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 딸이 가족 카톡방에 뜬금없이(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내가 갑자기 바퀴벌레가 되면 어떡할 거야?"라고 물었다. 이미 오전에 부모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낸 중고등학생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런 질문을 받으니 솔직하게 답변하기 힘들었다. 나는 다리가 많은 바퀴벌레를 싫어하고 무서워한다. 그런데 하필 내 딸이 바퀴벌레로 변신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줄 수 있을까.
이 질문 참 낯익다. 카프카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쓴 이야기가 백 년이 지나 자신은 알지도 못한 한 아시아의 나라 청소년들의 밈이 될 줄은.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출근 전에 자신이 침대 위에서 거대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황당한 설정은 얕은 판타지가 아니다. 카프카는 그레고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레의 몸으로 자신이 자본주의 사회의 일원으로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수행해야 하는 책임을 상기하고 그것을 벌레의 몸으로 하지 못하는 데에 대하여 느끼는 죄책감에 주목한다. 벌레로 변한 그를 연민하거나 사랑해 주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가족들조차 그런 그를 부끄러워하고 피하고 제거하고 싶어한다. 그가 무능력한 가족들의 빨대가 되어주어 집안에 실질적인 경제적 도움이 되어줬을 때에도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기보다는 당연시했고 그게 불가능해진 시점이 오자 그를 무시하고 조롱한다.
그레고르 잠자의 변신은 한 인간이 더 이상 사회가 부여한 외형적 가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할 때 그가 느껴야 하는 절망과 소외감을 놀랍도록 명징하고 세련되게 형상화한 우화다. 생명이 생명 그 자체로 존중받을 수 있을까? 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고 기본적인 전제를 전복시키는 이야기는 인간이 잘 살겠다고 만들어 놓은 구조적 헤게모니가 얼마나 강력하고 잔인한지 시사한다. 카프카의 냉소적인 시선은 사랑은 어쩌면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한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하는 기능과 기여로 의존하고 존중하고 존중받았는지도 모른다는 불편한 예감을 카프카는 현실화시킨다.
십대의 사춘기 아이들은 어쩌면 이런 그레고르의 변신을 둘러싼 가족의 변심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성적으로 평가되는 자신들의 성과로 부모와 불화하고 더 이상 존재만으로 기쁨을 주던 영유아기의 매력을 소유하지 못할 때에도 부모들은 자신들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줄 수 있는가? 이 질문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너가 바퀴벌레가 되어도 난 기꺼이 난 너를 안아줄거야, 라고 말할 수 있어야 사랑이겠지.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