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의 평전을 읽고 있는데 이제 반이나마 왔다. 팔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과 빡빡한 자간이 부담스러웠는데 평생 육체 노동으로 가족을 부양했던 아들과 이름이 같았던 레이먼드 카버 아버지 이야기, 본인들도 채 다 크지 못한 채 부모가 되어 어깨에 지게 된 짐과 자신의 욕구, 욕망, 꿈과의 간극에서 헤매는 카버 부부의 분투, 아버지뻘의 존 치버와 대작을 하며 어울리는 모습, 이제 곧 성공의 진입로에 섰는데 본인도 어쩔 수 없는 무질서와 상처 속에서 허둥대는 모습, 그리고 너무 빨리 늙어버려 정작 카버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이미 그는 자신의 삶의 시계에서 중노년의 시점에 섰음을 알아차리며 남은 그의 짧은 아까운 생을 헤아려 보고 아쉬워하게 된다. 그는 쉰이 되어 죽고 결혼 생활 대부분에서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하며 레이먼드 카버가 작가로서 입지를 굳히는 데에 거의 중추적인 역할 이상을 했다고 볼 수 있는 조강지처 메리엔과는 헤어지게 될 것임을 그는 지금 알지 못한다. 부부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때로 불화하고 폭력적이고 기이하게 비쳤지만 분명 외면적으로 다 풀어 설명할 수 없는 깊은 결속된 관계 속에 있었다. 십대에 만나 아이 둘을 낳고 그 아이들을 부양하고 못다한 학업을 끊임없이 재개하려 애쓰고 남편의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을 어떻게든 실현시키기 위해 이동, 또 이동, 포기, 선택했던 동반자적 역할은 부부 관계 안에서만 담을 수는 없는 내용이었다.

 

 

 

 

 

 

 

 

 

 

 

 

 

 

 

나도 내가 나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레이먼드 카버처럼 될 턱이 없기에 전체적인 조망 아래 삶을 진지하게 관찰할 수 없기에 지금 여기에서 내 삶에 얼마만큼 어떻게 와 있는지 알 수 없이 매일 매일의 일상과 과제에서 허우적댄다. 누군가가 조금 떨어져 나의 삶을 지켜본다면 수많은 나의 어리석음과 치기와 실수와 근시안을 찾아내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삶을 다 살고 나서가 아닌 다음에야 내가 그러기는 힘든 노릇이다. 그때 왜 그랬었지?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할 것을, 조금만 더 참을걸, 조금 더 나아갈걸, 하는 회한과 아쉬움은 지금 당장을 사는 사람의 것은 아니다.

 

가족이 아프고 만성 위염이 도지고 아이 둘을 돌보다 지쳐 벼르고 벼르던 내시경을 했다. 전날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온갖 것들이 걱정됐다. 혹시 내가 여기서 끝이면 어떡하지? 그러면 아직 어린 아기는 어떡하지? 다음 날 아침 일찍 한산한 대기실에서 순서를 기다리다 급하게 혈압을 재고 수면 내시경을 시작하려 약을 투여했다. 마취가 잘 되지 않아 눈을 계속 뜨고 있으니 간호사가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조금 더 약을 투입하는 듯한 움직임을 마지막으로, 간호사가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지러웠다. 위염이었고 의사는 아직 내가 젊다고 했다. 그 말은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성인이 되면서 내가 제일 먼저 만난 것은 위염이었다. 신입사원이 되어 제일 힘들었던 것도 위염이었다. 되지 않는 술을 억지로 먹다 보니 위염은 더욱 심해졌고 위벽이 다 헌 사진을 책상 위에 올려 놓고 내가 과연 이 생활을 견딜 수 있을까? 반문했다. 힘들면 마음이 아프면 영락 없이 나의 위도 시끄러웠다. 침대에서 일어나 어떻게 집에 왔는지 그 집으로 오던 길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약국에는 처방전이 아니라 병원 영수증을 내미는 기염을 토했다. 그런데 전날 밤 하도 오만가지 최악의 상황 속에서 헤메어서 그런지 어지러워도 좋았다. 그냥 그 안심되는 느낌이 좋았다. 나는 때로 너무 힘들지만 그래도 사는 게 좋다. 할머니가 되어 죽고 싶다. 할머니가 되면 그래도 죽음과 어느 정도 타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해할 수도 수긍할 수도 없겠지만 어쩔 수 없는, 어쩌지 못하는 것들에 체념할 수 있을 것같다.

