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날수록 '한계'를 실감한다. 특히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어떤 고난, 고통, 상실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체험하고 진정한 의미의 공감과 위로를 줄 수 있을까,에 대한 어떤 체념적 회의가 든다. 그러니 평생 노력할 일이다. 너무 아프더라도 '인간'이란 그런 존재이니까. 그러니 그것을 위선이나 가식으로 폄하하는 것도 어떤 오만이다. 이룰 수 없다 해서 갈 수 없다 해서 그 '과정'까지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조지 오웰은 <위건부두로 가는 길>에서 보통 사람이 지옥에 있으리라 상상할 만한 게 모두 있는 곳으로 탄광을 이야기했다. 비좁은 막장에서 온몸을 구부려서 쉬지 않고 일곱 시간 반을 석탄을 뜨는 광부들의 처참한 노동환경은 위의 볕 좋은 세상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비극의 현장으로 묘사된다. "우월한 인간들이 계속 우월하기 위하여 광부들이 피땀을 흘려야 한다",는 그의 냉소적인 이야기는 이미 반세기 가량 전 에밀 졸라에 의하여 서사화되었다. 슬프고 처참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대지 위에 피어나는 새싹을 이야기하는 제목 '제르미날'을 고집했던 에밀 졸라의 희망은 조지 오웰의 앞에서 무력하게 스러지고 만 것이다.

 

 

 

 

 

 

 

 

 

 

 

 

 

 

 

 

 

 

 

특이한 코의 배우 제라르 드빠르듀가 분한 동명의 영화로 유명한 작품이다. 에밀 졸라가 '한 가문의 역사'라는 테마 아래 기획한 '루공 마카르 총서'의 <목로주점>과 함께 민중을 전면에 내세운 대표적인 작품으로, 그의 장례식날 광부들이 참석하여 자신들의 초상화와 미래의 아름다운 청사진을 그려준 이 작품을 연호한 인상적인 에피소드로 유명하다. 흥미롭게도 <목로주점>의 여주인공 세탁부 제르베즈의 딸 나나는 <나나>의 주인공으로, 아들 에티엔은 <제르미날>에서 광부들의 파업을 이끄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책임자의 뺨을 때린 죄로 해고당한 청년 에티엔은 몽수탄광에서 광부로 일하게 되면서 성실하고 사람 좋은 마외를 만나게 된다. 그 자신이 도급제의 굴레의 책임자인 그는 탄가루 섞인 기침을 하는 노쇠한 아버지로부터 아직 어린 딸, 아들, 아내까지 모두 막장에 들여보내야 근근이 밥을 먹고 살 수 있는 탄광촌의 전형적으로 빈곤한 가족의 가장이다. 게다가 그들은 제대로 분리되지 않은 초라한 집구조로 남녀 형제들이 알몸을 보여야 하는 혼거생활까지 감내해야 한다. 에밀졸라는 가난의 추상성을 책임없이 흐릿하게 지워버리지 않고 적나라하고 때로는 곤혹스러울 정도로 세밀하고 생생하게 그려낸다. 광부들이 탄광에서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이 짐승처럼 하루 하루 위험한 노동 현장에서 사투를 벌이고도 항상 배고픈 현실에 우리 땅 밑의 그 애써 외면했던 모든 어둡고 슬프고 비극적인 것들이 떠오르는 듯해 눈을 질끔 감아버리고 싶은 환각마저 느꼈다. 이 정도면 이것은 소설적 차원에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고통스러운 삶의 르포의 현장에 와 있는 것이다. 어쩌면 여기에서 에밀 졸라는 조지 오웰의 탄생을 예비한 아버지였는 지도 모른다.  비록 실제 그 노동현장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폐소공포증을 극복하고서도 진실을 길어 올리기 위해 천착했던 그의 심정적 공감 노력은 실제 채굴작업현장에 내려간 조지오웰에 못지 않은 것으로 느껴진다.

 

마침내 에밀 졸라의 말처럼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되기 위한, 광부들의 대규모 파업이 일어난다. 그들 자신의 안위를 위협하는 갱목 보수 작업마저 채굴 작업 때문에 하지 못했던 그들에게 갱목 보수를 빌미로 교묘하게 지급임금을 낮춘 사측의 부당한 처사에 체념은 걸어나가고 분노가 일어선다. 그러나  배를 곯으면서도 자신들의 희망, 청사진을 포기하지 않던 그들은 결국 생존 앞에서 슬프게 투항하고 만다.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아이들이 굶어죽고 무력시위진압에 가족이 죽어나가면서 그들은 자의든 타의든 다시 그 지옥 같은 갱으로 케이지를 타고 내려간다. 이러한 광부들의 투쟁과 슬픈 투항 과정은 백 년이 훌쩍 지나 <빌리 엘리어트>에서도 그려진다. 소년 발레리노의 아버지와 형이 얼굴에 검댕을 묻히고 슬픈 눈빛으로 갱으로 내려가던 장면은 어쩌면 그렇게도 우리에게 끊임없이 돌아오는 소망의 좌절의 현현 같다.

 

급진 무정부주의자 수바린이 고의로 방수벽을 파괴함으로써 갱이 무너져 동료들이 갱내에 갇혀 사투를 벌이고 죽어가는 모습은 너무 참혹하고 생생해서 소름이 끼친다. 그 위에서 벌어지는 구조작업들. 생존하기 위하여 희망과 좌절의 틈새에서 스러져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의 것과 이리도 닮아있는지 다시금 가슴은 저릿하다. 에티엔은 사랑했으나 다른 남자에게 보내야 했던 마외의 딸 카트린을 죽어가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안게 된다.

 

작가와 소설에 대하여 '죽었다'는 표현이 감히 설득력을 띨 때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을 권한다. 힘겹게 오랜 시간 조금씩 읽고 나니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감동으로 다시 에밀 졸라라는 작가를 보게 된다. 언제나 비루하고 던적스러운 현실을 뛰어넘는 인간의 그 고단한 지향의 도정에 드문 드문 자리한 사람들로 인해 다시 희망을 꿈꾸게 된다. 붕괴된 탄광의 마지막이자 유일한 생존자인 에티엔이 실패한 자신의 꿈과 사랑에도 불구하고 4월의 따사로움을 만끽하며 "살아 있다는 건 참으로 기분좋은 일이었다"고 느낀 것은 에밀졸라가 지난한 현실 앞에서 내린 결론이기도 하다. 그는 인간의 가능성과 위대함을 믿었다. 아무리 추락해도 다시 도약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그의 시선은 치열한 탐사와 숙고에서 나온 것이기에 막연하게 보이지 않는다.

 

더위가 물러가고 다시금 파란 하늘.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말갛게 갠 그 얼굴처럼 현실도 그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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