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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사가 싫다 - 삼십년 동안 가부장제와 맞서 싸운 한 여성작가의 외침
이하천 지음 / 이프(if) / 2000년 1월
평점 :
절판
처음 이 책에 대한 얘기를 들었던 건 <시사저널>에선가, 이 책에 대한 논쟁이 붙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였다. 일단 매우 도발적인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이 사회에서 태어나 자라 남의 집 며느리된 여자 치고 제삿날이 즐겁기만 한 사람이 누가 있을 것인가만, 그렇다고 <나는 제사가 싫다>고 사회에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사람은 또 몇이나 있겠는가. 이하천이라는 작가의 소설을 읽은 적은 없었지만, 이 책만은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했다. 분명히 이하천이라는 사람 역시, 다른 대부분의 여성학자들처럼 매우 잘 이해해주는 시어머니가 계시거나, 남편이 매우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거나...할 것이다.
이름 있는 여성학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그들의 생각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일단 그들의 처지가 나와는 매우 달랐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여성의 희생을 딛고 일어섰으면서, 일어서지 못하는 것을 답답해하는 그들의 얘기를, 나는 오히려 답답하다고 느끼던 차였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는 여성학자들이 밤새워 토론하고 때로는 다른 지역, 다른 나라의 행사에도 부담없이 참여할 수 있는 건 그녀의 아이를 돌봐주는 친정어머니(아주 가끔은 시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었고, 특별한 형태의 공동체를 만들어 살면서 사회활동을 열심히 하는 한 여성학자도 집안을 꾸리면서 아이들을 돌봐주는 이모와 함께 살았다.
아마 이하천이라는 작가도 이런 부류가 아닐까 나름대로 의심했다. 그러나 그녀는 훨씬 용감한 종류의 사람인 것 같았다(최소한 책에서 보자면).
<제도란 사람이 만든 것이다. 우리가 인간이라면 잘못된 제도는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부계조상에 대한 제사가 마치 인간의 본능이라도 되는 듯이 여성에게 강요해 온 이 제도를 나는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심했다. 또한 인간 본연의 모습에 젖줄을 대놓고 있지 못한 제도를 어른으로서 내 후손들에게 절대로 물려줄 수는 없다.>
책의 맨 앞에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그리고 시어머니에게
'낯 붉힐 줄 모르는 감각으로 반만년이나 멍청하게 연장되어 온 낡은 권리를 움켜쥐고, 우는 것과 제사지내는 것밖에 모르는'
이라고 이야기했고, 부모란 모름지기 운운하시는 시아버지에게는
'부모가 뭔데요? 부모는 책임지는 자예요. 도대체 나에게 무엇을 책임지셨지요? 그리고 무엇을 책임지실 건가요? 며느리는 자식이 아닙니다. 당신 아들이 죽어보십시오. 또 내가 당신 아들과 이혼이라도 해보십시오.
나는 당신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당신들 자식입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예의를 지켜야 하는 사이입니다.'
라고 항변했다.
인간의 도리 운운하면 '그렇게 시시한 것이 인간이라면 인간임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고, 혼자 남을까 전전긍긍해하는 스스로에게 '내 기꺼이 혼자 죽으리라'고 다짐하기도 했단다.
일년에 몇 차례 그냥 눈 딱 감고 제사 지내버리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이런 어려운 말들, 남편과 헤어질 각오를 하지 않고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이런 말들을 쏟아붓고 가정을 깨느니, 그냥 '나 하나만 입 다물면 집안이 조용해지기 때문에 참자'는 논리로 참아버리고 만다. 이하천 씨는 바로 이런 생각이 여성의 생명력을 없애버린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동학의 교주였던 해월 최시형 선생이 처음으로 발표했던 향아설위(제사 지낼 때 위패와 밥그릇을 벽 쪽에 갖다 놓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지내는 살아 있는 사람 쪽으로 위패와 밥그릇을 갖다 놓는 것)에 남녀 평등의 개념을 접목시킨 새로운 제사 형식을 소개했다.
1. 제사상은 집에서 가장 좋은 곳에 준비한다.
2. 맑은 물을 아름다운 그릇에 그득 담는다. 계절에 맞는 꽃잎을 서너 개 띄운다.
3. 꽃과 향과 촛불을 준비한다.
4. 가족 전체가 제사상을 중간에 놓고 빙 둘러 앉다.
5. 사회자를 한 명 정하고, 그 사회자는 오늘은 누구의 제삿날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 조상에 대해 알릴 사항이 있으면 알린다.