 

그래서 사는 동안 이 모든 어리석음, 조급함, 치기가 다 소중하다. 무의미하고 실패할지라도 그게 어쩌지 못하는 삶인 것 같다. <대성당>을 쓴 카버의 삶도 그러지 않았는가? 정말 무언가,를 남을 것을 이룬 사람의 삶도 일상 속에서는 어리석고 슬프고 구태의연하고 구차한 면이 있다. 그는 점점 위대해져 전설이 될 것이지만 지금 당장은 술독에 빠져 있다. 이제 막 술독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그 어떤 성취보다 바로 그 점을 자랑스러워하게 될 순간을 맞게 될 시점으로 가고 있다. 그렇게나 사랑하고 지독하게 싸웠던 아내와는 헤어지고 다른 여자의 곁에서 임종을 맞게 될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을 그가 몰랐다고 해서 그의 지금이 무의미하다고 어리석다고 폄하될 수 있을까? 모르는 것들 투성이, 어떻게 결론에 치닫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게 바로 삶의 묘미이기도 한 것같다. 그래서 계속 읽게 된다. 이미 결론을 아는 이야기도 그곳으로 닿는 길은 미답인 경우가 많다. 처음과 끝이 아니라 그것을 연결하는 길에 진짜가 실재가 있는 지도 모른다는 느낌. 가을 하늘이 너무 예뻐서 이런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는 게 사는 것이라면 산다는 건 어쩌면 더 처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을이 되면 꼭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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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9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10 1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0 0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0 2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 시점까지 나는 내 삶에서 모든 게, 비록 정확히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할지라도, 내가 희망하는 대로 또는 원하는 대로 어떻게든 잘 풀릴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그 순간 빨래방에서, 그건 전혀 진실이 아님을 깨달았다. 나는 내 삶의 대부분이 어지럽고 시시한 일로 이루어졌으며, 희망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이먼드 카버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 중 

 

 

 

 

 

 

 

 

 

 

 

 

 

 

 

 

 

 

 

 

 

 

카버가 빨래방에서 가족들의 빨래를 안고 초조해하며 건조기 순번을 기다리는 순간 새치기를 당하고 느낀 단상이다. 카버는 언제나 가난했고 스무 살이 되기 이전에 이미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있었고 아버지 카버처럼 반생을 술로 고생했다. 이러한 게 단순히 카버적인 개별적인 그만의 신산한 삶의 풍경이었을까? 아니면 삶의 전반적인 풍경이 그저 카버 앞에서 순수하게 더 명료하게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 카버의 언어로 형상화된 것 뿐일까? 대체로 누구에게나 결국 삶은 시시하고 힘들고 예기치 않은 불운에 때로 얼굴을 가격 당하며 그렇게 버티며 나아가는 것일까? 그러다 늙음에 병마에 먹혀 자기가 미처 마침표도 찍기 전에 그냥 '끝'으로 사라지고 마는 걸까...

 

카버의 단행본에 실리지 않은 단편들의 끝은 여느 평범한 단편처럼 마무리되는 맛도 없고 오 헨리의 그것처럼 반전도 없고 다만 삶의 진실, "명쾌한 해답이나 엔딩은 주어지지 않는다"에 충실하다. 언제나 비극에 무방비이지만 쉽게 무릎꿇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신에게 다가온 일들을 좌지우지하겠다고 섣불리 덤비지도 않는다. 그의 '이야기'는 '현실'이다. 그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어제 생각했던, 혹은 몇 년 전에 들었던, 보았던 것들, 미래에 겪고 느끼게 될 감정들이다.

