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천 공사가 한창이다. 무식한 나는 이게 '하천 복개'인 것인줄 알았다. 거꾸로다. 복개는 하천을 말 그대로 덮어버리는 것이다. 하여튼 마을 버스를 타고 가다 차창으로 비친 갑자기 짠하고 나타난 하천에 시선을 던지다 '안감내 자리'라는 표시석에 부딪혔다. 안감내!! 

낯익은 단어.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에서 발견했던 단어다. 득달같이 펼쳐 든다. <그 남자네 집>은 노년의 '나'가 후배의 새로 이사한 집을 찾아갔다 예전 처녀 시절 사랑에 빠졌다 결과적으로 뻥 차버리게 된 '그 남자의 집'을 찾게 된 얘기다.  

이 소설 속 지명 하나 하나가 다 우리 집 주변이었다니.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 들어간 책이니만큼 그 지명은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러니까 그 남자네 집은 지척이었다. 성북동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삼선교, 돈암교를 거쳐 동네 앞을 흐르던 개천이 바로 안감내였다. 지금은 황량해진 채 하천 복구에 한창인 그곳이 아낙들이 빨랫감을 가지고 나와 도란도란 특별할 것 없는 얘기들을 나누던 곳이었고 개천 쪽으로는 수양버들이 늘어져 있어 이웃 동네에서까지 원정산책을 왔었던 곳이란다. 옆지기가 맛있다고 강변했던 신선설농탕 뒷골목이 바로 작중 화자(아마도 박완서)의 옛집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홍예문까지 있었던 조선 기와집이 그 남자네 집이었다. '나'와 함께 '내 생애의 구슬 같은 겨울'을 보낸 그 남자와의 추억담은 가슴 시리다. 

나는 내 몸에 위험한 바람이 들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피차 동정 같은 건 하지 않았지만 닮은 불운을 관통하는 운명의 울림 같은 걸 감지한 건 아니었을까. 나는 마치 길 가다 장풍을 만나 치마가 활짝 부풀어오른 계집애처럼 붕 떠오르고 싶은 갈망과 얼른 치마를 다독거리며 땅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수치심을 동시에 느꼈다.
-p.66 

풋사랑은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경계선 타기다. 그 스릴은 기쁜 것이기도 하고 고달픈 것이기도 하다. 월북한 가족 대신 혼자 남아 아들을 기다린 늙고 퇴락한 어미 밑에서 그 남자는 '나'와의 그 사랑놀음을 위하여 불효를 습관처럼 저지른다. 그리고 나는 어느 정도 거기에 기여함을 알고도 모른척 넘긴다. 전후 암울하고 내핍이 활보하던 그 거리를 나는 그 남자와 때로는 사치스럽게 때로는 낭만을 가장하고 버텨 나간다. 마지막 남은 '나'와 '너'는 그렇게 해서라도 견뎌 나가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울먹이는 남자를 뒤로 하고 안전한 새로운 사람과 둥지를 튼다.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p.74 

너무 예리해서 찔릴 것 같은 대목. 그렇게 우리는 순정한 우리의 과거의 갈무리마처 누군가에게 떨쳐 놓아 버리고
안전한 현실로 걸어 들어간다. 그게 결국 그러고야 말게 되는 것같다. 그리고 그리워하는 것으로 나머지를 눙치려 든다.

안감내가 복원되고 있다. 다시 흐를 그 하천가에서 나는 어느 누구의 첫사랑을 회상하며 알은 체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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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09-09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이 흰죽을 먹듯 맹숭맹숭한 느낌이었거든요.
님의 리뷰로 다시 읽으니,흰 죽을 꼭꼭 씹어먹어야 느낄 수 있는 고소함이 살아나는 것 같은 걸요~^^
아,좋아요.이런 리뷰~

blanca 2010-09-09 22:23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제가 바로 그랬어요. 그런데 안감내랑 이곳 저곳 지명이 바로 연결되니까 갑자기 소설이 확 다르게 다가오더라구요. 어젯밤에 다시 읽은 감상은 완전히 다르더라구요. 그래서 책을 다시 읽기도 하나 봐요.

