다. 가슴이 떨렸다. 다가갈 수 없는 그곳을 까치발을 하고 응시하며 오백 년도 더 전에 우리의 글과 소리를 만든 그 감격과 자부심에 가슴떨려하며 학자들이 밤을 지새우며 그것을 만든 과정을 정리하고 용례를 수집, 적어나가는 광경과 그것이 스러지고 남은 흔적에 다가갔다. 그 앞의 나는 나의 순간, 삶은 너무나 작게 느껴졌다.

 

박물관을 가는 것은 내가 여기 지금 끄달리는 문제들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것인지를 깨닫고 온전히 향유할 수 없는 '시간'의 한계 속에서 존재가 가지는 그 얄팍한 무게, 그러나 죽음 앞에서도 남는 것들의 존귀함에 대한 체감을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도저에 산재하는 시간들, 그 시간들 앞에서 헤매는 존재들, 고여 있는 삶들. 아기가 깨버리고 나는 아마 평생이 가도 소유할 수 없을 <미인도> 엽서를 샀다. 내가 마치 그것을 소유하는 것 같은 환각 앞에서 신윤복이 사랑했다는 여인네의 외꺼풀 눈은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큰 아이는 박물관 팜플렛에도 있는 그 그림을 왜 돈을 주고 구태여 사야 하냐고 반문한다. 일견 맞는 말이기도 하다. 어차피 어느 쪽도 나는 온전히 제대로 그 때 그 마음을 전해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맞출 수 없다고 갈 수 없다고 별을 보지 않는 것도 섭섭한 일. 그냥 그렇게 안 되어도 자꾸 올려다 보고 만지려 하고 그런 게 사는 맛이 아닐런지.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14-08-12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 가까운 곳에 간송미술관이 있다는 건 축복이네요~ ^^
저는 언제 여길 가볼까~~~ 기회가 오기를 기다린답니다.
간송은 정말 대단한 분이었어요. 이 책 읽을 때의 감격이 되살아납니다~

2014-08-12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8-12 14: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섬사이 2014-08-14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송미술관, 해마다 봄가을이면 가다가 너무 많은 사람들에 치이는 게 싫어서 발길을 끊은지 꽤 됐어요.
미술관 근처 '수연산방'인가 하는 찻집으로 꾸며진 이태준 고택을 들르거나
최순우 옛집을 들러서 돌아오곤 했어요.
블랑카님 글을 읽으니 그 장소, 그 시간들이 떠오릅니다.
ddp 간송미술전에 다녀올까, 궁리하게 되네요. ^^

blanca 2014-08-14 11:37   좋아요 0 | URL
아, 섬사이님도 그 긴 줄의 한 분이셨군요. 저도 수연산방 가서 차 마신 기억이 나요. 최순우 옛집은 가보지 못했어요. ddp는 시간만 잘 맞추면 좀 한가로이 여유롭게 감상하는 게 가능할 듯 합니다. 그런데 또 원래 있었던 곳에서 보는 기분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듭니다. 저는 박물관을 자주 안 다녀 그러한 건지 전체적인 조명이 어두워서 오히려 좀 아쉽더라고요. 이게 빛 때문에 작품 손상이 될까 그런 건지 아니면 감상 자체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궁금했어요. 아무래도 저는 조금 더 공부도 하고 여러 군데 다니면서 안목도 더 키워야 제대로 감상할 여력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제 '나'는 혼자 북치고 장구 치며 좋아했다 외면했다 정리한 첫사랑 질베르트에서 떠나 할머니와 발베크 해변으로 가게 된다. 유년시절 곁에 있어도 그렇게나 그리워했던 어머니와의 이별을 해치운 것은 이제 화자가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탈피하듯 진정한 의미의 성장의 관문에 있음을 의미한다. 기차 주변에서 카페오레를 팔던 소녀에게서 느낀 호감과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은 이제 이 청년이 해변가에서 만나 사랑에 빠질 소녀들에 대한 전주곡이다.