 

아껴 읽고 싶다. 노동자였던 그래서 일을 하며 술을 마시며 외동 아들을 사랑했던 아버지 레이먼드 카버에 대한 이야기, 이제 '쓴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 정열, 좌절, 자신의 삶, 아이들, 그리고 또 카버가 만든 많이 다듬지는 않은 날것의 이야기들. 병원 복도의 창에 기대어 눈물을 흘리며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의 부모의 심정을 돌이켜 보게 될 줄 몰랐듯이 그의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그냥 산다는 것의 편린들이라 무심코 흘려보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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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5-08-28 15: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희망하는대로, 원하는대로,
이루어지지 않을까봐 불안해하면서 행동하는 것이 강박이 되지요. 문득
요즘 제가 만나는 중3 아이가 떠올랐어요. 삶이란 것이, 원하는대로만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데도 포기하기 어려워요. ^^

아껴 읽고 싶다 라고 쓰긴 문구, 너무 좋아요.

blanca 2015-08-28 23:32   좋아요 0 | URL
지금도 아끼고 괜히 두고 그러는데 자꾸 진도가 나가네요. ㅋㅋ 중3... 코알라도 벌써 중3이라 하셨죠. 내가 열여섯이었던 시간들이 어제 같은데 정말 시간은 휙휙 지나가네요.

희선 2015-09-07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는 바라는 대로 될지도 모른다 한 적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때는 그리 길지 않은 듯해요 꽤 오래전부터 저는 사는 게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게 언제부턴지도 모르겠군요 시시한 일만 있고... 남한테는 시시해 보여도 자신한테는 그렇게 시시하지 않은 일도 있겠군요


희선

blanca 2015-09-07 11:21   좋아요 0 | URL
저도 요새 인간의 자유의지란 환상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어요....
 

어릴 때는 구체적이고 자잘한 고충들을 매일 매일 해결해 나가는 게 쉽지 않았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혹은 이렇게 하는 데에 확신이 들지 않아 혼라스러웠다. 고작 마흔으로 가는 시점에서 그런 모든 것들에 익숙해졌다고 얘기하면 자만이 될 터이고 다만 적어도 그런 것들은 조금 실수해도 다시 해도 괜찮다, 정도의 심정이다. 다만 이제 내가 어쩌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덮쳐 올 때 내가 그것들을 능동적으로 주체적으로 해결해 나간다는 것은 하나의 헛된 바람이자 오만이 될 수 있다는 또다른 두려움을 배워가는 중이다. 삶은 가혹한 학교다. 냉정하고 가차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난 이미 어쩌지 못하고 세상에 나와버렸다. 그 힘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나를 소멸로 데려가는 힘도 내 안에 내재되어 있겠지만 그것 또한 이미 나의 것이 아니다. 나도 늙고 주변 사람들도 늙고 때로 절망하고 넘어지고 병들고 그렇게 큰 흐름 속에서 그 한계 속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 한계, 그 종점을 항상 의식하면 어느 정도 슬프지 않고는 현재를 딛고 설 수가 없다. 마냥 즐겁고 마냥 꿈꿀 수 있던 시간들은 이미 내 뒤에서 삭아버리고 있다. 난 이미 중년이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 현악 4중주단. 제1바이올린, 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의 선율이 서로를 타고 넘는 그 흐름, 때로는 합쳐지고 어긋나고 멀어지고 다시 만나는 그 순간들의 명멸이 베토벤에 의해 만날 때 인생은 반드시 다 살고 나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이 불현듯 온다. 베토벤은 이미 다 알아버린 것같다. 인생의 근저에 깔린 그 허무함, 헛헛함, 슬픔, 그런데도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 연약한 시도들. 사람들, 만남, 사랑, 소통, 다툼, 이별.