세실 2010-09-09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참 좋았어요. 그 연세에도 이런 감성적인 소설을 쓸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었죠.
아 그 동네에 사시는군요^*^

blanca 2010-09-09 22:23   좋아요 0 | URL
예...저도 놀랐어요. 바로 그 동네였다니, 이런 깨달음이 어제였다는 사실이 더 놀랍더라구요 ㅋㅋㅋ 제가 지리에 약해서요.

프레이야 2010-09-09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남자네집,에 '안감내'를요?
그걸 다 기억하시는 블랑카님^^
네, 졸업식 때 울었던 기억, 그 학교에 더 있고 싶어 울었던 건 저도 절대로 아니었어요!!

blanca 2010-09-09 22:24   좋아요 0 | URL
고유명사는 다 잊어버리는데 이상하게 안감내만 기억에 콕 박혔다 나오더라구요. 저도 저 문구가 너무 동감갔어요...그래서 작가인가 봐요.

기억의집 2010-09-09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식으로 말하면 개천이죠. 저 어릴 때만 해도 동네마다 개천이 있었어요. 개천에서 뭘하고 논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개천길을 따라 물밑을 보며 따라올라갔다 내려왔다 했던 기억이. 저의 언니는 어느 날 개천길가를 따라 걷다가 개천에 빠져 얼굴이 다친적이 있어요. 아이들에게 개천같은 길, 에 대한 추억도 좋을 것 같아요.

근데 저의 동네랑 참 가까운 곳에 있는 것 같아요. 차로 한 40분 거리?!

blanca 2010-09-09 22:26   좋아요 0 | URL
기억의집님 저는 그런 기억이 없어서 너무 아쉬워요. 그건 만들 수도 없는 너무 소중한 것들인데...아이쿵, 언니 큰일 날뻔 하셨네요. 저는 예전에 공중전화박스에 유리로 막힌 줄 알고 바로 아스팔트로 내리꽂은 적이 있어 코에 한 일년은 상처 달고 다녔던 기억이 나요^^ 중랑구 아, 갑자기 무슨 동이었는지가 가물가물..찾아 볼게요^^

비로그인 2010-09-09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과 함께 조용히 침묵하며 돌아갑니다.

오늘의 느낌은 그냥 말줄임표로 대신해요. ... 이렇게.

blanca 2010-09-09 22:26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댓글은 항상 의미심장합니다.ㅋㅋㅋ 제가 말줄임표 좋아라 하는데.

yamoo 2010-09-09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구~ 바람결님이 제 댓글을 대신 해 주셨네욤^^ 저는 바람결님 따라쟁이..ㅋㅋ

blanca 2010-09-09 22:26   좋아요 0 | URL
야무님, 따라쟁이란 좋은 겁니다.^^;;

마녀고양이 2010-09-10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으면서 참 신기했겠어요........
그리고 동네 다니면서, 마음이 어쩐지 찡했을거 같다는.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빗소리가 세차네요. 아주 시원한 소리예요.
너무 좋아서,, 창문을 닫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고민 중이예요.

blanca 2010-09-10 21:57   좋아요 0 | URL
마녀 고양이님, 저도 빗소리 좋아서 창문 열어놓고 걸레로 닦고 그래요 ㅋㅋㅋ 다만 빨래가 너무 안말라서 고약한 냄새가 나요. 이 동네 참 신기해요...아이 델구 살기는 불편한데 옛날 그 어떤 분위기가 남아 있어서 괜시리 마음이 끌린답니다.

pjy 2010-09-11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맘속에 담아두던 지명을 센스있게 잡아내시는 블랑카님! 멋지시군요^^
어제는 퇴근했더니 집안에 빨래가 잔뜩 걸려서 웃었는데요~ 일본식 주점처럼 방문마다ㅋㅋ; 이런 날씨가 계속되면 빨래말리기가 참 고역입니다요~

blanca 2010-09-11 21:56   좋아요 0 | URL
빨래. 말도 마세요. 빨래를 하면 하기 전보다 냄새가 더 난다는--;; 이제 비 좀 고만오고 햇볓에 이것저것 다 바짝 널어 말릴 날이 왔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