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연년생 동생은 선물로 책을 사 주었다.
당시 장안의 화제였던 영화의 영상이 곳곳에 실려 있었고 작가의 원작과 그 영화의 대사가 혼재되어 있는 책. 에로티시즘이 잔뜩 깔려 있는 이야기였지만 왠지 헛헛하고 어딘 가에 진지한 무게 중심이 실려 있는 이야기였다. 여주인공의 양갈래로 땋은 머리와 아무렇게나 걸친 듯한 무채색의 원피스가 근사해 보였다. 그녀의 자유와 도발,아름다움이 한없이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아마 시간이 많이 흐른 후 영화를 직접 보게 되었던 것 같다. 생각보다 더 선정적으로 느껴졌고 조금 더 지루했다. 그때도 역시 그 연인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며칠 전 영화를 다시 제대로 보게 되었다. 출발은 성적 이끌림이나 호기심이었을지라도 결국 그것이 사랑으로 변질되었음을 깨달은 가망 없는 연인들이 현실에 저항하지 못하고 각자 흐느끼는 모습이 서러웠다. 채 어른이 되지 않은 아이 같은 소녀는 남자를 떠나는 뱃전에서 그 남자가 멀리서 차에서 내리지도 못한 채 그녀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배웅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불현듯 선상에 울려 퍼지는 쇼팽의 왈츠 속에서 그녀는 오열한다. 아주 많은 시간이 흘러 더 이상 앳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허스키한 목소리의 노년의 작가가 된 그녀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남자의 전화를 받는다. 절망 어린 정사로 가득했던 그 어둑 어둑하고 길거리에 나앉은 것 같았던 숙소에서의 날들은 그녀 내부에 차곡 차곡 쌓여 발효하고 있었다.
소녀의 가족은 프랑스령 식민지 베트남에서 눈에 띄는 백인 가족이었다. 아편에 중독된 망나니 큰 오빠와 유약한 작은 오빠, 미망인으로 홀로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절망과 우울을 오고가는 어머니가 주는 아픔은 그녀가 언제나 얼마쯤 슬픔에 잠겨 있게 했다. 어릴 때는 보이지 않던 나이 든 어머니의 항상 눈물에 젖어 있는 눈가의 주름들. 아들을 배웅하며 부둣가에 홀로 서 있는 어머니의 모습에는 많은 말이 필요치 않았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원작 소설에는 이러한 가망 없는 아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모성애에 대한 이야기에 많은 지면이 할애된다. "죽을 때까지 큰오빠는 어머니를 독차지했다." 아들은 어머니를 갉아 먹고 산다. 어머니가 가진 모든 희망, 기대, 물질들들 무참히 빼앗고 짓밟는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그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중국인 남자의 퇴폐적 애정, 돈, 절망에 기대어 사춘기 소녀가 마음 붙일 곳 없었던 가족에 대한 애증을 하나 하나 펼쳐 보이게 한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다. '자전적'이라는 말은 많은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하지만 여기에서는 전부 다 모두 언어의 숨골에 가 닿아 한 인간의 내밀한 성장기를 폭로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문장들.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시제가 경계 없이 섞이고 '나'과 '그녀'와 '그'의 시선이 무람 없이 교차하는 데도 그리 불친절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야기는 한 인간의 내면에서 그 모든 것이 질서 없이 혼재되고 교차할 수 있음을 정확히 간파하고 언어로 걸러낼 수 있었던 작가의 저력에 기댄 바가 크다.
나는 낮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햇빛이 모든 색깔을 퇴색시키며 짓누른다. 밤에 대해서는 잘 기억한다. 밤의 푸른빛은 하늘이 더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하늘은 세상의 본질을 덮고 있는 모든 불투명함의 저편에, 그 너머에 있었다. 나에게 하늘은 밤의 푸른빛을 가로지르는 순수한 광채와 모든 색깔을 초월한, 차갑게 녹아 드는 빛을 떠오르게 한다.
-p.98
"세상의 본질을
덮고 있는 모든 불투명함의 저편
"에서의 이야기는 언뜻 순수한 사랑이 아닌 욕망을 위장한 것처럼 보이고 삶에 대한 이야기가 스러져 버릴 덧없는 찰나에 대한 살풀이 같지만 그것은 순간 순간 늙어가고 죽어가고 멀어져 가는 존재의 몸짓의 그 생래적 무상함에 대한 섬세한 시선이다. 메콩 강을 건너가 버린 사랑은 그 사랑이 왔을 때보다 한층 더 깊어져 있고 삶 그 자체를 웅변하는 듯하다. 초반부터 시작된 노작가의 나레이션은 이미 늙어버리고 변해 버릴 소녀의 그 모든 것들을 예고하고 있기도 하지만 그 소녀가 거기에서 만들어 나간 서사가 절대 무의미하지 않고 오롯이 버티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Y.A. 당신은 무엇에 몰두하죠?
M.D. 글 쓰는 일에. 비극적인. 다시 말해 삶의 흐름에 관련된 일이지.
나는 노력하지 않아도 그 속에 있어.
-마르그리트 뒤라스 <이게 다예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