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운 책을 별로 안 좋아하는 편이라 처음 이 책은 사실 분량만 보고 지레 피했다. 우연히 학교에서 만난 대만인 엄마가 나보고 한국인이냐며 이 책을 읽어보았냐고 하며 다가워서 제목만 안다고 하니 갑자기 일본과 우리나라의 역사적 상황에 대하여 진지하게 질문을 시작해서 당황스러웠다. 근현대사에 대하여 좀더 찬찬히 공부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평소에 생각을 정리해 둬야 제대로 적절하게 의견을 얘기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 대만은 중국과 얽힌 민감한 지정학적 사안이 있으니 어쩌면 더 우리나라의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공감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 일로 <파친코>를 드디어 읽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야기의 흐름상 집중해서 한번에 쭈욱 읽어내려가면 좋으련만 그러지는 못하고 매일 조금씩 가슴 아파하며 읽고 있다. 일제 시대의 격랑에 휩쓸리는 개인의 삶. 자신의 신념과 이상을 던적스러운 현실과 전적으로 타협하지 않으면서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삶을 이어나가는 게 얼마나 어렵고 괴로운 것인지가 잘 형상화되어 있다. 별 것 아닌 일로 일본에서 감옥에 끌려가 고초를 겪다 결국 온 몸이 상처로 뒤덮여 죽기 직전에야 집으로 기다시피 돌아와 가슴으로 품은 어린 아들을 만나는 이삭의 모습에 가슴이 너무 아프고 힘들어 잠시 책을 덮었다. 나는 지금 여기 있지만 저기 거기에 있었을 수 있다. 어떤 상황이 윤리적 가치와 내 생을 교환가치로 저울질하며 고통스러운 선택을 강요한다면 나는 어떻게 그 상황을 이겨나갈 수 있을까? 두렵고 아득하다. 한편 그럼에도 결코 타협하지 않은 가치로 지켜낸 나라에서 나는 오늘 밥을 먹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라 생각하니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그 분들의 용기와 희생에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엄혹한 시대를 통과해서 만든 역사의 그 엄중한 무게는 상기하지 않으면 자꾸만 잊혀지고 가벼워져 버린다.
그런데 또 하필 하루키의 책을 동시에 읽고 있다. 그가 어떤 정치적 노선 표방이나 언사에 신중한 모습이 의미심장하다.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에 염증 반응을 보이는 것도. 특히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의 성실함과 조언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던지는 그의 무심하고 간결한 문장과는 다르게 심오하고 여운이 길다. 더 천천히 곱씹으며 읽어야 겠다. 기본적으로 너무 많은 의미나 과도한 그럴듯함에서 멀어지려는 그의 태도가 오히려 더 신뢰가 간다고나 할까. 그는 과거에 일본의 주변국가에 대한 가해에 관련한 역사 청산에 대한 무책임함을 비판하고 성토한 적이 있다.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로는 용기 있는 발언이라고 한다. 안 그래도 자기를 많은 사람이 싫어한다고 생각한다,는 발언이 초지일관이라 살짝 귀엽기까지... 소설적 자아와 사적 자아의 낙차가 큰 사람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일인칭은 점점 안 쓰게 된다는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소설 속 삼십 대의 '나'와 육십 대의 그의 괴리를 담백하게 인정해 버린다.
뜨겁다. 그런데 이 뜨거움이 가는 것도 애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