 

사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다소 장황하고 묘사의 결이 너무 촘촘하고 섬세해 가끔씩 의도치 않게 발걸음이 멈추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놓지 못하는 것은 그 정묘한 묘사의 결마다 우리는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떠나 보냈던 수많은 깨달음과 회한을 언어의 망에 포획해 다시 눈앞에 놓아주는 그 기가 막히는 순간들 때문인 것같다. 화자는 이미 아마도 나이가 꽤 들어버린, 그래서 생과 삶이 가지는 비의와 그 체념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복기하는 이다. 따라서 이 아름다운 바닷가의 눈부신 젊은이도 그때의 바로 그 어리석고 무모하기만 한 시선은 아니다. 그 순간이 찰나에 불과하고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지를 이미 아는 늙어버린 지혜의 시선은 젊음의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그는 이러한 망각과 체념들을 죽음에 비유한다. 그리고 그 죽음이 떨어나간 자리에 끊임없이 증식하는 새로운 자아가 삶을 견디게 한다. 그때의 꿈, 소녀들, 소년들, 사랑들은 사라져도 우리는 여전히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이유다.

 

이 작품 전반에는 귀족 세계와 화자가 속해 있는 부르조아 세계와의 그 심연에 대한 고찰이 지속된다. 발베크 해변에서 할머니의 지인 빌파리지 부인을 만나 나누게 되는 교분은 그의 추억으로 남는다.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자신의 신분에 대한 의식과 표현 들은 그녀의 조카의 아들 생루와 친구가 됨으로써 '나'의 관찰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핵심은 그러한 귀족사회에 대한 관찰, 회의, 감상이 아니다. 마침내 화자가 만나게 되는 소녀들. 그 찰나의 은유들에 대한 경탄이다. '괴물과 신들에 둘러싸인 이 나이는 평온함을 알지 못한다. 이런 시절에 저질렀던 행동 중 나중에 지우고 싶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화자의 고백은 그만의 것이 아닐 테다. 이 소녀들의 모습은 지금의 십대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기성세대들 앞에서 튀어 오르고 반항하고 순간의 욕구들에 압도당하는 에너제틱한 모습은 모든 청춘은 화자가 사실 자신이 좋아하는 소녀와 그녀의 친구들을 잘 구별하지 못했던 것처럼 하나의 일반화된 군집일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완성되지 않고 아직 두드러지지 않고 아직 고정되지 않은 그 유연하고 아름답고 순수하고 어리석은 시간들에 대한 묘사와 찬탄은 더없이 아름답다. 그러니 화자의 사랑이 사랑하는 이 그 자체보다 자기 자신이 사랑에 더 많이 기여한다,고 표현한 대목은 참으로 적절하다. 첫사랑은 그 대상보다 그 첫사랑에 빠져 있던 나 자신에 대한 그리움으로 더 아련하다. 화가 엘스티르가 젊은 시절에 대하여 그 시절이 가지는 불가피한 약점과 고충들을 지혜로 가기 위한 하나의 여정으로 묘사한 대목은 화자가 성장하는 과정에 대한 하나의 주석 같다.

 

얼마전까지 질베르트에게서 오지 않는 편지로 전전긍긍했던 '나'는 이 해변가에서 만난 소녀들 중 하나인 알베르틴에 또 환상을 품게 된다. 마침내 그녀에게서 마음을 얻었다 생각하고 키스를 시도하는 찰나에 대해 죽음이 영원히 불가능해 보이고 삶이 내 안에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청춘의 환희에 가졌던 감상을 그대로 채집한 듯 생생하다.  그러나 역시 이 서투르고 자의적인 사랑의 끝도 여기에서는 그리 아름답지 않다.

 

'나'의 늙은 하녀 프랑수아즈가 커튼을 당기면서 열어젖히는 여름날을 수천 년 지난 화려한 미라로 비유하듯 그의 청춘에 대한 이 절절하고 아름다운 환기는 그것들이 단지 죽은 기억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서 살아 숨쉬는 실재임을 암시한다. 이제는 제대로 정확하게 기억해 낼 수 없는 나의 젊은 나날들도 함께 막을 내리는 듯한 아쉬움을 남기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