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는 구체적이고 자잘한 고충들을 매일 매일 해결해 나가는 게 쉽지 않았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혹은 이렇게 하는 데에 확신이 들지 않아 혼라스러웠다. 고작 마흔으로 가는 시점에서 그런 모든 것들에 익숙해졌다고 얘기하면 자만이 될 터이고 다만 적어도 그런 것들은 조금 실수해도 다시 해도 괜찮다, 정도의 심정이다. 다만 이제 내가 어쩌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덮쳐 올 때 내가 그것들을 능동적으로 주체적으로 해결해 나간다는 것은 하나의 헛된 바람이자 오만이 될 수 있다는 또다른 두려움을 배워가는 중이다. 삶은 가혹한 학교다. 냉정하고 가차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난 이미 어쩌지 못하고 세상에 나와버렸다. 그 힘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나를 소멸로 데려가는 힘도 내 안에 내재되어 있겠지만 그것 또한 이미 나의 것이 아니다. 나도 늙고 주변 사람들도 늙고 때로 절망하고 넘어지고 병들고 그렇게 큰 흐름 속에서 그 한계 속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 한계, 그 종점을 항상 의식하면 어느 정도 슬프지 않고는 현재를 딛고 설 수가 없다. 마냥 즐겁고 마냥 꿈꿀 수 있던 시간들은 이미 내 뒤에서 삭아버리고 있다. 난 이미 중년이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 현악 4중주단. 제1바이올린, 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의 선율이 서로를 타고 넘는 그 흐름, 때로는 합쳐지고 어긋나고 멀어지고 다시 만나는 그 순간들의 명멸이 베토벤에 의해 만날 때 인생은 반드시 다 살고 나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이 불현듯 온다. 베토벤은 이미 다 알아버린 것같다. 인생의 근저에 깔린 그 허무함, 헛헛함, 슬픔, 그런데도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 연약한 시도들. 사람들, 만남, 사랑, 소통, 다툼, 이별.
25년 간 멤버들의 아버지뻘 나이의 첼리스트 피터가 이끈 4중주단은 그의 파킨슨병 진단으로 위기를 맞는다. 피터는 파킨슨병이 가져오는 그 모든 미세한 떨림, 퇴행이 연주자에게는 치명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약의 힘으로 병이 완화된다면 시즌 첫 콘서트를 베토벤의 현악 4중주곡 중 14번을 연주하는 고별 연주회로 하고 떠나겠다고 한다. 생의 종반부에 맞은 피터의 고난은 제2바이올린을 맞아 항상 제1 바이올린을 맡았던 다니엘에게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했던 로버트의 억압된 불만을 표출하는 계기가 되고 홍일점 첼리스트인 아내 줄리엣과의 불화 등 나머지 멤버들의 내면에 침잠했던 갈등들이 불거져 나오는 증폭제가 된다. 잔잔했던 팀내의 분위기는 악화일로를 치닫게 된다.
영화의 한계는 인물들의 내면을 오고가는 생각, 느낌을 간접적으로 그려내고 추정해 낼 수 밖에 없다는 데에 있다면 그러한 한계가 이 영화에서는 교단에 선 피터의 학생들과의 교감, 이야기로 충분히 해소된다고 볼 수 있다. 노년의 거장은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 14번을 단순히 연주를 위한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게 아니라 그 연주에 접근해 가며 당시 그것을 작곡했던 베토벤의 심상, 연주 당사자들이 그 어떤 휴식 없이 7악장을 연결해 나가야 하는 도전에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 들에 함께 다가가려 한다. 특히 T.S. 엘리엇의 평의 인용은 한 구절 한 구절이 베토벤의 그것과 만나 뭉근하게 녹는다. 모든 시간의 현재성. 시작과 끝의 그 경계, 그 간극 안에 있는 현재성. 과거도 미래도 결국 현재 안에 녹아 있다는 그 시간 안에 우리의 삶과 베토벤의 음악이 있다.
마침내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연주는 성황리에 마쳤을까? 그렇다면 이 영화는 삶과는 다른 할리우드식 서사에 그쳤을 것이다. 엔딩이 압도하는 대목은 나이 든 연주자들의 공연 안에 삶을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엔딩. 피터는 어쨌든 성공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완수해 낸다. 모두가 아는 방법은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외가 예측할 수 없음이 삶의 본질임을 이 영화는 직시한다. 소멸과 퇴장, 늙음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우리의 것이 될 것임을 알기에 가장 잘 이야기해져도 우리를 울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