6. 사회자의 주도로 모인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요즈음의 자신의 삶'에 대해 고백하는 시간을 갖는다.
7. 3분 정도 묵념의 시간을 가지며 조상과 나의 삶과 가족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식이 끝나면 청수를 한 모금씩 돌아가면서 마신다.
8. 끝나고 파티타임을 갖는다. 그 전에 사회자는 오늘의 파티타임을 위해 누구누구가 수고해 주셨는지 이야기하고, 파티타임이 끝나면 수고하지 않은 사람들(물론 남자도 포함)이 설거지 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면 한다고 이야기한다.
9. 파티는 축제 분위기에서 (누구에게도 절대로 짐이 안 되도록 사전에 조정한다.
내 생각에는 6번 순서에 제사를 지내는 그 조상에 대한 기억들에 대해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물론 며느리나 손자들이 모르는 조상일 경우엔 주로 시아버지 시어머니의 이야기가 되겠지만, 어떤 성품을 가진 분이었는지, 그분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한다면 전혀 모르는 사람의 제삿상이라는 기분은 들지 않을 것 같다.
<시사저널>에 가끔 시론을 썼던 설호정 씨는 <나의 제사 혁신기>라는 글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2001년? 혹은 그 이전? 4월 27일자 시사저널에 쓴 글이었는데, 개인적으로 설호정이라는 사람은 전혀 모르지만 그 사람의 글은 예전에 <샘이 깊은 물>이라는 월간지에서도 비교적 좋아하는 종류의 글이었다. 매우 예리하고 때로는 신랄하지만 항상 대안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고 보니, 이분, 요즘 뭘 하시지?)
큰며느리였지만 직장이 있었던지라 제사상 준비는 시어머니와 동서들이 했다. 그리고 그는 철저히 금품으로 보답했단다. 그러다가 결혼 스무해 쯤만에 드디어 전업주부가 되었고, 지체없이 시집의 대소사는 그의 앞에 떨어졌다. 몇 번 해 보니 역시 스트레스였다. 전통문화의 민족적 계승도 물론 좋지만 그 대단한 일이 왜 피 한방울 튀지 않은 며느리 집단의 노고로 감당되어야 하는가도 의문이었다. 그리고 시어머니도 동지의 입장일 것이었다.
그래서 시어머니를 설득했다. 그 시어머니의 아킬레스 건은 '형제 간에 의 상한다'였다. 그리고 제삿날 며느리들이 침울해하면 와서 잡수시는 넋들도 즐겁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 다음의 일은 시어머니가 다 알아서 하셨단다. 물론 그 과정에 긴 이야기들이 오갔겠지만 결과는 '절에서처럼 제삿상에는 꽃과 과일과 떡만 놓고 정성껏 지내자'였단다. 며느리도 현명하고 시어머니도 무척 현명하셨다.
난 태생적 한계인지 최소한 내 생각으로는 매우 보수적이고 소심하고 단순하다. 가끔 시집에 서운한 일이 있을 때도 '나 하나 참으면 세상이 조용하다'고 넘어가는 편이다. 그리고 제사라는 제도 역시 이하천씨의 말처럼 '여성의 생명력을 말살시키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오히려 명절이면 오랜만에 떨어져 사는 가족들 얼굴 볼 수 있어서 반갑고, 부엌에서 음식 장만하면서 동서들끼리 남편들 흉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게다가 난 큰며느리라서 제사 의식에 참여해 술도 따르고 절도 하면서 크게 소외감을 느끼진 않는다. 물론 여기에는 시어머니의 희생이 들어 있다. 웬만큼 제사음식 준비도 해 놓으시고, 며느리들에게 큰 부담을 지워주지 않으시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문제는 주도권을 쥔 어른들의 생각이다. 시어른들이나 혹은 남편이 며느리(혹은 부인)를 철저히 노동력과 생산력으로만 본다면 제사뿐만 아니라 시댁의 어떤 행산들 즐거울 수 있겠는가.
후에 내 주도로 제사가 넘어왔을 때, 그때도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그땐 더 재미있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음식은 꼭 먹을 것만 하고(어차피 대가족이 모이면 먹어야 할 음식 양도 엄청날 터이니까), '유세차~' 하는 건 생략하고, 손자건 손녀건 부엌일은 같이 거들도록 하고, 설거지는 남자들에게 하도록 하고... 그 이름이 파티이건 명절이건 혹은 축제이건 제사이건 이름과 상관 없이 즐거운 날이 되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나는 제사가 즐겁다>는 말들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