 

25년 간 멤버들의 아버지뻘 나이의 첼리스트 피터가 이끈 4중주단은 그의 파킨슨병 진단으로 위기를 맞는다. 피터는 파킨슨병이 가져오는 그 모든 미세한 떨림, 퇴행이 연주자에게는 치명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약의 힘으로 병이 완화된다면 시즌 첫 콘서트를 베토벤의 현악 4중주곡 중 14번을 연주하는 고별 연주회로 하고 떠나겠다고 한다. 생의 종반부에 맞은 피터의 고난은 제2바이올린을 맞아 항상 제1 바이올린을 맡았던 다니엘에게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했던 로버트의 억압된 불만을 표출하는 계기가 되고 홍일점 첼리스트인 아내 줄리엣과의 불화 등 나머지 멤버들의 내면에 침잠했던 갈등들이 불거져 나오는 증폭제가 된다. 잔잔했던 팀내의 분위기는 악화일로를 치닫게 된다.

 

영화의 한계는 인물들의 내면을 오고가는 생각, 느낌을 간접적으로 그려내고 추정해 낼 수 밖에 없다는 데에 있다면 그러한 한계가 이 영화에서는 교단에 선 피터의 학생들과의 교감, 이야기로 충분히 해소된다고 볼 수 있다. 노년의 거장은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 14번을 단순히 연주를 위한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게 아니라 그 연주에 접근해 가며 당시 그것을 작곡했던 베토벤의 심상, 연주 당사자들이 그 어떤 휴식 없이 7악장을 연결해 나가야 하는 도전에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 들에 함께 다가가려 한다. 특히 T.S. 엘리엇의 평의 인용은 한 구절 한 구절이 베토벤의 그것과 만나 뭉근하게 녹는다. 모든 시간의 현재성. 시작과 끝의 그 경계, 그 간극 안에 있는 현재성. 과거도 미래도 결국 현재 안에 녹아 있다는 그 시간 안에 우리의 삶과 베토벤의 음악이 있다.

 

마침내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연주는 성황리에 마쳤을까? 그렇다면 이 영화는 삶과는 다른 할리우드식 서사에 그쳤을 것이다. 엔딩이 압도하는 대목은 나이 든 연주자들의 공연 안에 삶을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엔딩. 피터는 어쨌든 성공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완수해 낸다. 모두가 아는 방법은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외가 예측할 수 없음이 삶의 본질임을 이 영화는 직시한다. 소멸과 퇴장, 늙음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우리의 것이 될 것임을 알기에 가장 잘 이야기해져도 우리를 울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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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9-07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 사람이 더 일찍 많은 것을 알아버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건 왜 그럴까요 그때는 그렇게 오래 사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일지도... 모두 그렇게 짧게 산 것은 아니기도 하겠지만... 마지막은 눈물 흘리게 하는군요 끝난다 해도 그때까지 살았다는 것도 잊지 않으면 좋을 텐데, 편하게 끝을 맞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군요


희선

blanca 2015-09-07 11:23   좋아요 0 | URL
희선님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런 면이 있네요. 아무래도 평균 수명이 짧았으니 깨달음이나 성숙도 어쩌면 더 빨랐을 지도 모르겠어요. 요즘 애들이 빠르다,는 면은 사실 성숙 차원의 이야기는 아니니까요.
 

1992년, 연년생 동생은 선물로 책을 사 주었다.

당시 장안의 화제였던 영화의 영상이 곳곳에 실려 있었고 작가의 원작과 그 영화의 대사가 혼재되어 있는 책. 에로티시즘이 잔뜩 깔려 있는 이야기였지만 왠지 헛헛하고 어딘 가에 진지한 무게 중심이 실려 있는 이야기였다. 여주인공의 양갈래로 땋은 머리와 아무렇게나 걸친 듯한 무채색의 원피스가 근사해 보였다. 그녀의 자유와 도발,아름다움이 한없이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아마 시간이 많이 흐른 후 영화를 직접 보게 되었던 것 같다. 생각보다 더 선정적으로 느껴졌고 조금 더 지루했다. 그때도 역시 그 연인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며칠 전 영화를 다시 제대로 보게 되었다. 출발은 성적 이끌림이나 호기심이었을지라도 결국 그것이 사랑으로 변질되었음을 깨달은 가망 없는 연인들이 현실에 저항하지 못하고 각자 흐느끼는 모습이 서러웠다. 채 어른이 되지 않은 아이 같은 소녀는 남자를 떠나는 뱃전에서 그 남자가 멀리서 차에서 내리지도 못한 채 그녀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배웅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불현듯 선상에 울려 퍼지는 쇼팽의 왈츠 속에서 그녀는 오열한다. 아주 많은 시간이 흘러 더 이상 앳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허스키한 목소리의 노년의 작가가 된 그녀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남자의 전화를 받는다. 절망 어린 정사로 가득했던 그 어둑 어둑하고 길거리에 나앉은 것 같았던 숙소에서의 날들은 그녀 내부에 차곡 차곡 쌓여 발효하고 있었다.

