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더 혼란스럽다. 두 개의 세계가 있다. 사람들은 비교적 선의를 가지고 있고 운명은 대체로 관대하고 비상식적이거나 잔인하거나 가혹한 일들은 예외적으로 치부된다. 꿈이 있고 이상이 있고 내일을 기대하고 추억은 아름답다. 다른 세계는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기적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타락해 있으며 운명은 불공평하고 냉혹하다. 미담은 예외적인 말장난이다. 그리고 그 두 개의 세계에 걸쳐 있는 삶이 또 있다. 그러니 너무 이상주의적이거나 감상적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항상 극단적인 절망이나 회의 속에 살 필요도 없는 세계. 어쩌면 양 극단의 세계를 오고 가다 영원히 풀리지 않는 궁금증들만 남기고 답은 주어지지 않는 게 삶인 걸까.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헤밍웨이와 피카소의 연인이었던 그녀가 그렇게나 살고 싶어했던 벨 에포크 시대의 작가 옥타브 미르보의 <어느 하녀의 일기>는 음험하다. 하녀 셀레스틴의 시점에서 그려진 그녀의 주인들의 세계도 또 그녀가 속한 하류층의 생활도 모두 탐욕과 위선, 거짓으로 가득차 있다. 어디 한 곳 선의가 게재될 여지가 없다. 하인들은 주인들에게 인간이하의 대우와 처우를 받으며 주인의 것들을 탐하고 도둑질하고 그들의 위선을 비웃는다. 주인과 하인들과는 그 어떤 인간적인 감정이나 존중, 공감도 오가지 않으며 항상 서로를 의심하고 미워하고 조롱한다. 사람 사이에 일방적으로 용역이 제공되고 그 대가로 생계가 보장되는 상황 자체에서 인간의 존엄을 논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런지도 모른다. 사회적 대의에는 용기 있는 발언을 하면서 정작 자신의 부엌에서는 인간을 비하하고 수단화하는 사람들이 이 시대의 희화화된 상류층의 인간상이라고 폄하하기에 작금의 현실도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배하는 자도 지배당하는 자도 서로를 이용하고 착취한다는 점에서 유죄다.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식으로 자신의 일을 받아들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남아있는 나날>의 집사. 그는 삼십오 년 간의 봉사에 '품위'와 '자부심'을 거론한다. 주인의 생의 오점에 대한 회한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마저도 그 주인에게 전적으로 헌신한 자신의 삶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믿음, 주인에 대한 충성 전체를 긍정해야만 자신의 삶 자체도 무의미화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얼마간 비겁하지만 그러한 그의 자신의 하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의미 부여를 어떻게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있을까. 노년에 뒤돌아보는 삶 전체를 헛된 것으로 폄하하고 절망하기란 쉽지 않다. 한 인간에 전적으로 종속된 삶, 생사여탈권까지 그에게 헌납하는 그 무모한 투신은 때로 이러한 정당화로 견뎌내고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하녀의 일기>의 하녀도 <남아 있는 나날>의 집사도 다 각자 나름대로 방법으로 자신들의 삶을 견뎌내고 살아낼 수 있었다.

 

 

 

 

 

 

 

 

 

 

 

 

 

 

 

 

하녀 셀레스틴이 악덕에 감염되어서도 무감각해했던 것처럼 <남아 있는 나날>의 집사도 주인이 나치에 협조한 것을 애써 외면하며 악덕에 일조를 했을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지워버리려 한다. 견뎌 나가는 날들이 도덕적으로 인간의 선의에 완벽하게 헌신할 수 있는 것도 운명이 여지를 남겨주어서인 지도 모른다. 얼마간 역겨운 행태들, 씁쓸한 뒷맛을 남기며 불평등한 수직 구조에 의하여 유린 당한 삶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나가며 저도 모르게 우울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좋아하지만 자신할 수는 없다. 그 정도로 사는 일이란 쉬울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너무 역겹고 눈에 번연히 아닌 길을 가고 있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살에 막 스치는 느낌. 살면 살수록 '절대'와 멀어질 수 없는 노릇이기에 그럴까... '상황'이 주는 강압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의 이야기는 언제나 우울감을 가진다. 일말의 진실과 실재를 내포한 이야기에게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또 다른 형태로 이러한 종속 관계와 착취가 자행되고 있다. 수많은 '갑'과 '을'의 이야기들이 양산되는 세계의 과거 버전의 희화화. 고전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시대의 고통과 병폐가 여전히 끈질기게 버티고 남아 우리들을 괴롭히고 있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5-08-20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블랑카님. 두 권 다 제가 읽고 싶어서 준비해둔 책들인데...아직 안읽고 있어요. 뭐, 그런 책이 어디 이 두권 뿐이겠습니까마는... ㅠㅠ

밑에, 남아있는 나날들에 대해 쓰신 부분을 읽다보니 `로맹 가리`의 단편 소설도 생각나요. [새들은 페루에서 죽다]란 단편집의 한 단편이었는데, 전쟁이 나서 집사부부(혹은 하인 부부)가 주인을 지하실에 숨긴뒤에 식량을 챙겨주거든요. 그러나 지하실에서 하인들이 주었던 음식만 받아먹었던 주인은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죠. 그래서 집은 아예 하인 차지가 되었던... 뭔가 서늘했던 소설이었어요. 그 소설이 생각나네요.

blanca 2015-08-20 13:27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어렴풋이 기억나요! 다락방님 지금 <남아 있는 나날>을 가지고 계신다면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어요.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영화도 참 처연하게 잘 만들었더라고요. 나이 든 사람이 한 사람에게 전적으로 헌신했던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합리화하기도 하고 정당화하기도 하는 그 담담함을 가장한 어조가 참 저릿해요.

cyrus 2015-08-20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하인이 나오는 소설작품을 알아보고 있었는데, 블랑카님 덕분에 <남아 있는 나날>을 알게 되었어요. 발자크의 <외제니 그랑데>에 나오는 하녀 나농도 <어느 하녀의 일기>의 주인공과 약간 비슷해요. 돈에 집착하는 그랑데 영감을 대놓고 비꼬는 인물로 나와요.

blanca 2015-08-21 11:33   좋아요 0 | URL
아, 어떤 테마를 중심으로 읽는 거예요? 그러는 것도 의미도 있고 즐거울 것 같아요. 가즈오 이시구로도 나름의 색깔을 서늘하게 잘 표현하는 작가인 듯해요. 기회되면 읽어 보세요.

cyrus 2015-08-21 17:57   좋아요 0 | URL
딱히 정해진 테마는 없어요. 그냥 하인이 비중 있게 나오는 소설을 찾고 있어요. ^^

희선 2015-08-22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둘 다 있고 가운데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사람이 다 착하고 제대로 살아가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겠죠 잘못을 하고 그것을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도 있죠 그것을 보면서 자신은 그러지 않아야겠다 생각할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희선

blanca 2015-08-22 08:39   좋아요 0 | URL
네, 아무래도 실제 인간의 복합적인 모습이 소설의 인물들의 모델이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래도 언어로 온전히 한 인간을 그려낸다는 건 참 쉽지 않은 이야기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