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모어 걸즈>는 십대에 미혼모가 된 엄마 로렐라이가 딸 로리와 작은 마을에서 이웃사람들과 함께 좌충우돌 살아나가는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가족 드라마다. 십대의 로리에게는 딘이라는 멋진 남자친구가 있는데 이 남자 친구와 나누는 대화의 상당량이 고전 문학에 할애되어 있어 흥미롭다. 로리는 책을 열정적으로 좋아하고 자신이 읽어본 책 중 좋았던 것은 딘에게 강력하게 읽기를 권유한다. 딘은 버스 정류장에서 여자 친구 로리를 기다리며 로리가 추천해 준 책을 읽곤 한다.
"나 우울해." 딘이 로리를 만나며 한 이야기는 안나 카레니나가 선로에 몸을 던진 대목을 읽은 직후였다. 딘은 아직 <안나 카레니나>를 다 읽지 않았지만 톨스토이의 이 만만치 않은 이야기가 자기가 완독하기에 역부족이라고 느끼며 로리에게 불평한다. 자기의 수준을 뛰어넘는다고. 로리는 그런 딘을 재치 있게 격려한다. 톨스토이의 이 이야기는 대단한 천재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소녀의 이야기가 촌절살인이다. 딘에게 끝까지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면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는 모습이 참 사랑스럽다.
로리가 <안나 카레니나>를 남자친구에게 권유하던 그 나이에 나는 로리의 한국인 친구 레인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가끔은 한국인 가정의 과열된 교육열이나 한국인 엄마의 융통성 없는 경직된 사고가 때로 지나치게 전형적으로 과장되게 그려진 감이 있지만, 이 지극히 미국적인 드라마에서 로리의 친구역으로 묘사한 한국 소녀의 모습은 생생하고 현실적인 부분이 있다. 지근거리에서 한국인 가정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형상화해낼 수 없는 부분들이 실제 작가의 학창 시절 한국인 단짝 친구의 모습을 그려낸 거라는 이야기에 수긍이 간다. 여하튼 <안나 카레니나>는 딘과 로리의 말처럼 지나치게 길고 진지하고 거창한 것처럼 인식되지만 그 누구에게라도 조금만 참고 계속해 보라고 응원하고 싶어질 정도로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의 모든 삶의 총체적 경험과 깨달음과 그럼에도 끝내야 남고 마는 생의 의미에 대한 의구심, 그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배우고 마침내 확립한 위대한 작가의 생의 말년의 철학적 사고가 톨스토이의 정점에 이른 창작력과 문장력으로 형상화된 작품이라 생각한다. 끝까지 러시아인들의 그 이름이 그 이름 같고, 그리고 종종 축약으로 갑자기 변형되는 이름으로 인해 등장 인물들이 심히 헷갈리지만 끝까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로리의 말처럼 절대 후회하지 않을 독서의 여정이 될 거라 장담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은 정작 안나가 아니라는 사실은 스포일러 축에도 끼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선로에 몸을 던져 생을 을 끝내고도 딘이 아직 <안나 카레니나>를 한참 더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격정적인 사랑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던져야 했던 안나의 이야기에서 마침표를 찍지 않은 톨스토이의 저의는 그 자신이 많이 투영된 레빈에게서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의 제목을 <안나 카레니나>로 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결론도 이야기 자체로 설득력을 얻는다. 그는 완성하거나 절대적인 것에 기대어 삶을 서술하려는 만용을 접었다. 수많은 물음표들과 의문, 불확실성, 절망, 실패에서 나아가는 생을 담은 톨스토이의 이야기는 그래서 인내를 가지고 들을 가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