 

 

 

 

 

 

 

 

 

 

 

 

 

 

 

 

 

 

소녀의 가족은 프랑스령 식민지 베트남에서 눈에 띄는 백인 가족이었다. 아편에 중독된 망나니 큰 오빠와 유약한 작은 오빠, 미망인으로 홀로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절망과 우울을 오고가는 어머니가 주는 아픔은 그녀가 언제나 얼마쯤 슬픔에 잠겨 있게 했다. 어릴 때는 보이지 않던 나이 든 어머니의 항상 눈물에 젖어 있는 눈가의 주름들. 아들을 배웅하며 부둣가에 홀로 서 있는 어머니의 모습에는 많은 말이 필요치 않았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원작 소설에는 이러한 가망 없는 아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모성애에 대한 이야기에 많은 지면이 할애된다. "죽을 때까지 큰오빠는 어머니를 독차지했다." 아들은 어머니를 갉아 먹고 산다. 어머니가 가진 모든 희망, 기대, 물질들들 무참히 빼앗고 짓밟는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그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중국인 남자의 퇴폐적 애정, 돈, 절망에 기대어 사춘기 소녀가 마음 붙일 곳 없었던 가족에 대한 애증을 하나 하나 펼쳐 보이게 한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다. '자전적'이라는 말은 많은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하지만 여기에서는 전부 다 모두 언어의 숨골에 가 닿아 한 인간의 내밀한 성장기를 폭로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문장들.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시제가 경계 없이 섞이고 '나'과 '그녀'와 '그'의 시선이 무람 없이 교차하는 데도 그리 불친절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야기는 한 인간의 내면에서 그 모든 것이 질서 없이 혼재되고 교차할 수 있음을 정확히 간파하고 언어로 걸러낼 수 있었던 작가의 저력에 기댄 바가 크다.

 

나는 낮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햇빛이 모든 색깔을 퇴색시키며 짓누른다. 밤에 대해서는 잘 기억한다. 밤의 푸른빛은 하늘이 더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하늘은 세상의 본질을 덮고 있는 모든 불투명함의 저편에, 그 너머에 있었다. 나에게 하늘은 밤의 푸른빛을 가로지르는 순수한 광채와 모든 색깔을 초월한, 차갑게 녹아 드는 빛을 떠오르게 한다.

-p.98

"세상의 본질을 덮고 있는 모든 불투명함의 저편 "에서의 이야기는 언뜻 순수한 사랑이 아닌 욕망을 위장한 것처럼 보이고 삶에 대한 이야기가 스러져 버릴 덧없는 찰나에 대한 살풀이 같지만 그것은 순간 순간 늙어가고 죽어가고 멀어져 가는 존재의 몸짓의 그 생래적 무상함에 대한 섬세한 시선이다. 메콩 강을 건너가 버린 사랑은 그 사랑이 왔을 때보다 한층 더 깊어져 있고 삶 그 자체를 웅변하는 듯하다. 초반부터 시작된 노작가의 나레이션은 이미 늙어버리고 변해 버릴 소녀의 그 모든 것들을 예고하고 있기도 하지만 그 소녀가 거기에서 만들어 나간 서사가 절대 무의미하지 않고 오롯이 버티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Y.A. 당신은 무엇에 몰두하죠?

M.D. 글 쓰는 일에. 비극적인. 다시 말해 삶의 흐름에 관련된 일이지.

