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의 평전을 읽고 있는데 이제 반이나마 왔다. 팔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과 빡빡한 자간이 부담스러웠는데 평생 육체 노동으로 가족을 부양했던 아들과 이름이 같았던 레이먼드 카버 아버지 이야기, 본인들도 채 다 크지 못한 채 부모가 되어 어깨에 지게 된 짐과 자신의 욕구, 욕망, 꿈과의 간극에서 헤매는 카버 부부의 분투, 아버지뻘의 존 치버와 대작을 하며 어울리는 모습, 이제 곧 성공의 진입로에 섰는데 본인도 어쩔 수 없는 무질서와 상처 속에서 허둥대는 모습, 그리고 너무 빨리 늙어버려 정작 카버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이미 그는 자신의 삶의 시계에서 중노년의 시점에 섰음을 알아차리며 남은 그의 짧은 아까운 생을 헤아려 보고 아쉬워하게 된다. 그는 쉰이 되어 죽고 결혼 생활 대부분에서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하며 레이먼드 카버가 작가로서 입지를 굳히는 데에 거의 중추적인 역할 이상을 했다고 볼 수 있는 조강지처 메리엔과는 헤어지게 될 것임을 그는 지금 알지 못한다. 부부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때로 불화하고 폭력적이고 기이하게 비쳤지만 분명 외면적으로 다 풀어 설명할 수 없는 깊은 결속된 관계 속에 있었다. 십대에 만나 아이 둘을 낳고 그 아이들을 부양하고 못다한 학업을 끊임없이 재개하려 애쓰고 남편의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을 어떻게든 실현시키기 위해 이동, 또 이동, 포기, 선택했던 동반자적 역할은 부부 관계 안에서만 담을 수는 없는 내용이었다.

 

 

 

 

 

 

 

 

 

 

 

 

 

 

 

나도 내가 나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레이먼드 카버처럼 될 턱이 없기에 전체적인 조망 아래 삶을 진지하게 관찰할 수 없기에 지금 여기에서 내 삶에 얼마만큼 어떻게 와 있는지 알 수 없이 매일 매일의 일상과 과제에서 허우적댄다. 누군가가 조금 떨어져 나의 삶을 지켜본다면 수많은 나의 어리석음과 치기와 실수와 근시안을 찾아내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삶을 다 살고 나서가 아닌 다음에야 내가 그러기는 힘든 노릇이다. 그때 왜 그랬었지?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할 것을, 조금만 더 참을걸, 조금 더 나아갈걸, 하는 회한과 아쉬움은 지금 당장을 사는 사람의 것은 아니다.

 

가족이 아프고 만성 위염이 도지고 아이 둘을 돌보다 지쳐 벼르고 벼르던 내시경을 했다. 전날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온갖 것들이 걱정됐다. 혹시 내가 여기서 끝이면 어떡하지? 그러면 아직 어린 아기는 어떡하지? 다음 날 아침 일찍 한산한 대기실에서 순서를 기다리다 급하게 혈압을 재고 수면 내시경을 시작하려 약을 투여했다. 마취가 잘 되지 않아 눈을 계속 뜨고 있으니 간호사가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조금 더 약을 투입하는 듯한 움직임을 마지막으로, 간호사가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지러웠다. 위염이었고 의사는 아직 내가 젊다고 했다. 그 말은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성인이 되면서 내가 제일 먼저 만난 것은 위염이었다. 신입사원이 되어 제일 힘들었던 것도 위염이었다. 되지 않는 술을 억지로 먹다 보니 위염은 더욱 심해졌고 위벽이 다 헌 사진을 책상 위에 올려 놓고 내가 과연 이 생활을 견딜 수 있을까? 반문했다. 힘들면 마음이 아프면 영락 없이 나의 위도 시끄러웠다. 침대에서 일어나 어떻게 집에 왔는지 그 집으로 오던 길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약국에는 처방전이 아니라 병원 영수증을 내미는 기염을 토했다. 그런데 전날 밤 하도 오만가지 최악의 상황 속에서 헤메어서 그런지 어지러워도 좋았다. 그냥 그 안심되는 느낌이 좋았다. 나는 때로 너무 힘들지만 그래도 사는 게 좋다. 할머니가 되어 죽고 싶다. 할머니가 되면 그래도 죽음과 어느 정도 타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해할 수도 수긍할 수도 없겠지만 어쩔 수 없는, 어쩌지 못하는 것들에 체념할 수 있을 것같다.

 

그래서 사는 동안 이 모든 어리석음, 조급함, 치기가 다 소중하다. 무의미하고 실패할지라도 그게 어쩌지 못하는 삶인 것 같다. <대성당>을 쓴 카버의 삶도 그러지 않았는가? 정말 무언가,를 남을 것을 이룬 사람의 삶도 일상 속에서는 어리석고 슬프고 구태의연하고 구차한 면이 있다. 그는 점점 위대해져 전설이 될 것이지만 지금 당장은 술독에 빠져 있다. 이제 막 술독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그 어떤 성취보다 바로 그 점을 자랑스러워하게 될 순간을 맞게 될 시점으로 가고 있다. 그렇게나 사랑하고 지독하게 싸웠던 아내와는 헤어지고 다른 여자의 곁에서 임종을 맞게 될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을 그가 몰랐다고 해서 그의 지금이 무의미하다고 어리석다고 폄하될 수 있을까? 모르는 것들 투성이, 어떻게 결론에 치닫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게 바로 삶의 묘미이기도 한 것같다. 그래서 계속 읽게 된다. 이미 결론을 아는 이야기도 그곳으로 닿는 길은 미답인 경우가 많다. 처음과 끝이 아니라 그것을 연결하는 길에 진짜가 실재가 있는 지도 모른다는 느낌. 가을 하늘이 너무 예뻐서 이런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는 게 사는 것이라면 산다는 건 어쩌면 더 처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을이 되면 꼭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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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9 20: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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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0 12: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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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0 02: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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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0 22: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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