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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공지영 지음 / 김영사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난 공지영에 대해, 한 번도 만나본 적도 그가 한 인터뷰를 본 적도 없는 소설가 공지영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그의 소설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고등어> <착한 여자> 등을 읽으면서 생긴 선입견이다.
우선은 정말 똑똑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똑똑한 척은 할 것 같다는 것,
똑부러지게 살아서 나처럼 작은 일에 흔들리고 남의 말에 쉽게 솔깃해지지는 않을 거라는 것,
그래서 나같은 사람은 쉽게 사귀지 못할 거라는 것, 나름대로 인생에서 별로 실패도 없었을 거라는 것(언젠가 이혼과 재혼을 했다는 얘길 들은 것도 같았는데 그것마저도 실패라기보다는 성공이라고 생각할 거라는 것),
그리고 똑똑한 척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신보다는 자신을 믿을 거라는 것...
허, 그렇게 보이던 사람이 수도원 기행에 관한 책을 썼단다.
그것도 책 제목 사이에는 커다란 글씨로 '그녀가 그리 오래도록 찾아 헤맨 목마른 영혼의 해답'이라고 씌여 있다.
내가 공지영이라는 작가를 어떻게 생각하든, 유난히 가을을 타서(사실 봄에는 봄을 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 참을 수 없는 나의 가벼움이여!)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은 나에게 유럽의 시골들에 꽁꽁 숨어 있는 수도원 기행이라는 테마는 나를 잡았다. 좋은 지질에 그림 같은 컬러 사진들이 아주 많이 들어간 김영사의 시원한 편집도 한몫 하긴 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즈음, 한달 남짓 동안 열 개쯤 되는 수도원을 돌아본 얘기였다.
아르정탱의 베네딕트 여자봉쇄수도원, 그레고리안 성가의 본산이라는 솔렘의 베네딕트 남자봉쇄 수도원 등등 프랑스와 스위스와 독일에 있는 수도원들의 얘기였는데... 솔직히 그 수도원이 어느 곳에 있었는지,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책을 덮은 지금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그 역시 각 수도원들을 어떤 곳은 그저 스치면서, 또 어떤 곳은 하룻밤 묵으면서 본 게 전부라서 그가 수도원들에서 그의 신앙심을 키웠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글의 초반에선 내가 바빠서인지 그의 행보가 바빠서인지 읽으면서 숨이 가쁘기도 했다. 수도원 기행이라는 고요하고 다소 엄숙한 테마와는 너무도 안 어울리게...
아, 게다가 요즘 내가 내 힘으로 감당이 되지 않는 많은 골치 아픈 일들 속에 쌓여 있다 보니 조금 꼬여 있기도 했나보다.
고백하자면, 아이도 있고 남편도 있는 그녀가 한 달 동안이나 혼자서 유럽 여행을 할 수 있는 현실이 부럽기도 했었을 터였다.
그래서인지, 수도원을 찾아다니면서 그녀가 만나는 수많은 행운들, 예를 들면 어둡고 춥고 비가 많은 유럽의 겨울 속에서도 그녀가 수도원을 찾은 날은 항상 날이 좋았다거나, 너무나 친절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거나(그녀는 철썩 같이 하느님이 자신에게 보낸 은총이라고 믿고 있는 듯하지만), 등등의 일까지도 처음엔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자기 과시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부분부터인가 모르게 난 <몰입>이 되어 있었다.
어느 순간 책을 읽다 나 자신을 돌아보니, 그가 토해내고 있는 자신의 이야기, 그가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내가 눈물짓고 있었다.
이상했다. 아무리 다시 읽어봐도 눈물을 자아내는 이야기는 없다.
내가 그녀와 비슷한 상황인 것도 없고, 동시대의 고민을 안고 살았던 적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내 가슴이 절절거리는가 말이다.
그가 툭툭 내뱉는 한 마디에, 그는 별로 의미를 두고 한 말 같지도 않은데, 난 그 말을 가지고 이 생각 저 생각하며 한숨짓고 눈물짓고 웃음 짓는다.
'다시 산다면, 다시 한 번 내가 스무 살의 나로 돌아간다면, 이 모든 것을 알고 다시 시작할 기회가 한 번이라도 온다면...'
- 아, 내게 그런 기회가 온다면 난 뭘 할까. 도서관의 책들을 다 읽어버릴까, 그저 무작정 길을 떠나볼까, 미친 듯이 공부를 해볼까...
'내 생이 결코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내 인생은 나의 것이어야 한다는 이 딜레마. 우리 삶에 상처를 입힌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면서 바로 그 순간에도 나는 또한 남에게 잊지 못할 상처를 주고 있다는 딜레마...'
- 정말 그렇다. 내 인생을 내 맘대로 한번 해보려고 이렇게 몸부림치는 것도 부족하여 내 아이들 인생까지 그렇게 내 맘대로 하려고 하는 건 아닌지...
유물론에 심취해 신을 멀리 했다가 18년만에 신 앞에 돌아와서 했다는 그녀의 기도,
"다시 돌아왔지만 그 사람을 용서하라는 말일랑은 하지 마세요. 설사 그것 때문에 지옥에 간다 해도, 물론 지옥에 가는 건 무섭지만, 그래도 지금 나는 그 사람만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말만은 내게 하지 마세요. 하느님... 다른 건 다 돼도 그것만은 안 됩니다."
- 아, 그녀도 그런 아픔이 있었구나.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솔직한가.
이렇게 저렇게 바른생활 아줌마처럼 살겠습니다가 아니라, 난 그건 못하겠습니다 했다는 그녀의 이야기...
난 그렇게 누군가를 미워해 본 기억도 없는데, 왜 그리 내 마음을 울리고 적시는지...
갑자기 책장 속에서 먼지만 뒤집어 쓰고 있는 성경을 꺼내 읽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것 역시 내가 싫어하는 나의 가벼움이다.
누군가 성령으로 충만한 것 같으면 하느님을 찾아볼까 생각하고, 남편이 법구경에 심취해 있으면 또 부처님을 찾아볼까 한다. 주변에 이슬람 신도가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천성이 약하고 게으른 나는 누군가를 의지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종교는 많은가 말이다.
이 책을 덮으니 더욱 더 떠나고 싶어진다.
잠시만 떨어져도 못잊히고 보고싶은 남편과 자식들을 두고 나 혼자서 말이다. 한 한 달쯤, 그냥 혼자서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서 돌아다니고 싶다.
아, 가을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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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꼭 이맘때 썼던 리뷰였다. 그런데 어쩜 이렇게 지금하고 똑같은지. 3년 동안 난 내내 그 자리다.