나는 노력하지 않아도 그 속에 있어.

-마르그리트 뒤라스 <이게 다예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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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4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24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24 1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5-09-07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읽었는데 거의 생각나지 않고, 그때 제대로 못 봤던 것 같네요 그런 책이 이것만은 아니기도 하네요 그렇다고 그런 걸 다시 다 볼 수도 없고... 게을러서 그렇죠 누군가는 여기 나오는 여자아이와 같은 나이 때 봐도 알지도 모를 테지만, 저는 몰랐네요 지금은 어떨지... 그렇게 된 배경이 있었군요


희선

blanca 2015-09-07 13:48   좋아요 0 | URL
저도 언뜻 스친 책을 나이들어 다시 읽어보니 감회가 새롭더라고요. 책도 아니 가독력도 나이를 먹는 듯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혼란스럽다. 두 개의 세계가 있다. 사람들은 비교적 선의를 가지고 있고 운명은 대체로 관대하고 비상식적이거나 잔인하거나 가혹한 일들은 예외적으로 치부된다. 꿈이 있고 이상이 있고 내일을 기대하고 추억은 아름답다. 다른 세계는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기적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타락해 있으며 운명은 불공평하고 냉혹하다. 미담은 예외적인 말장난이다. 그리고 그 두 개의 세계에 걸쳐 있는 삶이 또 있다. 그러니 너무 이상주의적이거나 감상적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항상 극단적인 절망이나 회의 속에 살 필요도 없는 세계. 어쩌면 양 극단의 세계를 오고 가다 영원히 풀리지 않는 궁금증들만 남기고 답은 주어지지 않는 게 삶인 걸까.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헤밍웨이와 피카소의 연인이었던 그녀가 그렇게나 살고 싶어했던 벨 에포크 시대의 작가 옥타브 미르보의 <어느 하녀의 일기>는 음험하다. 하녀 셀레스틴의 시점에서 그려진 그녀의 주인들의 세계도 또 그녀가 속한 하류층의 생활도 모두 탐욕과 위선, 거짓으로 가득차 있다. 어디 한 곳 선의가 게재될 여지가 없다. 하인들은 주인들에게 인간이하의 대우와 처우를 받으며 주인의 것들을 탐하고 도둑질하고 그들의 위선을 비웃는다. 주인과 하인들과는 그 어떤 인간적인 감정이나 존중, 공감도 오가지 않으며 항상 서로를 의심하고 미워하고 조롱한다. 사람 사이에 일방적으로 용역이 제공되고 그 대가로 생계가 보장되는 상황 자체에서 인간의 존엄을 논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런지도 모른다. 사회적 대의에는 용기 있는 발언을 하면서 정작 자신의 부엌에서는 인간을 비하하고 수단화하는 사람들이 이 시대의 희화화된 상류층의 인간상이라고 폄하하기에 작금의 현실도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배하는 자도 지배당하는 자도 서로를 이용하고 착취한다는 점에서 유죄다.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식으로 자신의 일을 받아들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남아있는 나날>의 집사. 그는 삼십오 년 간의 봉사에 '품위'와 '자부심'을 거론한다. 주인의 생의 오점에 대한 회한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마저도 그 주인에게 전적으로 헌신한 자신의 삶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믿음, 주인에 대한 충성 전체를 긍정해야만 자신의 삶 자체도 무의미화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얼마간 비겁하지만 그러한 그의 자신의 하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의미 부여를 어떻게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있을까. 노년에 뒤돌아보는 삶 전체를 헛된 것으로 폄하하고 절망하기란 쉽지 않다. 한 인간에 전적으로 종속된 삶, 생사여탈권까지 그에게 헌납하는 그 무모한 투신은 때로 이러한 정당화로 견뎌내고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하녀의 일기>의 하녀도 <남아 있는 나날>의 집사도 다 각자 나름대로 방법으로 자신들의 삶을 견뎌내고 살아낼 수 있었다.

