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끼어들기를 못해서 직진만 하다 돌고 돌아 늦은 귀가를 했고, 오늘은 게으르게 붙잡고 있던 쿠오바디스를 조금씩 울며 마침내 다 읽었다. 무언가 아주 조그마한 것들을 꾸준히 하고는 있는데 큰 진전은 없다.

   
 

네로는 돌풍처럼, 천둥처럼, 불길처럼, 전쟁처럼, 그리고 역병처럼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갔다. 그러나 베드로의 대성당은 지금도 바티카누스 언덕에서 로마와 온 세계를 굽어보고 있다.  

예전의 까페나 성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조그만 성당이 하나 서 있다. 성당 입구에는 닳아서 희미해지기는 했지만,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쿠오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네로의 핍박으로 로마를 떠나는 길에 환영처럼 만난 그리스도에게 베드로는 이 질문을 던진다. 그리스도는 서글픈 음성으로 대답한다. 네가 내 어린 양들을 버렸으니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로마로 간다. 베드로는 자신이 던진 질문에서 답을 얻고 로마로 돌아가 순교한다. 

이 소설은 네로의 폭정 시대를 배경으로 젊은 두 남녀의 사랑과 기독교인들의 순교를 오버랩시키고 있다. 작가 헨릭 시엔키에비츠는 그리스도교 이념을 담은 대서사시를 쓰고자 하는 의도에서 출발하여 로마를 다섯 차례나 직접 방문하고 수많은 관련 문헌들의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1세기의 로마를 역동적이고 생생하게 복원해 낸다. 흥청망청 벌어지는 귀족들의 연회, 원형경기장에서의 잔인한 학살 들의 묘사는 활자를 뚫고 생동하는 이미지들과 윙윙대는 소리들로 재연된다. 볼 수 있는 것들과 볼 수 없는 것들을 언어로 형상화해 내는 작가의 힘은 교묘하게 숙달된 요령이나 눈속임이 아니라 온몸을 던져 그 시대인들과 인간 그 자체에 천착한 진정성과 열정에서 나왔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 소설은 쿠오 바디스 도미네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분할 점령을 당한 조국 폴란드에 작가가 보내는 눈물어린 연서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로마의 귀족 비니키우스가 사랑하게 되는 여인 리기아와 그녀를 보필하는 장사 우르수스는 간접적으로 폴란드인들을 대표하고 있다. 슬픈 대단원의 막을 내리면서도 두 젊은 남녀의 사랑을 이루어지게 한 것은 작가가 죽는 순간까지도 그리워하며 염원했던 폴란드의 독립에 대한 희망적인 메시지였다. 죽고서야 독립된 조국으로 귀향하게 되는 그와 불타는 로마를 등지지 못하고 끝내 돌아서서 눈물로 순교하는 베드로의 모습은 하나로 겹친다.  

<쿠오 바디스>를 결국 읽고야 말게 한 그녀는 이제 더이상 눈물 흘릴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 책 참 재미있다, 언니."라고 말했던 소녀는 이제 웨딩드레스를 입는다. 그 날 나도 너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댓글(23)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1-05-20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처음으로 블랑카님 서재에 1등으로 추천하는 동시에 댓글을 달아보네요 ^^
<쿠오바디스>.. 영화 이름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네요,
집에 소장하고 있는데 아직 안 읽어봤어요, 요즘 모 출판사 독서모임 때문에
민음사 세트가 점점 잊혀져가고 있네요,,^^;;

stella.K 2011-05-20 22:08   좋아요 0 | URL
캬~! 동시에 쓰고 있었군요. 시루스님과 3분 차이라는!ㅎㅎ

blanca 2011-05-21 09:50   좋아요 0 | URL
시루스님, 집에 있으면 꼭 읽어 보세요. ^^ 아, 그 모임이요! 후기를 매번 참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저는 세 출판사를 번갈아 가며 중구난방으로 책을 사서 그런지 책꽂이가 좀 지저분해지기는 하네요. 각 판형들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여하튼 요새 참 번역이 성의있고 좋아진다는 고마움이 있긴 합니다. 학창시절 중역본, 일역본 읽으며 그게 다인 줄 알았던 시간들이 억울할 만큼요.

stella.K 2011-05-20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민음사의 저 책들이 좀 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왠지 손이 안 가요.
모르긴해도, 저 판형으로 20년은 족히 버티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저는 이 작품을 책으로 못 읽고 영화로 봤는데 정말 장대한 스케일이더군요.
놀라운 건, 작가가 어떻게 등장인물 100명을 다루고 있을까 하는 거죠.
동생이 결혼하는가 봅니다. 축하할 일인데, 울기는...^^

blanca 2011-05-21 09:52   좋아요 0 | URL
ㅋㅋ 민음사 판형이 손으로 들고 보기가 힘든 건 사실인 것 같아요. 자꾸 접혀서요. 제본만 놓고 본다면 열린책이 사철 방식인가 해서 참 좋긴 하더라구요. 대신 글자가 너무 빽빽해서 눈이 아파요. 아, 스텔라님 사촌동생이구요. 너무너무 잘 된 일인데 가장 기뻐해 줄 이모가 돌아가셨어요....어린시절 한 동네에 살아 이모한테 참 투정도 많이 부리고 정작 이모한테 해 드린 것도 없는데...회한이 많이 남아요.

stella.K 2011-05-21 10:27   좋아요 0 | URL
아, 그랬군요.
그러면 신부가 정말 많이 울텐데...
블랑카님께도 특별한 분이셨을 것 같구요.
그래도 울지 마시고, 동생 분 잘 보내 주세요.
나도 눈물이 나려고 그러네. 안 되는데...

