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참나물을 데쳤는데 기대했던 쌉싸래한 고소함 대신 씁쓸한 첫맛만 남고. 늦은 낮잠을 잘못 잔 아이는 옆에서 울며 아우성이고. 옆지기님은 '나. 가. 수' 볼륨을 이십 이상 올려 놓고 정작 보지는 않고 화장실 들어가 나올 생각은 않고. 탱탱하게 찔려고 했던 가지는 열어 보니 완전 물컹하니 진이 나오고 있고 베어 물 때마다 아예 "난 가지였던 거지. 지금 가지는 아니야."라듯이 그대로 바스라져 차마 먹을 수 없고. 

두 시간의 사투는 고작 병어 조림 하나에 자기 먹을 건 없다고 징징대는 아이와 배탈 나서 밥 먹기 힘들다는 옆지기. 참으로 진뜩진뜩한 일요일밤. 우리는 교보로 갔다. 

행선지를 말하지 않고 교보에 와버리는 센스. 나는 언제나 서점에 나를 데리고 오는 사람앞에서 무장해제된다. 이순신장군 앞 밤에 색색깔로 피어 오르는 바닥분수. 아이들은 그 밤에 옷을 적시며 물놀이를 한다. 아. 름. 답. 다. 

1년은 금방 가겠지? 
아니. 행복한 1년은 금방 가지만 내가 예전에 괴롭게 경험했던 1년은 진짜 하루가 천년 같더라. 

항상 이게 지나고 나면 더 좋은 다음이 올 거라고 생각하지만 인생은 또 이게 지나가야 하는 '다음'으로 목을 내밀고 기다리게 한다.  

 

너무 재미있는 것도 아닌데 책장 넘어가는 속도가 축지법 같다. 정말 독특한 문체들. 과하지 않은 그러면서도 눈에 보일 것 같은, 귀에 들리는 것 같은, 손으로 닿을 듯한 묘사들. 그래서 되도록 천천히 읽는다. '초콜릿처럼 검고 잘 다져진 땅'이라는 문구에 줄을 긋고 그런 땅을 상상해 본다. 엉뚱하다. 갑자기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읽지 않은 걸 기억해 내고 읽어야겠다고 다짐한다. 

분수를 바라보는 나에게 한 아주머니가 물었다. 어젯밤. 

"이거 매일 이렇게 틀어줘요?" 

"잘 모르겠는데요. 저도 오늘밤 처음 봐서..." 

"오늘 다들 처음 왔구나. 나처럼." 

아주머니는 괜히 막 웃는다. 어렸을 때는 낯선 사람이 쳐다 보는 것도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낯선 사람들과 한 마디, 두 마디씩 나누고 기분좋게 뒤돌아 서는 게 좋다. 끈끈한 게 나쁘지 만은 않다. 쿨한 게 항상 미덕이 아닌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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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05-30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이웃님들 글에서 유난히 '무장해제'라는 말을 많이 읽었어요.
나는 평소에 무엇으로 무장하고 살고 있나, 생각하다가 금방 생각이 안나서
너무 무방비상태로 사는거 아닌가도 싶었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니
참 어이없게도, 온통 '나는 옳다'로 무장하고 있네요.
이렇게 바보같을 수가 없네요.

blanca 2011-05-30 22:35   좋아요 0 | URL
무장해제. 그런데 메리포핀스님, 저는 너무 자주 무장해제를 해서 문제랍니다.^^;; '나'에 대한 확신이 부족해서일까요? 그런데 또 들여다 보면 저도 항상 '나는 옳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기도 해요.

마녀고양이 2011-05-30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부러운걸........
물어보지도 않고 교보로 와버리는 센스있는 남자와 사는 누가. ^^
난 같이 가자고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 가는데염. 크크.

나이들수록 약간은 끈끈한게 나쁘지 않아요, 그죠? 오늘 과하게 공감하고 가염~

blanca 2011-05-30 22:36   좋아요 0 | URL
ㅋㅋ 어제 안그래도 너무 덥고 이래저래 짜증 나 있었는데 그냥 책냄새 맡으니 다 사그라들더라구요. 맞아요. 한동안 쿨한 게 최고인 줄 알고 살았는데 이제는 좀 적당히 엉겨 붙는 맛이 좋아져요. 진짜 '아줌마'처럼 되가나 봐요^^;;

세실 2011-05-30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참나물의 독특한 향이 아직은 싫어요. 희한하죠?
광화문에 분수도 있군요. 밤에 가면 시원해서 좋겠어요.
맞아 짜증날때 서점가면 좋을꺼 같아요. 왜 그생각 못했지? ㅋ

blanca 2011-05-30 22:38   좋아요 0 | URL
세실님, 저도 예전에는 그 쓴 뒷맛이 참 싫었는데 요새는 중독 증상이 오더라구요. 그런데 어제 참나물은 참 너무하더라구요. 완전 쓴...한동안 들여다 보지 않게 될 것 같아요. 먹을 수 없게 되어 버려 다 버리니 어찌나 기분이 우울하던지요. 맞아요. 세실님은 특히나 더 잘 어울리십니다. 서점에 고운 사서분이 가시면 근사한 그림이 나올 것 같은데요^^

카스피 2011-05-30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날씨가 후덥지근하니,이젠 정말 분수를 찾을 시기가 온것 같네요^^

blanca 2011-05-30 22:39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정말 오늘도 역시나 어찌나 더운지. 선풍기를 껴안았네요. 오월 말에 선풍기를 벌써 꺼내 보기는 또 처음인 것 같아요. 커피도 이젠 다 아이스만 먹게 되네요.

