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속에서 나는 나를 복기한다. 때로 다시 대학생이고 가끔은 신입사원으로 돌아간다. 꿈 속의 나는 이게 진짜가 아니라고 의식한다. 나는 나를 나의 과거의 시간을 빌린다. 꿈이 아니어도 종종 나의 과거는 나의 현재를 비집고 들어온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그건 왜 그렇게밖에 결론날 수 없었을까? 궁극적으로 그건 나에게 어떤 의미를 남겼는가? 혹은 남기게 되는 걸까? 내가 그 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여기의 나는 다른 곳에 가 있었을까?
답은 언제나 모호하다. 혼란스럽다. 좋았던 일들도 부정적인 경험도 순차적으로 일어나 여기에 나를 데려다 놓았기에 어떤 다른 가정은 결국 가뭇없이 사라져 버리곤 한다. 상실의 기억을 전복시켜도 여기 지금의 더 나은 나를 확신할 수 없다. 시간과 삶의 불가항력은 생각보다 더 가혹하고 더 강렬하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내 삶 자체가 이야기될 수 없다. 안타깝지만.
이런 생각들을 언어화할 수 없었다. 지나가는 사고의 편린은 언제나처럼 빠르고 불명확하고 소통 불가능한 지대를 스치고 갈 뿐이라 대화의 소재로 적합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갑자기 옆 사람에게 그 때 우리가 안 만났다면 지금 더 행복했을까요? 이럴 수는 없으니까.
이런 이야기들을 진지하게 질문한 아름다운 단편을 늦게 만났다. 정묘하고 치밀하고 아름다워서 놀랐다. 이런 게 SF 소설이라면 이런 소설을 미처 읽지 않은 나를 어리석었다, 고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영화 <콘택트>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는 보지 않았다. 그것의 원작이 된 이야기는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속에 실린 동명의 중편이다.
" 아버지가 지금 내게 어떤 질문을 하려고 해. "로 시작하는 이야기. "나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알고 있단다."고 상기시키는 이야기. 화자는 이미 잃게 될 것을 아는 딸에게 그럼에도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그 딸을 가질 것을 결심하는 이야기를 한다. 현재의 '나'는 외계 생명체의 언어를 해독하고 소통하는 작업에 참가하며 그들의 새로운 언어과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있는 세계관을 인간들의 순차적이고 인과론적인 세계관과 접목하는 지점으로 나아간다. 그들에게 과거-현재-미래의 순차성은 의미가 없다. 모든 일련의 사건들은 동시적인 것으로 한데 어우러져 떠오른다. '나'는 이러한 이질적이고 혁명적인 언어와 접촉하며 이미 결론을 알고 있는 이야기와 자유 의지의 모순을 깨닫는다. 이미 내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다면. 그럼에도 그 선택은 또 가능한가. 그렇다면 나는 다른 길을 걷고 다른 삶의 경로를 갈 것인가.
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잃을 것을 알고도 엄마는 다시 그 아이를 가질 것을 결심한다. 이렇게 될 줄 안다는 것은 이 선택을 하지 않을 개연성을 함축한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그 길은 내가 그럼에도 또 걷게 될 삶의 경로다.
내면으로 향한 수많은 질문과 혼란을 테드 창은 상상의 한계를 넘어 형상화한다. 그것이 물화되어 나올 결론들이 깨끗하게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질문을 망설이지 않는다. 언어를 통해 그것의 이야기를 통해 한 단계 인식의 지평을 넓히려는 작가의 시도는 놀라울 정도로 도발적인데 한켠 슬프다. 천상을 향해 올라가지만 다시 지상으로 내동댕이쳐지는 인간의 이야기<바빌론의 탑>의 분위기가 내도록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계를 인식하고 한계를 깨려 하는 이야기는 그래서 설득력이 있지만 어쩐지 좀 서글프다.
다시 꿈 이야기. 나는 어린이가 되지는 않는다. 언제나 지금보다 조금 더 젊을 뿐이다. 다른 선택을 하는 이야기는 없다. 언제나 내가 가던 곳, 만나던 사람들이 꿈 속에 있다. 성큼성큼 나는 다시 그 시간을 걷고 여기 이 시간으로 아침마다 다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