 

 

 

 

 

 

 

 

 

 

 

 

 

 

 

 

하녀 셀레스틴이 악덕에 감염되어서도 무감각해했던 것처럼 <남아 있는 나날>의 집사도 주인이 나치에 협조한 것을 애써 외면하며 악덕에 일조를 했을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지워버리려 한다. 견뎌 나가는 날들이 도덕적으로 인간의 선의에 완벽하게 헌신할 수 있는 것도 운명이 여지를 남겨주어서인 지도 모른다. 얼마간 역겨운 행태들, 씁쓸한 뒷맛을 남기며 불평등한 수직 구조에 의하여 유린 당한 삶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나가며 저도 모르게 우울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좋아하지만 자신할 수는 없다. 그 정도로 사는 일이란 쉬울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너무 역겹고 눈에 번연히 아닌 길을 가고 있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살에 막 스치는 느낌. 살면 살수록 '절대'와 멀어질 수 없는 노릇이기에 그럴까... '상황'이 주는 강압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의 이야기는 언제나 우울감을 가진다. 일말의 진실과 실재를 내포한 이야기에게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또 다른 형태로 이러한 종속 관계와 착취가 자행되고 있다. 수많은 '갑'과 '을'의 이야기들이 양산되는 세계의 과거 버전의 희화화. 고전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시대의 고통과 병폐가 여전히 끈질기게 버티고 남아 우리들을 괴롭히고 있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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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8-20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블랑카님. 두 권 다 제가 읽고 싶어서 준비해둔 책들인데...아직 안읽고 있어요. 뭐, 그런 책이 어디 이 두권 뿐이겠습니까마는... ㅠㅠ

밑에, 남아있는 나날들에 대해 쓰신 부분을 읽다보니 `로맹 가리`의 단편 소설도 생각나요. [새들은 페루에서 죽다]란 단편집의 한 단편이었는데, 전쟁이 나서 집사부부(혹은 하인 부부)가 주인을 지하실에 숨긴뒤에 식량을 챙겨주거든요. 그러나 지하실에서 하인들이 주었던 음식만 받아먹었던 주인은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죠. 그래서 집은 아예 하인 차지가 되었던... 뭔가 서늘했던 소설이었어요. 그 소설이 생각나네요.

blanca 2015-08-20 13:27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어렴풋이 기억나요! 다락방님 지금 <남아 있는 나날>을 가지고 계신다면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어요.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영화도 참 처연하게 잘 만들었더라고요. 나이 든 사람이 한 사람에게 전적으로 헌신했던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합리화하기도 하고 정당화하기도 하는 그 담담함을 가장한 어조가 참 저릿해요.

cyrus 2015-08-20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하인이 나오는 소설작품을 알아보고 있었는데, 블랑카님 덕분에 <남아 있는 나날>을 알게 되었어요. 발자크의 <외제니 그랑데>에 나오는 하녀 나농도 <어느 하녀의 일기>의 주인공과 약간 비슷해요. 돈에 집착하는 그랑데 영감을 대놓고 비꼬는 인물로 나와요.

blanca 2015-08-21 11:33   좋아요 0 | URL
아, 어떤 테마를 중심으로 읽는 거예요? 그러는 것도 의미도 있고 즐거울 것 같아요. 가즈오 이시구로도 나름의 색깔을 서늘하게 잘 표현하는 작가인 듯해요. 기회되면 읽어 보세요.

cyrus 2015-08-21 17:57   좋아요 0 | URL
딱히 정해진 테마는 없어요. 그냥 하인이 비중 있게 나오는 소설을 찾고 있어요. ^^

희선 2015-08-22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둘 다 있고 가운데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사람이 다 착하고 제대로 살아가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겠죠 잘못을 하고 그것을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도 있죠 그것을 보면서 자신은 그러지 않아야겠다 생각할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희선

blanca 2015-08-22 08:39   좋아요 0 | URL
네, 아무래도 실제 인간의 복합적인 모습이 소설의 인물들의 모델이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래도 언어로 온전히 한 인간을 그려낸다는 건 참 쉽지 않은 이야기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