프레이야 2011-05-20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운전 초보이신가요? 직진만 하시다 뱅뱅 돌다에 웃음이 그만(죄송ㅋ)
웨딩드레스 입던 날 흘렸던 눈물이 지금도 생생해요.
그 이후로도 남의 결혼식 풍경만 봐도 이상하게 눈물이 나요.
저 책을 권해주셨던 그녀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참, 책 담아가요. 늘 매력적인 페이퍼~~

blanca 2011-05-21 09:54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운전한지 만 두 달 됐어요. 에피소드 모으면 유머집 반 권 분량은 된답니다. ㅋㅋㅋ 어제는 기름 넣고 왜 기름 넣었는데도 변화없냐고(그 계기판) 그랬더니 시동을 켜셔야죠! 그러더라구요--;; 끼어들기 하려다 다 안 껴줘서 직진 해서 엄청 돌고 돌아 집에 왔어요. 아이는 잠들고. 참 기분 안 좋더라구요. 바보가 된 기분이었어요. 퇴근시간까지 겹쳐서 난리도 아니었답니다.

... 2011-05-20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쿠오바디스>를 영화로 봤어요. 매년 성탄절에 <나 홀로 집에>에 버금갈 만큼 단골tv프로로 등장하잖아요. 영화도 감동 장난 아니었는데, 소설도 그렇군요. 나중에 작가가 폴란드 사람이란 걸 알고 의외다 싶기도 했어요. 이 책들을 보관함으로 얼른 보내야겠군요!

blanca 2011-05-21 09:56   좋아요 0 | URL
브론테님! 저는 정작 영화를 못 봤네요. 찾아 봐야겠어요. 강추합니다. 브론테님 딱 좋아하실 것 같아요. 번역도 완전 유려하고. 저도 작가가 폴란드 사람인 걸 이번에 알았어요. 감동적이더라구요. 죽는 순간까지 폴란드 독립을 위해 모금 활동을 하고.

순오기 2011-05-21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발이 성성한 베드로가 '쿠오 바디스 도미네' 하던 장면은 보고 또 봐도 눈물이 났어요.
리지아역의 데보라 카가 입었던 연보라빛 드레스와 흰드레스가 오래도록 눈에 밟혔어요.
폴란드 작가의 독립 염원이 담긴 작품이었군요.
영화제목은 '쿼바디스'였지요. 이 영화와 십계, 벤허, 사운드 오브 뮤직 등등 정말 수없이 봤는데~

웨딩드레스를 입은 동생과 눈물 흘리지 말고 예쁘게 웃어요!!^^

blanca 2011-05-21 09:58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아, 책에도 그 드레스 색깔 나오는데. 데보라 카! 저는 왜 이 영화를 보지 못했을까요. 참 아쉽네요. 그리고 저는 순오기님의 그 생생하게 중요한 것들을 기억하시는 능력이 참 부럽답니다. 저는 항상 무언가 희미하고 불확실해요. 특히 영화는요. 감사합니다. 사촌동생의 결혼인데 배의 축복을 기원하고 싶어요.

sslmo 2011-05-21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께,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끝은 창대하리라...이 경구를 읽어드릴 밖에요.
저도 아주 무언가 조그만 일들을 하고 있는데...진전은 없어도 좋으니 퇴보만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적어도 퇴보를 나이 탓으로 돌리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어요~ㅠ.ㅠ

blanca 2011-05-23 10:15   좋아요 0 | URL
양철댁님, 그렇겠죠? 저도 슬슬 나이라는 것에 대해 자꾸 생각하게 되네요. 변명거리인데. 요새는 도통 제가 제 자신을 잘 못 믿겠습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잘잘라 2011-05-21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이지 인생은 짧고 읽고싶은 책은 너무나 너무나 너무나
너.무.나.도 많아요. ㅜㅜ

blanca 2011-05-23 10:16   좋아요 0 | URL
메리포핀스님 제가 맨날 하는 생각이에요. ㅋㅋㅋ 그리고 저희 아버지 얘기 들으니 노안이 와서 읽기도 힘드시다고 하더라구요. 눈이 그래도 제 기능할 때 바짝 읽어 둬야 할 것 같아요.

pjy 2011-05-22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날은 쪼금씩만 울고, 환하게 웃어요~ 좋은날이잖아요*^^*

blanca 2011-05-23 10:1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어제도 묘하게 사촌동생 꿈을 꿨네요. 활짝 웃을게요.

노이에자이트 2011-05-22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명하지만 실제로 읽은 사람들은 드문 고전들을 독파하는 블랑카 님. 쿠오바디스! 잘 했습니다. 혹시 읽어보셨을지 모르겠지만 시엔케비치의 단편 '등대지기'는 폴란드어를 사용 못하게 된 한 많은 어느 폴란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니 한번 읽어보십시오.

blanca 2011-05-23 10:17   좋아요 0 | URL
노자님! 제가 안 그래도 그거 읽으려고 폴란드 대표 소설 단편집 주문했답니다. 교과서에 실려 있다면서요. 내용이 너무 낭만적이라 꼭 읽으려고 별렀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5-23 17:51   좋아요 0 | URL
그 단편 읽으면서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의 미묘한 관계도 공부해 보십시오.

마녀고양이 2011-05-23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 영화로 볼 때 참 감동스러웠어요.
아직도 눈앞에 삼삼한걸요. 그래서 책도 샀어요! 하지만, 당근 아직 못 읽었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blanca 2011-05-23 21:59   좋아요 0 | URL
아, 마고님도 보셨군요. 이거 한 번 인터넷에 있나 찾아 보고 챙겨 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