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는 휴가가 아니었다. 마음을 비우고 서울 시내를 다니기로 했다. 아직 돌쟁이 아기를 안고 집근처에서 간송미술전이 열린다고 해서 가족 전부가 함께 갔다. 사실 한달 전에 이 책을 읽었다.

 

 

 

 

 

 

 

 

 

 

 

 

 

 

 

 

어마어마한 재산을 상속받은 청년이 그 돈으로 일제강점기에 흩어져 있던 각종 우리의 문화유산을 되찾는 것은 처음 한 두 건은 일종의 호기, 과시욕으로 곡해될 수도 있겠지만 일생을, 자신이 가진 돈의 거의 전부를, 바친 것은 차원이 다른 것임을 알게 한다. 우리가 미술책에서나 보던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 정선의 그림들, 신윤복의 '미인도' 등이 전형필의 사비를 털어 일본인 수집가, 몰락한 양반 등에게서 되찾아 지킨 것이라는 점은 우리의 문화 유산이 거저 사수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것을 지키려고 되찾아 오려고 사투를 벌였던 그 행위 자체에 깃듯 열정, 노력이 우리가 일본에게서 독립을 되찾고 오늘날까지 우리 고유의 것들을 지켜오는 데에 일조를 담당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독립이 거저 주어진 것으로 곡해하고 우리 민족 고유의 힘과 얼을 폄하하는 발언들을 일삼는 몇몇 사회 지도자층의 발언은 간송 앞에서 어쩐지 코미디 같이 느껴진다. 이 책은 전형필의 이러한 삶을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따라서  문화재를 찾는 과정에서의 힘겨루기, 금전적 대가 등이 이야기의 얼개를 구성해 전형필 개인의 삶, 열정, 소망(사실 이런 것들을 복기하기란 현실적으로 대단히 어렵겠지만) 부분에 대해서는 다소 아쉬운 감이 든다. 여하튼 이 책을 읽고 나니 전형필이 사적으로 만든 박물관이 1년에 두 번 정도만 개방하여 그의 보물들을 보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의 소장 문화재들을 관람할 수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평일인데도 출입구는 붐벼 기다려서 입장했다. 전체적으로 조명이 어둡고 붐벼서 찬찬히 집중해서 감상하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나의 기억력으로는 문화재 하나 하나마다 그것을 구득하는 데에 얽힌 에피소드를 분명 읽었는데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 기염을 토해 어느 하나 제대로 감상해 낼 여력이 없었다. 여덟 살인 큰 애는 다소 지루해하는 표정이었고 둘째는 끙끙대다 잠을 자주어 출구 앞에서 다시 거꾸로 관람하기 시작했다. 출구 근처에는 그가 그렇게나 필생을 통해 구하려 애썼던 '훈민정음해례본' 앞에서 사투리 섞인 해설을 하는 아름다운 큐레이터 주변에 어린이들이 몰려 있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어문학 연구에 조예가 깊던 김태준의 중개로 그의 제자 이용준에게서 마침내 구한 것이었다. 이들이 사회주의 운동에 연루됨으로써 그 구하는 과정에 많은 곡절이 있었지만 마침내 간송은 꿈에도 그리던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함으로써 자신의 박물관의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이것은 한글을 만든 원리와 문자사용에 대한 설명과 용례를 상세하게 밝힌 것으로 집현전 학자들이 1446년에 만든 귀중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우리의 글을 우리의 손으로 만든 과정과 원리를 밝힌 책자는 그 자체로 우리 민족의 자긍심과 독립의지에 대한 하나의 상징 그 자체였다. 우리의 글, 우리의 이름을 자유롭게 쓰지 못했던 시대에 우리의 품에 안긴 그것을 유리벽 앞에 두고 고사리손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큐레이터의 열정적인 설명을 받아적고 있었다. 가슴이 떨렸다. 다가갈 수 없는 그곳을 까치발을 하고 응시하며 오백 년도 더 전에 우리의 글과 소리를 만든 그 감격과 자부심에 가슴떨려하며 학자들이 밤을 지새우며 그것을 만든 과정을 정리하고 용례를 수집, 적어나가는 광경과 그것이 스러지고 남은 흔적에 다가갔다. 그 앞의 나는 나의 순간, 삶은 너무나 작게 느껴졌다.

 

박물관을 가는 것은 내가 여기 지금 끄달리는 문제들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것인지를 깨닫고 온전히 향유할 수 없는 '시간'의 한계 속에서 존재가 가지는 그 얄팍한 무게, 그러나 죽음 앞에서도 남는 것들의 존귀함에 대한 체감을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도저에 산재하는 시간들, 그 시간들 앞에서 헤매는 존재들, 고여 있는 삶들. 아기가 깨버리고 나는 아마 평생이 가도 소유할 수 없을 <미인도> 엽서를 샀다. 내가 마치 그것을 소유하는 것 같은 환각 앞에서 신윤복이 사랑했다는 여인네의 외꺼풀 눈은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큰 아이는 박물관 팜플렛에도 있는 그 그림을 왜 돈을 주고 구태여 사야 하냐고 반문한다. 일견 맞는 말이기도 하다. 어차피 어느 쪽도 나는 온전히 제대로 그 때 그 마음을 전해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맞출 수 없다고 갈 수 없다고 별을 보지 않는 것도 섭섭한 일. 그냥 그렇게 안 되어도 자꾸 올려다 보고 만지려 하고 그런 게 사는 맛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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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4-08-12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 가까운 곳에 간송미술관이 있다는 건 축복이네요~ ^^
저는 언제 여길 가볼까~~~ 기회가 오기를 기다린답니다.
간송은 정말 대단한 분이었어요. 이 책 읽을 때의 감격이 되살아납니다~

2014-08-12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8-12 14: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섬사이 2014-08-14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송미술관, 해마다 봄가을이면 가다가 너무 많은 사람들에 치이는 게 싫어서 발길을 끊은지 꽤 됐어요.
미술관 근처 '수연산방'인가 하는 찻집으로 꾸며진 이태준 고택을 들르거나
최순우 옛집을 들러서 돌아오곤 했어요.
블랑카님 글을 읽으니 그 장소, 그 시간들이 떠오릅니다.
ddp 간송미술전에 다녀올까, 궁리하게 되네요. ^^

blanca 2014-08-14 11:37   좋아요 0 | URL
아, 섬사이님도 그 긴 줄의 한 분이셨군요. 저도 수연산방 가서 차 마신 기억이 나요. 최순우 옛집은 가보지 못했어요. ddp는 시간만 잘 맞추면 좀 한가로이 여유롭게 감상하는 게 가능할 듯 합니다. 그런데 또 원래 있었던 곳에서 보는 기분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듭니다. 저는 박물관을 자주 안 다녀 그러한 건지 전체적인 조명이 어두워서 오히려 좀 아쉽더라고요. 이게 빛 때문에 작품 손상이 될까 그런 건지 아니면 감상 자체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궁금했어요. 아무래도 저는 조금 더 공부도 하고 여러 군데 다니면서 안목도 더 키워야 제대로 감상할 여력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