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제 '나'는 혼자 북치고 장구 치며 좋아했다 외면했다 정리한 첫사랑 질베르트에서 떠나 할머니와 발베크 해변으로 가게 된다. 유년시절 곁에 있어도 그렇게나 그리워했던 어머니와의 이별을 해치운 것은 이제 화자가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탈피하듯 진정한 의미의 성장의 관문에 있음을 의미한다. 기차 주변에서 카페오레를 팔던 소녀에게서 느낀 호감과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은 이제 이 청년이 해변가에서 만나 사랑에 빠질 소녀들에 대한 전주곡이다.

 

사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다소 장황하고 묘사의 결이 너무 촘촘하고 섬세해 가끔씩 의도치 않게 발걸음이 멈추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놓지 못하는 것은 그 정묘한 묘사의 결마다 우리는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떠나 보냈던 수많은 깨달음과 회한을 언어의 망에 포획해 다시 눈앞에 놓아주는 그 기가 막히는 순간들 때문인 것같다. 화자는 이미 아마도 나이가 꽤 들어버린, 그래서 생과 삶이 가지는 비의와 그 체념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복기하는 이다. 따라서 이 아름다운 바닷가의 눈부신 젊은이도 그때의 바로 그 어리석고 무모하기만 한 시선은 아니다. 그 순간이 찰나에 불과하고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지를 이미 아는 늙어버린 지혜의 시선은 젊음의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그는 이러한 망각과 체념들을 죽음에 비유한다. 그리고 그 죽음이 떨어나간 자리에 끊임없이 증식하는 새로운 자아가 삶을 견디게 한다. 그때의 꿈, 소녀들, 소년들, 사랑들은 사라져도 우리는 여전히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이유다.

 

이 작품 전반에는 귀족 세계와 화자가 속해 있는 부르조아 세계와의 그 심연에 대한 고찰이 지속된다. 발베크 해변에서 할머니의 지인 빌파리지 부인을 만나 나누게 되는 교분은 그의 추억으로 남는다.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자신의 신분에 대한 의식과 표현 들은 그녀의 조카의 아들 생루와 친구가 됨으로써 '나'의 관찰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핵심은 그러한 귀족사회에 대한 관찰, 회의, 감상이 아니다. 마침내 화자가 만나게 되는 소녀들. 그 찰나의 은유들에 대한 경탄이다. '괴물과 신들에 둘러싸인 이 나이는 평온함을 알지 못한다. 이런 시절에 저질렀던 행동 중 나중에 지우고 싶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화자의 고백은 그만의 것이 아닐 테다. 이 소녀들의 모습은 지금의 십대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기성세대들 앞에서 튀어 오르고 반항하고 순간의 욕구들에 압도당하는 에너제틱한 모습은 모든 청춘은 화자가 사실 자신이 좋아하는 소녀와 그녀의 친구들을 잘 구별하지 못했던 것처럼 하나의 일반화된 군집일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완성되지 않고 아직 두드러지지 않고 아직 고정되지 않은 그 유연하고 아름답고 순수하고 어리석은 시간들에 대한 묘사와 찬탄은 더없이 아름답다. 그러니 화자의 사랑이 사랑하는 이 그 자체보다 자기 자신이 사랑에 더 많이 기여한다,고 표현한 대목은 참으로 적절하다. 첫사랑은 그 대상보다 그 첫사랑에 빠져 있던 나 자신에 대한 그리움으로 더 아련하다. 화가 엘스티르가 젊은 시절에 대하여 그 시절이 가지는 불가피한 약점과 고충들을 지혜로 가기 위한 하나의 여정으로 묘사한 대목은 화자가 성장하는 과정에 대한 하나의 주석 같다.

 

얼마전까지 질베르트에게서 오지 않는 편지로 전전긍긍했던 '나'는 이 해변가에서 만난 소녀들 중 하나인 알베르틴에 또 환상을 품게 된다. 마침내 그녀에게서 마음을 얻었다 생각하고 키스를 시도하는 찰나에 대해 죽음이 영원히 불가능해 보이고 삶이 내 안에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청춘의 환희에 가졌던 감상을 그대로 채집한 듯 생생하다.  그러나 역시 이 서투르고 자의적인 사랑의 끝도 여기에서는 그리 아름답지 않다.

 

'나'의 늙은 하녀 프랑수아즈가 커튼을 당기면서 열어젖히는 여름날을 수천 년 지난 화려한 미라로 비유하듯 그의 청춘에 대한 이 절절하고 아름다운 환기는 그것들이 단지 죽은 기억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서 살아 숨쉬는 실재임을 암시한다. 이제는 제대로 정확하게 기억해 낼 수 없는 나의 젊은 나날들도 함께 막을 내리는 듯한 아쉬움을 남기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