비로그인 2011-05-31 0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네 구멍가게 처럼 골목 모퉁이마다 작은 서점이 있었죠. 크시옹스카, 하고 살짝 부를 때면, 입 속에 민트가 있는 기분. 겨울 숲 속에서 봄바람을 꿈꾸는 민족.전 무조건 사랑해요.

blanca 2011-06-01 21:44   좋아요 0 | URL
골목 모퉁이마다 서점이 있는 나라. 크시옹스카가 무슨 뜻일까요? 독일인가요? 전 무조건 사랑해요,라는말이 참 달콤하게 들리네요. 곳곳에 서점이 있고 사람들이 책을 읽고 있는 풍경이 있는 곳이 그리워져요.

like 2011-05-31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종문화회관의 야외커피테이블에서 분수 내려봐도 좋더라구요.^^

blanca 2011-06-01 21:45   좋아요 0 | URL
아! 안 그래도 딱 그 전망이 되는 곳을 봤어요. 아마 제가 본 곳이 like님 가셨던 곳일 것 같아요. 당장 실천해 보고 싶어지네요....

like 2011-06-03 22:54   좋아요 0 | URL
오늘 교보앞을 지나쳤는데, 작년에 없던 이상한 tv가 전망을 막고 있더라구요. 서울시의 예술적감각은 정말,,,

cyrus 2011-05-31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대 있을 때에는 1년이라는 시간이 금방 가지 않은데,, 여기서는 시간이 금방 가는거 같아요,
무더운 날씨의 여름이 다가오고 있고 2학년 1학기도 이제 끝나가네요 -_-;;
옆지기님과 함께 교보에 들리는 모습, 글에너사마 화목한 두 분의 모습이 보이네요 ^^

blanca 2011-06-01 21:47   좋아요 0 | URL
cyrus님 예전 회사 남자 동기들이 힘들면 무조건 군대에 있는 걸로 치자,고 서로들 얘기하면서 격려하는 모습에 제가 군대를 다녀 온 듯한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 정도로 힘들었단 얘기였겠지요. 아, 벌써 그렇게 되네요. 아, 2학년으로 복학하신 거군요. 그럼 아직도 유예기간이 좀 있으니 이번 여름방학 때는 아름다운 곳으로 여행도 가시고 좋은 추억도 만드시기를... 그 젊음이 시간들이 가능성들이 참 부럽게 느껴집니다.

꿈꾸는섬 2011-05-31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나물을 데쳤다는 글에 얼른 들어왔어요.ㅎㅎ
전 참나물은 그냥 무쳐 먹는게 더 맛있더라구요.^^ 특히 고기 먹을때 먹으면 정말 좋던걸요.ㅎㅎ
근데 블랑카님 멋진 남자랑 살고 있었군요. 부러워요.^^ 근데 애는 감기 안 걸렸어요?

blanca 2011-06-01 21:47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 그냥 무쳐 먹을 수도 있어요? 오, 그런 거군요. 흑, 벌써 공주님은 수족구가 왕림하사 며칠 집에서 저랑 칩거했답니다.

하늘바람 2011-06-01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나물
음 저도 뭔가 오늘 나물 거리를 데쳐야겠어요
너무 반찬이 없어서리

blanca 2011-06-01 21:48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 저도 이 세상 최대 고민이 무엇을 해 먹을까 랍니다. ㅋㅋㅋ 반찬은 항상 없어요--;;

하늘바람 2011-06-01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언제나 서점에 나를 데리고 오는 사람앞에서 무장해제된다
그런데 그분이 옆지기라는 거지요?
흥 샘나서 흑흑

blanca 2011-06-01 21:48   좋아요 0 | URL
ㅋㅋ 어쩌다예요.

비로그인 2011-06-05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저도 오늘 또 다음을 외치게 될 것 같습니다. 일요일 일곱시. 그 시간을 보낸 다음에 말이지욥 ^^
blanca님 여름이 더 다가오기전에 즐거운 하루 되세용 ~

blanca 2011-06-07 21:23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오랜만이에요. 요즘 초여름 날씨가 끈끈하지 않은 청량감이 있어 참 좋네요. 어디 훌쩍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리고 항상 '다음'을 기대하기 때문에 삶도 지속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